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05)화 (105/144)

#102

“아….”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렸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몸이 그만 일어나라고 비명을 질러 댔다. 한참을 끙끙 앓던 세화는 결국 가물가물한 눈을 떴다. 무겁고 축 처지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배가 너무 아팠다. 이상할 정도로.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어쩐지 오른팔이 묵직하다 싶더라니… 팔오금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갈아 끼운 패치가 손목에 둘려 있었고, 부목을 감은 붕대도 새것처럼 보였다. 시트도, 이불도 전부 새것이다.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아까 실컷 토하고 그대로 기절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기태정이 뒷수습을 해 준 걸까.

물끄러미 관을 타고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바라보던 세화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얼추 다 들어갔으니 그만 빼도 될 것 같았다.

팔에 꽂힌 바늘이며 덕지덕지 붙은 테이프 같은 걸 전부 떼어 내고, 뒷정리를 하려 팔을 뻗자 또다시 싸한 아픔이 번졌다. 깨어날 때 느껴졌던 낯선 동통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아니, 조금 전보다 더 아픈 것도 같다.

세화는 배를 감싼 채로 느리게 호흡했다. 예전에도 몇 번 배 속이 따끔거렸던 적이 있으니, 곧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싹아.”

이번엔 뭔가 조금 달랐다. 칼날로 속을 죄 찢는 것 같은 아픔이 여진처럼 간헐적으로 밀려왔다.

“너 어디… 아파? 새싹아….”

조금 전에 수액까지 다 맞았는데. 왜 이러는 거지. 세화는 이를 악물고 참아 보았다. 생경한 고통을 떨쳐 내려 새싹이의 이름도 불러 보고 말도 걸어 보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만 커질 뿐이었다.

결국 침대 헤드 위를 더듬어, 목줄 옆에 놓여 있던 태블릿을 쥐었다. 이걸로 커튼도 여닫고 불도 끄고 켜고 다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누군가를 호출하는 기능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검사 기기도 침실 밖 복도에 전부 늘어놓았으니까, 나 중위만 와 주면 된다.

식은땀을 훔치며 더듬더듬 원하던 기능을 찾아, 꾹 누르려던 세화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버튼 위에서 손을 거두었다.

호출 기능엔 부를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 같은 건 없었다. 나 중위가 아니라 기태정이나 최 원사가 오면… 그러면 더 번거로워질 것 같았다. 기껏 차려 준 밥은 다 토하고, 수액도 맞게 해 줬더니 까탈스럽게 군다고 조롱할지도 모른다.

물론 어제의 남자에게선 그런 사나운 기미가 읽히진 않았다. 멋대로 사람을 끌어안고 잠들긴 했어도, 예전처럼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말도 안 되게 허약해진 몸과 마음이 멋대로 악몽 같은 상상을 덧입혔다. 어쨌든 지금 제 상태론 평범한 입씨름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세화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나 중위는 1층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아프면 새벽에도 참지 말고 불러 달라고 했으니,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았다.

줄곧 기태정의 침실에만 머물렀기에 나 중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진 듣지 못했는데, 예전에 초음파 검진 기기를 설치했었던 그 방으로 가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매트리스를 짚을 때마다 손목이 찌릿찌릿했지만, 이건 가짜 아픔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세화는 복부를 감싼 채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수액 덕분인지 핑 도는 느낌은 없었고, 배만 조금 땅길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예전엔 휑한 대리석 바닥이었는데, 지금은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여전히 단조롭고 살풍경한 느낌이긴 했어도, 어쨌든 그 덕분에 오른쪽 발목에 무리는 덜 가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 이참에 나 중위에게 부탁해서, 당분간 관계하면 안 된다는 소견서라도 써 달라고 할까? 조금 민망하긴 한데… 기태정이 계약서 같은 건 입에도 못 올리게 하니, 그런 식으로라도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그래도 아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호소에 결국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나 중위의 의견까지 곁들이면 적어도 당분간은 잠자리 문제로 곤란할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런 희미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막 침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재판장 안에 준장님도 계실 거고, 오선란 대장도 자리 지키고 있을 테니 한 번 출석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했던 일 완벽하게 무혐의로 돌리실 계획이시라면 더더욱이요.”

멀리서 박 소위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말하는 사람은 박 소위뿐이었지만,저벅저벅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발소리는 두 사람분의 것이었다. 역시 기태정도 같이 있는 모양이다.

“정 재판장에 세우기 싫으시다면 차라리 이세화 씨에게 증언 용도의 홀로그램이라도 찍어 달라고 부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도로 안으로 들어가려던 세화는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귀를 쫑긋 세웠다. 증언? 내가?

