소설리스트

3월 (107)화 (107/144)
  • #104

    “준장님!”

    노크도 없이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장소도 그렇고 지금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어지간한 사안이 아니고선 저에게 말도 붙이려 들지 않던 박 소위였는데, 어쩐 일로 요란이었다.

    “조금 전 이세화 씨가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바닥 어딘가에 흐릿한 시선을 주고 있던 기태정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보고드리러 오는 도중 나 중위에게 무전을 받았습니다.”

    아…….

    “이세화 상태는?”

    기태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따져 묻는 목소리가 어찌나 다급한지 끝이 슬쩍 뒤집힐 정도였다.

    “간단한 신체 기능 검사 정도만 거쳤지만 지금으로선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박 소위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계급 특진 대신 개명을 선택했을 때도, 드디어 평범한 이름이 박힌 주민증을 손에 넣었다며 좋아하던 때에도 이처럼 환히 웃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내색은 안 하려고 들었어도 박 소위가 줄곧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인큐베이터 보호실에서 아이를 살펴보고 다시 중환자실 복도로 돌아오자, 박 소위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준장님이 계단을 오르면서 말을 아끼실 때 눈치껏 입을 다물었어야 했는데, 이세화 씨가 깨어났을 거란 생각은, 문밖까지 나왔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못 하고서 주둥이를 나불거린 탓에 일이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것 같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화풀이여도 좋으니 무슨 처분이든 내려 달라는 박 소위에게 기태정은 그런 생각 할 것 없다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실제로 그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이세화의 모든 것을 꼼꼼히 망쳐 놓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저였다.

    “축하드립니다.”

    썩 적합한 인사는 아닌 것 같긴 했으나, 박 소위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지금껏 세화에게 죄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박 소위를 따라나서면서, 기태정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보통은 이런 생각이 드나? 이런 마음을 갖나?

    이세화가 쓰러진 일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었다. 박 소위는 그저 운이 좀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저와 세화에게 사과하고 싶어 했고, 진심으로 괴로워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라면, 이게 보통이고 정상인 거라면…. 그렇다면 저 또한이세화에게 사과부터 하는 것이 옳았을까.

    지금 와서 해명해 봤자 설득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과거는 그저 편린일 뿐이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달라지는 건 무엇도 없다. 그러니 달라진 미래를 쥐여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 더 나은 길일 거라 여겨왔다.

    그렇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박 소위를 보고 있자니, 어쩌면 세화도… 저에게서미안하다는 말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박 소위.”

    “예!”

    “오선란 대장에게 연락 넣어. 세화 눈 떴다고.”

    “그…,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야기가 퍼지지 않도록 최대한 힘을 쓰고는 있었으나, 철통같은 방어는 초반 3일 정도까지만 가능했다.

    아무리 국내의 기반이 약해졌다고 한들 오선란은 대장이었으며, 손꼽히는 명문가의 일원이었다. 돈과 인맥의 산물인 5성의 병원 소식통 하나를 안배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론, 오히려 최대치로 세를 불려 이세화의 주변을 에워쌌다. 슬쩍 간을 보던 어중이떠중이들은 병원에 배치된 최신식 병기와 옥상에서 대기 중인 전투기를 보고서 혀를 내두르며 물러섰을 정도였다.

    그런데 의외로… 오선란 대장은 대략적인 소식을 듣고서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수상쩍은 침묵에 의아했던 건 아주 잠시였다. 기태정은 오선란 대장의 고요함이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였다는 걸 금세 깨닫게 됐다.

    오선란 대장은 언어나 폭력으로 기태정을 공격하지 않았다. 자신과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공적인 서류만 빗발치듯 날려 댈 뿐이었다.

    양자 입적의 진행 과정 알림, 무사히 그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통보와 증명서, 그리고 이를 근거로 세화를 5성으로 편입하겠다는 내용 증명까지 도착했다.

    혼외자나 양자를 주민등록부에 올렸다고 해서 그들의 거주 구역이 서류상 부모의 것을 자동으로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의 규정은 가장 편리한 통제 수단이었고, 그래서 규율이 가장 까다로웠다. 천륜이 얽힌 일일지라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4환에서 1성으로 편입하는 것 정도야 돈을 바르면 어떻게든 가능했다. 높으신 분들도 하층민들의 사정에는무관심했고, 어차피 이마저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 밖의 주민이 5성으로 진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선란 또한 그걸 모르지 않아서,자신의 남은 생을 여기에 전부 쏟아붓겠다는 듯 여기저기에 과격하게 덤벼들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세화 앞으로 자산을 양도했다는 증명서와 부속 권리를 설명하는 두툼한 문서들이 몇 시간 간격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넘겨 본 서류의 끝에는 언제나 친권 포기 각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제 오선란 대장이 양부로서 법적 권리를 주장하며 나설지도 모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이제 난 이세화의 보호자가 아니니까.”

