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 …그래서 아는 장물아비 불러서 주사기 좀 구해 달라고 부탁할까 해요. 손에 익은 걸로 하면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해, 그럼. 밥은?”
- 지금은 잘 안 들어가서… 조금 이따가 챙겨 먹을게요. 그냥 누워 있고 싶어서….
기태정은 홀로그램 속, 조악한 물침대 위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이세화를 응시했다. 붙여 준 놈들에게 꼬박꼬박 보고를 받고 있기도 했지만,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직접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지금껏 이세화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수상쩍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하우스로 돌아온 이세화는 자신이 쓰던 작은 방 문간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더니 입은 옷을 힘없이 떨구고는, 욕실로 가서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기태정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세화는 확신이 없었던 거다. 옷을 입어도 좋다는 허락은 관사 안에서 내려온 것이니, 여기에선 어떻게 처신해도 되는 것인지.
어린 것은 이후로 죽은 듯 조그맣게 몸을 말고 있기만 했다. 푸딩처럼 잘게 흔들리는 물침대의 진동을 견디기 어려운 듯 이따금 헛구역질하면서도, 고집스레 그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에 자꾸만 속이 탔다. 칭찬해 줘야 마땅했다. 감시당하는 줄도 모르고 순종적으로 구는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해해야, 귀여워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의지는 전부 거세당한 것처럼 구는 이세화의 그 연약한 우울이, 계속 기태정의 속을 쓰리게 했다.
“…쉬어.”
- 네.
통화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이세화는 털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조종하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후…, 박 소위.”
벽에 붙어 대기 중이던 박 소위가 침을 꿀꺽 삼키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러다 재판 끝나면 국수 먹는 거 아니냐, 준장님 관사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줄 누가 알았겠느냐… 다들 실없이 그런 농담 따먹기나 하던 중이었는데.
어제, 부관들 사이에선 사모님이라 불리는 사람이 더는 버티기 힘들다며 통곡했다. 차라리 4환으로, 심지어 하우스 건물 안에서 나오질 못해도 좋으니 하루라도 거기서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스트레스로 기절했다가, 하혈까지 했다던 사람이 정신이 들자마자 한 소리가 저거였으니… 처음으로 마음이 가는 상대가 생긴 상관의 눈이 돌아가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보고 계속해.”
“아… 예. 당일 이세화 씨를 진찰했다던 그 의사는 4성 출신으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경한 제약의 장학 재단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아 왔다고 합니다.”
“4성 출신이 그 병원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는 건… 경한 제약 측에서 보증을 서 준 건가?”
“예. 입사 시기도 비교적 최근이니,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쓰고 버릴 패였던 것 같습니다.”
경한 제약은 김 소위의 부친인 김 중령이 상당수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로, 그의 사촌이 운영하는 중견 기업이었다.
“붙잡히자마자 울며 자백한 것도 그렇고, 집안 사정이 썩 좋지 않은 것을 미루어 볼 때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협박 혹은 보상에 눈이 멀어 저지른 일로 보입니다. 도주를 시도했던 것도 김 중령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게 아니라, 지레 겁을 먹고 멋대로 일을 저지르려다 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어쨌든, 이세화한텐 전부 말했다고?”
“예. 김 소위가 만든 약 때문에 체질이 변한 거란 얘기는 확실히 했다고 합니다. 주로 이세화 씨의 출신을 트집 잡아 모욕하라는 지시가 있어서, 자세한 설명 없이 저렇게만 말했다고 했습니다.”
이세화가 난데없이 자신의 체질에 관해, 그것도 왜 변한 거냐고 물어본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날 있었던 일을 짚어 보니 오선란보다도 의사 놈의 행적이 영 수상했고, 붙잡아 털어 보자 금세 전말이 밝혀졌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그리고 이세화는 끝까지 의사 놈이고, 오선란이고 자신이 들었던 얘기는 하나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저 시든 풀처럼 시름시름 앓으며 울기만 했다.
