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 주, 준장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 으아악!
처참한 송 씨 이모의 비명에 세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윽…!”
기세는 좋았으나, 의지를 견뎌 낼 힘이 하나도 없는 비루먹은 몸뚱어리는 금세 풀썩 무너지고 말았다. 삐뚤어진 발목은 이제 아프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예전에 기태정이 먹여 주었던 그 치료제가 절로 간절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부러진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움직일 때마다 뒤틀린 축에서 뼛조각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화는 엉거주춤하게 등을 말고 할딱이다, 다시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픔을 잊으려 크게 숨을 들이켜자 찐득하고 더러운 공기가 목구멍 안쪽에 더덕더덕 달라붙었다.
- 2분 남았어.
나지막한 경고에 세화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쿨럭 기침할 때마다 온몸의 장기가 들썩이는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이며 폐를 움켜쥐고 멋대로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눈먼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다가, 이따금 멈춰서 아래를 확인했다. 혹시라도 또 피가 비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멀쩡했다.
“새… 싹…, 새싹아….”
한 손으론 왼쪽 허벅지를 짚고서, 반대편 손으론 배를 받쳐 안았다. 형편없이 마른 뱃가죽을 압박하듯이 붙들고서, 많이 놀랐을 아가를 자꾸만 불러 댔다. 그래 봤자 불안정하게 뛰는 제 심장 박동에 덩달아 쪼그라들어 있겠지만, 그래도 목소리라도 듣고서 안심했으면 해서 호흡이 모자란 와중에도 연신 다독여 주었다.
“괜… 헉, 괜찮아, 하나도 안 무서워, 나, 흑, 하나도… 새싹… 아.”
- 1분.
아. 세화는 이를 악물었다. 나름대로 속도를 내는 중이긴 했어도, 이런 몸 상태로 선박 부근까지, 그것도 당장 1분 안에 도착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제 몸 상태야 차치하고서라도, 이 근처로 숨어들었으면 적어도 5분 안에 기태정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불가능하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허우적거리며 댐처럼 우뚝 선 컨테이너를 지나 드디어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발을 내딛는 순간, 항구 입구 쪽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몇 발 울렸다. 서로 뺏고 빼앗는 중인지 사이렌이 울리다 끊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섬뜩한 소음이 세화에겐 꼭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세화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수색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조금만… 더 버텨 볼까.
어쨌든 다른 세력이 도착한 건 확실한 것 같다. 오선란 대장이든 김 소위든, 기태정과 척을 진 다른 사람이든…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저쪽에서도 무력 행사 중인 것 같으니, 혹시라도 소요가 커지면 기태정도 저보다는 그쪽을 먼저 신경 쓰지 않을까.
- 어흐흑, 주, 준장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세화 총각 부탁만 받았을 뿐인데, 흐윽….
“…아.”
조심스레 위를 흘끔거리며 상황을 짐작해 보려던 세화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허튼 생각 하지 말라는 듯 스피커 너머로 한층 더 격렬해진 이모의 곡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준장님, 제발 이러지 마시고… 저는 정말 아는 거 하나도 없는데….
- 왜 그러세요, 여사님. 세화가 들으면 제가 여사님께 해코지라도 한 줄 알겠어요. 그런 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 살려 주세요, 흑, 준장님, 저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여태 허리가 휘도록 빚만 갚아 왔어요… 제발, 준장님….
- 네. 세화 나오면 살려 드릴게요. 그러니까 빨리 말씀하세요. 나 지금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고.
- 흑, 흐윽….
- 빨리요. 세화가 오해하면 큰일이잖아요?
촌스러운 비극의 배경 음악처럼 깔리는 이모의 얕은 울음이, 철컥거리는 총기의 조준 음이 도저히 세화를 이기적으로 굴 수 없게 했다.
- 흑, 총각… 세화 총각, 나는… 나는… 흐윽, 아직은 멀쩡해, 아직은….
