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84)화 (84/144)

#081

“우리 쪽 증인 자격으로 들어가겠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아, 증인이고 나발이고 마약 사범이잖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국방부 건물에 범죄자를 어떻게 들입니까?”

“심증 말고 제대로 된 증거 가지고 오십시오, 그러면.”

“사정 다 알 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이거 혹시라도 문제 되면 들들 볶이는 건 우리라고요. 이럴 시간에 그냥 준장님께 연락 넣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까부터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대체.”

“아, 그건…! 그건… 안 되니까 그렇죠.”

세화는 구석에 서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진작 도착했는데, 입구에서부터 탁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중이었다. 담당들이 수상쩍게 여기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유도 말 안 해 주면서 기태정에겐 절대 호출하면 안 된다고 하고, 그런 주제에 관계자도 아닌 사람을 일단 들여보내겠다고 벅벅 우겨 대고 있으니….

“거참. 이럴수록 점점 더 수상해 보이는 거 알죠?”

“그거야…!”

기태정과 제가 말랑말랑한 사이가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최 원사는,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가진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곰 같은 사내에게서 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왜냐면…! 이분은 준장님의…!”

“세화니?”

비장하게 열변을 토하려는 최 원사의 말을 툭 끊어 내고, 익숙하지 않은 다정한 목소리가 세화를 두드렸다. 호기심과 짜증, 불쾌함이 뒤섞인 사람들의 시선을 덤덤히 감내하던 세화의 고개가 느리게 들렸다.

“맞구나, 멀리서 보고 설마 했는데.”

놀랍게도… 제게 말을 붙인 사람은, 오선란 대장이었다.

“경례는 생략하지.”

그는 경악한 얼굴로 뒤늦게 거수하려는 사람들에게 눈치를 주고는, 세화를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나름대로 애를 쓰는 것 같긴 한데… 온화한 미소는 영 어색한지 눈가며 입매가 위엄 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대장님.”

“최 원사. 네 상관은 고작 이런 일도 빠릿빠릿하게 처리를 못 해서, 임신한 사람을 내내 길바닥에 세워 두고 있었나?”

“아니에요. 제가 연락도 없이 온 거라….”

매섭게 떨어지려는 오선란의 추궁을 막아서자, 최 원사가 감동한 듯 눈을 반짝였다.

“일부러 준장님께 얘기 안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거였어요. 그… 서프라이즈 이벤트 하고 싶어서….”

변명하는 세화를 빤히 바라보던 오선란은 이내 어깨가 얕게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이고, 이 철부지를 어떡하면 좋을까. 소리 내어 말은 안 했어도 그런 생각 중인 게 다분히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그리고 세화는 오선란의 그런 태도가 어쩐지 간질간질하고 또 낯설어서, 애꿎은 쇼핑백 끈만 세게 움켜쥐었다. 어른이 저를 보고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자신을 한심해하거나 꼴통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걱정하면서도 귀여워하는 낯이었다. 아버지든 친척 아저씨든 정말로 저에게도 가족이라는 게 있었다면, 꼭 저런 얼굴을 하고서 타일러 줄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데려다주마. 검문 필요 없는 곳까지만. 기태정 준장 집무실로 가려는 거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세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 원사에게 눈짓했다. 아직은 기태정에게 연락하지 말아 줬으면 했다. 이 소란이 안 전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일 테지만, 그래도 오선란과 대화를 나눌 최소한의 시간은 벌고 싶었다.

다행히도 최 원사는 결연한 얼굴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벤트를 성공시키고 싶은가 보다, 그렇게 멋대로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흐흠, 여기서 너와 마주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냉큼 곁을 내어 준 오선란은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아, 변명하자면 사람 같은 거 붙이진 않았다. 나도 지금 막 도착한 참이었는데, 소란이 있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오선란과 함께 걸으니 철옹성 같았던 건물이 활짝 열렸다. 검문대 옆에 장승처럼 서 있던 사람들은 어떤 대거리도 하지 않고서 세화가 지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물론 오선란이 부리는 사람들과 최 원사에겐 예외가 없어서, 그들은 차례로 검문을 받느라 조금씩 이쪽과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조금 더 쉽게 오선란에게 말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대장님.”

