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93)화 (93/144)

#090

“음, 내 이름은 세화야, 이세화.”

세화는 꿈질꿈질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저를 가리켜 아빠라고 말하는 건 아직도 좀 어려웠다.

“예전에는… 미안했어.”

죽었으면 좋겠다며 배를 내리쳤을 때의 새싹이는 심장만 겨우 달린 배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배를 토닥이는 자신의 손길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태명까지 지어 준 김에 본격적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 보려 했는데… 막상 자리를 까니까 좀처럼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산부 수첩에 적힌 토막 상식 같은 거라도 열심히 봐 둘 걸 그랬다. 무작정 외면하기 바빠서 일부러 뻣뻣하게 굴었던 게, 들여다보지도 않으려고 했던 게 이제 와 후회가 됐다.

“이젠 정말로 조심할게. 못된 말도 그만하고….”

기태정은 제 말버릇이 엉뚱하다며 픽 웃곤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나름대로 귀엽게 여기는 것 같았다. 원래 욕도 잘하고 말투도 무뚝뚝한 편이라고 했을 땐 담배를 태우다 말고 어이없어하며 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진짠데. 나도 욕 잘하는데. 화나면 씨발 소리도 지르고 이 새끼, 저 새끼 막 부르기도 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를 만난 이후론 한 번도 욕을 입에 올린 적 없었던 것 같다. 눈치가 보였던 것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기태정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 자신이 어떤 말을 고르고, 어떤 행동을 취하면 그가 너그러워지는지 무의식중에 얼추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내 생각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 사람을 좋아했나 봐.”

어설프게 복부를 어루만지던 세화의 손길이 서서히 느려졌다. 언젠가부터 기태정 또한 저를 이렇게 얼러 주곤 했다. 섹스 없이 잠드는 밤, 오직 서로뿐인 길 잃은 짐승들처럼 몸을 꼭 맞대고 있노라면. 그는 내키는 대로 아무 곳이나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쓸어 주길 반복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당기는 게 있는지, 내일 하고 싶은 일이 뭔지,같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딘지… 그런 시시한 것들을 물어봐 주면서.

“…아.”

저에게도 자장가를 불러 주듯 다정한 체온을 쏟아 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기태정이 빼앗아 가 버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거두어 간 것이라, 다시 돌려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아, 아윽….”

세화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여관방은 방음이 썩 좋지 않았다. 느지막이 일어난 사람들이 일을 나갈 시간이니, 소리 내면 안 된다.

“미안해, 흐윽, 오늘, 만….”

쏟아지는 울음을 참으며, 세화는 아이를 달랬다. 괜찮아, 새싹아. 이제는 진짜로 안 울 거야.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다짐을 하면서, 세화는 낡은 요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끅끅 목구멍을 울리던 흐느낌은 결국 통곡이 되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2환으로 내빼듯 도망친 지 벌써 며칠이 지나고서야, 처음으로 소리 내어 터트리는 울음이었다.

***

“제 아들 녀석이 저지른 잘못이 작지 않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경한 제약의 대표이자 지금은 은퇴한 군인인, 그러나 원로로서 국방부에 꾸준히 얼굴을 내밀고 있으며 아직도 밖에선 자신을 김 중령이라 소개하는 중년의 남자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그렇지만 제 아들이, 김석철 소위가 평소 마약에 손을 댔다고 해서 불법 실험을 감행했다는 주장은, 글쎄요.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기태정 준장이 여러 증거를 제시해 주긴 했으나….”

기태정은 아몬드처럼 뾰족해진 눈매를 하고서, 김 중령의 항변에 코웃음을 쳤다. 지나친 비약? 씨팔, 우길 걸 우겨야지.

