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아…. 세화는 입 안으로 낯선 단어를 굴려보았다.
이세화의.
법적 보호자.
기태정.
“임신 사실 확인한 이후로 3주 이내 등록해야 하고, 네 뜻이 어떻든 난 마지막 날엔 무조건 서류 제출할 거야.”
“…그럴 거면서 저한테 뭐하러 물어보시는 거예요.”
“글쎄. 마음의 준비는 해두라고?”
결국은 자기 뜻대로 밀어붙일 작정이라고 하면서, 기태정은 세화의 몸을 감싼 타올을 계속해서 적셔 주었다. 따끈따끈해진 몸이 식지 않도록. 보호자 등록 같은 건 이보다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세화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줄기는 그의 명령만큼이나 모순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체온을 덥히는 것보다 합리적인 선택지가 여러 개 있었다. 가장 좋은 건 탕을 나와 물기를 다 말리고, 옷을 입고서 대화를 나누는 거다. 하다못해 살을 맞대지 않고서 각자 욕탕에 몸을 푹 담글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기태정은 굳이 세화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힌 채, 물 밖으로 솟은 제 상체의 일부를 데워주길 고집했다. 방법은 모르지 않으나, 한치도 떨어져 있기 싫은 사람처럼.
“아이 문제는 조금 더 편하게, 오래 생각해도 괜찮아. 그렇지만.”
어깨와 목이 만나는 지점에 코끝을 처박고서, 기태정이 중얼거렸다.
“네 보호자는 나야.”
나 중위든 최 원사든 박 소위든, 혹은 알지도 못할 하우스의 용역 같은 놈들이 아니라.
“이 애를 낳든 어쩌든, 그 위치는 내 거라고.”
그 자린 내 거라고. 그러니까 넌 내 거라고.
“…준장님.”
“무조건 내 이름 올리는 거야. 알았어?”
입술을 묻고서 말을 이어 간 탓에 기태정의 목소리가 골을 타고 번져나갔다. 살갗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처럼, 기태정의 음성이 진득하게 전신을 내달렸다.
“또 다른 생각하지.”
“아, 아뇨….”
마킹하듯 세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벼대던 기태정이 과일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깔고 앉은 남자의 허벅지와 등에 닿은 흉근과 복근이 순간 크게 약동했다. …새삼스러운 생각이지만, 그와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다. 촘촘하게 짜인 이 몸의 선이, 자신을 만질 때 어떻게 움직였는지 절로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로.
아삭. 엄한 상상을 꾸짖듯, 청량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과실의 풋내가 자욱한 수증기에 섞여 아래로 내려앉았다.
기태정이 뒤에서 안고 있어, 보이는 것은 그의 손뿐이었다. 새빨간 과실은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선, 남자가 쥐고 누르는 대로 과즙을 뚝뚝 흘려댔다. 기태정의 뜻대로 손에서 뭉그러지는 사과를 보고 있자니, 남자가 조금 전 자신의 육벽을 물 많은 과일에 비유했던 것이 떠올랐다.
세화는 민망한 마음에 괜히 손가락을 찰박였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나름 심각한 얘기를 하던 도중이었는데 기태정이 제 몸을 발라먹었던 때나 떠올리고 있다니…. 심지어 그런 낯뜨거운 말이 뭐가 좋다고….
“이세화.”
“네, 네?”
“왜 그렇게 놀라, 수상하게.”
허리에 두르고 있던 기태정의 반대편 손이 타올 속으로 유영하듯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래도 이왕이면 네 손으로 서명하는 걸 보고 싶은데….”
옆구리를 간질이던 감각이 점점 위를 타고 올라갔다. 기태정은 아랫배를 느릿느릿 문지르고, 늑골을 더듬다, 돌연 가슴살을 움켜쥐었다.
“그러려면 앞으로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붉게 익은 유두를 손가락에 끼우고서 기태정이 느긋하게 속삭였다.
“…그거 그, 만….”
“제일 잘하는 좆질도 당분간은 못 해 줄 거고. 그렇다고 뭐 갖고 싶다고 나한테 조르지도 않고.”
“준장… 님….”
“어? 이세화.”
