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86)화 (86/144)
  • #083

    세화는 필사적으로 기태정을 외면했다. 이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울거나, 악을 쓰게 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나? …잘 모르겠다. 옆에 놓인 기기가 시끄럽게 울어 대는 걸 보니 아직 안 죽고 살아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심화를 이기지 못해 열이 오르기 시작한 머리로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더는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다. 그뿐이었다.

    이대로 관사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한 몸인 듯 포개져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당신이 무슨 속셈이었는지 다 알게 됐다고, 방금 약물 제조법이 적힌 기밀문서까지 확인한 참이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벼르고 있다던 재판을 앞둔 와중이었다. 얌전히 잘 있던 멍청한 인질이 난동을 부리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때부턴 기태정은 최소한의 연기조차 집어치운 채, 철저히 도구로서 저를 다룰 것이다.

    당장 반항해 봤자 결국 기태정 좋은 일만 시켜 주는 셈이었다. 무엇보다… 아직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부족했다. 어느 쪽이든 당장은 견딜 자신이 없었다.

    기태정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은데도, 그에게서 긍정하는 답을 들으면. 얄팍한 다정함마저 거둔 캄캄한 눈길을 받게 된다면.

    그러면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세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감쳐물었다. 울지 않을 거다. 어떻게든 제대로 숨을 쉴 거다. 혹시나 과호흡을 핑계로 기태정이 입을 맞추려 들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미 눈물샘이 터져, 온통 젖은 시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기태정을 좋아했나 보다. 하긴. 그를 떠올리면 귓불부터 손끝까지 옅은 색으로 물들었던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많이 좋아했다. 이 정도로 나락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어도, 결국은 끝이 좋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열심히 기태정을 좋아했다.

    “…하우스 안에만 있게 된대도 상관없어?”

    버석한 침묵을 깨고서, 기태정이 입을 열었다.

    “…….”

    “며칠만 갔다 와, 그럼.”

    세화는 간신히 눈만 들어 기태정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허락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 건물 자체가 증거물로 채택된 상황이라, 오선란 같은 대장급 인사가 온대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어. 이 시기에 하우스 건드려 봤자 일만 키우는 꼴일 테니 다른 놈들도 감히 들쑤실 생각은 못 할 거고….”

    그제야 돌아보는 시선이 기꺼운 듯, 기태정이 세화의 콧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가 좋아하는 행위 중 하나였다. 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으로 얼굴 여기저기를 부드럽게 건드리고 가는 것. 지금은 세화가 얼마나 진정이 되었는지, 타인의 손길을 어느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가도 된다고요?”

    “사흘. 여기 있는 게 많이 힘들어도 그 이상은 안 돼. 마지막 날엔 어떻게든 일 처리 끝내고 데리러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아무런 대꾸도 못 하는 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남자는 작게 웃었다.

    “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하겠냐.”

    “…….”

    “심지어 피까지 쏟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데.”

    기태정은 폴대와 세화의 손가락에 꽂힌 바이털 사인 체크 기기, 그리고 아직은 납작한 배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아아…. 아이 때문에 봐주려는 거였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기태정이 저에게 조금씩 녹은 듯 굴었던 것도 임신한 이후였던 것 같다. 오선란조차 저를 포섭 안 하는 게 이상한 거라고 했을 정도니까, 이 시점에서 유산이라도 하면 아까워서 저러는 거겠지? 남자의 부드러운 시선이 끝끝내 세화를 나락으로 처넣었다.

    “이세화.”

    늘 그랬듯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기태정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너 왜 자꾸 그런 표정 해.”

    “…어떤….”

    “자꾸 이상하게 웃잖아, 너.”

    지금 제 속이 어떤지 모르더라도, 척 보기에도 아파 보이지 않나? 이 와중에도 생글생글 웃고 있으라고?

    ‘아기’ 혹은 ‘쓸모있는 몸뚱어리’가 아니라 ‘이세화’가 주체가 되면, 아프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나 보다. 하기야 이전에도 제가 시무룩하게 있거나, 마음이 상한 티를 내면 건방지다고 싫어하긴 했지.

    세화는 속눈썹에 매달린 물기를 쓸어 내고 웃었다. 반쯤은 오기였다. 그런 낯짝 하지 말라기에, 최선을 다해서 입꼬리에 힘을 줬다. 그랬더니 기태정은 더더욱 굳은 입매로 저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 너.”

