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88)화 (88/144)
  • #085

    세화는 물침대가 놓인 작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여기보다 기태정의 침실이 더 싫었다. 그와 질펀하게 뒹굴었던 거실 소파도 끔찍하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맨바닥에서 자는 건 저만 손해였다. 잘 쉬어야 내일 움직일 수 있을 거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가구의 형상을 한 것에 몸을 뉘는 쪽을 택한 건데… 오직 쾌락에만 집중한 매트리스의 출렁임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쾌하고 천박해서,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천장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화는, 문득 여기서 기태정과 처음 관계했던 때가 떠올라 차게 웃었다.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그의 손길에 알아서 젖어 드는 뒷구멍이 이상해서, 그를 붙들고 끙끙 앓으며 물었다. 어제 먹은 최음제가 아직도 효과를 보이는 게 맞는 거냐, 원래 패치가 이런 물건인 거냐… 아마도 그렇게.

    그때 기태정이 뭐라고 답했더라? 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쳐 줬던 것 같다. 굳이 인상에 남을 정도로 강렬한 반응은 아니었던 터라, 이젠 세화도 기억이 희미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성의 없는 대꾸가 아닐 수 없다. 남이야 당황하든 말든, 당장 따먹고 싶으니 대충 얼러 줬던 것에 불과했다.

    하긴…. 공들여서 달래 줄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랬던 거겠지.저에게 솔직하고 진지했던 순간이 있기는 했을까. 단 한 번이어도 좋으니까.

    눈길로 싸구려 합지의 무늬를 따라 그리던 세화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기 싫어 악을 쓰듯 그리 굴었던 건데, 시뻘겋고 시퍼런 시신경이 눈꺼풀 뒤로 널을 뛰듯 흔들렸다.그 끝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잔상은 또 언젠가의 기태정이다.

    세화는 옆으로 누워 몸을 작게 말았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열심히 좋아해 보자고, 그저 빛으로 부풀었던 때엔 전부 견딜 만했던 일들이… 지금은 왜 이리도 서러운 건지 모르겠다.

    하나하나 되짚자면 끝도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를 향해 무작정 내던졌던 마음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홀로 품었던 연정은 스스로를 향한 비소가 되고 조롱이 되어 이미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뾰족한 모서리로 퍽퍽 내리쳤다.

    겨우 손에 넣고 기뻐했던 건,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던 건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구역 밖의 봄 같은 게 아니었다. 어느 계절에도 영영 녹지 않을, 지워지지 않을 만년설 같은 상흔만 남아 버렸다.

    ***

    “있어 봐. 내가 나가서 시간 좀 끌어 볼 테니까.”

    장물아비가 현관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군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괄괄한 목소리를 들으며, 세화는 핸드폰 화면 속 낯선 번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 명성이 괜히 생긴 게 아닌 듯, 장물아비는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서 해가 뜨자마자 세화를 찾아왔다. 핑계에 불과했던 주사기 같은 물건들도 전부 최상급으로 갖춰 왔다.

    약물 포장 끝에 새겨진 암호 같은 낙인을 손으로 더듬어 보며,세화는 아직 남은 배지의 개수를 다시 한번 헤아렸다. 오선란이 눈치껏 좋게 말을 해 준 것도 있겠지만, 배지가 확실히 대단한 물건이긴 한 것 같았다.그러니 이렇게 빨리, 좋은 것들로 가져다준 거겠지.

    그렇다면 앞으론 더더욱 신중히 사용해야 할 거다. 저 또한 장물아비가 알려 주고 나서야 쓰임을 알았을 정도로 흔치 않은 것이다. 배지를 현금 대신 쓸 순 없으니 반드시 사람을 거쳐야 할 텐데, 귀하고 가치 있는 매물이 나왔으니 금세 여기저기로 말이 새어 나갈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 배지는 2환으로 숨어들 때 떼어 주는 것 말고는,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병원으로 가든 야매 돌팔이를 찾든 오직 그 한 번을 위해 아껴 두어야 할 것 같다. 여러모로 들키기 딱 좋게 생겼으니까….

    - 세화니?

    멍하니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데, 통화 연결음이 돌연 부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기계음에 깜짝 놀라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려고 하자, 전화 너머로 오선란이 다급하게 외쳤다.

