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이세화.”
기태정의 부름을 무시한 채, 세화는 가방 안에서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캡을 벗기고 툭툭 흔들자, 주삿바늘 끝에 방울진 약물이 고였다. 피에 물을 약간 탄 것처럼 짙은 분홍색이었다.
전쟁터에선 별별 상황을 다 겪기 마련인지라, 일어날 수 있는 응급 상황은 모두 꿰고 있다고 생각했다. 약과 치료법 또한 웬만한 건 다 접해 봤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런 기태정조차 저런 불길한 색의 약물은 처음 보았다.
“헤스타, 알리온, 티란정이라는 수면제들을 섞은 거예요.”
“…뭐?”
“…….”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티란정?”
생각지도 못한 세화의 선전포고에, 누가 귀에 대고 북이라도 치듯 심장 박동이 쾅쾅 울렸다.
다른 건 몰라도 티란정이 얼마나 위험한 수면제인지 잘 안다. 외상 증후군을 견디다 못한 군인들이 자살을 목적으로 고르는 약물이었다. 티스푼 반만큼 맛을 보는 것도 사람에 따라 지극히 위험할 수 있는, 경우에 따라선 독극물로 분류되기도 하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걸 저만큼이나 들고서….
“밖에 있는 사람들 전부 치워 주세요.”
세화는 팔오금 부근을 검지와 중지로 꾹 누르며 익숙하게 혈관을 짚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너.”
기태정은 패치를 두르고 있는 마른 팔과 세화의 손에 들린 주사기를 번갈아 가며 훑었다. 그의 행동이 함의하는 바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지금 이세화가.
“저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내 앞에서 죽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려는 건가?
“몸이라도 섞는 척하면서… 멋대로 기습해서 주사기 찔러 넣고, 분통 터져 하는 꼴 보고 싶었는데….”
“…….”
“안 되겠어요.”
주사기의 피스톤을 만지작거리며 세화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당신한테 그렇게까지 정성 쏟을 기운도 없어.”
날카로운 말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기태정은 이어지려는 세화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이세화!”
세화는 주삿바늘을 자신의 몸에 찔러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도저히 차분히 굴 수 없어, 몇 발자국 내디뎌 성큼 가까이 다가가자, 세화가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 다 치우시고요.”
“…….”
“나야 죽든 말든 관심도 없겠지만, 아이는 아니잖아요?”
저 패치가 가짜일 가능성, 약물이 진짜가 아닐 확률…. 기태정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빠르게 헤아렸다.
세화를 제압하는 일 자체는 당연히 어렵지 않다. 체급으로든 완력으로든, 세화는 절대로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저 정체 모를 물건이 세화의 혈관을 타고 들어갈까 봐. 정말로 독약 같은 위험한 수면제로 배합된 약이 맞다면, 패치를 두르고 있는 저 약해빠진 몸이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세화.”
그 미미한 가능성이, 기태정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이래도 아니야?”
“…….”
“네 조잡한 수가 혹여 진짜면 어쩌나 싶어서, 씨발, 이렇게 가만히 너 하는 것만 쳐다만 보고 있는데….”
“…….”
“그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피스톤을 누르지 않아 약물은 주입되지 않았어도, 조준하고 있는 주삿바늘은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세화의 살갗을 긁어 대고 있었다. 허연 피부 위로 벌건 선이 죽죽 그어진다. 저대로 몇 번 더 스치면 진짜로 피가 날 수도 있다. 고작 그 정도로도 종잡을 수 없는 체질의 세화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요?”
“……, 뭐?”
“당신 마음 같은 걸 내가 왜….”
뾰족하게 눈을 치뜨고서 나름대로 날카롭게 대꾸하려던 세화는, 결국 울었다.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 해.”
“…….”
“인제 와서 그딴 걸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세화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도 어려울 입속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럴 거였으면 진작, 진작 나한테….
…차라리 세화가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면. 하다못해 쌍욕이라도 퍼부었다면 기태정도 세게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태까지 들어 본 것 중 가장 형편없는 세화의 목소리가… 도저히, 예전처럼 그를 함부로 만질 수 없게 했다.
“…밖의 사람들, 각 층에 있는 선수 대기실로 들어가 있으라고 하세요.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예요.”
경련하듯 몸을 잘게 떨던 세화는 한쪽 어깨를 들어 팔뚝으로 젖은 얼굴을 대강 훔쳐 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더는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당신 명령이 있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말라고 하시고요.”
그리고 그 흔들림이 없는 시선에서, 기태정은 세화의 진심을 읽었다.
진짜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떠나고 싶어 한다. 사흘, 짧은 시간 동안 비루한 생을 탈탈 털어 겨우 꼬아 낸 얄팍한 동아줄을 움켜쥐고서, 나에게서 멀어지려고 한다.