“그 새끼, 오선란한테 보내.”
“의사 놈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세화를 자기 아들처럼 여길 거라고 했으니… 이참에 그 말이 얼마나 진심이었던 건지 확인해 볼 수 있겠지.”
화학 실험 대상자와 이세화의 체질이 상당히 유사하긴 했다. 저조차도 서류를 보자마자 아, 이거 이세화의 부모 중 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명확한 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선란이 이 문제로 국가 원수에게 증서까지 받아 두었던 것은 의외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 아이가 이세화라는 것은 장담할 수 없는데도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구는 게 영 수상했다.
“말이 안 되잖아. 그렇게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애를, 유전자 검사 같은 것도 안 하고서 벌써부터 확신하고 싸고도는 게.”
“하긴… 그간의 쇼가 진심이었다면 오선란이 알아서 처리해 주겠네요, 그 의사 놈이요.”
“그리고 그 새낄 어떻게 조져 놓든 김 소위 측과는 영영 끝일 거고.”
만약 의사 놈을 가만히 둔다고 하면, 김 소위 쪽과 짜고 치는 쇼였다는 뜻일 테니, 이 얘길 들려주면 이세화 또한 이후론 오선란과 거리를 두려고 할 것이다.
혹시 오선란이 진심으로 나서 준다면… 뭐, 탐탁진 않더라도 김씨 집안과 연을 끊겠다는 신호로 봐도 무방할 테고. 어느 쪽으로든 기태정에겐 손해가 아니었다.
“오선란의 동선은 물론이고 돈 굴리는 방향, 끌어다 쓰는 통신의 양, 회선 출처, 관사에 사람 나고 드는 거… 전부 파악하고 있어.”
“예.”
기태정은 홀로그램 속 미동도 없는 이세화의 마른 등을 잠시 바라보다, 손목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CCTV에 접근 가능한 사람은 저밖에 없긴 하지만, 남들이 보는 앞에서 이세화의 모습을 오랫동안 노출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사정 다 알고 있는 박 소위일지라도.
어제 이세화에게 너 무슨 소리 듣고 이러는 거냐고 따져 묻지 않은 건… 그가 워낙 서럽게 울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다른 곳도 아닌 4환에서 ‘쉬고 싶다’고 호소한 탓이었다.
하우스를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꾸역꾸역 버텨 왔던 이세화다. 기태정이 벌이는 일에 가담하게 된 것도 김 소위를 대신해 신분을 올려 주기로 해서였다. 물론 제 협박이 두려웠던 것도 있겠지만, 이만큼이나 적극적이 된 건 단순히 공포에서 비롯된 움직임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태정은 평소엔 잘 쓰지도 않던 핸드폰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메시지라도… 남겨 주는 것이 좋을까.
사과를 집으며 환하게 웃던 이세화의 얼굴 위로, 의무실에서 보았던 서러운 울음이 덧입혀졌다.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는 포트에 다다랐을 때도 이세화는 조금도 신기해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침을 꿀꺽 삼키며 데굴데굴 눈을 굴렸을 텐데.
그래서… 지금 어떤 상황인 건지 대충 짐작이 가면서도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는 거였다. 당장이라도 저에게 따져 묻지 못하고 홀로 삭이는 걸 보고 있으려니까… 좀 가여워서. 전부 타올라 재가 된 것 같은 그의 텅 빈 시선이 자꾸 아른거려서.
기태정은 자신의 텅 빈 손을 한참 바라보다 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앞으로도 이세화는 모르게 하면 될 거라 가볍게 여겼던 지난날을 어떻게 봉합하면 좋을지…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일 데리러 갔을 때, 혹시 이세화가 사실대로 알려 달라고 부탁하면… 그땐 더는 속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김 소위가 만든 약이 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네 체질이 뒤틀렸을 수 있겠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고…. 그 정도는 털어놓을 것이다.