기회는 지금뿐이다. 오선란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긴 했어도, 이런 우연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기태정의 눈을 피해 오선란과 따로 약속을 잡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었다.

아직 기태정을 만나기 전이라, 타이밍도 딱 좋았다. 사실 그에게 뭘 물어보면 좋을지, 무슨 얘기를 듣고 싶은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 기태정을 봐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무작정 찾아온 거였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오선란과 대화하면서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울고 싶지도 않았고… 더는 이 비슷한 주제로 기태정을 의심하거나 추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론 불편한 사실을 굳이 꾸역꾸역 되새김질하면서 아파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되도록, 좋게 풀어 나가고 싶었다. 기태정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세화 자신을 위해서. 이 이상 초라해지고 싶지도, 아프고 싶지도 않으니까.

“무슨 일이길래 그러니? 뭔가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아, 아뇨. 제 체질 때문에요.”

물론 기태정도 아닌 오선란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오선란도 김 소위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니, 저를 이용해 기태정을 망치려는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사람에겐 무려 국가 원수가 내용을 보증해 준 증서가 있으니까…. 세화가 여태 살아온 세상은 돈이면 다 되는 천박한 밑바닥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너에게 내놓겠다는 말만큼 진실하게 느껴지는 증명도 없었다.

오선란의 사람됨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문서를 아주 조금은 신뢰하고 있을 뿐이다. 기태정이 답할 수 없거나, 답해 주지 않는 것을 조금이나마 다른 시야에서 보게 해 주지 않을까? 세화가 오선란에게 품은 믿음은 딱 그 정도였다.

“체질? 왜, 어디 아파?”

다급히 묻는 오선란의 눈동자가 일순 얕게 흔들렸다. 숨길 수 없이 퍼져 나가는 파문에서, 세화는 오선란이 실험 대상자였다던 그의 친구, 그러니까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노련한 무장은 제 앞에선 감정을 조금도 갈무리하지 못했다.

“아뇨,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요.”

세화는 잠시 말을 골랐다. 처음 떠올린 문장은 ‘김 소위가 만든 약의 정확한 효과를 알고 싶어요.’였는데…. 막상 운을 떼려고 하니, 이게 썩 적절한 물음 같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이 일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밝히는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 봤자 좋을 건 없지 않을까?

“…제가 약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된 거잖아요? 아이를 갖게 된 게….”

망설이던 세화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부러 단정적인 말을 입에 올려 봤다. 이 또한 블러핑이라면 블러핑이었다. 어쭙잖은 수긴 해도 통하기만 한다면, 제가 뭘 묻지 않아도 상대방이 알아서 정보를 술술 풀어놓을 것이다.

“그 약 때문에 어디가 문제라고 하든? 지금 진료 어디에서 보고 있어?”

“…아, 어…, 혹시, 그러면….”

세화는 침을 크게 삼키며 눈을 피했다. 어쩐지 지금 오선란의 다급한 물음이 자신의 말을 긍정…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김 소위의 약 때문에 네 체질 변한 거 맞다고.

“그, 그 약을 저를 낳아 주신 분도 복용하신 건지….”

아냐, 아직은. 무엇도 확실하지 않잖아. 김 소위랑 같이 약 만들고 맛볼 땐 패치 같은 걸 몸에 붙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약 때문에 몸이 변한 거겠어. 그냥, 그간 하도 이상한 걸 많이 주워 먹어서 체질이 달라진 거겠지.

그리고, 준장님도….

준장님도 정말로 몰랐다고 했잖아.

그런 얼굴로, 그런 눈으로, 그런 목소리를 하고서… 아니라고 했잖아.

세화는 벌 떼처럼 들고일어나는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붙들어 매려 애썼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부정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음, 그건 아닐 게다. 구체적인 제조법이 정립된 건 화학 실험 이후거든. 김 소위가 손을 댄 문서도 비교적 최근의 것이고.”

“아…, 그럼 그…, 제 몸은 그냥….”

“정확히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건진 모르겠다만, 네 몸이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약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확실히 유전의 영향인 것 같긴 해.”

아….

“김 소위가 다른 사람들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벌였는데, 성공적으로 체질이 변한 건 너뿐인 것으로 안다.”

“…….”