“…하하.”
대치하듯 마주 서서 세화를 바라보던 기태정은,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내가 정말… 뭐에 홀리긴 했나 봐.”
그런 게 아니고서야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선선히 보내줄 일이 아니었다. 4환에서, 자신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며칠만 쉬고 싶다는 그딴 개소리를 듣자마자 더 촘촘히 단속했어야 했다.
사실 속 깊은 곳에선 그런 생각이 뿌리 깊게 움트고 있었다. 그래도 컴컴한 마음의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서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준 거였다.
그냥,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만큼 세화의 우울이 가여웠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내줬다.
원래대로라면 틈이 나는 대로 CCTV를 켜 놓고 감시했어야 했다. 장물아비 같은 낯선 사람의 출입?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세화가 울었으니까.
저에게 주려던 쿠키가 다 부서졌다며 하염없이 울어서, 사람들에게 치이고 치여 서럽게 눈물을 뚝뚝 떨구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또 조금은, 미안하기도 해서.
그런데 뭐? 사람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고선, 이젠 당신 마음 같은 거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박 소위.”
자꾸만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것을 꾸역꾸역 삼켜 내던 기태정은, 결국은 시계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딸칵, 금속이 체온에 맞물리는 소리가, 그 찰나의 시간이 끔찍하게도 길게 느껴졌다.
- 예, 준장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거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씨발 애새끼는 내 알 바 아닌데, 세화한테 문제가 생기는 꼴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으니까.
“전원, 각 층에 있는 하우스 선수 대기실로 이동한다.”
- 예?
“한 놈도 빼놓지 말고, 전부 다. 다시 명령 있기 전까지 나오지 말고.”
그래서 결국은, 세화가 바라던 말을 고스란히 읊어 주고 말았다.
- …알겠습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명령이긴 했으나 박 소위는 끝내 토를 달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세화와 관련해 무슨 일을 벌이려나 그리 태평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이제 됐어?”
기태정은 이를 까득 씹으며, 한 걸음 더 세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팔뚝을 꿰뚫을 듯 번들거리는 주삿바늘이 더 선명하게 보여서, 속에서 천불이 났다. 하다못해 나를 찌르겠다고 덤벼들든가 할 것이지, 어디서 자기 몸뚱어릴 가지고, 이 미친 게….
“그런데 너, 이런 식으로 도망쳐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도, 기태정은 포기하지 않고 세화를 설득해 보려고 했다.
어떻게든 살고자 했던 사람이다. 성 밖에서 되는대로 살아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저 위의 구역으로 넘어가고 싶다고, 잘살아 보겠다는 오기 하나로 여기까지 버텨 온 사람이다.
그런 세화가 설마 진짜로 죽겠다고 이런 계획을 세웠을 것 같진 않으니,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오히려 김 소위 좋은 일만 시키는 거라고.”
“…….”
“당장은 믿기도 어려울 거고… 그래, 화도 나겠지만… 그래도 내 곁에 있으면서,”
“차라리 김 소위한테 붙잡혀서 개죽음당하는 게 낫겠어요.”
“…뭐?”
“당신하고 있느니 김 소위 손에 죽고 싶다고요.”
세화는 엄격한 얼굴로 기태정이 앉아 있던 쪽의 소파를 향해 턱짓했다.
“쿠션 뒤에 보면 숨겨 둔 물건이 있어요.”
“…….”
“꺼내서, 드세요.”
살면서 들어 본 것 중 가장 무해하고 부드러운 협박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상냥하기까지 했으나, 그 어떤 것보다 파괴력이 있는 한 방이었다.
기태정은 자신의 안에서 뭔가가 부서진 것 같아, 가슴께를 툭 두드려 보았다. 나랑 있느니 차라리 김 소위 손에 죽겠다고…. 그 말을 곱씹을수록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훅 올라왔다.
“찾아서 드시라고 했어요.”
어쩐지 조금 멍해져서, 기태정은 세화가 지시하는 대로 쿠션 뒤에 손을 밀어 넣었다. 크게 훑자 손끝에 자그마한 유리병이 걸렸다. 앰풀과 비슷하게 생긴 시약병 속에는, 세화가 쥐고 있는 주사기 속 찰랑거리는 액체와 똑같은 색의 약물이 담겨 있었다.
“…이세화.”
“…….”
“이거,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약물 같은데.”
“…….”
“그런데 나더러 먹으라고, 이걸.”
“…네.”
“이게 얼마나 독한 수면제만 골라 배합한 건지 방금 네 입으로 떠들어 놓고서….”
“……”
“먹으라고?”
