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00)화 (100/144)
  • #097

    툭,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앞의 사람이 쓰고 있던 방독면이 발치를 뒹굴었다. 세화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무너진 몸을 다시 일으켰다. 밟힌 벌레처럼 꿈틀대는 하찮은 몸짓일지라도, 이렇게 쓰러진 채로 저 사람을 올려다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 망할 육신이 좀처럼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발목도 발목이지만, 금이 간 것 같은 양 손목이 더 큰 문제였다. 땅을 짚을 수도 없어서 세화는 몇 번을 허우적거리다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앞을 보자, 눈이 멀 것처럼 환했던 조명은 이제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하나둘 스러지기 시작했다. 소임을 다한 빛살은 앞에 선 남자에게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세화는 팔뚝으로 어물어물한 눈가를 대충 훔쳤다. 기태정을 둘러싸던 하얗고 뿌연 빛무리가 가시고, 그야말로 모든 광명을 쓸어 담은 것 같은 현실감 없는 얼굴이, 다섯 걸음 정도 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

    기태정은 덤덤히 세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경악스러운 짓거리는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무구한 표정으로 오직 세화만 뚫어져라 직시할 따름이었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조금 길어진 머리, 얼룩덜룩 재가 앉은 얼굴과 이전보다 야윈 뺨이나 팔목, 필사적으로 배를 끌어안고 있는 손, 그리고 이상한 모양으로 비틀린 오른쪽 발목….

    특히 발 쪽에 진득하게 눈길을 주던 기태정은, 이후로도 몇 번이고 세화의 이곳저곳을 꼼꼼히 훑었다. 송 씨 이모를 데리고 그런 쇼까지 벌였던 주제에, 뭐랄까… 정말로 다시 저와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사람처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가만히 세화를 응시하기만 했다.

    “…3주 만이던가?”

    이윽고 흘러나온 남자의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들었던 것과는 달리 한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락도 없이 다쳐서 오고.”

    기태정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세화는 꼭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그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이모한테.”

    세화는 힘겹게 일렁이는 목울대를 엄지로 꾹꾹 누르곤,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무슨 짓 했어.”

    그는 의외라는 듯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조소했다.

    “못 보던 사이에 버르장머리가 없어졌네. 이제 말도 반 토막이고.”

    “이모한테… 무슨 짓 했냐고 묻잖아.”

    “아무것도.”

    기태정은 어깨를 으쓱였다. 세화는 일부러 가볍게 구는 남자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물론 그는 그 정도론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은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말했을 텐데,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다고.”

    “…….”

    “안 그래도 여사님이 해 준 밥은 곧잘 먹었다면서.”

    기태정이 뒤쪽으로 가볍게 고갯짓을 하며 ‘모셔 와서 네 식사 좀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어디 다치시면 큰일이지.’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했다.

    세화는 기태정의 어깨 너머로 항구에 정박한 화물선을 흘끗 훔쳐보았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 반발심으로 한껏 꿈에 잠겼던 걸지도 모르겠다. 빙하 같은 저 배에 몸을 싣고, 고래처럼 바다를 헤엄치는 것을 상상했다. 다른 나라에 닻을 내리고, 작고 연약한 새싹이가 아름드리나무처럼 쑥쑥 자라나는… 잠시나마 그런 부질없는 희망에 목을 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붙잡아다… 그러고 싶어?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송 씨 이모이긴 했지만, 세화 자신을 포함해 지탄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 속뜻을 모르지 않는 기태정은 픽 웃으며 고개를 얕게 기울였다. 어디 계속 건방 떨어 보라는 듯이.

    “고작 일주일이야, 이모랑 내가 안면 트고 지낸 게.”

    “알아.”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이모를…, 여기까지 끌고 오려고 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나 하면서,”

    “그런데?”

    …그런데, 라고? 세화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기태정은 충분히 진심인 모양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세화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게… 그게 전부야? 지금 여기를 이렇게 박살을 내 놓고서? 이게 김 소위가 저지른 짓하고 뭐가 다른데?”