이후로도 박 소위가 뭐라 말을 이어 나갔는데, 하도 작게 말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세화는 문고리를 쥔 손에 땀이 배어나는 것도 모르고서 박 소위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전 재판에서 김 중령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문제없으리라 봅니다.”

“그거야 김 중령이고 오선란이고 자기들 멋대로 나불대니까 했던 소리고.”

“…그럼 설마 하우스에 설치했던 CCTV 영상을,”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해?”

하우스에 설치했던… CCTV? 영상?

“손 사장에게 진 빚 탕감할 수 있다고 하면 증언하겠다는 놈들이 줄을 설 텐데, 뭐하러. 그냥 그중에서 골라.”

“그렇지만….”

“영상 조각내서 주면 이번엔 믿을 수 없으니 통째로 전부 내놓으라고 할 거야. 말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까, 그런 거 처음부터 없는 듯 굴어.증언 홀로그램이고 나발이고, 이세화도 더는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세화는 문고리를 쥐고서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되짚어 보았다.

이세화. 증언 용도. 홀로그램. 하우스에 설치했던 CCTV. 영상.

쪼개진 단어들이 눈꺼풀 안쪽에서부터 다글다글 차올랐다. 누가 제 머리통을 붙들고 그 글자만 보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조금 전 들은 이야기가… 도저히 지워지질 않았다.

“…이세화?”

의아하다는 듯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계단을 올라 복도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기척을 완전히 죽였는지, 기태정과 박 소위가 침실 가까이 다다른 것도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걸 눈치챌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기태정은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세화를 보고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짙은 시선이 오른쪽 발목과 양 손목, 그리고 주삿바늘 자국이 남은 팔오금을 훑고 갔다.

“너 아직 수액을,”

“준장님.”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었다.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역치가한계 이상을 넘어서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말씀하신 영상…, 그거 뭐예요?”

그러나 제 기분과는 반대로, 마른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CCTV 설치하셨다고, 하우스에….”

“…….”

“그 영상이라는 거… 혹시 지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게 맞아요?”

슬쩍 벌어졌던 기태정의 입매가 굳게 다물렸다. 뒤에 선 박 소위는 혀라도 깨물 것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아…. 세화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이미 답을 전부 들은 기분이었다. 진짜구나. 진짜로, 그런 일까지 계획하고 있었구나….

“…들어와, 그거 보여 줄 테니까 어떤 건지 네가 직접 확인해.”

기태정이 침음하며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처음 하우스 들어오던 날, 감시할 용도로 건물 전체에 CCTV 설치했어. 사무실이고 도박장이고 선수 휴게실이고… 어디 하나 거르는 곳 없이 전부 다.”

“…….”

“하우스는 그 자체로 중요한 증거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범죄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

“가장 평이한 작전도 원래 그렇게 시작해. 이건 작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규모긴 하지만, 어쨌든 시설 내부로 침투하는 거니까… 그런 기본적인 것들만 지시했던 거야. 그 당시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

끝으로 갈수록 기태정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답지 않게 말도 다소 중언부언 늘어놓는 것 같았다.

“어차피 CCTV 서버 접근은 나만 가능하고, 나중에 가선 나도 잊고 있었어. 생각보다 김 소위를 쉽게 잡아들였고, 그 새끼가 멍청하게 군 덕에 다른 방향으로 증거도 이미 충분히 확보한데다….”

그러나 길게 달린 변명을 전부 지우고 사실만 남기자면, 어쨌든 기태정은 CCTV가 설치된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저와 몸을 섞었다는 거다. 게다가 이 사실을 박 소위도 알고 있는 것 같고, 심지어 증언 용도 어쩌고 하면서 언급했으니…. 지금은 아닐지라도 과거엔, 필요하다면 그 기록을 꺼내 보일 생각도… 해 본 적은 있다는 뜻이었다.

“일부러… 그러니까 그런 목적으로 너만 노리고서 설치했던 게 아니, 이세화!”

물 안에 잠긴 것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더는 배도 아프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소실되고, 딛고 서 있는 땅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만 들었다.

“나 중위 불러, 빨리!”

그 순간에도 배는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든 몸을 감싸기는 했는데…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손끝이 바닥으로 툭 떨구어졌다.

“구급차도 부르겠습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박 소위가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기태정은 픽 고꾸라지려는 세화의 몸을 간신히 붙들고서, 바삐 손을 놀렸다. 숨은 제대로 쉬는지 확인하고, 맥박을 짚어 보기도 하고, 혹시 쓰러지면서 어디 부딪힌 곳은 없는지 확인하려 머리 이곳저곳을 훑기도 했다.

“이세화, 내 말 들려?”

