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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어디 한번 당신도 아파 보라고 입에 칼을 물고 덤비면, 더 해 보라며 입에 쑤셔 넣어 주는 위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렇게, 뭘 잘못… 했어요? 내가?”
감히 자신에게 덤벼든 상대방의 입을 찢느라, 날을 붙들고 있던 자신의 손이 다치든 말든, 그렇게 실컷 날뛰어 보라며 실실 웃는 미친놈이라는 걸 내가, 내가….
“당신 애야… 준장님 아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그렇게까지….”
“네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기태정 하는 말만 듣고 있노라면 꼭 근사한 고백처럼 느껴졌다. 이젠 네 멋대로 죽을 수도 없게 아이로 발을 묶어 두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아니라, 난 너 없으면 도저히 안 된다고 간절히 애원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한테만 못되게 굴어, 이 미친 새끼야! 내가 그렇게 밉고 싫으면!”
세화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최선을 다한 발버둥에 걷어차인 붕대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가고, 연고며 약들이 여기저기로 날아갔다.
“왜 애한테 그런 소리를 해! 다른 사람들한테도, 대체 왜! 왜 그래!”
“밉고 싫었던 적 없어.”
“…….”
“…그랬더라면 차라리 쉬웠겠지.”
나 중위에게 손을 까딱여 새 붕대를 받으며, 기태정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 앞으로 너랑 여보, 당신 할 거라고.”
잠시 가라앉은 시선으로 엉망이 된 세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태정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매끄러운 낯으로 사람 복장 뒤집히는 소리를 태연히 이어 나갔다.
“싫은 사람이랑 어떻게 살 맞대고 같이 살 생각을 하겠어? 그것도 주민등록부에 이름까지 새겨 가면서.”
“…….”
“물론 넌 혼인 신고서에 스스로 서명하게 될 거야, 자기야.”
기태정은 세화의 손등에, 손가락에 몇 번 입을 맞추곤 화사하게 웃었다. 혼인 신고서를 쓰자는 말은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넌 살기 싫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아닐 테니까.”
맺히지도 못한 눈물이 옷 위로 뚝뚝 떨어졌다. 먼지 앉은 천 조각이 동그란 무늬를 그리며 검게 젖어 드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기태정이 나직하게 박 소위를 불렀다.
“오선란 대장, 연결해.”
빨랫감처럼 축 늘어진 몸이 불쑥 들렸다. 무릎 위에 자신을 턱 올려놓고선, 기태정이 나 중위에게 턱짓했다. 치료 마무리 지으라는 듯이.
세화는 반항할 의지를 모조리 잃은 채 느리게 눈만 깜빡였다. 아이 다독이듯 등과 옆구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기태정의 손은 서럽게도 예전과 똑같았다. 체온도, 살냄새도, 안심하라는 듯 투박하게 쓸어 주는 손길도…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눈물을 쏟아 내는 세화를 보던 기태정은, 티가 나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결국은 손을 들었다. 예전처럼 뺨을 쓸어 주고, 눈가를 문질러 주려고.
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이 뭐라고, 세화는 크게 놀라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양팔로 배를 감싸곤 혹시라도 기태정이 아이에게 해코지하려는 게 아닐까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뭐라 함부로 말을 얹기도 어려울 정도로 허옇게 질려 부들거려서… 기태정은 위협하려던 게 아니었다는 변명도 못 하고서 겁에 질린 세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 세화야. 들리니?
그러다 불시에 쏟아진 다정한 오선란의 음성에 세화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흐느꼈다.
수수료 내놓으라며 억지를 쓰던 손 사장에게서 구해 주었을 때…. 그때에도 기태정은 저를 이렇게 품에 안아 들고서 힘들었겠다고 얼러 주었다. 그의 손길을 받으며, 그간 서러웠다고 칭얼거리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이제는 반대였다. 오선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화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남자에게서 숨통을 트이게 해 줘서 고맙다는 듯이. 당신이 지금의 내 위로라는 듯이.
기태정은 텅 빈 손을 들어 올린 채로 잠시 가만히 있다가, 결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쩍 떨구었다. 이세화가 나를 피한다고? 내 손을 거부한다고? 조금 당황스러워서세게 입술을 감쳐물었다, 저도 모르게 떠오른 씁쓸한 표정을 지워 냈다. 이럴 때 당황스럽다고 하는 게 맞나?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 기태정자신조차 알 수 없어서, 이런 작고 연약한 마음은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빠르게 심장에서 밀어 냈다.
