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04)화 (104/144)

#101

“아기 심장이 너무 느리게 뛰어서… 잘 움직이지도 않고요.”

“…….”

“이런 상황에서 하면… 그러니까,넣으면 절대로 견디지 못할 겁니다. 분명 새, 아니 아이가 크게 다칠 거예요.”

시트 위에 공손히 올리고 있는 손은 쉼 없이 경련하고 있었다. 아이를 가졌다는 얘길 처음 들었을 때도 이렇게 떨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실신할 정도로 울고 괴로워하면서도, 그때의 이세화는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다 알고 저지른 짓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럴 기운조차 없는 것 같았다. 단순히 몸 상태가 좋지 않다기보다,누군가에게 감정을 쏟아 낼 여유가 모조리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주 조금만 눈을 들면 제가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이세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선 짓지도 않은 죄를 헤아리며 거듭 용서를 구했다.

“혹시 믿기 어려우시면… 계약서라도 쓸까요?”

“계약서?”

황당함에 헛웃음부터 나왔다. 그 망할 놈의 계약서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채무를 짊어졌으면서, 이세화는 기꺼이 그런 부당한 거래를 하자고 졸라 댔다. 지금 본인이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이만 무사하다면, 그 이후엔 뭐든지 할게요. 마음대로 쓰세요.”

편하게, 마음껏 쓰시라고. 이세화는 자신의 몸이 도구인 양 그리 말했다.

“그리고, 아…, 준장님…!”

기태정은 손을 뻗어 기어이 이세화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몇 번이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떠 보았다. 그래도 안구 뒤쪽에 들러붙은 홧홧한 감각이 가시질 않아서, 천장을 한참이나 쏘아보았다.그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 와중에 이세화에게서 짐작도 못 했던 이야기까지 들으니 골이 지끈거렸다.

태아의 반응이 둔해졌다고 했던가. 그와 반대로 맞닿은 세화의 심장은 지나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다소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낯은 밀가루라도 바른 듯 창백했고, 손에 감기는 살결에선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안 해.”

“…….”

“섹스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상하게 목 안쪽이 따끔거려서 기태정은 몇 번이나 침을 삼킨 후에야 말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냥, 안아 주고 싶었어.”

그러나 세화는 예전처럼 꼭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을 따름이라는 기태정의 변명을 믿어 주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며 계약서, 하고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관사로 끌고 왔을 때, 당연히 싫어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렇지만 이런 방향으로 세화가 무너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손도 대지 말라고 버둥거렸으면 버둥거렸지, 아이만 지켜 준다면 제 몸을 자위 도구처럼 취급하는 계약서도 불사하겠다고 할 줄은….

“…나한테 약 먹인 날, 그러니까 하우스에 내가 너 데리러 갔을 때.”

운을 떼고서도 기태정은 뒤를 이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계속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이세화가 멀게 그리고 위험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내 것인 듯 쏙 안기는 감각은 그대로인데. 이젠 표정도, 목소리도, 하다못해 체온마저 달라졌다.

“그날 전부 말해 주려고 했어.”

“…….”

“그간 너한테 대충 둘러댔던 핑계들, 전부 다.”

세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할 때 으레 그랬듯 등을 보이고서 눕지도 않고, 그저 잠자코 안겨 있기만 했다. 그러면서 넋이 나간 목소리로 ‘계약서를 써 주세요.’ 하고 되뇔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랑 섹스를 할 건지 말 건지, 궁금한 건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그래, 안 해.”

“그럼… 확실히 계약,”

“그 망할 종이 쪼가리 때문에 지금껏 밑바닥에서 실컷 굴러 놓고선 그딴 걸 또 쓰고 싶어, 너는?”

“그렇지만….”

무뚝뚝한 핀잔에 세화는 다시 조그맣게 움츠러들었다. 빳빳하게 굳은 채 옹송그린 어깨는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럼 손으로 해 드릴까요.”

몇 번이고 망설이다 겨우 묻는 세화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저 아래에서부터 끓는 듯한 탄식이 튀어나왔다.

