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확인해 보게.”
받아 든 증서에 손목시계의 센서를 가져다 대자, 국가 원수를 상징하는 문양이 둥실 떠올랐다. 문서를 작성한 날짜와 두 사람분의 서명이 금빛으로 너울거리고, 해당 내용을 읊는 독재자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과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연출에 기태정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기물 파손이 잦군.”
오선란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기태정의 손목을 흘끔 바라보았다.
“맨주먹으로 방탄유리도 박살 냈다고 했던가? 공무 차량을 자주 갈아 치운다는 것은 들었네만… 계급장이 바뀐 것도 아닌데 새 시계를 발급받은 군인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당연한 말이지만 오선란은 기태정의 부주의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었다. 네 성질머리가 얼마나 개 같으면 남들은 은퇴하는 그 날까지 교체할 일이 없을 물품마저 부숴 먹은 거냐 비아냥대는 거였다.
“그래서 집무실까지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이세화도 없는 마당에 저한테 증서의 진위나 확인시켜 주시려던 건 아닐 테고….”
그 정도 핀잔이야 끄떡도 없다는 듯 기태정은 눈을 둥글게 휘며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뭐라도 트집 잡고 싶을 정도로 바싹 약이 오른 건 당신이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오래전 있었던 화학 실험에 대해 이미 알아봤을 거라 생각하네.”
그 비웃음을 모르지 않기에, 오선란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예.”
“그렇다면 증서에 적힌 피실험자의 코드명이 무슨 의미인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
“피실험자가 이세화의 부모 중 한 사람이라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맞아. 체질은 물론이고… 증명할 순 없으나, 그이와 생김마저 일치해.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아이’를, 세화를 찾아 헤맸어. 피실험자였던, 내 소중한… 벗에게 조금이나마 빚을 갚기 위해서.”
오선란은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방금 했던 말과 목소리를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진우를 가리켜 벗, 이라고 말할 때 혹여나 어색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다행히도 죽기 전에 어찌 단서를 쥘 수 있었고… 그래서 앞으론 세화의 삶에 그 어떤 풍파도 불어오지 않도록 도와주고 지켜 주는 것이 내 유일한 목표이자 꿈이 되었다네.”
마음 같아선 기태정에게도 고발장을 날리고 싶었다. 아니, 점잖은 법적 절차 따위 다 내던지고 총이라도 내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화를 처음 보러 갔을 때, 자길 향해 걸어오는 기태정을 보며 감격에 겨워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던 아이가 국방부 건물에서 쓰러질 때 뭐라고 중얼거렸던가. 겨우 전화 연결이 되었을 땐 형편 없는 목소리로 무슨 부탁을 건넸던가.
그렇지만 지금은 감정적으로 날뛰어 봤자 김 중령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었다. 그러니….
“…그러려면 이 재판을 순조롭게 마무리해야, 아니 나도 이 재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걸 알아.”
기태정은 세화가 김석철 같은 놈들이 내세운 위계에 눌려 그간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일을 했던 거라 주장할 것이다. 아무리 세화에게 마음이 없더라도, 자신의 승리를 위해선 그 기조를 유지하려 들겠지.
거기에 슬쩍 힘을 실어 주다가, 일이 끝나는 즉시 세화의 신분을 높여 주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아이의 결심이 선다면 등록부에 양자로 이름을 올려 주고…. 만약 거부한다면 그땐 물러서서 묵묵히 후원 정도만 해 주는 것으로 그쳐야겠지만,어쨌든 중요한 건 잡음 없이 세화의 신분 정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과정이 원만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김 중령이 언제고 세화를 물고 늘어질 게 뻔하다.
그러니 기태정 자체는 탐탁지 않더라도, 이 재판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기태정의 무결성에 흠집이 나는 것도 안 된다. 고발장에 적힌 진술 내용이며, 임부 보호자 등록이며, 오늘 재판장에서 했던 발언이며…. 오선란이 멋대로 떼어 내기엔 기태정은 이미 세화와 너무도 깊이 얽혀 있었다. 이 상황에선 기태정이 불리해질수록 세화의 안위 또한 위태로워진다.
“자네의 진술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재판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 가겠지. 심리전에선 논리 같은 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원로인 배심원들은 대부분 삐딱한 구석이 있었다. 그들은 올바른 논거를 들이밀면 자신의 치부가 들춰진 양 불쾌해하곤 했다.그 타당한 칼끝이 언젠가 자신을 겨눌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하고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쪽을 일부러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김석철의 잘못이 워낙 뚜렷하니 물밑에서만 꿍얼거리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호도할 것이 생기면 신이 나서 입방아를 찧어 댈 것이다. 한번 그런 분위기가 잡히면 이후론 반격이 상당히 어려워진다. 여론을 주무르는 건 김 중령 쪽 집안사람들의 주특기였으니까.
