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89)화 (8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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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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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6

    기태정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곧장 세화를 부르려고 했다. 잘 쉬었냐고, 몸은 좀 어떠냐고…, 뭐 그런 상투적인 말이라도 건넬 생각이었다. 울고 있을 게 뻔하니까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얼러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달싹이던 입술은 좀처럼 열리질 않았다. 세화야. 부관들 앞에선 여태 잘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정작 당사자 앞에선 아무런 문장도 뽑아낼 수 없었다. 자기야, 그런 낯뜨거운 호칭으로 부르는 건 오히려 쉬웠다. 놀리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세화가 벙커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름 대신 자기라는 호칭을 골랐었는지, 그리고 이후론 어떤 결심을 하고서 이름을 불러 줄 수 없겠느냐 물었던 건지 이제는 너무나 잘 알아서…. 인제 와서 친근하게 성까지 떼고서 세화야, 하고 부르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기태정은 마른 얼굴만 연신 쓸었다. 씨발. 타이밍 한번 좆같다. 왜 하필 지금 일이 터졌을까. 더는 울리고 싶지 않다고, 가능한 한 세화를 곁에 두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재판 다 끝나면 전부 설명해 주겠다던 말은 진심이었다. 당장은 아니었어도 조만간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했다. 계속 함께 있으려면, 데리고 놀다 대충 치울 게 아니라 그에게 말했던 대로 책임을 지려면. 언제까지고 속일 순 없을 테니까.

    어차피 질리면 끝일 텐데, 여태누굴 끼고 살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변덕이겠지, 그런데 굳이 사실대로 말해 줘서 일 복잡하게 만들 필요 있나, 그럼 아무것도 모르게 하면 되잖아.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거짓말이었다.

    처음엔 세화에 대해 가볍게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꽤 이전부터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지점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땐 저조차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 몰랐다. 그래서 몰아세우고, 가끔 놀리고, 자주 울렸던 거다.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찾아보자면 그랬다.

    사실 이미 잘 알고 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를 짧게 줄이면 미안하다, 그 한 마디만 남는다는 걸.

    기태정은 초조함을 감추려 괜히 정복 모자만 벗었다 쓰며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그간 세화를 속여 온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자니 그 자체로 또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대뜸 미안하다는 말만 던지려니 너무 성의 없어 보일 것 같았다.

    그제야 실감한다. 이건 수복이 가능한 전투 같은 게 아니다. 빼앗긴 만큼 갚아 주고, 착오가 있었다면 보상책을 논의하면 되는 싸움이 아니었다. 세화와 나눈 감정은 그런 것보다는 개개인의 목숨에 가까웠다. 한번 시들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것.

    “나 왔어.”

    시끄러운 속을 꾹꾹 누르며, 고르다 고른 첫 마디는 기태정조차 탄식이 터질 정도로 뻣뻣하고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세화.”

    세화는 소파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분명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이쪽은 돌아보지 않는다. 삐죽 솟은 동그란 뒤통수는 귀여웠지만 처연했고, 또 어쩐지 사람을 아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기태정은 문득, 세화가 자신의 품 안에서만 편안히 숨을 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이상하게도 긴장이 좀 풀렸다. 세화의 살냄새가 가득하다고, 코가 아니라 머리로 인식을 하자마자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6시도 안 됐고 여름이라 이젠 해도 제법 길어졌는데, 하우스는 여전히 어두침침했다. 4환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곳은 유독 해가 들지 않는 편이었다.

    하나도 불을 켜지 않은 사무실 안으로 벌겋고 새카만 낙조가 드리워졌다. 소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길게 늘어진 기태정의 그림자가 동그랗게 뭉쳐 흐르는 세화의 그림자를 칼처럼 들쑤셔 댔다.

    “…몸은 좀 어때.”

    뾰족한 것으로 잔뜩 헤집어 놓은 것 같은 낯의 세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기태정은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세화는 고개만 들었을 뿐 시선은 여전히 비낀 채였다. 내리깐 눈매가 온통 붉은 걸 보니, 들여다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계속 울었던 모양이다.

