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79)화 (79/144)
  • #076

    “아, 그게, 그래도….”

    기태정이 손바닥을 탁탁 털자 천 쪼가리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세화는 작게 딸꾹질을 했다. 보통의 옷감보다 탄성이 훨씬 좋은 속옷이, 심지어 잔뜩 축축해진 게… 저렇게 종잇장처럼 찢어질 수도 있는 건가…?

    “좆만 안 박으면 되는 거잖아.”

    놀랍게도 그는 세화의 다리를 활짝 벌리거나 몸을 휙 뒤집지는 않았다.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하체를 접고서 수직으로 아래를 콱콱 찍어 대는 거, 엉덩이만 들게 하고서 뒤에서 쑤시는 거 혹은 구멍을 핥아 주는 거… 제일 좋아하는 체위인 거 다 아는데도 말이다.

    “애 가졌을 때도 다들 씹질 잘만 하는 것 같긴 하던데… 넌 조금, 상황이 그러니까.”

    젖은 속옷을 아무렇게나 찢을 정도로 잔뜩 힘을 주고 있는 건 분명한데, 저를 몰아가는 손길은 예전처럼 거칠지 않았다. 기태정은 세화의 얼굴 옆에 팔꿈치를 세운 채로, 몸과 몸 사이의 간격을 어느 정도 벌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단단한 그의 몸이 저를 깔아뭉갤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낯설고 어설픈 배려가 어떤 음란한 속삭임이나 애무보다 세화를 달뜨게 했다.

    “왜 이렇게 물을 쏟아.”

    …물론 말버릇은 여전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빠른 걸 보니까… 제복 좋아하는 거 맞네, 너.”

    골을 울리는 낮은 속삭임에 민망하게도 엉덩이골을 타고 애액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게 아니라….”

    “아니라?”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남자의 목소리엔 덤덤하지만 능글맞은 기색이 가득했다.

    “여기 준장님 침실, 맞죠….”

    침대 헤드 쪽으로 꿈틀꿈틀 몸을 끌어올리며 세화가 두리번거렸다.

    “누우니까 온통 준장님 향이 나서, 그래서….”

    뭐 대단한 걸 하지도 않았는데, 기태정의 말마따나 벌써부터 앞뒤로 물을 흘리고 있는 게 좀 부끄러웠다. 이런 행위가 제법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반응이 확실히 빠르긴 했다.

    “어떻게 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세화는 결국 슬금슬금 말을 흐렸다. 기태정은 적당한 선이라는 걸 몰랐다. 여러 방면에서 그랬지만 특히 섹스는 더욱 그랬다. 민망하기도 했고, 벅차기도 해서 우선 거절부터 하고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이런 몸으로 야한 짓을 하면 안 되지 않을까, 그런 염려가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렇지만.

    솔직해지자면, 사실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여태 나누었던 그 어떤 섹스보다 손장난 같은 지금의 애무가 좋았다. 저를 함부로 다루지 않으려 애쓰는 남자의 노력이, 그러면서도 자신을 보고 잔뜩 흥분한 기태정의 얼굴이….

    “…….”

    민망함에 꾸물거리던 세화를 잠시 두고 보던 기태정은, 별안간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앗!”

    살벌한 소리에 깜짝 놀랄 새도 없이, 몸이 덥석 붙들렸다. 아래로 쑥 당겨지는 것과 동시에 이전보다 훨씬 더 격렬한 키스가 들이닥쳤다.

    “흣, 준… 장님….”

    “…너, 일부러 이래?”

    “아…, 무슨….”

    “그런 말로 사람 홀리는 거 어디서 배웠어, 어?”

    “그, 그런 거 아닌, 흐읏!”

    기태정의 목에 느슨하게 걸린 타이가 자꾸만 맨살을 간지럽혔다. 갑옷이라도 두른 것 같은 단단한 몸을 슬쩍 밀어내려는데, 어쩐지 손에 걸리는 부근이 조금 축축했다. 의아함에 흘끔 살펴보니, 정복 셔츠가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특히 소맷부리는 거의 물로 끼얹은 수준이라, 길게 일어선 굵은 핏줄까지 전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세화는 침을 꼴깍 삼키며 다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서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제가 흘린 체액 때문에 멀쩡했던 옷이 이 지경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젖꼭지도 이렇게 커져서.”