“김 소위가 개발을 시도했다던 신약과 ‘추수’의 연관성을 뒷받침하는 건 이세화라는 4환 출신 마약 유통상의 체질이 변했다… 그게 전부 아닙니까? 게다가 이세화라는 증인과 그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요지를 흐리는 전형적인 화법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김 중령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제 손해였다. 상대는 이런 식의 여론 몰이에 익숙하며, 승기를 잡은 경험 또한 다수 가지고 있다.

기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감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흥분할 것 없다. 개소리는 개소리로 받아치면 되는 일이다.

“게다가 이세화란 사람은 현재 기태정 준장의 아이를 가졌다지요? 그 과정에서 일어났을 강제성도 배제할 수 없는 와중이니 그 하층민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형평성과 공정성이 심히 떨어지지 않습니까?”

김 중령은 기태정을 준장이라 칭하는 것도 굴욕스럽다는 듯 그 대목에선 슬쩍 목소리를 줄였다.

원칙대로라면 은퇴한 중령이 준장님도 아니고 준장이라고 편히 부르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여긴 그 모든 위계를 무시하는 원로들 중심의 재판장이었다. 김 중령보다도 못한 노인네들도 어이 기태정이, 하고 찍찍 불러 대곤 했으니… 그나마 계급이라도 붙여 부른 게 어딘가 싶었다.

“그건 그래. 석철이가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라, 확인되지도 않은 일까지 쟤 탓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잖아? 계급장 날아가는 게 무슨 의민지 다들 알면서.”

“염병, 잘못이 없는 게 아니면 벌을 받아야지. 본인 입으로 시인했잖아? 창고 다 불태워 놓곤 기태정한테 고래고래 악까지 써 가면서.”

김 중령과 가까운 원로가 말을 보태자, 다른 이가 빈정거리며 바로 맥을 끊었다. 평소 기태정이고 김씨 집안이고 별다른 접점이 없는 인사였으나, 이번에 김 소위가 2환에 불을 지른 것 때문에 제법 큰 피해를 본 사람 중 하나였다.

“1환 대피소에서 그… 누구냐, 하여튼 약탈범들이 털어 간 것도 김 소위가 숨겨 뒀던 약이라며. 그 새끼들 시체도 불탄 2환 창고에서 나왔고. 김석철이 추수, 추수 노래 부르고 다녔던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우길 걸 우겨야지,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아, 그 영상도 난 못 믿어. 거기 테러하던 놈들 움직이는 꼴 봤어? 그중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로봇 같던데, 솔직히 그거….”

울컥해서 열변을 토하던 원로가 기태정을 흘끗 보곤 은근슬쩍 말끝을 흐렸다.

“…흐흠, 하여튼 기태정이 증거로 내민 것도 못 믿을 거 천지야. 특히 그 영상, 편집된 거 말고 원본으로 다시 보자고.”

“아니, 양념 친 영상 아닌 건 확실하다니까? 지금 우리 부서 의심하냐?”

“그런 뜻이 아니고…!”

예상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여러 가지 이권이 얽힌 노장들은 어린 애들도 하지 않을 유치한 말싸움을 이어 갔고, 각 파벌의 주요 인사들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흘리는 말 중 반론의 여지로 삼을 만한 것을 줍기 위해 뱀처럼 눈을 치뜨고 있었다. 김석철은 한가운데 앉아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제안하고 싶은 것은.”

일부러 이 난장판에 불을 붙인 김 중령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차피 오늘은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추후 다시 열릴 재판에서 이세화라는 사람을 소환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따분한 얼굴로 손톱 끝을 튕기던 기태정의 몸짓이 뚝 멈추었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팔짱만 끼고 있던 오선란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태정 준장의 고발장 내용과 김석철 소위의 진술서가 어긋나는 부분도 있으니, 이 자리에서 그 사람의 체질에 대해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확인? 이젠 천것까지 데려다가 여기 앉혀 놓자고?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아, 김 중령?”