    “뭐가 다르냐고?”

    기태정이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시야에 그 남자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단숨에 좁혀졌다.

    “그 씨발놈의 김 소위를 또 입에 올리니 설명해 주자면, 하늘길도 막힌 와중에 허가도 안 받은 수상한 배가 항구로 몰래 숨어들어 오기에,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리했을 뿐이야.”

    그러니 김 소위가 저지른 개짓거리와는 전혀 다르지, 하며 기태정이 세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고 민간인들이 보는 앞에서,”

    “군 장교가 안보 문제로 내린 결정에 민간인들이 토를 달면 안 되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했더니 네가 나왔잖아?”

    “…뭐?”

    “나 뒈지라고 약까지 먹였던 이세화 씨가, 생판 모르는 남 목숨 쥐고서 흔들었더니 자기 발로 뛰쳐나와 주셨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뭐가 문제냐는 듯 평이하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세화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가슴에 돌덩이가 쿵 얹힌 것만 같았다.

    그래, 군인이, 군인의 사고방식으로, 군인의 배를 격추시켰으니 그거야 제가 따질 일이 아니라고 치자. 그럼 애꿎은 사람 데려다가 살상 무기로 협박하고, 눈앞에서 바주카를 쏜 일은? 그건 옳았다는 건가? 숨어 있던 제가 기어 나왔으니 그만 아니냐고?

    “…미친 새끼.”

    기가 막혀 튀어나온 나지막한 욕설에, 기태정은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떴다. 그러나 지금 네가 감히 누구에게욕을 한 거냐고 화를 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새삼?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는 거 잘 알면서.”

    세화는 말을 말자는 듯 입술만 감쳐물었다. 맞부딪히는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기태정은 눈동자만 아래로 힐끗 움직여, 허옇게 갈라지고 버석하게 마른 세화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하순을 물고 있는 윗니, 흘끗 드러난 안쪽의 여린 살… 그런 것들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의 눈동자가 이내 이지를 잃고 허물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성큼 뻗어 온 커다란 손이 세화의 턱 끝을 붙들었다. 여유롭게 굴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남자에게선 시뻘건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거 놔…!”

    세화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쥐고서 여기저기 들여다보는 기태정의 낯은… 어쩐지 초조해 보였고, 예전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예기가 감돌았다. 움푹 꺼진 눈 밑 아래론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어쩐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처럼 흰자 전체가 새빨갰다.

    “놔, 느…, 아…!”

    기태정은 더는 견디기 어렵다는 듯 멋대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델 것 같은 살덩이가 곧장 세화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그는 혀로 이곳저곳을 쑤시듯 헤집고는, 세화의 입술 전체를 짓씹듯 머금었다가, 기갈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안에 고여 있던 타액을 모조리 쓸어 갔다.

    당장이라도 저를 죽여 버리고 싶어 고민하는 것 같다가도, 몸을 맞대자 그제야 숨을 쉴 수 있다는 듯 시퍼렇게 얼어 있던 얼굴을 녹이는 기태정이… 미웠다. 밉고,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읏.”

    그래서 세화는, 냅다 기태정의 혀며 입술을 물어뜯어 버렸다. 송곳니에 제법 세게 힘을 실어, 이 살점을 찢어발기고 말겠다는 듯 세게 씹어 댔다.

    “헉, 내가… 놓으라고…, 했지.”

    목적을 달성한 세화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비틀비틀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당해 놓고서도, 기태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손바닥으로 성의 없게 입가를 훑을 뿐이었다. 묻어나는 자신의 핏방울이 낯선 듯 잠시 들여다보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실 웃었다. 어딘가 반쯤 돌아 버린 것 같은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엎어 놓고 범한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리웠던 연인과 재회라도 한 듯 격렬하게 키스부터 퍼부으려 드는 게 끔찍했다.

