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이제 가야지.”
숲처럼 우거진 컨테이너 사이를 가로지르며 길쭉한 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처음 5성으로 올 때 탔던 차와 생김은 비슷했으나, 덩치는 조금 더 커다랬다.
“우리 집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세화의 뒷덜미를 쓸었다. 기태정은 손톱을 세워 빗금을 긋듯 살결을 문지르다, 목에 채워진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우리 집. 묵직한 금속의 무게가, 그리고 깃털처럼 가벼운 그의 목소리가 텅 빈 세화의 속을 울리고 갔다.
***
“가장 순한 영양제와 진정제, 진통제 위주로 놓을게요. 효과는 미미할 수도 있겠지만… H3 같은 회복제는 정밀 검사 받은 이후에 복용하는 게 안전할 것 같아요.”
오랜만에 만난 나 중위는 세화를 보고선 잠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특히 목을 죄고 있는 수상쩍은 물건을 발견했을 땐 당장이라도 기태정에게 따질 듯 몸을 들썩이기까지 했다.
그런 나 중위를 제지한 건 세화였다. 가만히 고개를 내저으며 눈짓으로 말렸다. 미안하게도 그녀가 아닌 저 자신을 위해서였다. 지금 눈앞에서 나 중위까지 위협을 받는 촌극이 벌어진다면, 그걸 보고 있으면…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부목 있나?”
옆자리에 앉아 나 중위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지켜보던 기태정이 불쑥 물었다.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대령하라는 명령이었다.
“아, 네.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세화 씨,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소린데 만약 회복제 복용 가능한 상태라고 판단되더라도 깁스든 부목이든 계속 두르고 있는 게 좋겠어요.”
기태정은 거즈와 몇 가지 약, 붕대와 부목 같은 것을 받아들고는 세화의 종아리를 꾹 움켜쥐었다. 지척에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그와 시선을 섞으려 들지 않는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몸을 옆으로 틀게 해서는 단단한 허벅지 위에 제 다리를 척 올려놓기까지 했다.
“이전에 먹어 봐서 알죠? 몸은 나아도 뇌는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어요. 하물며 이세화 씨는 이런 일을 자주 겪어 본 군인도 아니니… 실제 회복을 인지하는 속도는 훨씬 더 느릴 거예요.”
환상통이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며 나 중위가 조심스레 충고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뒤틀린 뼈가 제자리를 찾고, 상처가 아물어 새 살이 돋는다고 한들… 아팠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참. 당분간은 패치도 풀지 말고 있어요. 혹시 불편하진 않죠?”
“일전엔 착용 시간 최소화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소독용 스프레이를 분사하던 기태정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두는 쪽이 좋겠지만, 지금은 이세화 씨의 상태가…. 물론 정확한 건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수시로 약을 투여해야 하는 상황인 건 확실하니, 몸이 그런 흐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는 아몬드처럼 삐죽한 눈매를 하고선 패치를 두른 세화의 팔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뭐랄까, 불신과 불만이 한데 엉킨 그런 눈빛이었다. 나 중위는 자신의 처방이 불만이어도 어쩔 수 없다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기태정은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패치 그 자체가 짜증스럽다는 듯 작게 혀를 찰 뿐이었다.
어쩌면 기태정은… 그를 벗어나려 제가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던 순간을 떠올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패치로 팔뚝 전체를 휘감고서, 주삿바늘을 찔러 대며 약을 마시라고 강요하던 그때를.
“우리 자기가 무슨 개소리를 하면서 홀려 놔도 투여는 반드시 나 중위가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정말로 3주 전을 곱씹고 있었는지 기태정의 미간에 골이 팼다. 빚은 듯한 짙은 눈썹도 크게 한 번 꿈틀거렸다.
관련해서 또 무슨 말을 꺼낼지, 이번엔 어떤 식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기태정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계속해서 세화의 몸을 보살폈다.거즈에 생수를 콸콸 들이붓느라 자동차 시트는 물론이고 정복까지 다 젖어 버렸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환부를 닦는 데만 집중할 따름이었다. 따끔한 소독약 때문에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면, 이전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처 난 곳을 콕콕 찍어 내듯 문질러 주기도 했다.