    - 세화야, 나다.

    “…오선란 대장님?”

    - 이상한 소리 들려서 놀랐지? 미안하다. 전파 방해 신호를 쏘느라 조금 늦었어. 이젠 편히 말해도 괜찮아, 대신 긴 통화는 어려울 것 같구나.

    세화는 흘끔 현관 쪽을 살펴보았다. 장물아비는 여전히 밖에 선 군인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가져올 물건이 아직 남았는데 사람 더 못 들이냐, 그럼 너희 중 몇 명이라도 나와 함께 움직여 줘야 한다… 뭐 그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저도 마찬가지니 길게 말씀 안 드릴게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 세화야.

    “오늘 저녁 8시부터 전국의 포트와 검문소 일대 CCTV를 한 시간… 아니 30분만이라도 마비시켜 주세요. 어려우시겠지만 이 이후로 대장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절대없을 겁니다.”

    - 세화 너, 설마….

    “아마 대장님께도 손해는 아닐 겁니다. 어쨌든 가장 완벽한 증거라는 제가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재판 진행에도 분명 차질이,”

    -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다른 구역에 연고 하나 없는 거 뻔히 다 아는데, 홑몸도 아닌 애가 CCTV까지 먹통으로 만들고선 대체 어디로 가겠다고!

    “…….”

    - 당장 사람 보낼 테니까, 여기로 오거라.

    오선란은 어디로 숨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자기 관사에서 머무르라고 했다. 아니, 호소했다. 화도 나고 걱정도 되는데, 그래도 저에게 겁을 줄 순 없으니 애써 꾹꾹 참는 기색이 느껴졌다.

    “대장님.”

    - 불편하다면 차라리 내가 나가서 지낼 테니까,

    “아뇨, 그러실 것 없어요.”

    고마운 일이었다. 저라면 아무리 친한 친구의 아들이어도, 심지어 피 검사 같은 걸 해 보지도 않았으니 핏줄이 확실한지 알 수도 없는 사람을 이리 절절하게 챙겨 주진 못할 것 같은데.

    “죄송한데, 저 이제 아무도 안 믿어요.”

    - …세화, 야.

    문제는, 이젠 누구에게 그 무엇을 들어도 진심처럼 느껴지질 않게 된 자신의 마음이었다.

    “어차피 금방 붙잡히게 될 거 저도알아요. 다 아는데…, 재판 시작되는 그 시점에선 그 누구도 저를 히든카드 같은 걸론 못 쓰게 하고 싶어요. 그게 전부예요.”

    원래 첫 끗발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 처음부터 들이밀 수 없게 된 변수가 많은 패를, 시일이 지난 후에 어떻게 믿고 내밀 수 있단 말인가. 모두에게 가치 없는 수단이 되는 것.그거면 충분했다.

    - 너마저 너를 그렇게 도구처럼 써 버리면…. 5성의 가장 좋은 병원에서 신경 써서 돌봐 줘도 어려운 체질인데… 네 몸은, 그리고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아직 모르겠어요. 그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어요.”

    핸드폰 너머로 작은 소란이 느껴졌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없는 모양이었다. 오선란은 세화의 이름만 몇 번 되뇌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늘어놓았다.

    - 30분 정돈 그리 어려운 일 아니다. 한 시간도… 노력은 해 보마. 다만, 이 이후론 내가 널 도울 길이 없어.

    그야 당연하다. 전국의 모든 포트와 검문소를 마비시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기태정이든 김 소위든 당연히 오선란부터 의심할 거고, 앞으론 눈 부릅뜨고서 그의 움직임만 주시할 거다.

    몸집이 크면 그만큼이나 이목을 끌기 쉽다. 대장이라는 계급은 오선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럴 땐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 대신 3주 후에 만나기로 하자. 그때까진 너 하는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마. 내가 어설프게 굴었다가 놈들이 따라붙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 기태정과 김석철이 곤란해지는 꼴 보고 싶었던 거라면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해. 내가 직접 나서서 널 돕는 것만큼 그 새끼들 꼴 우습게 만드는 것도 없고.

    세화야, 제발. 누군가가 절박하게 불러 주는 자신의 이름이 낯설어서, 세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 너까지 잘못되면 내가 진우를… 죽어서도 네 아빠를 볼 면목이 없다. 그러니 제발….