“말씀의 요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자네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야. 참고인이 되어 달라고 했던가? 좋아, 어려울 게 뭐가 있다고. 그 외에도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제공해 주겠네. 자네에겐 없고 김석철에겐 있는 것, 내가 전부 지원해 줄 수 있어. 대신….”
오선란은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챙겨 온 가죽 결재판을 기태정에게 내밀었다. 안에 든 것은 증서만큼이나 뻣뻣한 종잇장이었다.
“이게 뭡니까?”
“친권 포기 각서.”
순간 기태정의 눈동자에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오선란은 속으로 혀를 차며 협탁에서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세화와 아이를 깨끗이 포기하겠다고 하면 이번 일에서 전폭적으로 자네를 지지하고 돕도록 하지.”
“…….”
“이번 일로 김씨 집안이 고꾸라지더라도 자네가 내건 조건이 전부 수용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내가 나서면 얘기가 달라지지. 2계급 특진? 빠른 제대? 원로로 추대받는 것? 전부 들어줄 수 있어.”
“그게 제 아이의 친권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게다가 방금 대장님께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이세화가 잘되려면 어차피 저를 도울 수밖에 없다고.”
기태정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서류를 훑어보았다. 입꼬리는 올리고 있었으나 눈가엔 성마른 분노가 알알이 어려 있었다.
“저에게 그런 조건을 내거실 처지가 아니신데요, 오선란 대장님.”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건지 모르겠군. 어차피 자네는 세화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잖아? 재판을 위해 잠시 이용하려고 했을 뿐이지.”
비난하려는 어조는 아니었다. 분노하는 것도, 비꼬는 것도 아니다. 오선란은 그저 덤덤하게 말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이가 객관적 조건을 짚어 나가듯이.
“이번 일 잘 마무리되면 자네의 지위는 더더욱 공고해질 거고, 그땐 원하는 사람 누구든 곁에 세울 수 있을 텐데.”
“…….”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나서 주는 것이 자네로선 환영할 일 아닌가? 그 어떤 조건도 없이두 사람 모두 책임지겠다는데. 자네가 그렸던그림에서 세화와 아이는 귀찮은 걸림돌이자 변수에 불과하잖아.”
기태정은 일순 목이 꽉 막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당신이 뭔데. 나는 이세화의 법적 보호자지만, 당신은 양부도 무엇도 아닌 타인일 뿐이야.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웃어 주면 되는 일인데….
어차피 이세화를 좋아하지도 않지 않냐, 일이 끝나면 금세 다른 사람 만나서 자리 잡을 거 아니냐는 오선란의 물음 위로… 이세화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겹쳐졌다. 나중에 연인이 생기면 저한테 그랬듯 잔인하게 굴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친권을 포기하라고요.”
이런 식으로 대꾸하면 안 된다. 침착해야 한다. 재판장에서 했던 것과 똑같다. 개소리는 무시하면 그만이다. 처음으로 오선란과 제대로 된 독대를 하는 건데 벌써부터 주도권을 내어 줄 순 없었다.
그런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군인들을 상대하는 일은 일상과도 같아서 기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세화를 주제로 삼는 건… 이성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벌건 불꽃이 머릿속에서 펑펑 터지고 있었다.
이세화가 독한 수면제를 먹이고 도망친 이후로, 줄곧 잠들지 못했다. 언제고 손을 뻗으면 느낄 수 있었던 살결의 감촉과 온기, 작게 꿈지럭거리던 미미한 움직임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품 안은 텅 비어 있다는 걸 견디기 어려웠다.
의무적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한 톨의 미련도 없다는 듯 돌아서던 이세화의 마른 등만 어른거렸다. 그가 더듬더듬 내뱉었던 말이, 더는 저에게 그 어떤 정성도 쏟기 싫다던 체념 어린 목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럴 때면 눈꺼풀 뒤를 불로 지지는 것처럼 열이 훅 오르고, 온몸의 혈관에 유리 조각이 박힌 것처럼 전신이 따끔거렸다. 속에서 치미는 화기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된다.
“…이세화가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꺼낸다면 포기하겠습니다.”
기태정은 결재판에서 꺼내 든 친권 포기 각서를 손가락으로 퉁 튕겼다. 일부러 힘을 조절하지 않은 탓에 한가운데가 크게 찢어졌다.
“대신 이세화가 제 발로 2환에서 걸어 나와, 제 곁에 얌전히 머무르겠노라 말한다면… 그땐 대장님께서도 다시는 저희 문제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기태정 준장.”