이전 같았으면 틀림없이 감동했겠지. 그가 점점 저를 마음에 들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소중히 대해 주는 것 같다고… 깜빡 속아서 들떴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 세화는 고작 이런 시혜로 감격하지 않았다. 지금 기태정이 하는 짓은 조금 전 제멋대로였던 키스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자기 좋을 대로 하는 농락이고, 기만에 불과하다.
“준장님.”
“아…!”
그렇게 새파랗게 날을 세우고서 있었는데, 난데없이 박 소위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세화는 저도 모르게 몸을 크게 떨고 말았다. 그 탓에 퉁퉁 부은 발목과 기태정이 들고 있던 부목이 부딪혀, 세화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깊이 숙였다.
“아이고. 괜찮아요?”
나 중위가 놀라 다가왔다.
“…아, 그게….”
세화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며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그보다는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이렇게까지 움츠러들고 있다는 티를 낸 게 쪽팔렸다.
“박 소위는 조수석에 있어.”
비웃을 줄 알았던 기태정은 의외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다친 부위에 더 큰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신중히 관찰할 뿐이었다.
“차단막 쳐 놔서 안 보이는 거야. 뒤에서 버튼만 누르면 앞 좌석까진 아무 소리도 안 들리게 할 수도 있고.”
…누가 뭐라고 했나. 세화는 고집스레 고개를 비끼고 있었다. 박 소위더러 계속하라며 지시하는 목소리에서 아주 약간의 웃음기가 배어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박 소위의 보고에, 기태정은 써늘하게 낯을 굳혔다.
“아, 예. 죄송합니다만 오선란 대장이 통신 연결을 원하고 있습니다.”
오선란 대장?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거리며 앞을 향해 기웃거리자, 기태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 새끼 소식을 나보다 더 좋아하면, 자기야. 내 기분이 좆같아지잖아.”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저는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당신도 나한테 좆같이 구는데 왜 나는 똑같이 하면 안 돼? 그런 의미를 담아 빤히 쳐다보자, 잠시 눈만 깜빡이던 기태정은 이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래. 안 될 건 없지.”
“그럼 바로 연결을,”
“자기야.”
기태정이 틀어진 발목을 아프지 않게 쓰다듬어 주며 박 소위의 말을 끊었다.
“자기가 이참에오선란 대장한테 직접 말해 줘. 네가 좋아서 내 곁에 있기로 한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개소리 그만하라고.”
“…저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해요.”
누구누구와는 달라서. 세화는 그렇게 유치하게 덧붙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게 왜 거짓말이야?”
“지금 그걸,”
“어, 말이라고 하는 건데.”
“…….”
“너, 네 발로 내 앞에 나타나서 스스로 이 차에 올라탔어. 아니야?”
속이… 잠잠해질 틈이 없었다. 이미 화를 내야 마땅한 일들이 이만큼이나 쌓여 있는데, 기태정은 그 위로 자꾸만 새로운 상처를 얹어 준다. 이 격랑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잊지 말라는 듯이.
“이세화 씨, 진정해요. 그러다 큰일 나요.”
현기증이 나는 걸 어떻게든 참아 보려 떨구고 있던 손에 힘을 꾹 주자, 나 중위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제지했다.
“그리고 준장님도 몸 안 좋은 사람 자꾸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지금도 아슬아슬하다고, 이세화 씨가 스트레스받으면 안 좋은 거 알지 않느냐며 나 중위가 간곡히 타일렀다.
“…이러려고 나 중위님 부른 거죠?”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듯 기태정이 흘끗 쳐다보았다. 겨우 소강상태로 접어든분위기에 한시름 놓으려던 나 중위가 경악하며 어색하게 눈짓했다. 그러지 말라고.대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제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나 중위님도 죽이려고요?”
“그런 거 아니에요. 준장님은 이세화 씨 상태가 걱정된다고 하시면서,”
“걱정이요? 그런 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순진한 민간인 납치해서 협박할 생각을 안 했겠죠.”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처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나 중위를 같은 차에 태운 건, 역시 제 숨통을 조일 목적이 아니겠는가.