말 좀 해보라며 재촉하는 기태정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러면서 그가 얼굴선을 덧그리듯 아래턱 전체에 촘촘하게 입을 맞춰왔다. 아무런 말도 없었으나 키스해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 것만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세화는 이내 고개를 슬쩍 틀었다. 남자의 입술이 깊이 맞물렸다. 가쁜 숨을 삼킬 때마다 온갖 과일 맛이 입 안에서 톡톡 터졌다.
아무것도요, 그냥 지금처럼만, 오늘처럼만…. 세화는 기태정이 듣지도 못할 속말을 타액과 함께 꼴깍꼴깍 삼켰다.
***
“아무리 수감소 안이라지만 대체 무슨 꼬락서니냐, 그게.”
김석철은 말없이 바닥으로 쏟아진 약통을 뒤적였다. 오선란이 분풀이를 하고 간 이후로 시일이 제법 지났건만, 여태 변변찮은 치료제 하나 받지 못하고 버텨야 했다.
종이에 손을 벤 사소한 상처부터 약물 중독 증상에 이르기까지, 김석철은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H3부터 복용하고 봤다. 불사신이라도 된 것처럼 금세 회복되는 것이 당연했던 육신은 이런 종류의 고통에 익숙하지 못했다. 자연 치유 과정은 김석철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디고 괴로웠다.
그런데도 집안에선 오선란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런 조치도 취해 줄 수 없었다. 그나마도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핑계를 대고서 겨우 아버지가 면회를 온 참이었다. 아니지. 어쩌면 이것도 고의일 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돕고 싶었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래도 그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라. 상대는 대장에, 무려 오씨 집안 사람이야.”
아버지의 차분한 음성에 김석철은 하마터면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걸 알면서 자식새끼의 치부를 다 떠벌렸냐고, 왜 오선란의 속을 그런 식으로 뒤집어놨냐고, 저를 팔아먹고 이세화의 얘길 다 떠벌린 건 바로 아버지 당신 아니었냐고.
그렇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될 때다. 참아야 한다. 김석철에게도 눈치가 있기는 했다.
“네가 군복을 벗는 선에서 끝내는 것으로 조율하고 있다.”
군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더라도, 복역과 같은 전과 기록이 남지 않으면 그만이라며 김석철의 아버지, 김 중령이 차갑게 말했다. 적당한 계급까지 특진을 거듭하던 그는 중령을 달자마자 제대했고, 이후로 집안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어엿한 제약 회사의 대표가 되었어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김 중령이라고 불렀다.
한 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이다. 퇴역 시 기존 장교와 원로들의 추천이 과반을 넘기면, 그 사람 또한 원로의 일원이 되어 군부의 일에 계속해서 간섭할 수 있다.
즉, 김 중령은 자신의 아들에게 그 당연한 관례와 명예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거였다.
“모자란 너를 아끼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우리 쪽 사람을 잃을 순 없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왕 사고를 치려면 석철이처럼 크게 해 먹어야 한다며 빈정거릴 사촌들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또한 최선을 다해 로비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김석철의 주민등록부에 불명예가 새겨지지 않도록.
김 중령의 말 그대로다. 기태정이 던진 고발장은 김석철 개인에 대한 규탄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집안 전체의 위신이 달려있다. 아니, 김씨 일가와 손을 잡은 군부 내 인사 모두에게 난데없이 닥쳐온 재앙이요, 피할 수 없는 화살 비였다.
물론 김석철이 감옥살이 좀 한다고 해서 당장 가세가 기울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굴복하면 다른 피라미들도 눈치를 보며 슬슬 반기를 들 거고, 저것들 언제 망하려나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아귀 떼들은 좋다고 달려들 테다. 당장 김씨 일가도 그렇게 세를 불려 왔으니, 비슷한 몸집의 포식자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기태정은 당장 흠잡을 곳 없이 증거물을 정리한 모양이더구나. 적합성이나 진위를 물고 늘어지고 싶어도, 네 허술한 거짓말에 분노한 오선란 대장이 틈을 허락할 것 같지도 않고.”
“…….”