- 몸은? 어디 아프진 않고? 아무 이상 없어?
오선란 대장은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는지, 어째서 상의도 없이 그런 무모한 계획을 세웠는지, 그리고 어쩌다 기태정과 함께 있게 된 건지….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너 아픈 곳이 없냐고,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고 했다.
- 세화야?
“…네.”
누가 들어도 울음에 푹 젖은 목소리였다.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 오선란 대장은 잠시 침묵하다, 모르는 척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그래, 그럼 됐다. 너 아픈 곳 없고 무사하면…. 그런데 세화야.
“…….”
- 너도 알겠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너에겐 그 무엇도 강제할 수 없어. 그래서 너에게도 천천히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시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미안하게도 네가 다소 빠르게 결정해 줬으면 하는 일이 생겼다.
세화는 무거운 어깨를 들어 팔뚝에 눈물을 닦아 냈다.
“네, 말씀… 하세요.”
- 김 소위 측에서 두 번째 공판을 계속 미루려고 하고 있어. 네가 아이를 낳으면 이후론 보호자가 사라지니까, 그 틈에 너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는 것 같다. 물론 그들도 네가 기태정 준장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어쨌든 법적으론 두 사람은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무슨 짓을 저지르려거든 그때가 적기라는 걸 아는 거지.
아…. 세화는 그제야 기태정이 자꾸만 혼인 신고서 운운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혹시라도 재판 결과가 망가질 수 있으니까 그랬던 거구나.
하긴. 네가 죽으면 그 애도 너와 똑같은 팔자로 살게 하겠다는 말이나 하는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저에게 진심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히 질 낮은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구나. 정말로 필요해서, 주민등록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려고 했던 거구나. 오직 필요에 의해서….
- 그러니 아직 생각은 많겠지만, 내 양자로 들어오는 걸 조금 서둘렀으면 하는데… 아직도 많이 껄끄러우니?
“…….”
- 아. 이건 네가 기태정 준장 곁에 머무르는 것과 전혀 별개의 일이니까, 진행해도 문제없을 거야.
방금 그 말은 세화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태정에게 하는 통보나 마찬가지였다.역시 오선란 대장은 세화가 자의로 남자의 곁에 머무는 것이라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 필요하다면 내가 기 준장 만나서 설득할 테니, 너는 염려할 것 하나도 없다.
그리고 오선란 대장의 주장은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세화가 그의 양자가 되는 쪽이 기태정에게도 유리했다. 김 소위 일당들을 물리치기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트집 잡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저 자신의 기분이 더럽다고 무작정 반대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나중에 다시 말씀하시죠. 지금은 세화가 많이 피곤해 보이니.”
세화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 곁에서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기태정이 불쑥 말을 끊었다.
- …그럼 준비해서 연락하마.
툭 끼어든 기태정이 불쾌하다는 듯, 혹은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이를 아득 갈던 오선란 대장은 길게 한숨을 씨근거리더니 진정하려는 듯 세화의 이름을 길게 불렀다.
- 내가 네 아빠 이름 알려 줬던가?
“얼핏… 듣기는 했는데….”
- 그래. 제대로 말해 준 적은 없지? 이진우라고 한다. 참 진, 연뿌리 우. 그런 글자를 써서, 이진우.
오선란은 연뿌리는 연꽃의 뿌리이고, 그 꽃은 진흙 속에서도 홀로 피어날 정도로 아주 강인하다고 말해 주었다. 더러운 곳에서도 꿋꿋이 잘도 피어나는 그런 꽃이라, 어느 종교에선 상징으로 삼기도 했을 정도라고.
- 넌 그런 진우의 아들이야. 진우의 아들답게,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 버텼어. 잘해 왔어.
“…….”
-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아주 조금만 더 힘내다오. 알았지? 거의 다 왔다.
“…….”
- 울지 말고, 세화야.
그 상냥한 위로를 끝으로 오선란 대장의 목소리가 뚝 끊겨 버렸다. 기태정의 손이 꿈틀 움직인 것을 보니, 버튼 같은 걸 눌러서 통신을 종료해 버린 모양이었다.
“흐, 윽… 흑….”
세화는 결국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오선란 대장에게 미안했다. 송 씨 이모에게도 미안했고, 새싹이에게도 미안했고… 그리고 그만큼 기태정이 미웠다.