“무슨 약을 먹어도 효과를 무효화하는 체질이라더군요. 김 소위가 참고했다던 문서 그대로 약을 제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먹어도 정말로 아무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침착하게 말하니 그럴싸하게 들릴 뿐, 맥락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개소리였다. 이세화를 불러다가 김석철의 잘못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체질이 진짜인지 아닌지 가려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끌고 가는 것부터가 뻔했다. 특이한체질의 4환 주민이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렸던 범죄다, 일부러 마약 중독자인 김 소위에게 접근해 벌인 일이다… 그런 식으로 몰아가려는 거겠지.

“기태정 준장은 어떻게 생각해. 방금 김 중령이 제안한 거.”

문제는… 김 중령과목적은 다를지라도, 살아 있는 증거인 이세화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다는 거였다. 그것도 다수결로 결과가 갈리는 이 군사 재판에서, 이기려면 꼭 붙들어야 하는 중도에 선 인사들이 대체로 긍정적인 느낌을 표했다.

“이세화의 법적 보호자로서 증인 출석은 거부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가해자인 김석철 소위 앞에서 피해자를 불러내 봤자, 제대로 된 증언이 가능하겠습니까?”

“허허…. 아무리 요즘 끼고도는 놈이래도 그렇지. 이세화인가, 걔도 범죄자인 건 맞잖아? 피해자라곤 할 수 없지. 평생을 마약이나 팔면서,”

“증거 가지고 오세요.”

기태정은 빈정거리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길쭉하게 꼰 다리를 이기지 못하고, 무거운 원목 의자가 우드득 뒤로 밀려났다.

“이세화가 그간 저지른 범죄 현장, 홀로그램으로라도 보여 주시든가요. 증거도 없으면서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가시네.”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말이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증거가 명백한 김석철 소위도 무죄라고 우기고 있는 판국인데.”

이세화에겐 아무 잘못 없다고 변론하면서도, 모래를 삼킨 듯 입 안이 꺼끌꺼끌했다.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땐 저 또한 같은 용도로 쓰고 버릴 계획이었으니까. 김 중령과 자신의 차이점은 유도하려는 결과가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세화가 몰래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사 안에서얌전히 머무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절대 시키지 않을 것이다. 제 아이를 가진 이세화에게 다시 위험한 약을 만들어 보라고, 패치만 안 두르면 뭘 주워 먹어도 네 몸은 멀쩡하지 않냐고 몰아붙이고 싶지 않다. 이 많은 승냥이 떼 앞에 이세화를 덜렁 앉혀 두고, 쏟아지는 빈정거림을 감내하라 하지 않을 거다.

기태정은 어느 부분에선 이미 이세화를 도저히 이길 수 없게 됐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증인 이세화와 저는 마음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곤죽이 된 속내를 감추고서, 기태정은 과장되게 정모를 벗었다가 썼다.

“이 부분만큼은 김석철 소위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잔뜩 쭈그러들었던 김석철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가 뭐라 입을 열려 하자, 김 중령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입 닥치고 있으라는 경고였다. 그 소리에 움찔 놀란 김석철은 분한 듯 어깨를 떨며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미욱한 행동거지에 몇몇 원로들의 얼굴에 불쾌함이 서렸다.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 중령은 낭패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정당한 절차 따위 개나 준 재판이었다. 결정적인 힘을 실어 줄 스윙 보터들은 저런 사소한 일에도 표심이 흔들리곤 했다.

“그러나 사감을 떠나 저는 이세, 아니, 저희 집사람을 재판에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닐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뭐? 집사람? 자네 그 하층민하고 식까지 올렸어?”

“아직입니다만, 곧 올릴 생각입니다.”

이번엔 김석철이 참지 못하고 크게 욕을 뇌까렸고, 김 중령은 불편한 사람처럼 자꾸만 기침을 해 댔다.

“여태 혼담이라면 질색을 하더니… 하필 골라도 그런 놈을 골랐어?”

“자네 자식새끼들보다 4환의 하층민이 나았나 보지. 뭘 물어.”