    돌이켜 보면 삐걱거렸던 순간은 몇 번이고 있었다. 세화를 울린 건 언제나 저였다. 혀에 칼날을 두른 채 그의 마음을 서걱서걱 썰어 댔다. 상처받을 걸 알면서, 아니 그러라고 일부러 못된 말만 골라 퍼부었다.

    그런데도 세화는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잔뜩 졸아붙어 제 눈치를 보면서도 조잘대며 실없는 소리나 늘어놓거나. 혹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을 바랐다. 그리고 그 끝에 쥐게 된 것은 이전보다 더 커진 애정이었다.

    그랬던 세화가 정물처럼 저를 대하니, 안 그래도 갈피를 잡지 못하던 기태정은 더더욱 입을 열기 어려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 몸처럼 메고 다니던 가방이 그의 옆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래도 함께 돌아갈 생각이긴 하구나. 그와 동시에 이기적인 뿌듯함도 슬쩍 피어났다. 그래, 이세화는 나를 좋아해. 그래도 결국은, 나를 좋아해.

    기태정은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몇 번 헛기침했다. 발치에 떨어진 가운을 보고 아는 척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모르는 척 넘기기로 했다.

    그러다 불현듯 세화에게 처음으로 외출을 허락했던 날을 떠올렸다. 3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는, 손목에 비닐봉지를 덜렁 끼우고선, 애타게 저만 찾으며 어둠 속을 더듬던 어린 얼굴. 검사라는 명목으로 걸친 옷을 벗게 하고서 한참을 탐했던, 그야말로 내 것 같은 하얀 몸.

    또 언젠가는 이곳에서 손 사장 때문에 서러워하는 세화를 안고 달래 준 적도 있었고. 나란히 마주 앉아 특수 분장을 하기도 했고, 섹스보다 더 잘한다는 ‘그 짓’이 궁금해서 세화에게 손님들 상대하는 모습을 재현해 보라고 한 적도 있었다.

    고작 소파 하나에도 꽤 많은 기억이 쌓여 있다. 문제는 이걸 추억이라고 부를 순 없을 것 같다는 거지만….

    기태정은 묵직한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 않은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전보다 잘해 주면 된다. 잘 달래 주면 될 거다. 어차피 세화도 자신이 이런 인간이라는 걸 모르고서 좋아한 게 아닐 테니까.

    “…일단 가면서 얘기할까.”

    “…….”

    “나한테 묻고 싶은 게 있을 것 같은데.”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세화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불길하게 일렁이는 불빛을 등지고서 빤히 기태정을 바라보던 그는 허, 하고 찬웃음을 흘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세화가 이내 목을 툭 떨구었다. 이마를 무릎에 대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웅크리고 있던 몸을 곧게 폈다. 그야말로 곧게. 직시하는 시선에선 알 수 없는 결의마저 느껴졌다.

    “뭘 굳이 떠보세요? 제가 뭘 알게 됐는지 이미 다 짐작하신 것 같은데.”

    “…잘은 몰라, 네가 어디서 무슨 얘길 들었는지.”

    “…….”

    “뜬금없는 걸 묻길래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고… 김 소위가 심은 의사에게든, 오선란에게든… 뭔가 충격적인 얘길 들었으니까 쓰러지기까지 했구나, 그렇게 짐작했을 뿐이야. 그리고 나는,”

    “준장님은….”

    듣기 싫다는 듯 말을 툭 자르고서, 세화는 어금니로 입술을 삐딱하게 짓씹었다.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세화는 며칠 전에도 이 옷을 입고 있었다. 국방부의 의무실에서 하우스까지 내쫓기는 사람처럼 도망쳐 온 그날 걸치고 있던 차림새 그대로였다. 분명 사람을 시켜 갈아입을 옷이며 이것저것 챙겨 보냈는데 손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 있는 동안은 가운만 걸치고 있었으니 굳이 새것을 찾을 이유가 없었겠지.

    그렇지만 며칠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세화를 보고 있자니,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균열이 생기기 이전의 여느 날 같아서, 무엇이든 돌이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꾸만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전부예요?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그렇지만 세화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잘게 떨고 있었다. 아니, 달았던 꿈에서 깨어나 이제야 지옥 같은 현실을 마주한 사람처럼 보였다.