물론 먹어도 죽진 않을 거다. 괜히 기태정이 전장에서 불사신 취급을 받는 게 아니었다. 세화처럼 조금이나마 인과가 유추되는 체질까진 아니었어도, 어쨌든 저 자신을 비롯한 군부 사람들 모두에겐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기태정 저 새끼는 죽여도, 절대로 안 죽는다는.
게다가 원래도 수면제는 종류를 불문하고 잘 안 받았다. 이 정도 양을 한 번에 삼켜 본 적은 없었지만, 이미 시중에 나온 모든 종류는 한계 이상으로 시도해 봤다. 어릴 땐 그렇게라도 잠들고 싶어서였고, 어른이 된 이후론 언제나 타인의 표적이었던 탓이다.
그러니 저걸 들이켠다고 한들 잠깐 잠들 순 있어도, 죽진 않을 거다. 그러나….
“…날 죽이고 싶었어?”
이 약을 건넨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세화라는 게 좀처럼 믿기질 않았다.
“그랬으면 독극물을 골랐어야지, 이런 수면제 따위가 아니라.”
“…….”
“독약을 들이부어도 과연 죽기는 할지, 나조차도 모르겠는데.”
세화는 평온한 낯으로,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는 기태정을 빤히 정시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보며 움츠러들지도, 제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그저 덤덤히 주삿바늘을 팔 어딘가에 조준하고 있을 뿐이다.
“알아요.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괴물이라고.”
“…뭐?”
“…그래서, 안 죽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괴물?
이세화가 나한테?
“너, 지금….”
괴물. 사실 그 말 자체는 기태정에게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단어를 굳이 입에 올리며 미미하게 찌푸리는 세화의 얼굴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숨기질 못하는 그 괴로움에서… 더없이 진정성이 느껴졌다.
본인의 기질에는 영 맞지 않아 힘겨워하면서도, 세화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고, 떠나고 싶어 하고… 그러다 못해 제가 죽길 바라고 있는 거였다.
어느 순간부터 세화와의 관계는 역학의 논리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주고받는 말의 묵직함은 포장된 언어의 형태가 아닌, 마음의 무게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을 땐 코웃음만 나왔던 괴물이라는 욕이, 그 유치한 힐난이… 세화의 입에서 쏟아지자, 그 어떠한 무기보다 대단한 살상력을 머금고서 기태정을 부수려고 들었다.
“아아… 그래.”
기태정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졌다. 이세화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굳이 치장했던 거였지, 평소에도 정모는 굳이 챙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도 의외긴 하네. 그렇게까지 꼴도 보기 싫은 거면서, 약간의 여지라도 주는 게.”
“…….”
“나였으면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약을 골랐을 텐데.”
이젠 모르겠다. 속이 엉망으로 으깨져 지금 이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맛본 달콤함에 취해서, 들떠서, 열병에라도 걸린 듯 평소 같지 않게 등신처럼 굴었다는 분노가. 그냥 콱 뒈져 버리라는 말이나 듣고 있으면서도 함부로 그를 붙들 수 없는 미련함이. 그리고 어쩌면 이런 식으로 이세화가 모든 일을 알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허망한 자책감이….
한데 엉켜 기태정을 기태정으로 있을 수 없게 했다.
“누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 것도… 그럴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예요.”
“…….”
“습관처럼 사람 치워 대던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말 그대로였다. 세화는 하나도 통쾌하지 않았다. 즐겁지도 않았다.
멋있는 복수 같은 거, 바란 적도 없었지만 하나도 필요 없으니 그저 빨리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 와중에도 그에게 변명할 기회는 주자고, 깊은 곳에서 속살대는 미련한 마음이 끔찍하고 한심했다.
주삿바늘이 팔뚝 이곳저곳을 쿡쿡 찔러 대서 따끔거렸다. 아직 피가 흐르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 무슨 일이 생긴 데도 한 방에 찔러 넣기 어려울 것 같은데….
무엇보다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기태정 또한, 자신이 그렇게까지 침착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꼴사납게 덜덜 떠는 꼴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발아래가 꺼질 것만 같은 침묵이 한참이나 계속됐다. 굳게 버티던 세화는 결국 견디다 못해, 밀려드는 어지러움을 이겨 내려 짧게 도리질을 쳤다.
그리고 그때, 드디어 기태정이 움직였다.
뚜껑을 열어젖히는 손길이 거칠었다. 기태정은 뺨까지 튄 약간의 약물을 엄지로 쓸어 냈다. 물기가 맺힌 자신의 손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더는 가타부타 말을 보태지 않고 단숨에 입 안으로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 모조리.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세화는 주사기를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다행… 인 건가?
