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80)화 (80/144)

#077

“글쎄요, 음, 평범하게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 평범하게.”

내가 널 김 소위의 공범으로 심문하지 않아도 됐을 법한 첫 만남을 상상해 보라고 하자, 이세화는 난감해하며 미간에 힘을 꾹 줬다.

“그랬으면, 으음….”

임신하면 자길 닮은 게 먹고 싶어지는 건가? 생각에 잠긴 이세화의 뺨은 붉은 사과 같았고, 울먹이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코끝은 또 체리 같기도 했다.

물론 떡도 잘 어울렸다. 오선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진 모르겠으나, 백설기….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저 몸은 하얗고 따끈따끈하고 쫀득쫀득하니까.

“그럼 바로 준장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요?”

이세화에게서 떡과 과일의 흔적을 찾아내느라 분주히 움직이던 기태정의 눈길이 느리게 멈추었다.

“이사님이라고 안 부르고 곧장 준장님이라고 불렀을 것 같은데….”

아… 그랬었지.

다른 놈들 시선을 피해 하우스를 통째로 묶어 두려고, 이사라는 말도 안 되는 직함을 두르고서 이세화와 처음 만났다. 이사님, 이사님 하면서 제 아래에서 질질 짜는 얼굴을 보고 꼴린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형이니 삼촌이니 허깨비 같은 호칭이나 고민하던 게 우스웠다. 상성이 잘 맞는 몸뚱어리가 주는 감촉이 좋아서, 이세화의 말마따나 이런 짓이 오랜만이라서… 잠시 들떴던 모양이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첫 만남에서 이세화에게 가혹하게 굴지 않았더라도, 제 신분은 변함없이 준장이었을 테니까.

김 소위의 일이 아니었더라도 평생 가까워질 일 없었을 상대였다. 4환 주민인 이세화의 처지를 비웃고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공군 준장까지 달지 않았더라면, 지금껏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서 이세화와 마주치려면 제가 그 지옥도에서 살아남아 준장 계급장을 다는 것 말곤 방도가 없는데. 다른 우연한 계기가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이세화의 입장에서도 버티고 버텨 하우스 실장까지 올라간 것이 최선이었을 거다. 그런 놈 둘이 만나 엮인다고 한들, 마약상과 손님 혹은 도박 선수와 공사 상대 정도가 그나마 평온한 시작이었을 테다. 어떤 식으로든 평범할 수가 없다.

혀로 볼 안쪽을 쓸어내리던 기태정은 이내 헛웃음을 삼켰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호칭?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뭘 아쉬워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조건들 다 떼어놓고서 그저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한다고 해도… 이세화가 친한 척 형이니 뭐니 그렇게 불러 댔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꺾어 버렸을 거면서. 우는 얼굴을 보고선 실컷 박고 싶다는 생각이나 했을 거면서.

“아니면….”

됐으니 얌전히 입이나 벌리라고, 아니 키스해도 되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주어진 울타리 밖을 상상하지 못하는 건 이세화도 마찬가지인데, 답답한 꼴을 더 두고 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태정 씨…?”

“…뭐?”

울긋불긋 잇자국이 가득한 목덜미로 손을 뻗었을 때, 이 떡 같고 체리 같은 게 평소라면 입에도 올리지 못했을 건방진 소리를 읊어 댔다.

“형이나 삼촌은 좀 그렇고… 공적인? 뭐라고 해야 하죠, 하여튼… 사회 생활하다가 만난 사이는 다들 그렇게 시작하니까….”

그렇다고 기태정 씨라고 부르면 처음보다 더 많이 맞을 것 같고, 하면서 이세화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자기 나름대로 계속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삼촌, 은 확실히 아니었을 것 같아요. 아저씨나 삼촌이나 별 차이 없잖아요? 준장님이 그 정도로 나이가 많다고 느껴지진 않아서요.”

“…….”

“태정이 형은…, 글쎄요. 이것도 무조건 한 대 맞고 시작했을 것 같은데.”