    “정말로, 밖에서 못된 것만 배워서 왔네?”

    “기만도 정도껏 해.”

    “기만?”

    “그래, 기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겠지. 어디서 누구와 뭘 하고 있는지 쉽게 다 꿰찰 수 있으니, 내 필사적인 몸부림도 당신한텐 그냥 한낱 유희처럼 느껴졌나 봐. 이런 쇼까지 벌이면서 잡아들였으니 다시는 도망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거라고, 이전까지 그랬듯이 계속해서 날 멋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오만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당신이 붙잡은 건 고작 내 몸뚱어리일 뿐이야, 나는…, 절대로….”

    세화는 덜덜 떨며 자신의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다시는 당신한테 휘둘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끝내지도 않아. 포기 안 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서, 있는 힘껏 당신 곁에서 벗어날 거야. 나 때문에 재판 망칠까 봐 내내 피가 말랐던 모양인데, 앞으로도 그 기분 계속 느껴 봐. 나는….

    “절대로, 뭐.”

    “이거 놓으라고, 했… 잖아…!”

    “씨발,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건데, 네 주제에.”

    갑옷을 두른 것 같은 단단한 몸이 세화를 억세게 붙들었다.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망가진 손으로나마 힘껏 때리기까지 했는데도 기태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제 목 언저리에 코를 박고 크게 체향을 들이켜다가, 쪼아 대듯 빗장뼈며 귓불 아래에 입을 맞춰 댔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가르칠 생각을 하니까 까마득하긴 한데….”

    한숨을 쉬며 기태정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세화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총, 곤봉… 어쨌든 무시무시한 무언가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처음부터 가르치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저를 두들겨 패거나 발로 찰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신… 그래. 뭐, 그 호칭 자체는 나쁘지 않아.”

    난데없이 뒷덜미로 차가운 것이 툭 닿았다. 새싹이를 감싸려 허리를 숙이고 있던 세화는 의아함에 눈만 깜빡였다. 총부리라기엔 부드러웠고, 칼이라기엔 단단하고 뭉툭하다. 뭔가 둥글고, 그리고….

    “앞으로 너랑 여보, 당신 그런 거 할 작정이긴 했으니까.”

    “이, 미친…!”

    단단한 금속이 순식간에 세화의 목을 감싸고, 철컥 잠금이 맞물렸다. 그건… 죄수들에게나 채우는 족쇄를 목을 옭아맬 수 있는 크기 정도로 늘린 물건이었다.

    “이런 걸, 아윽…!”

    기태정이 목줄 뒤에 달린 고리에 검지를 끼워 넣었다. 그러고선 위로 쑥 잡아당기자, 싫어도 고개가 절로 들렸다.

    세화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목을 더듬거렸다. 쇠… 인가? 뭔가 자잘한 장식 같은 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보통의 날붙이로는 자를 수도 없는 재질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잘 어울리네.”

    기태정은 감상이라도 하듯 세화의 목 부근을 어루만졌다.

    “줄은 백금으로 하고, 장식으론최상급 다이아몬드만 박아 넣으라고 주문했거든. 너한텐 유색 보석보다 그쪽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

    역시 예쁘다, 하며 기태정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자기야.”

    이세화.

    키스해도 돼?

    덤덤하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 주고, 입을 맞추기 전 허락을 구하던 남자는 이제 없다.

    자기야. 완벽히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 호칭에 세화는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그 부름이 머금고 있는 함의가 너무도 분명했다. 앞으론 너에게 그 어떤 사람다운 존중도 없을 거라는, 이렇게 짐승처럼 목줄을 채워 놓고 좆집으로 쓰겠다는 선언이었다. 예전에 그랬듯이.

    “집에 준비해 둔 게 많은데 자기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세화의 뺨에 묻은 더러운 것을, 그리고 차오르는 눈물을 엄지로 부드럽게 닦아 주며, 기태정이 환하게 웃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