“혹시 수상쩍은 기미가 보이면, 증거물 관리 책임자의 권한으로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함부로 접근하는 놈은 누구든 사살해. 그게 오선란일지라도.”
“그… 준장님…, 아닙니다. 명 이행하겠습니다.”
감정의 깊이를 측정하는 방법 같은 건 잘 모르겠다. 살면서 이런 고민을 하는 날이 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세화를 좋아한다, 그 짧은 한마디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속이 좀 메슥거렸다.
그래도 이제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세화를 곁에 두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면 웃었으면 좋겠다. 섹스할 땐 울더라도, 다른 때엔 근심 걱정 없이 환하게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만약 이세화가 자초지종을 묻는다면… 이번엔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오랜 시간 서먹하게 지내야 한대도, 조금은 솔직해질 생각이었다. 한참이나 꼬여 버린 이 실타래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 보고 싶었다.
***
“이야, 여기가 그 대단하신 이사님 사무실이야? 번쩍번쩍하네.”
장물아비가 신기한 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근데 삼월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한참을 안 보여서 사실 너도 쓱싹된 건 줄 알았다, 얘.”
군복 입은 사람들이 와르르 몰려와선 너 보러 가자고 해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며, 장물아비가 과장되게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기태정은 정말로 며칠간의 휴식을 허락해 줬다. 물론 사방에 인력을 촘촘히 배치해 두긴 했지만…. 그래도 스트레스 주지 말라던 나 중위의 권고를 아주 잊진 않았는지, 복도에 징그럽게 쫙 깔린 군인들이 안까지 쳐들어오진 않았다. 지금도 장물아비를 거실까지 데려다주기만 했을 뿐, 곁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감시하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웬 주사기?”
장물아비가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가져온 물건들을 꺼내 놓았다. 세화는 겉봉투와 케이스의 이음새를 손가락으로 훑어 보았다. 역시 뜯어본 흔적이 있었고, 검문을 거친다는 걸 굳이 숨기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모, 잠깐만 핸드폰 좀. 제가 필요한 거 아예 쫙 써 드릴게요.”
“엥? 메모까지? 너 어차피 김 소위 말고 다른 손님은 다 정리했잖….”
고개를 삐죽 내밀고서 얘가 대체 뭘 챙겨 달라고 하려나, 지켜보던 장물아비가 서서히 말끝을 흐렸다.
눈으로만 보고외우세요
바로지울거니까
“…다 정리, 흠, 했잖아?”
“네. 이건 손님용 아니고 제가 쓸 물건이에요.”
인신매매ㅈ쪽브로커들한테 물어보면
오선란대장 연락처 아는사람나올거예요
군인 대장 말하는거맞아요 엄청ㄴ높은사람
“네가 쓴다고? 그…, 근데 너 약 안 하잖아?”
대장님심부름이에요
그분ㄱ게이세화라고 이름대면
이모핸드폰으로 저랑통화하고 싳ㅍ다고할거예요
아마내일
“테스트 좀 해 봐야 해서요.”
이사 눈속이고 해야하는 일이에요
여기서 2환까지 몰래빠져나가야함
“내일 또 자리 비울 건데… 당분간 못 돌아올 것 같아서 물량 충분히 확보해 둬야 할 것 같아요.”
“하, 하긴…. 다른 건 몰라도 약 놓을 때 쓰는 물건은, 흠, 그것도 대량으로 구하는 거라면 내가 제일 빠르긴 하지.”
“그러니까요.”
세화는 임신 사실을 포함해 자세한 사정은 전부 감추기로 했다. 밑지는 것이 많아 보일수록 이용당하기 쉽다. 물론 장물아비 이모는 저에게 무척 잘해 줬다. 떼먹는 것도 별로 없어서 저뿐만 아니라 두루두루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일이 틀어졌다는 인상을 주면, 특히 내빼는 것 같은 기색이 느껴지면 결정적인 순간에 저를 이용하려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소위도 아니고, 대장급 인사의 심부름으로 조용히 움직이는 중이라고 하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해서라도 혹은 두려워서라도 허튼짓은 못 할 거다.