    “…….”

    “입구에서 무슨 취급을 받았든, 오선란이 무슨 소릴 했든… 다 무시해. 어차피 재판 끝나면 너한테 찍소리도 못할 새끼들이야.”

    아직 찰랑이는 눈동자 속 물막 너머로 흐릿하게 기태정이 가득 들어찼다. 세화가 열렬히 좋아했던 그 상像은 두 개, 세 개로 쪼개지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남자의 얼굴 위로 다채로운 감정이 스쳐 갔다.

    덤덤한 것처럼 보였어도, 세화는 어지럽게 어룽진 남자의 감정이 쉽게 읽혔다. 그것은 이상한… 그래, 이상한 깨달음이었다. 자신은 이런 사소한 신호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이 사람을 깊이 좋아하고 있었고, 또 기태정은… 자신의 눈물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약해진 것 같았다.

    기태정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굳이 이런 식으로 숨 쉴 틈을 줄 필요는 없었다. 육신을 보양해 줄 방법이야 차고 넘쳤다. 차라리 건강을 핑계 삼아 침실에 가둬 두는 게 그가 선호할 법한 선택지였다.

    “왜요?”

    “왜냐니.”

    “제가, 울어서요? 그래서…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 질질 짜는 거 보기 싫어서.”

    회음부에 도장을 찍어 놓고선 슬쩍 물이 든 걸로도 불쾌해한 사람이었다. 자기 뜻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티셔츠 쪼가리도 허락해 주지 않았던 남자였다.

    누구보다 기태정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거다. 자신과 떨어져서, 그것도 4환에, 며칠이나 혼자 있어도 된다는 허락은 결코 그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세화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결심이라도 한 듯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그러겠다는 뜻만 겨우 내비쳤다. 세화가 힘을 주기도 전에, 기태정이 제법 세심한 손길로 몸을 붙들어 주었다. 조금 전의 거부를 만회라도 하고 싶은 듯이.

    기태정의 말과 행동에 더는 어떠한 의미 부여도 하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한 번은 묻고 싶었다. 반란의 끝은 폭도의 죽음 아니면 혁명뿐이다. 그리고 세화는 자신의 성공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 전, 마지막으로 건네는 간절한 물음이었다. 아니, 초라한 응답이라도 바라는 절실한 기도였다.

    “…준장님. 저,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제발,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 줘. 구구절절 설명할 것도 없으니까, 단 한마디라도. 제발.

    “글쎄. 일단은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은데,”

    “아뇨, 그게 아니라… 제 체질이요. 이렇게… 아이 가질 수 있게 변하게 됐잖아요.”

    “갑자기 그건 왜, 아. 설마 오선란이 뭐라고 해?”

    “…….”

    “씨발, 그 새끼가 뭐라고 했길래,”

    “…그런 거 아니에요. 아깐 제가 혼자서 너무 긴장해서 그랬던 거고, 그냥… 아까 병원 갔을 때 매니저가 물어봐서….”

    기태정은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라기보다, 누군가 자신의 소유물을 함부로 대한 것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뭐든 그냥 흘려들어. 그리고 오선란은 김 소위가 모시고 있는 사람이야.”

    “…….”

    “하필 재판 앞두고 너 찾아온 것만 봐도 그렇잖아. 증서니, 뭐니 내세워도 결국 다 꿍꿍이가 있으니 하는 개소리라고.”

    그래도 오선란은 증서라도 가지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즉석에서 보여 줬던 기밀문서도 김 소위가 내렸던 지시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지만 기태정은? 그가 나한테 뭘 증명해 줄 수 있지? 내 뒷구멍 빨고 싶다는 것 말고 진심이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당신을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날 보면서… 그간 무슨 생각 했을까, 이 남자는.

    “재판 끝나면 확인해 줄게. 네 부모님 얘기 들먹인 건 신경 쓰이니까.”

    “…재판, 끝나면요.”

    “그래. 증서도 확인해 보고… 일이 어떻게 된 건지도, 다 말해 줄 테니까.”