사흘이나 마음 졸였던 것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 청승을 떨면서 그에게 구질구질하게 하소연할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당신을 어떤 각오로 좋아했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나 비참해졌는지…. 속을 전부 꺼내 보이고선 추잡하게 엉엉 울 줄 알았는데.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빈 병이 바닥 어딘가로, 저 멀리 굴러갔다. 작은 유리병이 벽에 톡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사무실 안을 울렸다.
“아, 씨발….”
기태정은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전신에 도는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이겨내 보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태산 같았던 남자의 단단한 몸이 천천히 소파 위로 허물어졌다. 가름하게 뜬 그림 같은 눈에선 불쾌한 나른함이 묻어났다. 다행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지도 않는 걸 보니, 이대로 평온하게 잠들지 않을까 싶었다.
세화는 무너지려는 몸을 견디려는 듯 팔걸이를 세게 쥐고 있는 기태정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보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핏줄이 툭 불거지는 그의 손을, 팔뚝까지 잘게 쪼개진 그 능선을 보면 언제나 설렜다. 안 좋아했던 곳이 없었으나, 기태정의 눈과 손을, 특히나 좋아했다.
“그래도 언제까지라고 장담할 순 없으니까 이건 제가 가지고 갈게요.”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내며, 세화는 텅 빈 자리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리고 저 같은 하찮은 것에게 허무하게 모든 걸 강탈당하는 중인 남자의 손에, 변변치 않지만 미리 써 두었던 메모를 쥐여 주었다. 사용한 약물과 배합의 농도, 해독에 효과가 있을 약물 등을 자세히 적어 둔 것이었다.
“…세화야.”
시계를 잡아 빼다 말고, 세화는 습격처럼 불린 자신의 이름에 잠시 그대로 멈춰 버렸다. 처음… 이었다. 기태정이 저를 이런 식으로 부른 것은.
“너 어차피 금방 나한테 잡혀.”
“…….”
“내가 순순히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
기태정의 감은 눈가가 움찔 떨렸다. 산맥처럼 자리한 전신의 근육이 움찔 일어서고, 드넓은 어깨가 느리게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나 안 죽을 거고, 심지어 오래 잠들 것 같지도 않고…, 그럼 무슨 수를 써서든 너 다시 찾아.”
“…….”
“김 소위 그 새끼와 마주칠 틈도 없이, 아마도 네 예상보다도 빨리.”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기태정이 감고 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드러난 남자의 동공엔… 불길이, 그 말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깊고 짙은 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갈래?”
이건 반대로, 기태정이 건네는 정중한 협박이었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일을 벌이지 않아도, 어쩌면 시간이 좀 걸려도 차분하게 풀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식으로 도망치지 마. 이렇게 끝내고 가 버리면 너랑 나 다시는 예전으로 못 돌아가.
“…말씀드렸잖아요, 김 소위 손에 죽고 말겠다고.”
“…….”
“싫어요.”
아…. 기태정은 길게 탄식하며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서서히 뒤로 고개가 꺾이고, 우아한 조각상 같은 턱과 목울대가 부드럽게 능선을 그리며 움찔거렸다.
“…그래, 그럼 어디 좆대로 해 봐.”
“…….”
“그런데, 너.”
가물가물한 눈을 둥글게 휘며, 기태정이 웃었다. 뼛속까지 서늘함이 올라올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다시 잡히면, 그땐 앞으로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다닐 일 없을 줄 알아.”
그러니까 죽을 각오로 도망쳐.
네 말대로 차라리 김 소위 손에 죽더라도, 나한테 들키지 말고서 끝까지 잘 숨어 있어.
“…마음대로 하세요. 모가지를 꺾든, 발목을 분지르든.”
남자의 살벌한 경고를 튕겨내며 세화는 손목시계와 주사기를 양손에 쥔 채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가방 안에 든 것은 백만 원도 안 되는 현금과 포트 배지 몇 개, 그리고 여벌의 속옷과 약간의 옷가지가 전부였다. 이것만으로… 3주를 버텨야 한다. 오선란과 연락이 닿을 때까지.
“그런데요, 준장님.”
그렇게 기태정을 버리고 돌아서기 직전. 막막한 앞으로의 일은 잠시 미뤄 두고서, 세화는 떨리는 손을 그에게 뻗었다.
“저만큼은 아니었어도, 완전한 애정까진 아니었더라도….”
“…….”
“준장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나한테 마음 있었던 거… 알아요.”
그림처럼 불거진 기태정의 눈썹뼈를 더듬어 보고, 부드럽게 눈썹을 쓸어 보기도 했다. 마지막이었다. 마침내 체온이 높아진 그의 뺨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으면서, 세화는 울면서 웃었다. 흐려진 기태정의 동공 속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그간 붙였던 정마저 다 떨어질 것 같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저 못나기만 했다.
“나중에 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시면… 그 사람한테는 저한테 굴었던 것처럼 모질게 굴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