“나 중위님은 수용소 동기라면서요.”
“…….”
“같은 군인이면서 어떻게, 아, 아니지. 같은 군인이라 더 쉬웠겠네. 군인은 윗사람이 하는 명령이라고 하면 다 따라야 한다고 했으니까.”
나 중위는 숨까지 죽이고서 기태정의 눈치만 봤고,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곤, 볼이 홀쭉해지도록 안쪽 살을 꽉 깨물 뿐이었다. 마치 철없는 너를 내가 참아 주겠다는 것처럼.
세화는 더더욱 약이 올라, 팔꿈치로 시트 등받이를 찍어 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엉덩이 걸음으론, 게다가 차 안에서는 상대방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처음부터 요원한 일이었다.
“나 중위, 이세화 심박수 체크하고 너무 흥분 상태면 진정제 더 놔 줘.”
기태정은 세화의 다리를 붙들어 도로 아래로 쭉 끌어당겼다. 고작 이만큼 움직인 걸로도 입에서 밭은 숨이 콸콸 쏟아지는데, 그는 어린 애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쉽게 그 노력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늘 그랬듯이.
왜 나만 아파야 하지? 왜 매번 나만 상처받고 울어야 하지?
기태정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고 싶어서 돌멩이라도 던져 보지만, 다치는 건 언제나 저였다. 미련하게 쥐고 있던 삐죽빼죽한 돌덩이의 끝에 찔리고 베이고 피가 나는 건… 오직 저뿐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세화는 팔뚝에 감긴 패치를 이로 물어뜯었다. 봉합 부분을 떼어 내고서, 퉁퉁 부은 손으로 전선처럼 엉킨 검은 선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겼다.
“이세화!”
“나야말로 궁금해지네. 뭘 믿고 패치를 둘러 줬어요?”
당신은 수틀리면 못되게 굴고, 그러다 조금 잘해 주면 없었던 일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나는 그게 안 돼.
“내가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언젠가, 기태정이 제 말에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을 때 묘한 쾌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을 뿐, 당신도 똑같이 당해 보라며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도 참…못 할 짓이라 금세 꼬리를 내린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얼마나 우습고 오만한 판단이었는지…. 그땐 견딜 만해서 그따위 태평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다. 내 상처 또한 곪아 터진대도, 같이 수렁으로 빠진대도 기태정에게도 이 아픔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왜 그렇게 봐? 말했잖아. 당신 곁에 있느니 나는,”
“아니. 넌 못 죽어.”
이번엔 종아리가 아니라 말랑한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듯 움켜쥐며, 기태정이 상체를 숙였다. 한 번만 더 멋대로 키스하면 이번엔 입술을 물어뜯는 것보다 더한 짓도 하려고 했는데, 그는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댄 채로 가만히 웃기만 했다.
“네가 죽어도 배 속의 애는 무조건 살릴 거라서.”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내가 죽었는데… 새싹이가 어떻게 살아?뜻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이자, 기태정은 태연하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늘어놓았다.
“원래대로라면 열 달 품었어야 할 애를 네다섯 달이면 무사히 끄집어내서, 더 완벽한 유전자를 심어 주기까지 하는 세상이야.”
“…….”
“산부가 숨이 멎어도, 서두르면 아이는 살려 낼 수 있어.”
“그게… 무슨….”
얼이 나간 세화의 코끝에 입을 맞추며, 기태정이 근사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너도 없어진 마당에, 내가 그 애를 어떻게 대할 것 같아?”
“…….”
“너랑 똑같이 살게 할 거야.”
4환에 처박아 두고서, 그 어떤 것도 베풀지 않으려고. 네가 그렇게 살았듯이.
“그건 싫을 거 아냐, 자기야.”
“…….”
“그러니까 툭하면 네 목숨줄로 협박하려는 그 버르장머리, 고쳐.”
기태정이 얼어붙은 세화의 몸을 다시 바투 당겼다.
“오늘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알겠지만 난 두 번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