이모가 저더러 아들 같다며 웃어 주지 않았더라면. 진짜 아들이 사채나 끌어다 쓰고 죽었다는 사연을 몰랐다면. 심지어 사업하다 망한 것도, 사치를 부리다가 그 꼴이 난 것도 아니고 도박이나 하다가 그렇게 됐다는 소리만 듣지 않았어도….
- 미안한데 나 좀 살려 줘, 여기 사람들 좀 살려 줘….
이미 다 타버려 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던 작은 마음의 조각이 독처럼 온 혈관을 타고 흘렀다.
미친 사람처럼 악악 비명만 내지르고 싶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당장 나부터 살고 싶은데. 그런데…. 저에게 호의를 베푼 죄밖에 없는 짧은 인연이, 죄도 없는 이모가 영문도 모른 채 항구까지 끌려와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데, 차마 모르는 척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 이런, 세화야. 5분 지났어.
확성기가 필요한 건 이쪽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어쨌든 더는 안 숨어 있잖아, 그쪽으로 착실히 가고 있다고. 그러면 된 거 아니야? 내 다리가 부러졌든 망가졌든, 그런 거 하나도 모르더라도…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는 거잖아….
- 히익! 주, 준장님! 그, 그게… 그게 뭐…!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다급한 이모의 비명에 세화 또한 불안해졌다. 욕지거리를 꾹꾹 삼키며, 거의 깨금발을 하고서 절뚝이며 내달리는데, 일순 천지가 뒤흔들릴 것 같은 굉음이 귓전을 찢고 갔다. 서툴고 늦은 세화의 걸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폭발음이었다.
“…이게, 대체….”
비슷한 소리를 들어 본 적 있었다. 기태정과 함께 침입했던 1환의 대피소에서, 그가 바주카를 쏴서 건물 전체가 무너졌을 때… 그때 이렇게 요란한 소리가 났다.
- 으아악!
혼비백산이 되어 나뒹구는 이모의 울음과 뭔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항구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선박 근처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의 경악에 찬 비명이 넘실거렸다.
세화는 넋을 놓은 채로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런다고 뭔가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랬다.
다행히도 사람에게 총격을 가한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이건 뭔가를, 그것도 건물에 준하는 덩치가 큰 것을 부쉈을 때 나는 소리다. 그런데 대체 뭐가, 어떤 게 무너진 거지? 일단 이쪽을 겨냥한 것 같지는 않은데….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 같은 건 진작 가져다 버린 터라, 세화는 텅텅 소리가 울릴 정도로 손바닥으로 컨테이너며 팔레트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듯 짚어가며 걸음을 옮겼다.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탄내가 코끝에 감돌았다.
자꾸만 퍼지려는 몸을 억지로 이끌었다. 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어정쩡하게 구부리고서 차곡차곡 쌓인 블록의 숲을 간신히 벗어나자,
“…미, 쳤어….”
그제야 바다 저 너머에 횃불처럼 떠오른 자그마한 불길이 보였다. 여기서도 이렇게 보일 정도면, 실제로는 그 규모가 작지 않을 터였다. 배? 등대? 타오르는 저게 정확히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기태정이 저지른 짓인 것만은 분명했다.
- 아아… 그러고 보니까 네가 달리기에 좀 서툴렀지? 발목도 가늘어서.
패닉이 되어 악다구니를 쓰는 이모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물벼룩처럼 사방으로 날뛰는 사람들의 고함을 태연히 뒤로 하고서, 기태정이 더없이 산뜻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나 없이는 제대로 달리지도 못했던 주제에 무슨 깡으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인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 그 부분은 참작해 줄게.
수면 위로 작은 폭발음이 연달아 울렸다. 선박 안의 연료에도 불이 붙었는지, 작게 일렁이던 불꽃은 이제 기둥 같은 형상을 그리며 위로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 지금 쏜 건 김 중령이 몰래 붙인 쥐새끼들이긴 했는데… 그다음은 없어.
기태정이 타이르듯 속삭였다.
- 정말로 없어, 세화야.
세화는 기가 막혀서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항구 쪽과는 경계를 나눈 듯 깨끗했던 바다 위의 하늘에도회색 연기가 거미손처럼 넘실대며 뻗어 나갔다.