    “…생각, 해 볼게요.”

    오선란은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짧게 한숨을 내쉬며 접선 장소 몇 개를 골라 주었다. 2환 지리에 훤한 세화 또한 잘 아는 곳들이었다.

    - 10분이 지나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그리고 처음 불러 준 장소에서부터 시계 정방향으로 이동하고, 옮긴 곳에서도 아무도 보이지 않으면 다음 날 다시 오는 것으로 하자. 나 또한 그렇게 하마.

    정말 끝의 끝인지, 그의 수하가 뭐라 재촉하는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 그리고 장물아비 쪽으로 현금을….

    뭐라 다급하게 말을 덧붙이려던 오선란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기계음에 묻혀 그대로 끊겨 버렸다. 방해 신호인지 뭔지가 끊어진 모양이었다. 장물아비 또한 더는 핑계 댈 것이 없는지, 이쪽으로 터덜터덜 돌아오고 있었다.

    “얘기는 잘 됐어?”

    세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돌려줬다. 녹음 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으나, 지금 그런 것까지 따져 물을 처지는 아니었다. 혹시라도 장물아비의 기분이 상하면 저만 손해였다. 오선란 대장이 저에게 각별하게 구는 내용이 전부였으니, 나중에 녹취록을 듣는다고 한들 앞으로 저에게 잘하면 잘했지, 왜 속였냐며 날뛸 것 같진 않기도 했고.

    “2환에 있는 유명한 밀수꾼 알아? 금동이라고.”

    “알아요.”

    “마침 걔한테 보낼 물건이 있거든. 그 컨테이너 안에 널 숨겨 줄 순 있어. 위로 가는 거면 몰라도 아래로 가는 거야 검문소에 돈 좀 먹이면 될 것 같으니까… 대신 사람 하나 숨기는 건 금액이 좀 세.”

    “네.2환 넘어가고 나면 급사 쪽으로 배지 전해 드릴게요.”

    “에이,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 다른 법인데. 2환 넘어가고 나서 네가 안 준다고 우기면 끝이잖아. 지금 계산 끝내야지.”

    “오선란 대장님이 선금 다 줬다고 하시던데요?”

    “그, 그거야….”

    장물아비는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그냥 찔러본 말이었는데 정말 오선란에게 뭘 받긴 한 모양이다. 역시 믿을 사람 아무도 없어. 이모도 저한테 되게 잘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밑지는 게 많은 세화는 이번에도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저녁 8시까진 무조건 4환 떠야 해요.”

    “그, 그럼 최소한 6시 20분까진 매점으로 와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구라치는 게 아니고 밖에 타일 하나 건너 한 놈씩 지키고 서 있어. 심지어 무장한 군인들이.”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이모는 손전등이나 미리 준비해 두세요.”

    “손전등? 그건 또 왜… 아냐, 지금 그런 걸 물어봤자 뭐 하겠냐. 알겠어.”

    기태정에게 놔달라는 협박이 통하면, 두꺼비집과 통신망부터 다 부숴 놓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가 유용하게 쓰는 최첨단 장비들은 모두 전기가 있어야 움직인다. 물론 비상시 수단이 당연히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그를 불편하게 만들려면 전선부터 다 끊어 놔야 할 것 같았다.

    “네. 이 건물 불 다 꺼지고 통신도 완전 먹통 되면, 곧 저 온다는 신호인 줄 아세요.”

    세화는눈을 감고서도 이 건물 안,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전부 다 짚어 낼 수 있었다. 손님을 빼돌리려고, 맞기 싫어서 도망가려고, 몰래 숨어서 끼니라도 때우려고 매일같이 쥐새끼처럼 숨어 다녔던 탓에, 애쓰지 않아도 몸과 발이 알아서 움직였다.

    군사 시설을 다 때려 부수고, 자동차를 타고 바다 위를 날았을 때 기태정이 그랬다. 하늘 위에선 자기가 무적이라고. 유감스럽게도 이 하우스는, 개미굴 같은 수직 도시는 그 하늘의 끝에 선 곳이었다. 그리고 전깃불마저 들지 않는 컴컴한 시궁창에선 쥐새끼가 왕인 법이었다.