그리 오래 알고 지내지 않은 사람들도 이렇게나 평범하게 다정하다. 울지 말라고 말해 주고, 힘내라고 응원도 해 주는데. 왜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은 매번 저를 진창으로 처박는 걸까.
네 애도 너처럼 살게 만들겠다는 협박이나 해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게 만들어 놓고는, 이젠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혼인 신고서까지 쓰겠다고 하는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는데. 그래서 지금 이렇게나 힘들어하는 건데… 그걸 뻔히 알면서 또 자기라고 불러 대며 조롱하고, 싫어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말이나 덧붙이는 기태정이….
“…놔요.”
남자가 지치지도 않고 저를 괴롭히려고 들어서, 또 손을 들어 자꾸만 얼굴을 만지려고 해서… 세화는 다시 있는 힘껏 버둥거렸다.
“놓으라고!”
기태정은 어림도 없다는 듯 세화의 허리를 조여 안았다. 그러곤… 젖은 뺨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엔 세화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물러서지 않은 채, 꿋꿋하게 물기를 닦아 주었다.
형편없는 힘으로 남자의 손등을 쳐 내고, 고집스레 고개를 비틀어도 그는 자기 멋대로 굴었다. 연민도 아니고 귀여워해 주는 것도 아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을 멋대로 내던지고 있다.끝까지 이기적이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쌕쌕 숨만 몰아쉬는 세화의 서러운 눈가를 가만히 덮어 주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
기태정은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녹기 시작한 얼음이 짤깍 소리를 내며 아이스 버킷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 조금 전 몸의 수분기가 다 마르도록 울었던 이세화처럼.
차에서 기절한 세화를 데려와 씻기고, 침대에 눕혀 두었다. 이전에 그가 쓰던 게스트룸이 아니라 자신이 쓰던, 거대한 침대만 놓인 개인 침실에.
목을 죄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백금 재질에, 금과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상감한 사슬을 고리에 걸고, 침대 헤드에 박아 둔 말뚝에 단단히 고정해 두었다. 지금은 짝이 맞지 않아 채워 두지 않았지만, 발목만 멀쩡해지면 족쇄도 채워 놓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유치하고 끔찍한 화풀이가 맞았다.
차라리 죽으라며 저를 등지고 돌아섰던 것, 화물선에 몸을 싣고 멀리 벗어나려고 했던 것. 그리고 그 약한 몸을 헤쳐 가면서까지 저를 위협하려 했던 것…. 다시는 그따위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해 주리라.
처음에야 어르고 달래서 좋은 말만 해 주려고 했다. 어려울 것 없었으니까. 그리고 별것도 아닌 일에 감동해서 스스로 안기려 드는 세화를 보는 게 좋았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돌아왔던가. 이젠 무슨 말을 해도 듣지도, 믿지도 않으려고 하고 자꾸만 곁에서 날아가려고 하니, 그럼 아예 날개를 꺾어 두는 수밖에.
“씨발….”
단숨에 잔을 비우고, 거의 부술 기세로 세게 내려놓았다.
술을 들이부어도 엉킨 속이 가라앉질 않았다. 다짐했던 대로 목줄까지 채워서 끌고 왔는데, 아무리 깨끗하게 씻겨 놔도 지워지지 않는 눈물 자국을 보고 있으니… 후련하기는커녕 기분만 더러워졌다.
“…하.”
세화를…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모르겠다.
자기 딴엔 모질게 굴어 보겠다고 덤벼 대는데, 그건 솔직히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이세화는 그런 말을 할 때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지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자기가 더 속상하고 아파하면서 던져 대는 비수는 기태정의 심장은커녕 발끝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다만….
쥐고 있는 게 몸뚱어리뿐이라 그런가, 자꾸만 자해부터 하려고 드는 게 싫었다. 세화는 들으면 어이없어하겠지만, 걱정도 됐다.
무르게 넘어갔다간 또 그런 식으로 도망칠 계획이나 세울 것 같아서… 어림도 없다는 듯 성질대로 찍어 누르고 말았다. 이렇게 몰아붙이는 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태정은 바 근처에 대충 던져두고 안주 삼아 바라보던 쇼핑백을 끌어왔다. 상자를 꺼내고 종이 포장을 걷어 내자, 똑같이 생긴 신발 두 쌍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세화에게 주려던 선물이었다.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고백하고, 사과도 하고 싶었지만… 이젠 당사자가 들을 마음이 없겠지.그렇게 제 손가락보다도 작은 아기 신발만 만지작거렸다.