“…그래도 다행이긴 하구나. 혹시라도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서 당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그렇다고 가뜩이나 혼란스러울 널 대뜸 붙들고서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어디까지 알고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오선란이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진정으로 안도하는 것 같은 그를 보면서, 세화는 더는 어떠한 물음도 내놓질 못했다.

그러니까

김 소위가 만든 약이

마약의 대용품이 아니라,

임신 가능한 체질로 변하는 약이, 맞았다고?

그것도 모르고서, 나는… 드디어 성 안에서, 별 안에서 살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던 건가?

“기태정이 너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건 아닐까, 그게 가장 걱정이 됐고…. 그 사람으로선 그렇게 해서라도 널 잡고 싶었을 테니까.”

“…왜, 요?”

세화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안면에 마비라도 온 것처럼 근육의 쓰임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부디 이 습관 같은 연기가, 지나치게 어색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제 체질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준장님한테 뭐가 도움이 된다고 저 같은 거랑….”

어쩌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을 기어이 꺼내 들면서, 세화는 간절히 빌었다. 그래, 김 소위가 처음부터 어떤 설계를 했든 상관없으니까… 기태정은 본인이 주장했던 대로 몰랐으면 했다. 아니 조금은 알고 있었대도 괜찮으니까… 김 소위처럼, 여태 저를 이용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수단으로 쓰고 버리려던 게 아니라면,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았다.

“김 소위네 집안 정도면 마약 제조나 유통 같은 일은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다. 로비 같은 걸 할 것도 없이, 너처럼 힘없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떠넘기면 그만이지. 아마 김 소위도 그걸 노리고서 너나 하우스 사람들을 끼고서 움직였던 걸 거고.”

“…….”

“그런데 이 약이 단순한 마약 같은 게 아니라고, 그 효능을 입증할 방법이 있다면…. 김 소위 측을 어떻게든 주저앉히고 싶은 기태정 같은 사람이 그걸 알게 됐다면, 어떻게 할 것 같으니.”

…아.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꺼풀 뒤로 가시 같은 글자들이 자글자글 들끓었다. 기태정이 처음부터 나한테 수상쩍은 제안을 던진 이유가 있었어. 단순히 몸뚱어리가 마음에 들어서 먹고 버리려던 것도 아니고, 그저 도구로 이용하려고….

“네 존재 자체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증거인 셈이야. 네가 아이를 가진 덕에 더는 김 소위를 단순한 마약 사범이라고 우길 수 없게 되어 버린 거지. 게다가 세화 너는 재판장에서 그 약을 완벽히 제조해 보일 수 있잖니? 스스로 해독도 가능한 체질이니 몇 번이고 지치지 않고 같은 일을 반복해도 망가지지 않을 테고…. 기태정 입장에선 너를 포섭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

“그래서 김 소위 쪽에서도 지금 여론을 돌리겠답시고 내세우는 주장이, 네가 몹쓸 짓을 당해 아이를 가졌다는 거다. 그렇게 만들어진 증인과 증거는 법적 효력이 없지 않냐고 우기고 있지.”

오선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임부에겐 전혀 해롭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군인들의 안내를 흘려들으며, 세화는 유령처럼 마지막 보안 검색대를 지나쳤다. 지금 어떻게 발을 놀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되는대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표정, 관리해야 하는데. 탈 제대로 쓰고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당장이라도 속에서 시커멓고 뾰족한 덩어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고작 울지 않고 있는 것이 최선일 따름이었다.

“전후 사정이야 모르겠다만, 그래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은 있는 것 같아서… 또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다.”

“…….”

“네 아빠도… 참 힘들었거든. 너마저 그런 일을 겪은 걸 알면 천국에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거야.”

세화는 순간 팔자니, 운명이니 하던 사람들의 비웃음을 떠올렸다. 화투판에서 지겹게 들었던 주제였고, 그 숱한 말들은 저에겐 저주와도 같았다.

아무리 애써도 피할 수 없이 밟고 말았던 더러운 웅덩이처럼. 넌 결국 구질구질하게 살다 죽을 거라고.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느냐고들 그랬다.

당신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천국까진 바라진 않았어도 별 안에 소속되고 싶어서. 성 안의 사람이라는 주민증, 그거 한 장이 갖고 싶어서 여태 발버둥 쳐 왔다. 선하게 살진 않았어도 가끔 흉내라도 내 보려고 노력하면서, 똑같은 쓰레기들이 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써 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틀린 말 하나도 없었다. 이게 바로 제 팔자였다. 언젠가 기태정이 말했던 것처럼 환상에 젖어 몸도, 마음도 다 주다가 신세나 조지는, 그런 흔하고 멍청한 뒷골목 사람.

