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85)화 (8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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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2

    “이세화?”

    “이세화 씨가 여기로 방문하셨는데….”

    “여기? 국방부에 이세화가 왔다고?”

    “예, 그… 최 원사 말로는 준장님을 깜짝 놀라게 해 드리려는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간식도 잔뜩 사 오셔서… 나름대로 서프라이즈 이벤트였다고….”

    허. 기태정은 헛웃음을 삼키며 발을 뗐다가, 자신의 차림새를 떠올리곤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셔츠 포켓에 대충 찔러 넣고 있던 넥타이를 꺼내고, 걷어붙인 소매도 단정히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책상 위로 던져둔 정복 모자를 주워 들려다… 이건 좀 과하지 싶어서 관두기로 했다.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로비까진 들여보내라고 해.”

    요즘 빡세게 잡고 있으니 외부인은, 심지어 성 주민도 아닌 이세화는 정문도 통과 못 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럴 시간이 없긴 했지만, 제가 나서서 직접 모셔 오는 게 가장 모양새가 좋을 것 같았다.

    “참나.”

    괜히 뻐근한 척 목이며 어깨를 주무르던 기태정은 이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서프라이즈라니. 간식은 또 뭐고.

    간식 쪼가릴 손에 쥐고서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성였을 이세화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니 어쩐지 뱃속이 간질거렸다. 뭘 사라고 해도 양껏 고르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거 준장님과 먹고 싶은데, 하며 어렵게 최 원사에게 부탁했을 이세화를 상상하니까… 이런 표현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낯뜨겁긴 한데, 조금… 쑥스러웠다. 겁도 많은 게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지?

    박 소위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던 기태정은, 벽면에 걸린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음. 역시 전부 갖춰 입는 쪽이 좋으려나? 이세화가 정장한 저를 볼 때마다 넋을 놓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슈트를 걸칠 때도 그랬지만, 정복을 입고 있을 땐 시선의 농도가 달라졌다. 그 경외와 감탄이 그리 싫진 않아서….

    “저…, 준장님.”

    “아, 왜 자꾸 불러.”

    다소 고양된 기분으로 박 소위를 돌아본 기태정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제법 귀여운 소식을 들고 온 부하 직원이 수상할 정도로 새파랗게 얼어 있던 탓이다.

    “뭐야.”

    “…….”

    “박 소위. 똑바로 말 안 해?”

    “그…, 이세화 씨가… 검문에 붙들려 있던 참에 오선란 대장과 마주쳤다고 합니다.”

    “오선란?”

    “예, 이후로 부관들도 뒤로 물리고서 이세화 씨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지막 검색대 통과했을 때 갑자기….”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박 소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뭐?”

    “의무실에 나 중위가 와 있고, 일단 이세화 씨의 안정이 중요하니 오선란 대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은 다 물리고서, 준장님!”

    박 소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태정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최 원사 이 새끼 어딨어!”

    “준장님! 이세화 씨는 지금 안정을 취해야…!”

    “서프라이즈고 나발이고, 오선란을 마주쳤는데 그걸, 씨발, 보고도 안 하고서 여태 입 닥치고 있었다고? 내가 그러라고 이세화한테 그 새끼 붙여 준 줄 알아?”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계단을 거의 날아가듯 뛰어가는 기태정을 따라잡으려 부관들 또한 요란스레 달려들었다. 흡사 추격전이라도 벌어진 것 같은 심상치 않은 소음이 회색 복도를 쿵쿵 울렸다. 층마다 지키고 서 있던 놈들이 화들짝 놀라 이쪽으로 목을 길게 뺄 정도였다.

    박 소위가 조심스러워한 이유를 안다. 제가 이렇게 빡쳐서 덤벼들 걸 예상했겠지. 기태정도 모르지 않았다. 암암리에 이세화의 존재가 알려지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자신이 이세화를 싸고돈다는 구체적인 목격담이 나오기 시작하면 곤란해진다. 재판을 떠나 공식적인 약점이 생기는 셈이니까. 그렇지만.

    “주, 준장님.”

    애가 쓰러졌다잖아. 오선란과 있다가.

    기태정은 초조하게 밖을 서성이던 최 원사를 밀쳐 내고, 의무실의 문고리를 쥐었다. 그대로 벌컥 열어젖히려다…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잠시 멈춰 서서 엄지와 검지로 굳은 입가를 몇 번 매만졌다. 그런다고 부드럽게 풀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보다야 한결 나아졌다.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넥타이도 다시 잘 죄었다. 분명 무시무시할 제 얼굴을 보고서, 가뜩이나 놀랐을 이세화가 더 움츠러들지 않도록 외관을 잘 정돈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아, 준장님.”

    바로 곁에서 기기를 들여다보던 나 중위의 몸에 가려져, 이세화가 바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시트가 볼록 솟은 걸 보니 거기 누워 있긴 한 모양이었다. 전신을 덮은 그 새하얀 침구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기태정은 기껏 단장한 보람도 없이 미간을 한껏 구기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어요.”

    그리고 침대 위의 이세화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가뜩이나 밀가루 반죽처럼 허여멀건 게, 평소의 배로 창백하게 질려서 꼭 눈만 뜬 시체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발긋한 뺨을 하고선,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이런저런 이야길 잘도 늘어놓았는데.

    “수치는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이대로 푹 쉬시면 금방 회복될 것 같습니다. 다만….”

    나 중위가 한숨을 쉬며 검사지를 내밀었다.

    “약간 피가 비쳐서….”

    “피?”