“…….”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세요?”

세화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모로 누웠던 몸을 뒤집었다. 고작 그 정도 움직이는 걸로도 근육이 어릿하게 땅겨 왔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덕분에 숨을 고를 수 있어서 다른 화두가 떠오른 것이 반갑긴 했다. 저더러 민망한 곳을 만지면 얼마나 좋은지 말해 보라는 것보다야 훨씬 더 수월하게 답할 수 있기도 했고….

기태정과의 섹스는 언제나 힘겨웠다. 오늘은 특히 그랬다. 다만 이전엔 차곡차곡 쌓이는 열락에 온전한 정신으로 있기 어려웠던 거라면, 지금은 마음이 덧입혀진 탓인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을 전부 인정하고 나니,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원래도 그리 높지 않았던 자극의 역치는 이젠 거의 밑바닥에 머무르고 있었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활짝 열렸다. 정신적인 만족감이 너무 커서, 육체가 느끼는 쾌락 같은 건 세세하게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좋아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 손님 안 받으면 네 거래 다 끊기는 거라던 협박도, 순순히 굴지 않으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어주고 휘둘리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원해서, 하고 싶어서, 좋아서 그의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거였다. 물론 기태정은 정도가 좀 지나치긴 했지만….

“저, 준장님….”

세화는 들키지 않게 한숨을 후 몰아쉬고, 더듬더듬 그를 찾았다.

지금 이 순간이 벅차고 좋은 것과는 별개로…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러다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 이미 몇 번이나 사정했고, 뒷구멍으로는 아직도 말간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준장님.”

슬쩍 몸을 틀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물론 세화의 체감으론 그랬고, 실제 자리에서 움직인 건 1mm는 겨우 될까 싶을 정도긴 했다.

“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신나게 채근하던 기태정은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한 발도 못 빼서 그런가? 더는 못하겠다고 빌려던 세화는 마음이 조금 약해져서, 그를 불러 놓고서도 어물대기만 했다.

“그게, 저, 더는….”

“…….”

아…, 아냐. 그래도 이 이상은 안 된다. 지친 것도 지친 건데, 졸지에 이런 문란한 감각에 휩싸인 애는 무슨 죄란 말인가. 여기저기서 곧 떼어낼 거란 말이나 실컷 듣고, 갑자기 성격 지랄맞다는 욕이나 듣고…. 그래. 차라리 몇 번이고 입으로 빨아 주고 손으로 훑어 주는 게 낫지, 더는 맥없이 그의 손에 몸을 내맡겨선 안 될 것 같다.

“저번에… 분명히 그러셨죠?”

그래서 세화는,

“저 걸레 같지 않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기태정에게 귀염을 떨어보기로 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며 코웃음을 치던 기태정의 입매가 조금씩 딱딱하게 굳어 갔다. 세화가 이 난데없는 얘길 어디서 끄집어 낸 건지 뒤늦게 떠올린 모양이었다.

“창놈 구멍처럼 보이진 않다고 하셨잖아요. 다행이에요.”

“…….”

“…그때는 상관없었지만, 지금 준장님한테 제 몸이 그렇게 느껴진다면… 많이 속상할 것 같아서요.”

평소라면 엄두도 못 냈을 건방진 소리였다. 대놓고 아양을 부리는 것 같아서 낯 뜨겁기도 했다.

“…….”

어색함에 몇 번이나 혀를 씹을 뻔했지만, 놀랍게도 다소 건방졌던 그 물음은 기태정에겐 제법 유효한 한 방이었던 것 같다. 그는 약간의 당황을 내비치긴 했어도, 불쾌해하진 않았다. 하긴, 예전에도 그랬지. 당돌하게 구는 건 싫어하지 않으니, 재미있게 놀아 달라고.

세화는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간신히 시트를 짚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시선 또한 비스듬히 따라왔다.