“뭐? 야, 최 대령!”

결혼이라.

저 새끼들 속 뒤집히라고 내던져 본 소리였는데, 막상 말을 하고서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군부의 서버 어딘가에야 기록이 남아 있긴 하겠지만, 임부 보호자 등록은 아이를 낳고 출생 신고를 하는 것과 동시에 해제된다.

그렇지만 혼인 신고는 다르다. 이세화의 가족 관계부를 떼면 기태정이란 이름이 영구히 남게 되는 것이다. 제가 죽더라도 말이다.법적으로 그를 온전히 소유하고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번에 이세화 잡아 오면 그렇게 할까? 기태정은 엄지로 턱 끝을 슬쩍 쓸었다.어차피 결혼 같은 것에 큰 의미를 두는 편도 아니었으니, 등록부 귀퉁이에 자리 하나 내어 주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이세화야 싫다고 울겠지만.

“하지만 김 중령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으니… 신뢰할 수 있는 분을 참고인으로 모시고, 저희 집사람이 이런저런 진술을 하는 홀로그램을 제작하는 정도는 고려해 보겠습니다.”

“참고인?”

“예. 예를 들면….”

이세화를 가리켜 집사람 운운한 순간부터 시퍼렇게 날 선 얼굴을 하고 있던 오선란을 바라보며, 기태정이 생글생글 웃었다.

“오선란 대장님 정도라면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만.”

난데없는 전개에 투실투실한 김 중령의 볼이 푸르르 흔들렸다.

“저보다는 김석철 소위와 가깝게 지내셨던 분이니, 굳이 제 쪽에 편파적인 의견을 내시진 않을 거고… 계급도 높으시죠. 이 정도면 제법 공정한 절충안 아닙니까?”

국방부 건물에서 오선란 대장이 이세화라는 하층민과 제법 오랜 시간 이야길 나누었다는 말이 이미 군부 내에파다했다. 그가 해외에 장기 체류하며 찾아 헤매던 사람이 실은 혼외자였는데, 그게 바로 이세화라는 말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오선란이 일부러 소문에 불을 지핀 건지, 국내에서의 영향력이 그만큼 약해진 것인진 아직 알 수 없었다.

뭐가 됐든 기태정으로선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제 오선란은 이세화의 도주에 대해 자신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거다. 친자식처럼 여길 거라던 이세화가 재판장에 끌려 나오는 꼴을 보기 싫으면 저에게 협조해 줘야 한다. 이세화가 제 발로 숨은 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번거로우시겠지만 오선란 대장님께서 동의해 주신다면, 저도 그 정도까진 양보할 의사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맞은편에 선 기태정과 오선란을 분주하게 오갔다.다들 어찌나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지, 눈을 굴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숫자가 팽팽 튀는 것만 같았다.

“…아아, 그래. 못할 것도 없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새파랗게 젊고 건방진 장교를 바라보던 오선란은, 이내 냉소를 흘리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오 대장님.”

김 중령이 애써 구겨진 얼굴을 펴며 오선란을 제지하려 들었다.

“출석하지도 않은 증인의 증언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아니, 애초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원수님도 아니고 한낱 장교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런 특혜를 주다니요.”

“문제 될 것이 있나? 당장 증인이 거동하기 어렵다잖아. 보증하는 사람의 계급이 대장 정도 되면 없던 의미도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오선란에게선 뚜렷한 적의가 느껴졌다. 김 중령조차 흠칫 놀라 턱을 당기며 물러설 정도로.주고받는 배심원들의 눈길이 더더욱 의미심장해졌다. 오선란이 이렇게까지 뚜렷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 그가 보인 태도는 앞으로김씨 집안과는 완전히 선을 긋겠다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까부터 같은 이야기만 반복되는 것 같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합시다. 다음에는 부디 생산적인 방향으로 재판이 진행되길 바랍니다.”

오선란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 또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기태정 준장은 잠깐 나 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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