약간의 계기가 생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기태정에게 마음을 내주었다. 배가 곯았던 것 이상으로 정이 고파서, 사람도 동물도 무엇도 없는 쓸쓸한 화투패가 자신의 상징인 것이 너무너무 싫어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오선란의 말마따나 몹쓸 취급 당했다는 거 알면서도, 쉽게 그에게 자신을 내던져 버렸다.이런 제가 등신 같다는 걸 모르고서 기태정을 좋아하게 된 게 아니었다. 워낙 처지가 비루하니 이 정도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영원을 바랄 수도 없으니, 한때 머물렀다 사라지는 계절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음, 그래도 넌…, 세화 너는… 진우와 다를 수 있을 거야. 건강하게,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 또… 어쨌든 기태정도 널 자기 사람으로 여기고 있고, 서로 좋아하고 있잖니.”

세화는 자꾸만 차게 비집고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켰다.

기태정이 좋아한다고? 날?

그를 붙들고 몇 번이나 물어봤다. 꺽꺽 울면서, 당신 처음부터 내 체질이 변한 거 알고 있었냐고, 다 알면서 나랑 잤던 거 아니냐고 따졌다. 그때 기태정이 뭐라고 했더라. 제 손을 꼭 붙들고서 아니라고 답했다. 기절했다 깨어나고, 또 첫새벽이 올 때까지, 남자는 세 번도 넘도록 부정했다. 진정 몰랐다고, 전부 다 아니라고.

이세화. 그렇게 이름을 불러 주던 낮은 목소리, 키스해도 되냐던 물음. 진지하게 너와 아이를 책임질 방법에 관해 고민해 보겠다던 다짐, 어쨌든 법적 보호자는 무조건 자신으로 해 달라는 부탁,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진짜 바다를 보여 주겠다면서 씩 웃었던 기태정의 얼굴….

“대장님, 그 문서요. 약물 제조법 적혀 있다던 그거….”

세화는 건물 내부를 구경하는 척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자꾸만 고이는 눈물을 없애야 했다.

“그거 저도 볼 수 있는 거예요? 지시만 들었지, 실제론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오선란은 왜 안 되겠냐며 즉시 손목시계를 두드렸다. 몇 가지의 보안 절차를 거치자마자, 홀로그램이 판 위로 작게 떠 올랐다.

세화는 눈앞에 떠오른 글자를 씹어 삼킬 기세로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몇 가지 약물은 생소했으나, 대부분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김 소위가 들려주었던 제조법 그대로였다. 모르는 것도 맛을 보면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아래 있는 설명만 확인해도 충분하지 싶었다. 어디에서 추출한 건지만 알아도 대략적인 맛은 가늠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당장은 줄줄이 딸린 주석을 해석할 여력이 없었다. 뭔가에 깊이 집중하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기운이 조금도 없었다.

“세화야?”

“네?”

“왜 그러니?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그건 아니고, 음… 김 소위가 당시엔 저에게 패치를 둘러 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약이 어떻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아아… 흠, 혹시 팔뚝에 토니켓 같은 걸 두르지 않았니? 김 소위와 약 만들 때.”

“토니켓… 아, 의료용 고무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시중 병원에서 사용하는 패치 중엔 그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거든. 김 소위가 그 패치를 상당수 확보하고 있었던 게 확인이 되어서… 잠깐만. 설마 기태정이 이런 얘기도 전해 주지 않은 거야?”

아…. 저도 모르게 어깨가 툭 떨어졌다. 주사 쉽게 놓으라고 도와줬던 게 아니라, 약물 잘 돌라고 패치 둘러 준 거였구나…. 그것도 모르고서 꼬박꼬박 고맙다고 김 소위한테 인사했네….

“세화야, 너 혹시….”