- 총각, 세화 총각…! 미안한데 우리 좀 살려 줘…, 빨리 와서…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준장님께 이러지 마시라고 좀…, 응?
절박하게 저만 찾아 대는 이모는 거의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곳곳에 숨어 있던 인부들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조그만 확성기 같은 걸 동원해서 세화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씨팔, 이러다 애꿎은 사람 다 죽게 만들려고!”
“세환지 뭔지 너 이 새끼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 엉?”
“그래, 너 우리가 먼저 찾아내면 몇 대 두들겨 패고서 저쪽에다 넘겨줄 테니까! 맞기 싫으면 후딱 튀어나오지?”
뒈지고 싶으면 자기 혼자 뒈지든가 할 것이지, 왜 애먼 사람들까지 저승길 동무로 끌고 들어가냐는 사람들의 힐난이 세화의 심장을 푹푹 찌르고 갔다.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 세화는 물에 녹은 종이 인형처럼 너덜거리는 몸을 하고서 다시 달렸다. 그러다 쓰러지고, 겨우 일어났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서 또 쓰러지고… 몇 번이나 그러길 반복하다, 결국 울며 소리를 내질렀다.
“…여기, 있잖아! 나 여기 있다고!”
손톱에 피가 맺히도록 바닥을 긁어 가며, 구르듯 울면서 외쳤다.
“그만해…, 나왔잖아… 그러니까….”
기태정에게 다시 붙들리면… 기껏해야 도구처럼 다루어지는 것 정도를 예상했다. 조금이나마 달라진 척하던 연기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다시 저를 물건처럼 바라볼 거라고…. 그 정돈 각오하고 있었다. 더는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그럴 일도 없을 거라고,그리고 혹여 기태정에게 떠밀려 재판장에 서더라도 그가 원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짧았던 반란의 끝은 세화의 상상 이상으로 처참했다. 폭군은 다시는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가장 효과적이고 잔인한 패를 꺼내 들어 세화의 숨통을 옥죄려 들었다.
“그만하라고, 당신한테 가고 있으니까…!”
분을 못 이겨 주먹으로 퍽퍽 아스팔트를 내려치자, 발목만큼이나 형편없는 꼴이 되어 버린 양 손목이 이상한 각도로 덜렁거렸다.
그리고… 세화의 항복 선언을 기다려 왔다는 듯 빛으로 빚은 팽대한 구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어디에서부터 쏟아진 건지 연유를 알 수 없는 조명들이 컨테이너가 놓인 구역 전체를 정신없이 훑기 시작했다.
먼지로 뒤덮인 얼굴 위로 꾀죄죄한 눈물길을 그리던 세화는 멍한 눈을 들어 상공을 바라보았다. 수십 대의 드론이 상공을 날아다니며 핀 라이트를 흩뿌리고, 기중기에 매달린 거대한 조명은 수백 개의 눈알이라도 단 것처럼 알알이 번뜩이며 사방을 조여 댔다.
어지러이 배회하던 기기들이 드디어 한 귀퉁이에 주저앉아 있던 세화를 발견했는지, 이쪽을 향해 폭탄 같은 빛 덩어리를 투하했다. 세화의 머리꼭지 바로 위로 벌의 군락처럼 새카맣게 몰려든 드론들이 징그럽게 윙윙 날아다녔다.
어느 순간부터 스피커에선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이 세상이 아닌 듯 온통 새하얀 주변이고, 느껴지는 건 뽀얀 먼지를 품은 바닷바람뿐이었다. 세화는 고장 난 로봇처럼 이제 그만하라는 말만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네.”
그러길 잠시, 사위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아득한 빛의 제국 속으로 성큼 몸을 내던진 남자가 여상한 목소리로 저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사지가 뚝뚝 분시되는 것만 같았다.새까만 군화가 내리깐 시야 끝에 걸리고, 텁텁한 여름 바람을 타고 익숙한 향이 밀려왔다. 시가 냄새, 짙고 알싸한 향수 냄새…. 세화는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가만히 앉아서, 초라한 울음을 삼켰다.
“외출은 즐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