내가 걸레 같지 않고 몸 파는 애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를, 당신을 좋아한다는 고백으로 치환할 수 있는 사람은 기태정밖에 없다. 이 어이없는 암호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오직 저 남자뿐이다.

그래서….

당신이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조금씩 내어주고 싶다. 물론 당신이 나에게 던졌던 비수 같은 말은 아직도 이렇게나 생생하고, 그 흉터는 쉽게 지워질 것 같진 않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말할 때 저에게 얼토당토않은 환상을 품고 있다고 비웃었던 당신의 얼굴이, 너 같은 건 자신에게 그 어떤 종류의 감정도 품어선 안 된다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지만….

“…이세화.”

기태정이 검지로 세화의 턱을 치켜올렸다. 느릿한 손길이었다.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그답지 않게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이세화, 넌….”

“…….”

“처음 봤을 때보다 분명 더 어려졌는데….”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훨씬 깊었다. 이, 하고 세화, 하고 이어서 발음하는 간격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이 뻣뻣한 탈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처럼, 원래는 이렇게 살고 싶었던 것처럼… 아주 고삐가 다 풀려서는, 말끝 축 늘이면서 쫑알거리길래, 이거 갈수록 되게 어리게 군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기태정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슬쩍 넘겨주었다. 간질간질하고 살랑살랑한 손길이었다.

“분명 지금도 그러고 있긴 한데, 이상하게 오늘은….”

세화는 쌕쌕 숨만 몰아쉬었다. 가까이에서 울리는 기태정의 목소리에서 신기한 진폭이 느껴졌다. 그 울림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으나, 그는 더 말을 이어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조용히 입술을 겹치자 물 먹은 여린 살이 또 한 번 달구어진다.

“…오늘은 안 어려 보이고 어른 같아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타액을 꼴깍 삼키고서 토해 낸 세화의 실없는 말에, 기태정이 어이없어했다.

“기어오르지, 자꾸.”

그랬었나? 그 누구보다 저 남자를 무서워했는데. 그의 앞에서만 내가 어리고 악하게 굴었던가? 세화는 지난 기억을 빠르게 넘겨 보다,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잊진 않았어도, 굳이 되짚으며 상처받지 않기로 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마음껏 좋아하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했으니까, 습관처럼 주저앉더라도 금방 일어서면 되는 거다. 과거가 아니라 당장 지금의 기태정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쓸어주는 이 체온에만 집중하면서.

“저 원래 되게 쉬워요. 다들 그랬어요.”

“…….”

“체념도 빠르고, 순응도 빠르고….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바락바락 덤빈다고 여기저기서 욕도 많이 먹었어요.”

힘이 다 풀린 팔을 들어 그의 어깨 위에 얹어 보았다. 이전 같았으면 제대로 목에 감으라며 삐딱하게 명령했을 기태정은, 이젠 말없이 상체를 숙이며 자신이 쉽게 자세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세화는 기태정에게 얌전히 매달렸다. 손에 쥔 것이 얼마나 곱고 투명한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나를 안아 주고 있어서,

그래서 세화는 더는 비참하지 않았다.

***

“저 손만 씻고 올게요.”

손에 덕지덕지 묻은 벌건 물과 과일 껍질 때문에 곤란해서 그랬던 건데, 기태정은 수작 부리지 말라는 듯 덥석 제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세화는 들키지 않게 한숨만 폭 내쉬었다.

조금 전, 아니 한참 전. 기태정은 더없이 부드럽게 키스해 주었다. 예쁜 짓 하느라 수고했다는 듯이.

마주한 그의 눈빛이 어쩐지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세화는 조금은 뿌듯하게 부푼 가슴으로, 그의 빗장뼈에 조심스레 이마를 기댔다. 솔직해지길 잘했다고,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런데….

이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입술이 온몸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결국 엉엉 울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자의 눈동자에 깃들었던 건 따뜻한 무언가가 아니라, 잔뜩 끓어오르는 열기로 돌아 버리기 직전의 경고였다는 걸.