“후우…. 그래도 해볼 만한 싸움이긴 하다. ‘추수’에 입 댔던 놈들도 면피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고, 무엇보다 하우스의 찌꺼기들이 있으니까. 평생 그런 짓거리만 하고 살아온 범죄자 집단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라고 하면, 여기서 일 더 키우기 싫은 사람들이 알아서 중재해 줄 게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
나름대로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가던 김 중령이 더는 참지 못하고 사납게 일갈했다.
“네가 생각 같은 걸 할 줄 아는 놈이었으면 2환에 불을 지르지도 않았겠지!”
“아버지….”
“앞으로 누가 무슨 도발을 하든, 하다못해 기태정이 재판장에서 네 상판대기가 어떻다 면전에 대고 품평을 해도 입 닥치고 있거라. 설마 식구들 모두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아무리 모자란 너라도 그 정도는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석철이 마약 중독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이 정도는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다. 약 좀 빨겠다고 하우스 같은 곳에 드나든 건 김석철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철없는 호기심에 범죄자들이 새로운 약을 만들겠다고 설쳐대는 걸 구경하다가 재수 없게 얽혔다고 발뺌할 계획이었다. 99%의 물증 여러 개가 모였다고 한들, 100%는 아니지 않느냐고 우기면 된다. 다행스럽게도 김 중령을 포함한 집안 어르신들에겐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모자란 자식새끼가 2환의 창고를 전소시키는 바람에 일이 커져 버렸다. 이 일로 2환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각종 무기고와 물류 창고가 밀집한 곳에 접근조차 불가능해지자, 곳곳에서 아우성을 쳤다. 점잖게 중립을 지키던 파벌에서도 본인들의 자산에 직접적인 피해가 오자 날카롭게 이를 드러냈다.
그래 놓고선 김석철은 그게 최선이었다는 속 터지는 소리나 했다. 김 중령은 한숨을 쉬며 마른 얼굴을 쓸었다. 저게 하나뿐인 자식새끼만 아니었어도 입을 쭉 찢어 놨을 텐데.
“하다못해 오선란에게 수작질을 부리고 있었다는 건 언급이라도 해 줬어야 할 거 아니냐! 혼자 일을 봉합할 주변머리도 없으면서 왜 그딴 짓을 벌여, 왜!”
“아버지,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이세화 그게 실은….”
“더 들을 것도 없다. 앞으로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 그 새끼가 오선란 대장과 뭔가 있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오선란이 좆이 빠지게 찾던 사람이 이세화인 것 같다고요!”
“…뭐?”
“그래서 오선란이 저한테 그렇게 화를 냈던 겁니다, 일이 꼬였다고….”
언젠가 거나하게 취한 국가 원수가 오선란은 간절히 찾는 사람이 있어 절대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고 떠벌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해 주는 거라고.
오선란이 예전의 실험에 관해 집착적으로 찾아 헤맸다는 흔적이 남아 있어서, 다들 이와 관련한 일일 거라 추측하긴 했다. 그래도 정확한 사연은 알지 못했고,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중요한 건 오씨 집안의 대장급 인사가 이 문제로 영영 발목이 묶였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그 새끼가 오선란의 혼외자인 것 같아요.”
“혼외자? 오선란한테 그런 게 있었다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그래도 오선란 본인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기태정은 이세화를 이용하려고 들 거고, 오선란은 결론이 나기까진 어쨌든 이세화를 지키고 싶어 할 테니… 둘의 싸움으로 슬쩍 무게를 실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석철이 이를 아득 갈았다. 아직도 이 일만 생각하면 천불이 일었다.
“이세화가 기태정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뭐라고?”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김 중령이 대경하며 김석철을 돌아보았다.
“설마 네가 만들었다던 그 약물 때문이냐?”
“네. 그러니 이세화가 주축으로 한 짓이라고 몰아가긴 더더욱 쉽지 싶어요. 놈이 저에게 약 말아 주면서 요구했던 조건도 성 안에서 살 수 있는 신분증이었으니… 팔자 좀 고쳐보겠다고 눈이 뒤집힌 천것의 소행이라 포장하기 딱 좋죠.”