“그럼 참고인 건은 승낙해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기태정은 오선란의 텅 빈 집무실을 훑어보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나가 봐도 좋다는 허락도, 실례하겠다는 경례조차 없었던 살벌한 끝맺음이었다. 네 귀퉁이를 힘없이 늘어뜨린 종잇조각만이 테이블 위를 살랑거리며 부유할 뿐이었다.
“…준장님.”
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박 소위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에 종이를 찢어발기는 소리는 들었을 터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이세화, 지금은 어디에 있다고?”
“공사장으로 납품하는 도시락 업체에서 일하는 중입니다.”
“음….”
“오선란 대장 측에서도 비슷한 수를 꾸민 것 같았습니다.”
“비슷한 수라니. 이세화 전용 일자리라도 만들어 냈다고?”
“예. 다만 이런 사례가 여럿 있는 편이 오히려 이세화 씨의 의심을 덜 수 있을 것 같아서 굳이 추적하진 않았습니다.”
“제지할 필요가 없는 것과 추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다르지. 찾아. 오선란이 누구 통해서 2환에 사람 보내고 돈 보내고 있는 건지.”
“예, 준장님.”
이세화는 예상과 달리 노름꾼들이나 약쟁이 소굴은 찾지 않았다. 허름한 여관에 콕 틀어박혀 있다가 새벽이 되면 슬쩍 인력 시장을 기웃거렸다.
그렇다고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종일 관리자를 쫓아다니며 얼굴도장을 찍어도 겨우 일감을 줄까 말까인데, 가끔 나타나선 단 한 순간도 방독면을 벗지 않으려 드는 수상쩍은 사람을 써 줄 리가 만무했다.
일주일 정도 그 꼴을 두고 보던 기태정은, 보다 못해 일자리를 몇 개 만들어 줬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우면서도 보수는 나쁘지 않은 종류였다.
그러나 이세화는 관리자의 제안을 듣고는 오히려 방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사흘 정도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꼭꼭 숨어 있다가, 어이없게도 야반도주를 했다. 남은 돈도 별로 없을 텐데 두어 번이나 눈속임 장치를 만들면서까지.
이렇게나 편한 일을 하는데 돈은 많이 준다는 게 오히려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엔 비슷한 일거리를 몇 개 더 만들어 두었다. 그러곤 관리자들에게 정말로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연기해 보라는 주문도 넣었다.
그러길 며칠, 이세화는 숙식까지 제공한다는 식당의 구인 제안을 듣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살살 눈치를 보다가 쉬는 날이 되니 식품 공장에 파견도 나가겠다고 했다.
혹시 돈을 모아 돌팔이 의사라도 찾아가려고 한다면 그 즉시 잡아들이려고 했다. 마취조차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곳에서 이세화를 죽게 할 순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세화는… 그렇게 몇 푼 모은 돈으로 달걀 몇 알을 샀다. 물러터진 바나나 두어 개도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자꾸만 아랫배를 톡톡 두드렸다.방독면을 쓰고 있어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받아 본 홀로그램마다 그러고 있었다.
박 소위는 이세화가 아이에게 말을 거는 중일 것 같다고 했다. 옆 방에 심어 둔 놈들에게 그런 보고를 받았다면서.
저와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었던 모습이어서, 기태정은 홀로그램을 몇 번이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내내 회피해 왔는데… 말을 걸고 있다고? 애한테?
“어디까지 버티려나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이제 2주 좀 넘었던가? 오선란이 불씨를 지펴 준 탓에 한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좀 더 몰아가려고 했는데. 먼저 기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바싹 말려 주려고 했는데… 더는 제가 못 견딜 것 같다.
“이세화와 조금이라도 안면 튼 사람은 전부 다 잡아들여. 잡역들이야 저번에 다 치워 버렸으니… 단골손님 위주로 찾아보는 게 좋겠군.”
기태정은 손을 들어 눈두덩이 전체를 힘주어 꾹 눌렀다. 가려진 것은 시야인데 저조차 흠칫 놀랄 정도로 턱턱 막힌 것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본인은 기억도 못 할, 아주 사소하게 스친 사람일수록 좋아. 이세화 성격에 더 크게 죄책감 느낄 테니까.”
“…준장님, 그 말씀은….”
“이세화한테 알려 줘야지. 나한테 안 오면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다 뒈질 수 있다는 걸.”
***
세화는 돌덩이처럼 뭉친 빨랫감을 탁탁 털어 방 안에 걸었다. 건조대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천으로 된 옷장의 지퍼 이빨 사이에 옷걸이를 어떻게 잘 끼워서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되게 덥다, 그치?”
여전히 납작하기만 한 배를 문지르며, 새싹이에게 조심조심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