    세화는 자꾸만 엉키는 속눈썹을 문지르고, 크게 눈을 떴다. 손등에 묻은 진물 같은 물기도 털어 냈다. 이미 다 쪼개진 마음의 조각을 붙들고,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애써 봤지만, 돌아온 건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대꾸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다. 정말로, 끝이었다.

    “음, 이번에 특진할 수도 있는데.”

    자꾸만 침잠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기태정은 드문드문 짤막한 이야길 늘어놓았다.

    “두 계단 올라가면 이젠 준장이 아니라 중장이야.”

    “…….”

    “그 전에 일 다 끝내야 할 텐데. 김 소위 그 새끼가 증거물 다 없앤답시고 2환 창고에 불 질러서, 그쪽 하늘길이 꽉 막혔어. 오가기도 어렵고, 당장 거기 주둔 중인 군인들 식수조차 부족한 상황이고…. 이 일까지 겹쳐서 요즘 좀 바빴어.”

    “…….”

    “아, 중장 달면 더 큰 관사 나올걸? 그건 네가 원하는 대로 꾸며 봐.”

    “…제가요?”

    “지금 있는 곳은 좀 삭막하잖아.”

    동의한 적도 없는데, 기태정은 그의 미래에 자신을 부품처럼 끼워 넣고 있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쪼글쪼글해진 풍선이 겨우 품고 있던 공기를 쥐어짜듯, 허망하고 허무한 웃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쩍쩍 갈라진 가슴의 틈으로 칼날 같은 바람이 불었다.

    그래,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모든 일의 시발점인, 기태정이 가장 강력한 무기로 휘두를 수 있다는 이 아이는, 제 뜻대로 할 것이다. 기태정이든 오선란이든 김 소위든,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거다. 저야 이따위로 한심하게 21년이나 살았다지만, 이 아이는 그 누구의 필요도, 수단도, 도구도 되지 않게 할 테다.

    평생 도망 다니며 살 순 없다. 아무리 잘 숨어도 결국은 붙잡힐 거다. 공권력을 이길 방법은 요원하다. 심지어 저를 쫓을 사람들은…. 기태정과 오선란, 김 소위의 계급을 헤아리고 있자니 절로 모골이 송연했다. 잘 쳐줘 봐야… 몇 달? 아니, 한 달도 버거울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재판에 조금은 타격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완벽한 도주를 목표로 삼지 않을 거다. 제 몸뚱어리와 아이를 이용하려는, 저를 장난감처럼 취급했던 사람들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걸로도 충분했다. 붙잡혀 총살을 당하든, 모가지가 떨어지든, 실험실에 가둬 두고 뺑이를 치든… 그건 더는 알 바 아니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아, 그래. 쿠키.”

    “…….”

    “그거 어디 거야, 사다 줄게.”

    자꾸만 뭔가를 묻는 기태정의 목소리가 듣기 괴로워서, 세화는 피곤한 척 눈을 감아 버렸다.

    지금 2환이 마비되었다고 했던가.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상공이 불투명하다면, 사람들 모두 방독면이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을까? 원래도 공기가 썩 좋지 않은 곳이라 그런 차림이 어색하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2환의 지리는 훤히 꿰고 있었다. 도움을 구할 법한 야매 의사들도 몇 명 알고 있다. 하우스의 감시 인원을 잘 따돌리면 되는데…. 셈을 하던 세화는 밀려오는 허탈함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결국은 제자리였다. 죽기 살기로 4환까지 올라왔고, 곧 성 안의 주민증을 손에 넣는다며 들떠 있었는데…. 다시 2환으로 도망쳐야 한다.

    하우스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겠지? 결국 2원짜리 인생이 자기 몫인 줄도 모르고 까불어 대다가 저렇게 된 거라고. 고상 떨면서 살고 싶어 하더니, 꼴 좋다고….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을 때마다, 폐부로 가득 들어찬 공기가 가시가 되어 심장을 쿡쿡 찔러 댔다. 기태정 앞에서 속눈썹이 떨리는 모습조차 내보이고 싶지 않아, 세화는 온몸에 힘을 줬다.

    “이제 됐어요. 그만 가요.”

    “미쳤어? 너 수액 아직 반도 못 맞았어. 그래프도 정상 아니고.”

    “아뇨, 괜찮아요. 가요.”

    이젠 어리광 그만 부리고, 처음부터 허락받았던 적 없는 환상에서 깨어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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