    인큐베이터 코드가 병원 전산에 등록된 것과 동시에기태정의 임부 보호자 자격은 해제되었다. 혹시라도 추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면,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양부인 오선란 대장뿐이다.

    기태정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정복에 달린 각종 장식과 견장, 계급장이 불빛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다.

    이걸… 원해 왔다. 이 별을 가슴에 달아 보겠다고 여태 버텨 왔고, 하우스를 점거할 때까지만 해도 이제 거의끝나 간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동정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살아남은 것이 자신의 지독한 성정 덕이었든, 탁월한 신체 능력 덕분이었든… 어쨌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 지옥에서 스스로를 구원했노라 믿어 왔다. 그런데 대체 누가 누굴 불쌍히 여긴단 말인가.

    김씨 집안과 무사히 협상을 마치면 이후로 더 많은 별을 가슴팍에 달게 될 거고, 제대 이후로 원로의 자격도 얻게 될 테니 썩어 빠진 늙은이들을 실컷 비웃을 수 있게 됐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집안의 위명만 믿고 방탕하게 살았던 김 소위의 멍청함 때문이라는 점까지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라마지 않던 재판이 시작된 지금, 나는 대체 무엇을 얻게 되었나. 나를 살육 병기로 길러 낸 자들을 단죄하는 순간이 코앞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아직도 절절 끓는 불구덩이 속에 갇힌 기분이 드는 것인가.

    손만 뻗으면 닿던 이세화의 온기가 사라진 것을 믿을 수 없어 매일같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여기가 지옥이 아니라면 어디란 말이지.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상실감에 영영 잠겨 죽을 것 같다. 그런데 구원? 내가 나를 구원한 거였다고?

    “준장님, 그러면 혼인 신고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박 소위가 거울 너머로 눈을 맞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혼인 신고 정도야 이세화 없이도 충분히 진행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준비는 전부 마친 참이었다. 다만 세화가 자신의 손으로 이름을 써 넣는 것을 보고 싶어서 기다렸던 거다. 물론 말이 자의적 서명이지, 늘 그랬듯 눈 하나 깜짝 않고 그에게 윽박지르고, 겁을 먹게 하고서, 결국은 울며 서명하게 했겠지만….

    “당장이라도 서류 넣으면 즉시 효력 발생하게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기태정은 굳게 입을 다물고선 아무런 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박 소위는 그런 상관이 새삼스러워서, 더는 이 주제로 말을 붙이지 않고 오선란 대장에게 연통을 넣겠노라 대꾸만 하고 말았다.

    “특실이라고 했으니… 아, 저쪽인가 봅니다.”

    옮긴 병실은 중환자실과 수술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곳에 있었다. 기껏 일반실로 옮겼으면서 왜 이런 애매한 위치를 고른 건가 싶었는데, 직접 보니 비상시 동선이 매우 효율적이었다.

    “…하니까, 이건 계속….”

    특실 팻말을 향해 걷다 보니, 나 중위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태정은 괜히 빗장뼈 아래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뜨거운 물을 한 번에 삼킨 것처럼 식도부터 명치 아래까지, 몸에 난 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 저는 스테이션에 의료진과 경호 인력 추가 배치를 요청해 두겠습니다.”

    오선란 대장에게도 연락 넣고 보고드리겠다며, 박 소위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해결할 일도 할 말도 많을 테니 둘만의 시간을 가져 보라는 나름의 배려인 것 같았다. 다소 능글맞은 구석이 있는 최 원사와 달리 이런 연기는 젬병인 인사인지라, 그 어설픔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태정은 슬쩍 올라간 자신의 입매가 어색해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이게 얼마 만에 웃는 거더라….

    “이세화 씨, 일단 설명을 해 드릴게요.”

    나 중위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잠시 멈춰 있던 시간까지 보상받으려는 듯 내달리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조급히 굴지 않으려고 했는데, 속이 다 저릿저릿해서 견딜 수 없었다.

    세화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도 일주일이 넘었다. 목소리를 들은 건 까마득히 오래전인 것 같다. 저를 보고 욕을 퍼부어도 좋으니까, 싫다고 울어도 괜찮으니까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기태정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손잡이를 쥐었다.

    “혹시 모르니 일단 끼고는, 아… 준장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 중위가 어정쩡하게 경례를 올렸다. 반대편 손엔 달랑거리는 산소 호흡기를 쥔 채였다.

    그리고 이세화는… 한쪽 다리만 침대 밖으로 내려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은 자세였다. 사경을 헤맸으면서, 아직 몸도 안 좋을 거면서… 눈을 뜨자마자 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확연한 거부에 명치 아래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 고통 덕에 비로소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곁을 두려워하고 낯설어하는, 살아 움직이는세화가, 저에 대한 미움으로나마 펄떡이는 그 생이 기태정을 전율케 했다.