    “…설명할 생각이었어, 전부 다. 그런데 지금 네 상태가,”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죠. 아이 같은 거 원하지도 않는다고.”

    “…….”

    “알았더라면 신경 써서 피임했을 거라고, 정말 몰랐다고.”

    듣고 싶지 않은 듯 기태정의 말을 자르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당연히 그 말 안 믿었어요. 뭔가 있을 거라고… 그래, 처음엔 몰랐더라도 나중에 눈치챈 걸 거라고 생각했어. 실컷 안에 싸 놓고 즐기다가, 나중에 되어서야 당신도 내 몸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그렇게…. 그래도 덧붙이는 변명은 진심처럼 보여서, 아… 재수 없게 일이 꼬였나 보다, 하고….”

    “…….”

    “…그런데 이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그런 수준이 아니잖아.”

    울음을 참는지 턱 끝이 파르르 떨렸다. 세화가 질끈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감쳐물었던 입술 안쪽 살이 허옇게 질려 튕겨 나올 때마다, 그가 품고 있었던 감정이 우수수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래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어요…?”

    기태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서 그 서글픈 몰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계까지 끓다가 서서히 식기 시작한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관조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도 없었다.

    “재밌으셨어요? 속으로 무슨 취급 받는지도 모르고서, 당신 좋아한다고 말했던 나 볼 때마다….”

    뭐 저런 등신 같은 게 다 있나 싶었겠지, 하면서 결국 세화는 울었다.

    “그런 게 아니야.”

    “…….”

    “이세화,”

    “내가… 어떤 심정으로….”

    “…….”

    “무슨 결심을 하고서 당신을 좋아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당신은 몰라.”

    모르지. 알, 리가, 없, 지. 그딴 거, 알고 싶, 지도 않았, 겠지. 삼키는 울음에 묻혀 서러운 말이 드문드문 끊어졌다. 세화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할딱이는 숨을 골랐다. 짧은 시간 동안 그새 더 말랐는지, 전보다 헐렁해진 소맷부리가 팔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더는 어떠한 계산도 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입이 벌어졌다.

    미안해. 세화야, 미안해.

    차마 꺼내지 못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던 말이 절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내내 열심히 생각해 봤어요. 당신한테도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어서.”

    그러나 잔뜩 열이 오른 세화는, 더는 기태정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 소용 없겠더라고요. 난 돈도 없고, 힘도 없고, 머리도 나쁘고… 가진 게 하나도 없으니까….”

    세화는 자신의 텅 빈 손을 바라보다, 기태정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음울한 눈길이 가슴에 달린 계급장을 훑고 갔다.

    “게다가 당신은 날 사람이 아니라 소중한 증거물 정도로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받은 것과 똑같은 상처를 줄 수 있겠어요.”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미안하다고, 미안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악을 쓰듯 부정하고 말았다.

    “씨발, 내가….”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점점 차게 식어 가는 세화의 시선을 더는 받아 내기 어려웠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덤덤한 그의 표정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 것 같아서. 무엇이든 들어 주자고, 천천히 풀어 나가자고 다짐해 놓고선, 초조함에 소리부터 지르고 말았다.

    “처음엔 널 대단치 않게 여겼던 거 맞아, 수단으로 여겼던 것도, 사람 취급 안 했던 것도 다 맞아. 하지만….”

    “…….”

    “이젠 아니라는 거 알잖아.”

    “…….”

    “예전과 비교하면 나 많이 달라진 거, 이제 너한테 함부로 굴지 않는다는 거.”

    “…….”

    “…너도 알잖아.”

    쥐어짠 초라한 고백에, 세화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 짧은 순간마다 필름을 갈아 끼우듯 다채로운 색이 서글픈 동공을 스쳐 가고…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텅 빈 검은색이었다.

    “…아뇨, 모르겠어요.”

    세화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렸다.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아요.”

    드러난 마른 팔뚝엔 패치가 몇 줄이나 둘둘 감겨 있었다. 꼭 오래된 주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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