오늘 유독 파괴적으로 그리고 충동적으로 굴었던 점은 인정한다. 특히 아이를 어떻게 해 버리겠고 했던 건… 심했다는 거, 알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이세화의 가슴에 오랫동안 멍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
한참 손안에서 자그마한 신발을 굴려 보던 기태정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이딴 거 보여 줘 봤자 좋아하지도 않을 테지만…. 뭐, 지금 와서 그런 고민을 한들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세화는 제가 뭘 줘도 싫어할 텐데.
그러니 앞으론 저 또한 좆대로 굴어 볼 생각이었다. 돈과 권력으로 지은 울타리 안에 얌전히 이세화를 모셔 두고서, 주고 싶은 게 생기면 멋대로 퍼부어 줄 거다. 도망이나 자해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게 꽉 붙들어 두면,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못 했던 말을 꺼내 볼 날도 오겠지.
이세화가 자신의 기척을 느끼고 또 파드득 몸을 떠는 꼴은 보기 싫어서, 기태정은 소리를 죽여 조심스레 2층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아직 정신을 차리진 못했을 테니… 침대 헤드와 연결해 둔 구속도 풀어 줘야겠다. 당분간 목에 띠만 둘러 놓고 있어도, 허튼짓은 못 할 테니까.
“…어때?”
마지막 계단을 밟고 복도로 올라선 기태정은 소곤소곤 들려오는 말소리에 놀라, 우뚝 멈춰 섰다. 뭐지? 이세화 목소리 같은데….
“새싹아.”
…새싹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기태정은 후, 하고 숨을 뒤채며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단단히 취한 게 분명하다.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걸 보면.
잡혀 온 이세화가 이렇게 다정히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정신이 들었다면, 침대에 연결해 둔 목줄을 보고서 엉엉 울거나 소리를 질렀을 거다, 그러니까….
“아까 사람들이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 아빠도 다 잊어버렸어. 이거 봐, 이제 안 울잖아….”
하지만 듣는 대상이 명확한, 숨이 막히도록 사랑스러운 속삭임은 계속되었다. 기태정은 그 말에 못이 박힌 듯 꿈쩍도 하지 못했다.거짓이 아니다. 환상도 아니다. 정말… 세화의 목소리가 맞았다.
아주 작게 열린 문틈으로 희미한 독서등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세화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 그 포근한 불빛에 잠겨 있었다. 그러곤 아직 부르지도 않은 배를 연신 쓰다듬으며 자꾸만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새싹이… 는, 그가 배 속의 아이에게 붙여 준 이름인 모양이다.새싹. 살면서 발음해 본 적은 있나 싶은, 너무나 작고 귀여워서 낯선 단어였다.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다 끝낼 거래. 그러면 아빠하고 다시 멀리멀리 떠나자.”
기태정은 세화에게 들키지 않도록 벽에 등을 붙인 채로, 저는 초대받지 못한 따뜻하고 이상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웃으며 아이에게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여린 음성은 예전 같은 온기를 듬뿍 머금고 있었다. 이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화가 저를 보고서 준장님, 하고 웃어 줄 것만 같았다. 혼자서 술 드시느라 이렇게 늦었냐며 삐죽거리고, 제가 팔을 벌리면 그대로 쏙 안기며 한참 재잘댈 것 같다. 당신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눈에 애정을 가득 담아 바라보던 언젠가처럼.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 말은 다 떨어졌지만 잠들고 싶지 않은지, 세화는 비슷한 말만 자꾸 늘어놓았다. 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너와 함께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이루지 못할 꿈을 하나하나 헤아리기도 했다.
“…그런데 고래도 여러 가지 종이 있대, 강아지처럼… 아빠는 그중에서도 돌고래가 제일 보고 싶었어. 예전에 어떤 손님이 말해 줬는데, 크루즈라는 배를 타면 돌고래를 볼 수 있대. 아, 크루즈가 뭐냐면….”
이세화와 새싹이.
세화와 새싹이.
세화와, 세화의 아이.
…나와 세화의 아이.
기태정은 목을 뒤로 젖히고서, 설탕이 솔솔 쏟아질 것 같은 그 음성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검지와 중지에 아기 신발을 한쪽씩 끼우고, 세화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