“…삼월아, 너 소위도 아니고 대장이랑 어떻게 얽혀서 이래….”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장물아비가 입술만 달싹이며 물었다.
“김 소위님이 모시는 분이에요. 이따가 브로커 통해서 물어보세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세화 또한 복화술이라도 하듯 작게 대꾸해 주곤,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어때요? 내일 오전까지 가능하실 것 같아요?”
“흐, 흠… 꼭두새벽만 아니면.”
하ㅣ우스매점으로갈테니까
2환으로가는 물류박스 같은거에 저좀 숨겨주세요
지금거기꽉막혀서 물건없어서난리라면서요
약이든화투패든 쓰레기더미든 아ㅜ무데나 괜찬ㅇ하
이후론제가알아서해요
되는대로 세운 계획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장물아비가 그렇게 악독한 사람까진 아니길, 그리고 오선란이 눈치껏 숨은 뜻을 읽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기태정과 거리를 두고 있고, 당신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금으로선 그 외엔 방법이 없었다.
“아, 맞다. 이모, 이거….”
세화는 낡은 가방 안을 뒤적여, 장물아비가 일전에 부탁했던 신약을 꺼냈다.
“너무 늦게 왔죠, 제가. 근데 당분간 신약 테스트는 어려울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린 먹는 약 때문에….”
“아…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시제품이라 아직 거래 확정된 것도 아니었어.”
장물아비는 유독 커다래진 알약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에 손을 봤는지 부자연스러운 물기와 점성이 느껴졌고, 무엇보다 손끝에 걸리는 이 감촉은 분명 금속의 물건이었다.
안에 뭔가를 숨긴 것 같은데…. 약을 손에 넣고 잠시 굴려 보던 장물아비는, 일전에 세화가 가방 안에서 꺼내 보였던 배지를 떠올렸다. 포트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밀수꾼들에게 높은 가격으로 팔리는 자유 이용권을.
“그리고 이거 별건 아닌데요… 이모, 저 밖에서 먹고 싶은 거 있는데 저분들은 말해도 모르더라고요. 내일 오실 때 가게 열었으면 이것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헤스타 알리온 티란정아니면하데스
삼십미리이상
“…아니, 너는 팔자도 폈다더니 왜 이런 싸구려 음식을 찾아.”
세화가 적어 내려간 약은 하나같이 위험한 수면제였다. 중증 약쟁이 중에서도 불면에 시달리는 놈들이 종종 섞어 달라고 주문할 때가 있긴 했지만, 그나마도 극소량이었다. 30밀리그램이면 자살이 목적인 사람들이나 찾는 양이었다.
“그냥… 꼭 먹고 싶어서요. 당분간 여기 못 오니까, 꼭이요.”
세화는 여태 썼던 말을 전부 지우고, 평범한 도구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전혀 당기지도 않는 노점상의 군것질거리도 몇 개 적었다.
“이사님이 내일 저녁쯤 도착하시거든요. 점심 전까지만 와 주세요.”
“알겠어, 구해 볼게.”
“네, 대금은 높으신 분이 알아서 해 주실 거예요. 아주, 잘.”
장물아비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높으신 분이 새로 왔다던 ‘이사님’이 아니라 오선란 대장을 가리킨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곤 망설이지도 않고, 세화가 돌려준 약 중 하나를 꿀꺽 집어삼켰다. 배지 하나를 숨겨 둔 그 알약이었다. 세화는 그제야 이 물건이 가진 가치를 실감했다. 약에 취해 잠시 해롱해롱하더라도, 좀 더러운 방식으로 물건을 배출하게 되더라도, 그래도 장물아비는 이 배지를 무사히 손에 넣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거다.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니, 가진 현금이 적은 세화로선 다행이었다.
