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92)화 (92/144)
  • #089

    기태정은 테이블 위에 놓인 쇼핑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 조금 전 이세화가 그랬듯이.

    “나 중위 관사로 불러. 혹시 채혈 도구 있나? 지금 바로 써 보고 싶은데.”

    “차 안에 있긴 합니다만….”

    “그거 가지고, 아냐. 가면서 하지.”

    “죄송합니다만… 준장님, 무슨 일 있으셨던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박 소위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세화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여길 빠져나갔다는 건 알겠는데… 기태정이 그가 떠나는 걸 순순히 허락해 줬다는 게 영 믿기질 않았다. 다시 데려올 계획을 세우곤 있다고 하더라도, 상관의 성격상 이세화가 제발 보내 달라며 울고불고 매달려도 일단은 붙들어 놓고 봤을 것 같은데….

    “이세화가 나한테 약을 먹였어.”

    “…예?”

    “헤스타, 알리온, 티란정. 세 개 다 섞어서 30mL 정도.”

    기태정이 약물의 이름을 읊자 부관 두 사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나만 삼켜도 치명적인 것들을 세 개나 섞었다니. 심지어 30mL….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양이었다.

    “하,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해 놓고선 실제 사용한 약물은 달랐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박 소위는 굳어진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최 원사는 더듬거리며 필사적으로 이세화를 변호하려 애썼다.

    “그 약들을, 그 용량으로 쓴 게 아니었다면 내가 정신 놓고 쓰러지진 않았겠지.”

    “그렇지만… 그런,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준장님께서 평범한 사람들과는 좀 다르다는 걸 이세화 씨도 알고는 있으니까요. 절대 치명적이지 않으리라 확신하고서….”

    “그런 의도, 맞아.”

    기태정은 일어난 직후부터 내내 손에 쥐고 있던 종잇조각을 주머니 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혹시나 내가 뒈져도 상관없다고 골라 온 거야. 이 독한 약들로만.”

    “…준장님.”

    “박 소위.”

    “예.”

    “임부 보호자 등록 절차, 그대로 진행해. 어차피 이세화 동의 없이도 할 수 있는 거였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미 마감일은 지난 지 오래다. 그래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 주제만 나오면 한없이 쪼그라드는 이세화를 잘 알아서, 여태 입도 벙긋하지 않았던 거다.

    보호자 등록 기한이 지나면 매일 벌금이 부과된다. 기태정 입장에선 시큰둥한 액수였으나, 이세화 기준에선 졸도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이걸 알게 되면 떠밀리듯 등록 빨리하겠다고 들까 봐,일절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해 주고 있던 참이었다.

    이세화의 입에서 보호자가 되어 달란 말을 듣고 싶어서. 자기 손으로 서류에 이름을 적고, 돌아보며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한데, 이럴 거였으면.

    “…신발 같은 게 아니라 반지를 맞춰 올 걸 그랬어.”

    기태정은 가늘게 눈매를 좁히고서 한 손을 구부려 반원을 만들어 보았다. 이세화 발목이 이 정도는 됐던가? 그러다 두 손으로 작은 원통을 그리곤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다. 목둘레는 이쯤 됐던 것 같은데…. 좆 크기는 또 어느 정도였더라.

    허깨비 같은 잔상을 더듬고 주무르던 기태정의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곧 저에게 붙들릴 이세화를 위해 세상에 다시 없을 호화로운 장신구부터 만들 생각이다. 예쁘장한 얼굴에 어울릴 법한 값비싼 보석을 아낌없이 때려 박아, 온몸에 치렁치렁 둘러 주고서, 침실 밖으론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할 거다.

    “여기저기에 내 거라는 흔적을 달게 하고 있었으면 그딴 어이없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을 텐데.”

    이세화는 제 태도가 처음과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또 지금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참에 깨닫게 해 주면 될 일이다. 양 발목과 목에 족쇄를 채워 주고, 혼자선 화장실도 못 가게 자지 뿌리까지 조여 놓고, 가운조차 내주지 않으면 그땐 알게 되겠지.

    “준장님, 조금만 진정하시고….”

    “충분히 진정했어.”

    약이라도 빤 듯 종일 둥실둥실 들떠 있던 예전이 오히려 문제가 있었던 거지, 지금은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또렷하기만 했다. 정신도, 시야도.

    결국 이세화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이세화가 어떻게 하우스를 빠져나갔고, 지금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으며, 그간 누구와 접촉했고 뭘 먹고 있는지… 하루 안으로 속속들이 파악할 자신이 있었다.

    그에겐 더없는 불행이겠으나, 기태정은 쫓기는 자의 피를 말리는 추적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하물며 이세화는 한낱 민간인에 불과했다. 범죄자 소굴에서 나고 자란 날고 기는 마약팔이였대도 군인을 이길 순 없다. 그러니까….

    “…아.”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던 기태정은, 순간 밀려오는 구역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세화가 저더러 괴물이라고 불렀던 거, 당신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라고 했던 거…. 그런 말들보다.

