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98)화 (98/144)

#095

“부르다니요? 준장님이 아니라 제가 세화 총각을 부른다고요?”

송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총각이 타려는 배가 무엇이었는지, 방독면을 쓰고 있어 식별이 어려울 테니 오늘 무슨 옷을 입었는지… 그런 것들을 묻고 확인하려고 저를 데려온 줄 알았다. 그 이상 자신이 나설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애 아빠가 직접 모시러 와 줬는데.

“순순히 자기 발로 나와 준다면 좋겠지만, 우리 세화가 고집이 좀 세서요.”

…순순히? 자기 발? 송 씨는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남자는, 기태정 준장은, 신분 차이가 부담스럽다며 세화 총각이 갑자기 잠적해 버려서 서둘러 찾아 나선 거라고 했다.한 번 하혈까지 했던 사람을 이런 곳에서 고생하게 둘 수 없다는 말에, 저 또한 총각에게 미안해서 추레한 차림으로 허겁지겁 따라오긴 했다만…. 보통 이럴 때 ‘좋아하는 사람’에게 ‘순순히 자기 발로 나온다’는 표현을 쓰진 않지 않나?

“입구에 나 중위 도착했다고 합니다, 준장님.”

수하의 보고에 기태정이 뒤쪽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국화國花와 공군을 상징하는 표식이 화려하게 박힌 시곗줄이 쨍한 조명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고, 항구 입구 쪽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조명이 켜졌다. 거리가 제법 먼 데도 그 산발적이고 연속적인 움직임에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다에 뜬 배 위와 항구 입구 쪽은 밤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훤히 밝았다. 오직 가운데 놓인, 아마도 세화 총각이 몸을 숨기고 있을 컨테이너가 쌓인 블록 부근만 어두컴컴할 따름이었다.

이거 애인이 아니라 꼭 죄인 추포하러 온 것 같은데…. 송 씨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서 기태정의 옆모습만 흘끔 훔쳐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이 아름다운 남자는 내내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을 뿐,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는걸.

***

어디로, 당장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잠시라도 숨어 있어야 할 텐데.

세화는 컨테이너에 기댄 채 밭은 숨을 골랐다. 갑자기 전력 질주해서 그런지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그저 힘껏 입을 틀어막고 견디는 것이 전부였다.

숨 가쁘고 어지러운 거야 곧 가라앉겠지만… 조금 전 넘어지면서 삐끗한 발목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걱정이었다. 차라리 땅을 짚거나 중심을 잡으며 버텼으면 덜 다쳤을지도 모르겠는데, 배를 감싸고 구르는 바람에 일이 좀 커져 버렸다.

오른쪽 발목을 조심스레 들어 보니, 묘하게 축이 틀어져 있었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은데… 이 이상 달리는 것은 확실히 무리다. 아프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새싹이는 다치지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이다.

숨소리도, 앓는 소리도, 그 무엇이든 꾹 참고서 삼키려 애꿎은 입술만 세게 짓씹었더니 어느새 턱을 타고 핏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그래도 패치는 쥐고 있을 걸 그랬다. 마지막까지 협박이라도 해 볼 수 있게.

그나저나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인력 사무소도, 식당 사장도 영 수상해서 평범한 직원에게 일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던 건데. 그럼 설마… 송 씨 이모도 기태정이 붙여 둔 감시자였던 걸까. 아니면….

세화는 그만두자는 듯 도리질을 쳤다. 식당 사람들 전부 기태정의 끄나풀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도 믿을 사람 없다고 해 놓고서, 금세 이모에게 정을 줘 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맞지만, 그래도 최후까지 경계할 수는 있었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실없는 얘기를 하며 웃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로 기태정이 미워졌다. 3주가 다 되어 가는 시간, 그의 추적을 완벽히 따돌렸다곤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이렇게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돌멩이처럼 멋대로 굴리고 관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끝까지 사람을 등신 취급하네.”