격렬했던 사정도 여러 차례였고, 여진 같이 밀려온 절정은 몇 번이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더는 못 하겠다고 질질 짜면서 빌자, 기태정은 그제야 선심 쓰듯 그의 성기를 내어주었다.

어설프게 물고 빨면서 겨우 사정을 유도하고, 그가 젖은 제복을 벗으며 씻으러 가자고 하길래 드디어 끝이 난 건가 보다, 했다.

그렇지만… 작은 수영장 정도 되는 거대한 규모의 욕탕에 온수를 가득 채우는 동안, 샤워 부스 안에서 한 번 더 그의 좆을 빨았고, 또 빨려야 했다.

물이 어느 정도 차오른 다음엔 욕조의 턱을 붙들고서 반쯤 둥실둥실 떠오른 채로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기도 했다. 탕 안의 계단에 무릎을 대고 있기도 했고, 힘을 크게 줄 필요도 없어 크게 부담이 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배가 아프진 않았다는 거지, 힘들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침대 위에선 욕심껏 구멍을 탐할 수 없었다는 기태정의 항변을 들었을 땐…. 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소리를 빽 지를 뻔했다.

“더 해도 될 것 같은데.”

기태정은 자기 자지를 물던 구멍이 손가락이나 혀로 만족이나 하겠냐며, 끈덕지게 달라 붙어 왔다.

“…아뇨, 못 해요. 진짜로 저 죽을 수도 있어요….”

다 갈라진 목소리가 처참했다.

하도 쥐어짜여 물처럼 투명해진 정액 몇 방울을 수면 위로 떨구고 나서야, 기태정 또한 제 얼굴에 대고 사정했다. 이 정도면 사정‘해준’ 거다. 그리곤 욕탕의 물이 더러워졌으니 새로 갈자고 하면서, 그동안 또 샤워 부스 안에서 엉키고… 그러다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눈을 뜨면 좆이 입에 물려있고, 아니면 기태정이 자신의 것을 집어삼키고 있고….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겨우 다시 욕탕 속으로 들어온 거였다.

“너 아까 내 얼굴 위로 계속 엉덩이 내밀었잖아.”

“제, 제가 언제….”

“거의 정신 놨을 때, 더 빨아달라는 듯이 쭉 빼고서 흔들었어. 내 뺨이 다 뭉개질 정도로.”

기태정이 커다란 배스 타올로 몸을 둘둘 감아 주며, 짓궂게 속삭였다.

“정신 놨을 때잖아요, 그거는….”

“그때만큼 솔직해지는 때도 없지.”

세화는 대꾸하길 포기한 채로 몸에 힘을 쭉 뺐다. 따뜻한 물에 잠겨,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자니 노곤함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마지막으로 머릿속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드디어 욕탕 속이었다. 혹시나 또 수상쩍은 짓을 하고 샤워 부스로 가려는 거 아닐까 의심했는데… 사방을 둘러싼 물건들을 보고서야 이 지긋한 애무가 정말로 끝이 났다는 걸 알았다.

언제 차려 둔 건지 널찍한 머리받이 양옆과 드높은 욕조의 턱을 따라 아이스 버킷이 빼곡히 놓여있었다. 안에 담긴 것은 온갖 종류의 과일이었다. 물론 비중이 가장 컸던 건 체리와 블루베리, 그리고 사과였다.

“너무 달아.”

쪼글쪼글해진 세화의 손가락을 한참이나 빨던 기태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거두었다. 세화는 새콤한 과육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단가? 물론 맛있고, 좋기는 한데…. 사실 세화가 바라던 맛과는 살짝 달랐다. 좀 더 달아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체리가 아니라, 기태정이 안겨 주었던 그 케이크가 먹고 싶었던 것 같다. 분홍빛 크림을 두른 체리 맛 케이크.

“더 안 먹어?”

“지금은 괜찮아요.”