게다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참고했던 약물 제조 관련 문서는 특급 비밀까지도 아니었다. 군부 내에서 비슷한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문서 자체에 누구나 접근 가능한 건 아니었어도, 이러이러한 것이 있지 않으냐고 건너 건너 아는 장교에게 슬쩍 묻기만 해도 줄줄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을 거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썩을 대로 썩은 군부의 안은 생각보다 허술했고, 인맥과 돈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었다. 물론 이렇게 큰일이 터진다면 얘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어쨌든 문서 유출에 대한 책임을 덜기 위해서라도 담당 부처에선 이세화를 쥐잡듯 잡을 것이다.
말을 꾸미기도 딱 좋았다. 간악한 범죄자들이 작정하고 벌인 짓인데, 우리가 뭘 어쩔 도리가 있었겠냐고 우는소리를 하면 되니까.
이렇게 모든 상황이 이세화가 진범이라고 몰아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기태정을 압박하기 시작할 거다. 김석철이 제대한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냐고, 너도 이쯤에서 양보하라고.
당장은 치욕스러워도, 김석철은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하다만… 그래도 시간이 좀 흐른 후 집에서 힘을 써준다면 복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태정에겐 없고 저에겐 있는 것. 김석철은 출신도 모호한 하자품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가문이라는 무기를 마음껏 휘둘러 볼 생각이었다.
“그러니 아버지, 어떻게든 이세화를 재판장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문서나 영상 같은 증거 말고, 이세화를 직접 데리고 나오라고 기태정을 압박해야 해요. 나이도 어린, 평생을 밑바닥에서 살았던 놈입니다. 사방에서 네가 한 짓 아니냐고 물어뜯는 걸 제까짓 게 어떻게 견디겠어요.”
***
“주사? 그걸 왜 네가 직접 놔.”
기태정의 미간에 골이 팼다. 막 진찰을 받고 온 이세화가 들고 온 봉투 속 내용물이 범상치 않았던 탓이다.
“매일 시간 맞춰서 오는 것도 일이잖아요.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바늘 찌르는 건 병원 사람들보다 제가 더 잘할걸요?”
“까불지, 또.”
봉투를 잡아채며 기태정이 턱짓했다.
“잔말 말고 병원에서 주사 맞아.”
“평범한 사람들도 안정제 정도는 집에서 자가 투여하고 그런대요.”
“그래서 네가 평범해? 아니잖아.”
“에이. 어차피 혈관에 놓는 주사도 아닌데.”
이세화가 배시시 웃으며 기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잖아요. 평생 이걸로 밥 벌어 먹고살았는데.’ 같은 헛소리나 하면서.
이게 귀엽다, 귀엽다 해 줬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기태정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세화에겐 당장 시정하라고 날카롭게 명령하는 것보다, 시차를 두고 살살 얼러주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관사로 돌아가 같이 저녁 먹고, 함께 씻으면서 부드럽게 채근하면 결국은 못 이긴 척 제 뜻을 따라줄 거다.
“음?”
이세화를 데리고 안으로 이동하려는데, 봉투 안에서 낯선 무게감이 느껴졌다. 약이 든 앰풀에 뭔가 턱턱 부딪히는 소리가 어쩐지 이질적이라 다시 안을 훑어 보자, 박스 아래로 깔린 새까만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대충 보기에도 일부러 숨겨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건 또 뭐야.”
아마도 이세화가 숨기고 싶어 했을 그 물건은 손바닥만 한 태블릿이었다.
“엇, 잠깐만요! 그거는…!”
태평하게 굴던 이세화가 깜짝 놀라 저에게 달려들었다. 팔을 쭉 뻗고는 콩콩 뛰면서 돌려달라고,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고 하는 꼴이, 당연한 말이지만 몹시 수상쩍었다.
핸드폰은 확실히 아닌데. 제 명령 없이 통신 장비를 내어 줄 간 큰 놈도 없을 거고. 혹시 오선란이 수를 쓴 건가?
순식간에 심각해진 기태정은 이세화의 손이 닿지 않도록 물건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재빠르게 엄지로 화면을 터치하자, 미색의 배경 위로 동글동글한 글씨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산부(남성용) 수첩.
태아의 하루하루를 기록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