    그러나,

    “…누구, 세요?”

    이어진 세화의 물음에 기태정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 중위 또한 숨이 턱 멎은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죄송한데 혹시 제 손님이셨나요?”

    “…….”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으음….”

    살이 내려 더욱 커다래진 눈이 병실 안과 수액 팩이 꽂힌 폴대를 훑었다.

    “좋은 병원에 데리고 와 주신 것 같은데… 감사하지만 저는 이런 곳에서 머무를 능력이 없습니다. 몸도 아무 이상 없고요.”

    세화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애써 들어 보이고, 이것 좀 보라는 듯 다리도 휘휘 흔들어 보였다.

    “이세화 씨.”

    나 중위의 부름에 세화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 입 모양으로만 이세화, 하고 자신의 이름을 우물거려 본다. 그런 식의 부름은 처음이라는 듯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지금 이세화 씨가 몇 살이죠?”

    “저요? 스무 살인데….”

    “…….”

    “왜들… 그러세요?”

    기태정도, 나 중위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서 멀거니 세화만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시선이 어색했는지, 세화는 볼을 긁적이며 눈을 피했다.

    스무 살.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이고, 아직 자신과 만나기 전이었다. 얼마나 싫었으면, 얼마나 끔찍했으면 이세화는 저를 알게 된 스물한 살의 기억을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일까.

    “가장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그러니까 지금 생각나는 일이 뭐가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는지, 세화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나 중위는 뭐라고 설명할 듯 입을 열었다, 이내 도리질을 했다.

    “준장님, 일단 정밀 검사부터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이후에 다시 보고드리겠다며, 나 중위가 빠르게 병실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응시하던 세화의 얼굴에 물음표가 작게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뛰쳐나갈 듯 굴었던 세화는 침대 끄트머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큰일이 벌어졌구나, 짐작은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런 쪽으로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세화는 팔을 들어 자신의 양손을 살펴보곤, 상체를 숙여 발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뭔가 불편하다는 듯 배를 움켜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태정은 입술을 짓씹으며 한참이나 망설였다. 위험하니까 제대로 앉아 있으라고, 아니 차라리 누우라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혹여나 자신의 음성이 기폭제를 누르는 일이 될까 봐, 가뜩이나 혼란스러울 그의 정신을 망가트리면 어쩌나 싶어서 쉬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 손님.”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던 세화가 조심스레 저를 불렀다.

    그 눈길엔 어떤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애정도, 미움도, 분노도, 공포와 체념… 그 무엇도 없었다. 저를 단 한 번도 마음에 둔 적 없다는 듯 건조하기만 한 타인의 시선이었다.

    “…음, 제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 같은데….”

    스무 살의 이세화는, 예전에 아주 잠깐 상상했던 것처럼 그 어떤 계기도 없이 평범하게 마주하게 된 이세화는… 기태정이 알던 모습보다 훨씬 덤덤했고, 침착했다. 낯선 장소를 살펴보는 눈빛은 차분했고, 저에게 말을 걸면서도 덜덜 떨지 않았다. 제 눈치를 보고는 있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만은 확실했다.

    당연한 일이다. 김 소위의 공범 취급하며 억지로 무릎을 꿇리지도, 발로 차지도, 패치를 두르고 약을 먹이지도 않았으니까. 도구 취급이나 받으며 저에게 뒤를 대 주었던 것도, 거짓말로 얼룩진 애정에 무너져 내렸던 것도 전부 모르고 있는 스무 살이니까.

    “아까 얼핏 듣기로는 의사 선생님이 손님을 준장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맞나요?”

    “…….”

    “지금 입으신 옷도 그렇고… 혹시 군인이신 거라면….”

    그러면서 이세화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손끝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준장이란 계급이 어느 정도인지 헤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준장은 군의 장교고.”

    기태정은 흔들리는 속내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놀라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은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똑같았다.

    “내 위로 네 단계만 거치면, 국가 원수가 나오지.”

    그 이후로 세화와 겪었던 일들이, 저를 보며 울고 웃었던 그의 얼굴이… 수없이 많은 잔상이 몇 배속이나 빠르게 재생한 것처럼 와르르 쏟아졌다.시야에 오직 이세화만 가득했다.

    “소위는 나보다 여섯 계단 밑이고.”

    그러나 환상은 결국 깨어지고, 남은 것은 자신을 낯설어하는 무구한 얼굴뿐이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세화지만 이세화가 아니다. 자신의 세상 안으로 기태정을 들이지 않은, 1년 후의 일은 전부 잊어버린 이였다.

    “내 이름은 기태정이고, 아까 말했듯이 직업은 군인, 계급은 준장.”

    원래대로라면 처음 만났을 때 나누었어야 할 소개였다. 기태정은 한참이나 늦은 인사를 건네며, 저를 지워 버린 세화를 향해 조심스레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리고 너한테 아주 많이, 잘못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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