    앞으로 다른 사람 좋아하게 되면 그러지 말라던 당부가, 어차피 당신은 금세 다 잊고서 잘 살지 않겠느냐 단정 짓던 이세화의 그 울음 섞인 자조가, 타인과의 미래를 운운할 정도로 나는 이제 당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그 최후의 선고가….

    날카로운 바늘이 되고 칼날이 되어 자꾸만 기태정의 심장을 저며 댔다.

    ***

    세화는 시무룩한 낯으로 냄비에 물을 받았다. 구닥다리 화구는 털털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다 겨우 불씨를 피워 냈다.

    오늘도 일을 구하지 못했다.

    아무도 저를 믿고 써 주질 않았다. 여태 안 해 본 게 없다고 열심히 호소해 봐도, 방독면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앳되어도 너무 앳되다며, 다들 문밖으로 저를 밀어 냈다. 어린 애는 이런 데 오는 거 아니라는 핀잔은 덤이었다.

    빚 갚으러 왔다고, 돈 못 벌면 죽는다는 말부터 서두에 올리면 조금 관심을 보이다가도, 허옇게 마른 제 손을 보면 이걸 어디다 쓰냐며 혀를 찼다.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약쟁이들 소굴이 2환 어디쯤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놈들을 살살 꾀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안다. 놈들이 가지고 있는 약을 이러저러하게 조합해서 몇 번 투여를 도와주면 된다. 그럼 알아서 돈 싸 들고 찾아와서 제발 약 좀 말아 달라고 애원할 테니까. 하우스에서 손님 상대하던 것에 비하면 일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입에 풀칠하고 싶진 않았다. 소문이 퍼지면 위험할 거란 계산도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러긴 싫었다. 그런 식으로 배불리 먹고 따뜻한 곳에서 편히 자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쯤 묵을 곳을 옮겼어야 했다. 숙박업소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름을 올려 쫓는 사람에게혼란을 주는 것이 도주의 기본이라는 건 안다. 그러니 일당을 모아서 그때그때 숙소를 옮기려고 했는데….

    돈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밀수꾼은 세화를 2환까지 무사히 데리고 와 주었고, 제법 정중한 태도로 추가 거래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배지와 바꾸자며 그가 내민 것은 방독면 몇 개와 여벌의 옷, 라면 몇 봉지 그리고 약간의 현금이었다. 배지 하나의 값으론 턱도 없을 약소한 액수긴 했지만, 그마저 절실한 상황이었다.

    시장에 물건을 내놓고 싶어 엉덩일 들썩이던 장물아비의 부탁이었다면 그래도 거절했겠지만, 밀수꾼이라면 오히려 괜찮을 것 같았다. 물건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따로 당부하지 않아도 바로 쓰지 않을 것이다. 아끼고 아끼다 꼭 필요한 순간에 꺼내 들겠지.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서 처음보다야 여유가 생기긴 했어도… 마냥 놀고먹으면서 3주 혹은 그 이상을 버틸 수 있는 정도까진 아니었다. 어떻게든 일을 구해야 한다.

    “와, 이번엔 진짜 잘 끓였다.”

    매콤한 라면 국물 냄새가 낡은 부엌 안에 가득 들어찼다. 세화는 일부러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이라도 그렇게 하다 보면 정말로 괜찮아졌다.

    이거 체리다, 생각하고 씹다 보면 진짜 체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이거 딸기 맛이라고 상상하면 그런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세화는 끈적끈적한 공용 식탁 위를 대충 훔치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빠져나갈 수 있는 뒷문과 창문의 위치를 눈에 꼭꼭 담고, 바깥의 기척에 잠시 귀를 기울인 다음에야 안심하고서 수저를 들었다.

    아기는 응석이 좀 심했다. 여태 고급스러운 것만 먹어서 그런가? 2환은커녕 4환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비싼 음식들이 당긴다며 자꾸만 세화를 졸라 댔다.

    이미 질릴 대로 질린 라면 국물을 억지로 삼키며, 세화는 처음 먹었던 체리를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과일을 집어다 주던 손의 주인이 떠올랐다.저를 보고 소중한 것 보듯 작게 웃던 기태정의 얼굴과 이세화, 하고 불러 주던 낮은 목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그러면….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서 싸구려 수저 속에 비친 자신의 태만 멀거니 들여다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널따란 이층집에서, 굴러도 굴러도 떨어지지 않는 거대하고 폭신한 침대 위에서 그 남자와 함께 잠들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하루하루 부푸는 애정을 감추질 못하고, 설레며 눈을 떴던 게 전부 거짓말 같았다.

    “…계란, 흠, 라면에 계란 넣으면 더 맛있다?”

    화제를 돌려 봤지만, 역효과였다. 대꾸도 없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다, 세화는 결국 목을 푹 떨구었다.

    기태정은… 미안했다는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범람하는 감정과 기억이 수시로 세화의 무릎을 꺾이게 했다.