가방 속에 남은 배지의 개수를 급히 헤아려 보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이 관련한 일을 해결하긴 충분할 것 같았다. 어디서 먹고살지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까지도 안 죽고 잘 살았잖아. 모두 방독면을 쓰고 있다고 하니, 정 급하면 얼굴 가리고서 막노동 같은 거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한 달이면 된다. 나 중위가 그랬다. 떼어 낼 거라면 한 달, 그게 아니더라도 한 달은 지켜보자고. 그러니까….
“그럼 부탁해요, 이모.”
세화는 아랫배를 움켜쥐고서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물아비는 텅 빈 가방을 들고는 이쪽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약효가 돌기 전에 빨리 자리를 떠야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자리를 파하려는 기척을 느꼈는지, 지키고 선 군인들이 현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최 원사는 이번엔 함께 움직이지 못했다. 오선란 대장이 나타났는데도 제때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명 받았다고 했다. 당분간 기태정의 감시하에 빡세게 뺑이칠 거라며, 나 중위가 혀를 쯧쯧 차며 말해 줬다.
세화로선 악재였다. 최 원사는 그래도 기태정 핑계를 대면 어떻게든 구워삶을 수 있었는데, 밖을 지키는 낯선 이들에겐 그 어떤 수작질도 통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내일 기태정 본인이 직접 납신다면… 힘껏 덤벼 물어도 잇자국 하나 남지 않을 거다.
그래서 밤새 고민하던 세화는… 다소 무모한 방법을 떠올렸다. 어차피 완전한 도주는 글렀잖아. 그렇다면 시작부터 다소 허술해도 되지 않을까. 차라리 기태정을 한 번 더 시험해 보자. 자신의 눈물이 그에게 얼마만큼 위력적인지, 그리고 이 목숨이… 정확히는 배 속의 이 아이가 그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세화는 5성에서 들고 온 쇼핑백 속에서 패치를 꺼내 손목에 두르고, 익숙하게 안정제를 투여했다. 알코올 솜으로 팔뚝을 문질러 닦아 내고, 사용한 주삿바늘과 기구들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 안에 돌덩이 같은 것이 콱 박혀서, 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렇게 숨이 턱턱 막혔다. 세화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다가, 느리게 얼굴 전체를 쓸었다. 또 울컥 번지려는 물기를 다스리려 눈가를 몇 번이고 꾹꾹 세게 누르다가, 결국은 힘이 빠져 손을 툭 떨구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세화는 모든 표정을 놓아 버렸다.
차라리 완전히 어긋났다면 또 모르겠는데, 약간은 저에게 진심인 것처럼 보였던 최근의 기태정이 자꾸만 세화를 망설이게 했다. 그냥 모르는 척할까? 일이 다 끝나면 솔직하게 말해 주려던 걸 수도 있잖아….
물론… 알고 있었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불과하다는 걸. 기태정의 태도가 처음과 달라졌다고 해서, 지금 와서 적선하듯 베푸는 다정함이 기만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 것 또한.
그래서 세화는 진물 같은 울음을 삼키고, 입속말로 내일 기태정에게 내뱉을 말을 연습했다.
평소처럼 바보같이 웃어 주고, 시키는 대로 짧게 키스하고… 방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준비해 둔 물건들을 내보일 것이다.
온몸에 패치를 칭칭 두르고서, 밖에 선 군인들 다 물리라고, 날 보내 달라고. 그러지 않으면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이 위험한 약들을 자신의 몸에 찔러 넣겠다고 협박을 해 볼 생각이었다.
나도, 이 애도 이 자리에서 다 끝장나는 꼴 보기 싫으면 순순히 보내 달라고 하는 것…. 우습고 초라하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세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내걸 수 있는 모든 것이었으며, 가장 강력한 패였다.
물론 기태정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수도 있다. 어디 진짜 죽어 보라며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그럼, 그땐….
“……, 정말 그렇게 끝나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