    ***

    헬기에서 내린 기태정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챙겨 온 향수를 뿌리고 손목을 코 가까이 가져다 대 봤지만, 딱히 특별한 걸 느낄 수 없었다. 향수 냄새가 거기서 거기일 텐데 세화가 자신의 체향에서만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저를 꼴도 보기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며칠 만에 만나는 거였다. 그간 불편한 침대 위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테니, 일단은 제 품 안에서 숨이라도 편히 쉬었으면 했다. 얘기야 관사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참, 말씀하셨던 장부입니다.”

    박 소위가 서류 가방 안에서 낡은 노트를 꺼내 건넸다.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덕지덕지 감아 꼭 누더기 같은 표지 위로 세화의 이름이 여러 개 적혀 있었다. 계약 조건이 바뀔 때마다 새로 쓴 모양이다.

    가장 위에 적힌, 아마도 처음 채무를 승계받았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적었을 이름은… 글씨라기보다 상형 문자를 따라 그린 것만 같았다. 삐뚤빼뚤한 필체는 아래로 갈수록 점점 반듯해졌다.채무 장부의 표지만으로도 세화의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손 사장이 준장님을 뵙겠다며 난동을 피우고 있다고 합니다.”

    기태정이 ‘청소’를 했던 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손 사장은 사장실에 감금당한 상태였다. 감시를 두엇 붙여 두긴 했어도 열과 성을 다해 들여다보진 않았다.

    어차피 그 새끼는 도망칠 수 없다. 괜히 눈칫밥 먹으며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게 아니라,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김석철이 아니라 자신의 편에 붙어 있어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중이라는 걸.

    “그 120억, 세화한테 갔다는 거 아직 모르나?”

    “예.”

    “그럼 슬슬 다 알려 줘. 충격받으면 입 좀 닥치고 있겠지. 그리고 관사로 돌아가기 전에 이거 태워 버릴 거니까, 준비 좀 해 놔.”

    “준비라고 하심은….”

    “왜, 처음 세화 만났던 창고에 있었던 드럼통 같은 거 있잖아. 그 안에 쑤셔 넣고 다 태워 버리게.”

    “아아…, 예. 알겠습니다.”

    뒤에서 눈치만 보던 최 원사가 쇼핑백 두 개를 슬쩍 건넸다. 세화에게 줄 선물이었다.

    이번엔 체크 카드나 시계, 보석 같은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신발 두 쌍이다. 쇼퍼나 부관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고심해서 직접 골라 본 거였다.

    요사이 세화의 발꿈치는 성할 날이 없었다. 유명하고 비싸고 좋다는 것만 사다가 쫙 깔아 줬는데도, 새 가죽에 쓸린 여린 살은 툭하면 까지고 피가 맺히곤 했다. 그래서 세화는 위에 뭘 걸치든 원래 그의 것이었던 낡은 스니커즈를 신고서 밖으로 나섰다.

    그 바람에 함께 장을 보러 갈 때마다 기태정은 터질 뻔한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새 옷으로 쫙 빼입었는데 신고 있는 신발만 어수룩하고 꼬질꼬질했다. 속으로 그를 재밌어, 아니 귀여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어떻게든 새 신발에 발을 욱여넣고 나올까 봐 여태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이 모델이 5성의 임부들에게 특히 인기라고 들었다. 소재도, 디자인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발이 부어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태정이 마음에 들었던 건 동일한 디자인의 아기 신발이 있다는 거였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그 물건을 보면, 어쩐지 세화가 좋아할 것 같았다.

    기태정은 다소 어색하게 쇼핑백 끈을 쥐고서, 하우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세화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지금은 무슨 생각 중인지, 또 어쩔 수 없이 차게 굳을 분위기를 부드럽게 돌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착오가 생기면 대안을 제시하고, 더 좋은 결과물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그쪽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고, 계급장을 단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다. 아니, 그래야 군부 안에서 살아남았다.

    다만… 세화가 이 일로 인해 저를 원망하고 있다면, 그래서 뭔가 바라는 것이 생겼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널 잃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로 모면하려고 했던 거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거다. 그리고 세화와 아이,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책임지고 싶다고,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태어나 처음으로 고백부터 해 볼 생각이었다. 비록 방법을 모르니 멋이라곤 하나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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