    놀라 되묻자, 이세화가 베개 밑으로 꾸물꾸물 고개를 파묻었다. 죽을죄를 지어 죄송하다는 듯이. 기태정은 입술 안쪽 살을 세게 짓씹었다. 이후론 크게 소리 내지 않으려고.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합니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고요. 이것 역시 푹 쉬면서 영양제, 안정제 전부 다 잘 챙겨 먹으시면 됩니다. 아시겠지만 이세화 씨의 체질이 특이하다 보니 당분간은 투여량을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시간도 반드시 준수하셔야 하고요. 그리고….”

    나 중위가 기태정을 향해 슬쩍 몸을 기울였다.

    “…오선란 대장이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 새끼야? 애를 이 꼴로 만든 게.”

    “그건 아닌데… 굉장히 놀라선 진심으로 이세화 씨를 걱정했습니다. 연기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태정은 수치의 분포도를 대략 살펴보고는 나 중위에게 도로 서류를 돌려주었다.

    “…알겠으니까, 일단은 다 나가.”

    뒤에서 무언의 소란이 느껴졌다. 뻔했다. 셋이서 무슨 수신호라도 주고받고 있겠지.

    “…이세화.”

    기태정은 폴대에 걸린 수액과 마른 팔목에 감긴 검은 패치, 그리고 눈 밑이 새파래진 이세화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걸쳐 앉느라 매트리스 한쪽이 얕게 내려앉자, 이세화가 크게 침을 삼켰다. 멋대로 찾아와 사고까지 쳤으니, 저에게 혼날 거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왜….”

    말을 하지, 뭘 그렇게 미련하게 앞에서 입씨름하고 있었냐고. 가볍게 핀잔을 주고, 꼭 안아 주려고 했다. 아니면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이라도 쓸어 넘겨 줄 생각이었다. 이세화는 자신의 체향을 맡으면, 품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으면 금세 안정을 되찾곤 했으니까. 손이 닿으면 눈가를 움찔거리며 슬쩍 몸을 기대 오곤 했으니까. 그런데….

    “…아, 죄송… 해요.”

    “…….”

    “좀, 놀라서요….”

    이세화는 자신이 움직이자마자, 걷어차인 개처럼 화들짝 몸을 튀었다. 어디 뭐 닿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손만 슬쩍 들었을 뿐인데…. 누가 보면 저한테 허구한 날 얻어맞는다고 오해할 정도로 격렬한 거부였다.

    기태정은 민망한 손을 거두며 슬쩍 주먹을 쥐었다. 언짢은 건 아니고… 그냥 마음이 좀 안 좋았다. 검문 검색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고 오선란에겐 또 무슨 소릴 들었길래 애가 이렇게….

    “미리 연락을 하지. 원래도 여긴 살벌한 곳인데….”

    “…….”

    “…이세화.”

    “…….”

    “너, 울어?”

    본인도 몰랐는지, 이세화가 당황하며 고개를 슬쩍 틀었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는 손길이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애쓰는 보람도 없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은 금세 죽죽 흐르는 물줄기가 되어 귓바퀴를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잠깐 나 좀 봐 봐.”

    “…….”

    “너 아까 무슨 일 있었길래,”

    “준장님.”

    끅끅 삼키는 울음에 섞여, 목소리가 죄 뒤집혔다. 형편없이 갈라져, 됐으니 입 다물고 쉬라고 해야만 할 것 같은… 처절한 음색이었다.

    “제가… 쿠키, 를, 사, 왔는데요….”

    그런데도 이세화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 나갔다. 열심히 고른 거였는데. 준장님께 드리려고 했는데….

    “다… 부서졌어요.”

    전부 뭉개지고, 망가져서,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쓰레기가 되어 버렸어요.

    거기까지 겨우 중얼거리고선, 이세화는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옆에 놓인 기기 두 대가 심상치 않은 경고음을 냈고, 팔뚝에 꽂은 링거 바늘을 타고 피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알겠으니까 일단 진정해, 팔 내리고.”

    “원래 준장님이, 바라지도 않던 거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저는… 저는….”

    “사 줄게, 내가. 그 쿠킨지 뭔지, 아주 가게 통째로 사서 넘겨줄 테니까…. 울지 말고, 어?”

    어지간히도 찬밥 취급을 받았는지, 이세화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서 꺽꺽 울기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물 맺힌 이세화의 얼굴을 제일 좋아하는데, 늘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기분이 하나도 좋지 않았다. 저 없는 곳에서 여기저기 채이고선 서럽게 우는 이세화를 보고 있자니… 목구멍 안쪽으로 불덩어리 같은 것이 자꾸만 꿀럭이며 넘어갔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기태정은 벼르고 벼르던 이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울지 마. 세화야.

    “준장님, 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이 벌어지려는 순간, 세화가 먼저 기태정을 붙들었다.

    “…어, 말해.”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줄 기세로 기태정이 세화의 손을 꼭 붙들었다. 왜 이렇게 차갑냐고 중얼거리면서, 끝을 아프지 않게 주물러 줬다.

    평소라면 감격해 볼을 붉혔을 거다. 기태정 특유의 향과 더운 체온에 설레, 혼자서 색이 고운 꿈속을 헤엄쳤을 거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세화는 훅 치미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저… 잠시만 4환에 있고 싶어요.”

    “4환? 이 몸을 하고서 무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까… 거기서 잠깐만 쉬고 오면, 안 될까요….”

    “…….”

    “4환이 아니라 어디라도 좋아요. 딱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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