정확한 목표물을 떠올리자, 놀랍게도 맛있었던 과일이 물리기 시작했다. 양껏 먹어서 그런지 속이 쓰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배불리 먹은, 어려진 어른 이세화한테 묻는 건데.”

“하하, 그게 뭐예요.”

여전히 무뚝뚝하긴 했어도, 날카로운 기는 전부 덜어낸 그 음색이 싫지 않아서 세화는 작게 웃었다.

“이세화.”

“네?”

“보호자, 나로 올려.”

“…….”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던 입가가 지퍼라도 채운 듯 일자로 딱 다물렸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떨구었다. 내내 잊고 있었던 무거운 짐이 갑자기 어깨 위로 얹어진 기분이었다.

“아….”

좋은 것만 생각하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미루고 있었다. 배 속 아이와 관련한 모든 일을.

“…저는,”

“내가 할 소린 아니긴 한데, 너 보고 있으면.”

기태정은 품속의 세화를 돌려세웠다. 뿌옇게 어린 수증기 사이로,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늘, 마냥 좋았는데. 행복했는데. 무언가 해낸 것 같아서 되게 뿌듯했는데…. 갑자기 어렵고 아픈 주제를 헤집는 게 싫어서, 세화는 가만히 물에 잠긴 자신의 손만 바라봤다.

“누가 말려 주길 바라는 것 같아.”

“…뭘요?”

타올이 마르지 않도록 뜨거운 물을 끼얹어 주다, 기태정이 툭 말을 던졌다.

“아이 낳아도 된다고 떠밀어 줬으면, 지우지 말라고 말려 줬으면, 그렇게 보여. 너.”

“제, 제가 언제….”

초음파 봤을 때, 심장 소리 들었을 때, 홀로그램 손에 쥐었을 때… 그리고 뾰족하게 날을 세우면서 아기한테 욕하지 말라고 했을 때. 조금 전 음란하게 굴면 아이가 싫어할 거라고 망설였을 때. 기태정이 인상적이었던 자신의 순간을 헤아릴 때마다, 세화는 손끝이 저렸다.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맥박이 마구 날뛰었다.

“…그럴 리가요.”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듯 잠시 굳어 있던 세화는, 크게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떤 방향으로든 책임지겠다고 하긴 했지만.”

기태정은 세화의 말을 툭 자르곤, 검지로 명치 아래를 아프지 않게 찔렀다. 그렇게 두어 번 콕콕 건드리다, 조심스럽게 세화의 배 전체를 감쌌다.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진 않았어. 빈말이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아이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게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

“…….”

“책임…, 글쎄. 돈 걱정 없이 키울 수 있게 도와주는 거? 뭔가 문제가 생기면 늘 돈 발라 처리해 왔으니, 이번에도 그런 방식만 떠올렸지. 네가 필요로 하는 만큼 돈 주고, 사람 붙여 주면 될 거라고.”

험하고 천박한 욕설을 전부 거두어 낸 남자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저 조용히 떠오르는 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꺼려지는 건 사실이야. 너랑 나 모두 공감한 부분이잖아. 내 핏줄 받아 태어나 봤자 애가 제대로 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거.”

“…….”

“그렇지만 만약 네가 정말로 아이를 원하고 있는 거라면.”

젖은 머리칼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세화는 눈을 내리깐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돌연 폭격처럼 쏟아지는 기태정의 말이, 꼭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렸고…. 또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때보다 훨씬 더, 진심처럼 느껴져서….

“오선란 대장 말처럼, 어떤 연유로 생긴 아이든 네 핏줄을, 네 가족을 가지고 싶은 거라면….”

“…….”

“…나도 돈만 덜렁 던져 주고서 책임진 거라고 여기지 않을 테니까.”

준장님. 그를 부르는 말은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입 안에서 부서졌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속눈썹에 맺혀 있던 수분기가 화드득 쏟아져 잠시 시야가 흐릿했다.

“물론 지우겠다고 해도 말리진 않을 거고, 그런데.”

“…….”

“뭐가 됐든 네 보호자는 나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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