    세화가 갑자기 민망해하는 이유를 알아챘는지, 기태정이 작게 웃으며 볼록 솟은 유실을 톡톡 건드렸다.

    “쳐다만 봤다고 발딱 서는 게 말이 돼?”

    “그…, 오랜, 만이라서….”

    “아하, 오랜만이라서.”

    “흐… 읏!”

    “그래서 이렇게 씹물을 질질 흘리는 거였구나. 여기도 빨갛게 부풀고.”

    기태정은 마른 가슴살을 있는 대로 그러모으고는, 젖꽃판 전체를 흡입하듯 입에 머금었다.

    “…이거 어떡할래, 너.”

    과실 같은 작은 살덩이를 물고서 남자가 속삭였다. 웃음기와 수분기가 잔뜩 배어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흠뻑 젖었잖아. 나 여분 시트 어디에 두는지도 모르는데.”

    엉덩이 밑으로 짙은 자국이 점점이 번져 가는 것을 지적하자, 쾌감으로 몽롱하게 눈을 풀고 있던 이세화의 낯이 당황으로 쩍 얼어붙었다.

    “침대 새로 사야겠네.”

    당연한 말이지만 침대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고작 이 정도로 매트리스를 바꿔야 한다면, 가구 회사부터 고소해야 할 거다.

    “이거 내 키에 맞게 맞춤 제작한 거라 완성되기까지 시간 제법 걸릴 텐데.”

    만약 다시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들 전혀 문제 될 것 없었다. 고작 침대가 뭐 얼마나 한다고. 다만, 이런 말을 했을 때 이세화가 곤란해할 걸 알아서.

    “…그럼 어떡, 해요?”

    그래,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어서 그냥 해 본 소리였다.

    “어떡하긴. 새 침대 올 때까지 네 방에서 같이 자야지, 그리고….”

    부끄러움에 온몸이 벌게진 이세화를 옆으로 뉘여 주며, 오금 뒤를 눌러 다리를 기역 자로 접어 올렸다.

    “흣, 준장님, 이건….”

    정상위나 후배위보다 하복부에 압박이 덜 가는 것과 동시에, 골반을 쥐고 살짝만 틀어도 뒷구멍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세였다. 오히려 마주 보고 다릴 벌리고 있을 때보다 아래가 훤히 드러나서, 물고 빨기는 훨씬 편할 것 같았다.

    “너 아기집 조금 내려와 있다며.”

    “…….”

    “그런 몸에다 대고 좆질할 정도로 섹스에 환장하진 않았어.”

    안 넣어, 끝까지 안 해. 기태정은 다시 한 번 힘주어 강조했다. 태아처럼 몸을 말고서 모로 누운 이세화는 앞만 보고서, 커다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다 돌연 동그랗게 어깨를 말고는, 뙤약볕 아래 다 녹은 초콜릿 같은 얼굴을 하고서 웃었다. 히히. 그렇게 받아적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뭐랄까. 그래, 말간. 그저 천진하고 말간 이세화의 웃음에 기태정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런 순간에 기습을 당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패잔병처럼.

    “…좋아하시면서.”

    “…….”

    “준장님 엄청 좋아하시잖아요, 그… 하는 거.”

    꼭 낯선 이를 품에 안고 있는 것 같다. 기태정은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럴 땐 얼굴 근육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장난… 이었어요.”

    기태정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이세화가 머쓱해하며 몸을 움츠렸다. 긴장하고 있는지 얕게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여전히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리고서 저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아, 그리고 지금 생각난 건데요… 아이한테 이런 거, 들려주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

    “진찰 본 지 며칠 지났으니까 지금쯤이면 귀가 돋았을 수도 있고… 음, 나 중위님 말로는 해결, 하기 전까지는 저도 아이도 보통 사람들이랑 똑같은 과정을 거칠, 아…!”