기태정은 핼쑥해진 세화의 뒷덜미를 낚아채듯 끌어당기고, 정수리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렇게 닿을 수 있는데, 분명 이세화는 내 품 안에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욕심껏 손안에 움켜쥐고 있는 이 사람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

기태정은 몹시 바쁜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런데도 침실을 떠날 생각이 도통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침대밖에 없던 방 안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였다. 그리고 그곳이 남자의 간이 집무실이 되어 버렸다. 박 소위는 물론이고 최 원사, 나 중위… 아직 안면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까지 태블릿을 들고서 그를 찾아왔다. 새로운 무기 반입이나 훈련 방식 같은… 군에서 일상적으로 다루는 업무에 관한 논의가 주로 이루어졌다.

세화는 얼굴 전체를 덮고 있던 이불을 슬쩍 내려 남자의 동태를 훔쳐보았다. 떠오른 홀로그램 속에는 자그마한 점들이 분주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공군이니 비행정이라도 관찰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

흘끔거리던 세화는 조금 더 용기를 내, 이불을 가슴 아래까지 끌어 내렸다.눈을 뜨고서 지금까지 내내 꿈질꿈질 배만 쓰다듬고 있었다. 나 중위 말로는 같은 자세로 계속 누워만 있는 것도 좋지 않다고 했으니, 이젠 잠깐 앉아 있으려고 했다. 어차피 기태정도 바쁘니 저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어디 안 좋아?”

조용히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기태정이 말을 거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파드득 떨고 말았다. 어찌나 크게 몸을 삐끗했는지, 시트 구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

세화는 눕지도, 앉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눈을 내리깔았다. 꼴이 그게 뭐냐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기태정은 제법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세화는 한참 동안 숙이고 있던 목을 조심스레 주무르며 슬쩍 눈을 굴렸다. 남자는 다시 태블릿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코끝으로 한숨을 쉬기도 했고, 앞머리를 쓸어 올리다 말고 눈을 꾹 감았다 뜨기도 했다.

많이 바쁜가 보네. 다행이다. 세화는 아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번엔 기태정도 아는 체를 하지 않고서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어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기태정은 섹스를 강행하려던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곤 뭔가 벼르던 말이 있는 듯 자꾸만 목을 울리며 길게 망설였다. 평소답지 않은 그 표정과 목소리가 인상적이어서 세화도 뒤늦게 진정하긴 했으나, 그래도 방심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계약서라도 써 주면 좋을 텐데…. 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싸늘하게 일갈해서 더는 조를 수 없었다.

그러곤 그렇게 기태정에게 끌어안긴 채로 잠들어 버렸다. 다행히 창문을 열어 두어서 남자의 체향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었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엔 확실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세화의 마음과 달리물색없는 몸은 남자의 품 안에서 습관처럼 노글노글 녹아내리고 말았다.

“준장님.”

업무 보고로 거리낌 없이 드나들던 이전과는 달리방 밖에서 최 원사가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어왔다.그쪽엔 관심을 끄려고 했던 세화 또한 무슨 일인가 싶어 괜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 내가 하지.”

눈짓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한 기태정이 문을 열고는, 최 원사에게서 뭔가를 건네받았다. 그건… 간단한 식사가 차려진 자그만 트레이였다.

“먹어.”

한 손으로 트레이를 받쳐 들고서, 기태정이 맞은편에 놓인 의자로 턱짓했다.

“아… 저는….”

세화는 난감해졌다. 고작 자세 좀 바꾸는 걸로도 이렇게나 눈치가 보였는데… 이젠 기태정 앞에서 밥을 먹으라고? 어제 최 원사가 차려다 주는 것도 거의 넘기질 못했는데…. 빤히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침대에서 먹게?”

불편할 것 같은데, 하며 기태정이 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으음, 하고 잠시 자리를 고민하더니 이내 제 곁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긴 다리를 접어 그 위에 트레이를 올려 두었다.

차려진 것은 어제와 비슷했다. 간이 거의 되지 않은 죽, 따뜻한 물… 그리고 처음 보는 하얗고 몽글몽글한 것이 있었다.