세화는 컨테이너 벽면을 짚고 있던 손가락 끝에 힘을 주며, 조금씩 발을 뗐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다. 숨을 만한 곳은 컨테이너 안뿐이긴 했지만,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텨 볼 거다.

헬기에, 군인들 여럿 대동해서 납신 걸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분명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오선란 대장이라거나, 김 소위라거나…. 만약 후자라면 말 그대로 목숨 연장 시간이 약간 늘어나는 정도일 테지만, 오선란 대장이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어쨌든 기태정도 당장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고, 여기 쌓인 컨테이너와 팔레트의 수는 적지 않았다. 이걸 전부 불태울 수도 없을 테니 하나하나 다 뒤져 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긴 할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 승산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어느 컨테이너 안에 숨어야 하나. 세화는 팔레트 옆구리에 큼직하게 새겨진 로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름은 들어 본 대기업의 것이라 다행이긴 했다. 함부로 망가뜨리진 못할 것 같아서. …아니지, 기태정이 어디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이던가. 오히려 군부의 물품이 아니니 더욱 거리낌 없이 파괴할지도 모르겠다.

고민하던 세화는 일단 방독면의 끈을 풀었다. 워낙 싸구려라 시야 확보가 어려운 와중에, 어두워지니 피아 식별마저 뜻대로 되질 않았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고 고개를 들자, 소금기를 머금은 더운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기태정과 백화점에서 맡았던 그 청량한 향과는 전혀 달랐다. 눅눅하고, 짭조름하고… 그리고 매캐한 탄내가 섞여 있었다.

2환의 외곽이고, 바다가 펼쳐진 경계선부터는 공기 중의 뿌연 부유물이 확실히 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몸에 좋지는 않을 것이다. 패치를 두르지 않은 자신의 몸이, 새카만 독성마저 걸러 주길 바랄 뿐이었다. 아니, 제 몸이 망가지는 것은 상관없다. 그저 새싹이만 멀쩡했으면 좋겠다. 그거면 충분하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오른쪽 다리를 붙들고, 세화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밤인 데다 거대한 벽처럼 사방을 에워싼 컨테이너 블록 속이라, 홀로 어둠 속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온몸의 오감이 첨예하게 일어섰다. 저 멀리서 전등의 스위치를 끄고 켜는 소리마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화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자꾸만 위쪽을 살폈다. 자신을 노리고 있는 저격수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난데없이 하늘에서 기태정이 뚝 떨어져, 맹금류처럼 자신의 뒷덜미를 사냥해 갈 것도 같았다.

긴장한 탓인지 자꾸만 시야가 흔들렸다. 컨테이너가 나뉜 구획이, 그 네모반듯한 선이 커다랗게 확대가 되었다가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신발 밑창으로 아주 작은 자갈이 밟히는 소리마저 천둥이라도 치는 듯 쾅쾅 귓가를 울려 댔다.

이제 배 속은 콕콕 쑤시는 정도가 아니었다. 달구어진 쇠막대가 느리게 안을 휘젓는 것만 같았다. 세화는 이마며 콧잔등을 타고 줄줄 흐르는 땀을 훔쳐 냈다. 손을 적신 물기에서 톡 쏘는 것 같은 시큼한 냄새가 났다. 상하기 직전의 잔뜩 흐무러진 신 과일 같은, 그런 악취였다.

문득 이러다 정말로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약을 물 마시듯 털어 넣어도 멀쩡했던 몸뚱어리라, 이런 감각은 처음으로 느껴 보는 거였다. 이제 한계라는, 위험하다는, 속 깊은 곳에서 보내는 경고.

기태정의 추적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재판이 어그러질 때까지만. 아니면 새싹이를 무사히 꺼낼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숨어 있고 싶었을 뿐이다. 한데 고작 3주…. 어쩌면 오선란과 만나기로 한 그 날짜까지 참아 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세화는 근처 컨테이너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목도 발목인데 배가 너무 당겼다. 새싹이가 더는 못 견디겠다고, 아빠 나 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모르겠어. 어떡하지, 새싹아….”