    너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데없으니 돌아가라는 핀잔이나 듣고, 퀴퀴한 방 안에 몸을 말고 있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자괴감이 밀려왔고…

    “…저녁엔 일 못 구해도 계란은 사 먹을까? 그 정도 비상금은 있어, 아무리 그래도.”

    세화는 그럴 때마다 더더욱 친근하게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다디단 환상에 젖어 내달리던 마음이 갈 길을 잃어서, 당장 뭐라도 붙들고 매달리지 않으면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널 낳을게, 잘해 줄게, 내가 아빠야… 감히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얄팍한 뱃가죽에 대고선 영양가라곤 하나도 없는 얘기나 우물쭈물 꺼내다, 끝내 기절하듯 얕은 잠에 빠질 따름이었다.

    “사실 나는… 맨날 생각했거든? 부모님은 왜 나를 낳았을까…. 그런데 이젠 좀 알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는 걸 상기할 때마다 무서움이 가셨다.

    바깥에서 들리는 아주 작은 기척에도 벌떡 일어났다가, 혹은 있는 대로 몸을 웅크렸다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면 그제야 식은땀을 흘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길 반복하고 있었다. 신경 쇠약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배 속 아이에게 말을 붙이다 보면 조금은 진정이 됐다. 초음파 화면 속젤리 같은 쪼그만 몸통, 콩콩콩 열심히 내달리던 심장 소리를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젠 밉기만 한 남자의 피가 흐르는 아이인데, 그 덕분에 아직까진 견딜 만하다는 게.

    이제 아이에게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다는 걸 아니까, 불쑥 치미는 못된 생각을 금세 접게 된다.쉬운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건실하게 돈을 벌어 보자고 다짐하게 됐다.며칠째 하루에 두 끼만, 그것도 라면으로만 끼니를 때우는 처지가 신물이 나는데도, 편하게 약쟁이들 돈이나 뜯어먹자는 유혹엔 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워, 네가 있어서….”

    나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아이를 떠올리면, 미안하게도….

    “…그래도 내가 아직은,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세화는 여전히 판판한 배를 괜히 통통 두드려 보았다. 그래도 라면이라도 들어가서 그런지, 아까보다야 물이 찬 소리가 났다.

    밑동이 새카맣게 그을린 냄비를 깨끗이 씻고, 세화는 부엌 밖을 한참을 내다보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은 낮인데도 온통 새카맣다. 낡은 냄비의 밑바닥처럼.화재야 진작 잡았는데, 상당량의 유해 물질을 아무런 조치도 없이 태워 버린 탓에 이 지경이 된 거라고 했다.

    “…너도 이름 지어 줄까?”

    창문에 다닥다닥 붙은 새카만 분진 같은 것을 보던 세화는, 저도 모르게 배 속의 아이에게 불쑥물었다.

    꾀죄죄한 여관방에서, 불길하게 검은 밖을 바라보다대뜸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게 좀 어이없고 당황스럽긴 한데…. 어쨌든 이 아기 덕에 세화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평생을 갈구하던 ‘존재하는 사람으로서의 증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 말로만 고맙다고 할 게 아니라….”

    이젠 죽어도 같이 죽는 사이가 됐는데, 너, 아이… 계속 그렇게만 지칭하긴 좀 그랬다.

    세화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선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왕이면 좋고 예쁜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다.별명 붙이는 것도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삼월이, 사쿠라, 홍단이… 그 거지 같은 별칭들 때문에 제가 얼마나 작아졌던가.

    그런 의미에서 제 이름의 유래인 꽃은 죽어도 싫었다. 직접적으로 꽃이라는 말이 안 들어가더라도, 꽃을 연상케 하는 것들은 모조리 탈락이었다.

    “그럼 뭘 하지…. 하늘이? 햇살이?”

    세화는 무릎에 뺨을 뭉갠 채로 제가 좋아하던 것들을 헤아려 보았다. 그렇지만 하늘은…. 거기 있는 것들은 어쩐지 기태정의 소유인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 창공을 날았던 순간이 자꾸만 떠오르기도 해서, 그 또한 전부 제외하기로 했다.

    “숲? 나무?”

    땅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 반사적으로 읊어 본 건데, 말을 내뱉고 보니 그 또한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세화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나약하고 한심한 꽃 같은 게 아니라 태풍이 몰아쳐도 끄떡없을 단단한 나무 같은 게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숲아, 이건 발음이 좀 어렵, 아…, 새싹…?”

    우거진 나무를 좀 더 예쁘게 별명처럼 부르는 말이 없을까, 고심하던 세화는 별안간 귀여운 단어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새싹….”

    급조한 것치곤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아니, 곱씹을수록 좋았다. 비록 지금은 작지만, 나중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씩씩한 새싹.

    “…새싹아.”

    아직은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래도 조금 더 자란 작은 콩 같은 아가를가만히 불러 보았다.

    “새싹아, 들려?”

    신기한 일이었다. 이름도 아닌 고작 별명 하나 붙여 준 것만으로도, 여태 무작정 외면하려 들었던 따뜻한 마음이 샘처럼 퐁퐁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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