“어쩔 수 없어. 네가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찬 음식들이라.”

자꾸만 망설이는 걸 반찬 투정하는 것쯤으로 여겼는지, 기태정이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선 수저를 쥐여 주었다.

“…….”

“약 먹어야지.”

머뭇거리던 세화는 그 말을 듣자마자 버튼이라도 눌린 듯 기계적으로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약은 먹어야지.

새싹이를 생각해서 간신히 죽을 한 술 삼켰다. 그러나 축 퍼진 몸은 의지를 따라가지 못해서, 몇 번에 걸쳐 나누어 먹었는데도 벌써부터 목구멍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 지금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약 먹을 시간 이미 지났어.”

“…알고는 있는데….”

“그럼 먹기 싫어도 들어. 그래야 너도 애도 멀쩡해질 거 아냐.”

그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새싹이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먹기는 먹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태정을 마주 보고선 아무것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조금만 이따가….”

자꾸만 미적거리는 꼴이 답답했는지 기태정은 수저를 빼앗아 가서는, 듬뿍 죽을 퍼 올렸다.

“너 어제 먹은 거 반 공기도 안 돼. 지금은 한 숟갈도 다 안 먹고서 물린 거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수저가 마른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내키지 않아, 세화는 몇 번이고 어물거리다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고작해야 밥 조금 먹는 것 가지고 기태정과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혹여나 남자가 마음을 바꿔 당장 옷을 벗으라고 한다거나, 아니면 아이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할까 봐 무섭기도 했다.

“푸딩과 얼추 비슷한 맛은 날 거야.”

순순한 태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가져온 음식을 설명해 주는 기태정의 목소리에서 묘한 들뜸이 느껴졌다.

“과일이든 뭐든 찬 음식은 당분간 피하라고 했으니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먹고 있어.”

그가 수저 끝으로 조그만 그릇을 톡 건드리자, 안에 담긴 폭신폭신하고 따끈한 것이 파르르 흔들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바나나와 커스터드 크림의 달콤한 향이 사르르 피어났다.

“죽 반이라도 비워. 그러면 디저트 먹게 해 줄게.”

보기엔 예뻤고 향도 좋았지만…그게 뭐였든 먹기는 버겁다고 생각하는 와중이었는데, 기태정은 제가 먹고 싶어서 빤히 쳐다본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기태정이 다시 크게 죽을 한 수저 떠서 내밀었다. 내내 사납게 굳어 있던 짙은 눈썹은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세화는 잠수하기 직전인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새싹이가 아프다. 어제처럼 축 늘어진 아이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이 사람 말대로 약을 먹어야 하고, 밥도 조금이라도 더 먹어야….

“…우욱!”

먹어야, 하는데….

세화는 기태정의 손을 뿌리치고서 더듬더듬 침대를 기었다. 시고 쓴맛이 입 안에서 엉망으로 한데 엉켰다. 얹힌 것이 식도를 역류하는 불쾌하고 따끔한 감각이 훅훅 치밀었다.

결국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그대로 전부 게워 내고 말았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간간이 올라오는 헛구역질 하는 소리가 버석하게 마른 침실 안을 울렸다.

매트리스 위로 나동그라지는 수저와 밀치는 손길에 엉망이 된 트레이를 보면서 기태정이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추한 몰골로 입을 틀어막는 순간 그의 얼굴이, 또 눈빛이… 어땠더라.

“…흐윽.”

일단 저거 다 치워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문을 짚고 있던 손이 주르륵 미끄러지고, 세화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쏟아지는 시선에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조용하더니,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태정이 직접 식기를 치우고, 더러워진 시트를 벗겨 내는 것 같았다. 나 중위를 불러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도 같았다.

약… 먹어야 하는데….

세화야, 이세화. 저를 부르는 음색은 익숙했으나, 그래도 기태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저를 그렇게 걱정스럽다는 듯 불러 줄 리가 없으니까. 세화는 문가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듣고 싶은 대로 상상해서 듣는 자신의 어리석은 기대심에 진절머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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