그런데… 사방에서 듣기 싫은 이명과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 여기에다 대고서 말하면 되는 거예요?

항구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타고서, 송 씨 이모의 천진한 물음이 돌림 노래처럼 울려 퍼졌다.깜짝 놀란 세화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어디서부터 이 음의 진폭이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난데없는 수런거림이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혹은 지금 앉아 있는 땅에서부터… 스멀스멀 자라난 넝쿨처럼 세화의 숨통을 조여 댔다.

- 예, 여사님.

아.

세화는 손톱이 부러지는 것도 모르고서 콘크리트 바닥을 긁어 댔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나직하고 또 근사한

그 허름한 창고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심장을 떨리게 했던

아마 사는 내내 잊을 수 없을

- 제 목소리는 들리세요, 여사님?

…사랑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 예, 잘 들려요. 헤드폰이 신기하게 생겼네요.

- 좋아요, 그러면 제가 하는 말을 따라서 읊어 주시면 돼요. 저 왔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아직 나타날 생각이 없나 봐요, 우리 세화가.

- 따라 읊으라고요? 뭐 어려울 거 없지만… 글쎄요, 제가 썩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우리 세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건 또 무슨 쇼인가 싶었다. 자기 목소리도 송출하고 있으면서, 이모한텐 아닌 척 굴고 있는 건가?

- 세화야.

- 세화야.

- 충분히 속상해했잖아,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 충분히 속상해했잖아,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그래, 내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세화 총각이 임신한 줄은 몰랐어. 결혼 앞두고서 많이 심란했던 모양인데, 그래도 그렇지 덜컥 배를 탈 생각을 하면 어떡해.

기태정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던 이모가 이내 걱정스럽다는 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세화는 앉은 자리에서 허허웃었다. 이젠 눈물도 나지 않아서, 웃기만 했다.

시키는 대로 기태정의 말을 따라 하는 이모에겐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지금 보니 기태정과 자신 사이의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서, 정 많은 사람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해 여기까지 쫓아온 모양이었으니까. 그렇지만….

- 이제 3개월은 넘었어도, 너 몸 약해서 조심해야 하는 거 알잖아.

- 이제 3개월…, 아니, 정말 3개월은 넘었어요? 총각 빼빼 말랐던데….

- 네. 훌쩍 넘었죠.

- 아이고, 큰일이네… 총각. 준장님께서 3개월도 넘었다고 하는데,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왜 말을 안 했어, 왜….

- 음… 여전히 저 볼 생각이 안 드나 봐요. 그럼 이것도 전해 주실래요, 여사님?

- 뭔데요?

- 세화야, 앞으로 5분 줄게.

- …세화야, 앞으로 5분… 줄게….

송 씨 이모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머뭇거리며 기태정의 말을 따라 읊었다.

- 그런데 준장님, 그런 말은 좀… 너무 윽박지르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까요?

세화는 꺾인 새순처럼 바닥에 쭈그리고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듣기만 했다. 이젠 아프다는 감각조차 잊었다.간간이 떠올라 마음을 아리게 했던 좋았던 시절도, 이젠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기태정에게 이런 취급을 받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그냥 성 밖의 시궁창에서, 거기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그냥… 마음을 다해 당신을 좋아했을 뿐인데. 똑같이 좋아해 달라고 떼쓰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굴어?

- 세화 총각이 지금 많이 몰린 모양인데, 조금만 더 다정하게 불러 보시는 게….

- 설마요. 우리 세화가 보기보다 담이 세요. 지금도 이 정도론 꿈쩍도 안 하잖아요. 무슨 상황인지 뻔히 짐작하고 있을 텐데도.

- 준장님….

- 정말이라니까요? 저한텐 뒈지든 말든 약이나 먹이고서, 차라리 다른 남자한테 가겠다고 한 사람이에요. 우리 세화가.

- …예? 그게… 그게 무슨….

- 됐고, 이제 3분 남았어.듣고 있지?

아.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 발로 기어 나와, 이세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뒈지는 꼴 보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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