“아니에요. 속상해할 것 같다고 자세히는 말씀 안 해 주셔서…. 어쨌든 김 소위가 제 오랜 단골이었거든요. 대충은 다 알아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자신의 몸이, 목소리가, 모든 것이 낯설었다. 눈꺼풀 안쪽으로 하얗고 까만 잉크 같은 것이 온통 번졌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세화는 손톱이 부러질 듯 주먹을 쥐며 견뎌 냈다. 울면 안 돼. 지금 울면….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세화야.”

“정말이에요. 저 다 알고 있었어요.”

대단한 걸 바랐던 게 아니다. 결혼 같은 거? 영원한 사랑?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어차피 한 철 지나면 버려질 거라는 거, 언제고 그가 질리면 끝날 관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설계된 공사일 줄은 몰랐다.

기태정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아니라고 해 줘서. 앞으론 믿어 달라고 해서. 실제로도 점점 변해 가는 것이 느껴져서….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냥 편히 일 해결하기 위한 약간의 연기였을 뿐인데. 그 김에 한번 박고 싸고, 버리기도 편한 장난감 같은 거였는데…. 혼자만 들떠 있었다. 하긴… 기태정은 처음부터 저에게 잠깐 곁에 끼고 있을 놀이 상대가 되어 달라고 했던 거니,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었는데, 저만 모르고 있었다.

주제 파악하자고 해 놓고선, 기태정이 속삭이는 말이 마냥 달아서 바보처럼 꿈을 꿨다.

“…기태정 준장님이, 저 아껴 주시잖아요.”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삼월이가 아니라 이세화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

“멍청한 새끼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기태정은 등받이에 몸을 묻고서,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재판 준비 외에도 장교로서 소화해야 하는 기본적인 업무들이 있다. 공식적으론 제법 긴 휴가 중이긴 했으나, 그래도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와중에 이 빌어 처먹을 김 소위가 2환의 창고를 전소시키는 바람에, 유해 물질로 뒤덮인 하늘길을 뚫을 방도 또한 고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피해 보상 청구야 당연히 하겠지만, 이미 돈 몇 푼 정도론 지금 벌어진 일을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 격납고의 전투기를 꺼내는 것도 문제고, 2환 인근의 상공이 뻥 뚫린 것도 문제였다.

“이번엔 뭐라고 회신할까요, 준장님.”

“우린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부턴 입 닥치고 있으면 돼.”

대안은 이미 몇 개나 제시했다. 자산 피해가 극심한 다른 군인들과 기업가들도 전부 동의했을 정도로 괜찮은 방안이었다.

그런데 그 대단하신 김 소위 가문의 어르신들이 찬성할 수 없다며 뻗대고 있었다. 재판 문제로 완전히 맛이 가 버렸는지, 놈들은 자신과 대립하는 사람들이 내는 의견은, 특히 기태정이 제출한 안건은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중이었다.

“공사 구분 못 하고 악쓰고 있는 건 저쪽이고, 놈들이 저렇게 멍청하게 굴수록 우리한테 유리해질 테니까.”

잠시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이던 기태정은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무의미한 명분 놀음이나 하며 시간을 낭비해야 할까. 씨발, 다 쌩까고 이세화랑 장이나 보러 가고 싶은데.

재판만 끝나면, 저 새끼들 싹 다 쓸어 내고 나면. 이렇게 끝의 끝까지 그럴싸한 구실이나 찾다가 미적미적 움직이는 방식은 아주 싹 다 뜯어고쳐 놓고 말 거다. 곧 제대긴 하지만, 앞으로도 원로로서 계속 얼굴 내밀게 될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속 터지는 꼴을 보고 있을 순 없다.

그래, 조금만 참으면 된다. 알고는 있는데… 끝이 보여서 그런지 점점 인내심이 닳아 가고 있었다.

“주, 준장님!”

돌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마찬가지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눈이 시뻘게진 박 소위였다.

“뭐야.”

조금 뜨끔한 마음에 생각 이상으로 서늘한 대꾸가 튀어나왔다. 다 팽개치고 관사로 돌아가려는 거, 눈치챘나?

“준장님, 그게….”

그렇지만 박 소위는 그런 기척은 전혀 읽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뛰어들어 보고하려는 일 말고 다른 것엔 조금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지금, 준장님, 그….”

박 소위는 그저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기태정만 찾아 댔다.

“박 소위.”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기태정이 미간에 얕게 내 천 자를 그었다.

“아, 죄송합니다만…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사, 아니, 이세화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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