차게 식어 가는 손을 주무르며 기태정이 자꾸만 저를 불러 댔다.

“이런 식으로 말고… 하나하나 다시 잘 설명해 줄 테니까.”

대체 무엇을…? 아직도 내가 알아야 할 게 남아 있나? 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아파야 끝에 닿을 수 있다는 거지?

“세화야.”

흐려지는 의식 속에 소심한 원망이 잠깐 피어올랐다. 차라리 계속 김 소위의 공범이나 편리한 도구 같은 걸로 대해 주지. 처음처럼 걷어차고, 묶어서 가둬 두지.어떠한 기대도 품지 않게….

그랬더라면 무슨 취급을 하든, 나중에 주민증만 쥐여 준다고 하면 정말로 뭐든 할 수 있었을 거다. 이렇게까지 아프지도 않았을 거고, 그리고….

“이세화!”

글쎄,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

…이젠 전부 다 그만두고 싶었다.

***

굳게 닫혀 있던 수술실의 문이 몇 시간 만에 열렸다. 내내 복도를 서성이고 있던 기태정은 핏발 선 눈을 하고서 나 중위에게 달려들었다.

“이세화는.”

쓰러진 세화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바로 붙든 덕에 머리를 다치지도 않았고, 각혈이나 하혈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죽은 사람처럼 눈 밑이 순식간에 푸르스름해졌다. 시든 꽃처럼 생기가 싹 가시는 그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세화 어떻게 됐냐고 묻잖아!”

“아직 수술 진행 중입니다만… 준장님께 급히 여쭤봐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하우스에서 손 사장을 빼내려다 실패한 김 중령은, 안에 설치해 둔 CCTV를 내놓으라고 우겨 대고 있었다. 점거 과정에서 있었던 가혹 행위 뭐 그런 것을 내세워 조금이라도 저에게 흠집을 내 보려는 수작질이었다.

이사라는 웃기지도 않는 감투를 쓰고 하우스에 들어섰을 땐, 모든 곳에 감시의 눈을 달아 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잊고 있었고, 당연히 그럴 마음조차 없었지만… 처음 이세화를 취했을 땐 그가 스스로 저를 원한다는 모습 또한 담길 테니 나중에 편리하겠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있는 건 사실이었다. 박 소위에게도 그렇게 되리라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적 있었고.

세화를 심하게 몰아붙였던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군인과 마약 사범으로 처음 마주했다고 한들 잔인했던 유린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후 세화가 주는 선선한 애정에 물들어 가면서, 처음의 계획 따윈 까맣게 잊었다는 게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방식으로 세화가 모든 일을 알게 하고 싶진 않았다.

돌이켜 보면 변명 삼아 가벼이 거짓을 내보인 이후로 계속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이미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 도미노 같아서, 그저 응시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어디서부터 실타래가 엉킨 건지도 모르겠고, 어딜 어떻게 건드려야 풀 수 있을지 이젠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예상보다 이르게 수술하게 됐지만… 인큐베이터로 이동하는 것까지 무사히 성공했고, 아이의 상태도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4개월은 넘겨서 참고할 사례가 많아 다행이었어요. 다만….”

“다만?”

나 중위는 피곤과 걱정으로 움푹 팬 눈을 하고선 잠시 하순을 꾹 깨물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지요, 이세화 씨는 기본적인 수치도 안 좋고 아기집도 약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태아만 건강하게 보인다고. 지금도 그런 상황입니다. 아이를 꺼내는 수술까지는 무사히 마쳤으나… 산부의, 이세화 씨의 출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마취약은 통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신… 가지고 있는 모든 지혈의 수단이 먹히질 않습니다. 레이저로 봉합할 수 없는 부위의 내부 출혈이 잡히질 않고 있어요.”

그래서, 하며 나 중위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마 이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지금 시도하려는 조치는 산부의 법적 보호자이신 준장님의 동의서가 한 장 더 필요합니다.”

“…동의서?”

“수혈하면서 A7을 함께 투여해 보려고 합니다.”

“A7을 쓰겠다고?”

A7은 군부 내에서도 특수한 치료제였다. 의심병이 들린 국가 원수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라며,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의 숨은 붙여 놓으라며 개발을 닦달해서 만들어진 약이었다.

물론 효과야 그 어느 치료제보다 강력했다. 그러나 그만큼 부작용도 상당해서, 지금은 사용할 일이 없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숱하게 전장을 구른 기태정조차 이름만 들어 봤을 뿐 복용해 본 적 없었다. 총에 맞고 칼에 찔려 피를 철철 쏟을 때도 H3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세화에게 A7을 써야 한다고….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이 방법은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이세화 씨의 사망, 까지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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