    “…내가, 씨발.”

    기태정은 눈앞에 놓인 엉덩잇살을 있는 대로 잡아 벌리고, 성마르게 구멍을 문질렀다. 발끝에서부터 영문을 알 수 없는 열기가 치솟았다.

    조금 전 뭘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던 이세화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울컥 치미는 낯선 감각을 설명할 길도, 해소할 방법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손에 닿는 대로 밀가루 반죽 같은 말캉한 살을 움켜쥐고 주물러 댔다.

    “씨발, 너 때문에….”

    이걸 해치고 싶진 않은데, 씹어 삼키고 싶기도 하다. 울 때가 제일 예쁘긴 한데, 숨기고 있던 다른 표정도 궁금해진다. 이런 모순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떠나, 불필요하다. 하등 쓸모가 없는 고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세화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속이 푹푹 끓었다.

    “아, 안 돼요, 잠깐….”

    “좋다고 자지러지고 있잖아, 너. 그럼 애도 좋아하겠지.”

    손가락 틈으로 마시멜로처럼 말캉한 살이 비집고 나온다. 깡마른 주제에 엉덩이와 회음부에만 봉긋하게 살집이 올랐다.

    “하여튼 야해 빠져서….”

    그쪽으로 집요하게 꽂히는 시선을 느꼈는지, 젖은 구멍이 움찔거리며 애액을 쏟아냈다. 실처럼 길게 늘어지던 끈적끈적하고 투명한 액은 어느새 물처럼 녹아 허연 살결 위로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멍에 힘 좀 풀어.”

    “아흐, 읏…!”

    “아다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조일까.”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밀어 넣은 채 내벽을 쓱 훑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야한 물이 사방으로 핏핏 튀었다.

    “소리 들려?”

    내 좆 끝까지 받아먹었을 때도 이만큼 젖진 않았잖아. 귓바퀴를 깨물며 속삭이자, 이세화는 더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가려 버렸다. 어찌나 부끄러워하는지 여기까지 열감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세화.”

    “…….”

    “뭐가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워?”

    “그, 그거야 당연히….”

    “애까지 가졌으면서 동정처럼 구니까, 정숙한 기혼자 따먹는 것 같아서 기분 되게 이상하다고.”

    “아, 제발, 그런 말… 준장님….”

    뜨끈한 속살은 안을 헤집는 손길이 기꺼운 듯, 꼭 물고선 놓아줄 생각을 안 했다. 그 음탕한 조임을 따라 잔뜩 고인 애액이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뚝뚝 흘러내렸다.

    “음, 물 많은 과일 으깨는 것 같아.”

    향긋하고, 수분기 많고, 끈적끈적한 그런 거. 이를테면 복숭아라거나.

    “속 헤집을 때마다 끈적끈적한 게 줄줄 흘러서,”

    “그러지 마세, 아….”

    “애 들을까 봐 걱정된다며. 그래서 점잖게 말하고 있잖아.”

    손을 입구까지 완전히 물렸다가, 다시 푹 찔러넣었다. 주르륵 딸려 나오던 애액이 철벅거리며 도로 안으로 처박혔다. 투명한 비말이 퍽퍽 소리를 내며 터진다. 한껏 벌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구멍은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주름 하나 보이질 않았다.

    “아, 싫, 그런… 그런 말….”

    “그럼 제일 듣기 싫은 거 하나만 골라 봐.”

    “…네?”

    “내가 하는 야한 말 중에, 제일 싫은 거. 그 말은 입에 안 올리도록 노력할 테니까.”

    “정말요?”

    너그러워 보여도 수상쩍은 게 분명한 제안인데, 이세화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을 했다. 기태정은 자기가 함정을 파 놓고서도 어쩐지 답답해졌다. 아니. 저렇게 홀라당 잘 속아서 대체 어떻게 하우스 실장까지 달았던 거지?

    “그, 그럼….”

    “그럼?”

    “…물, 이요.”

    “물?”

    “…씨, 씹물….”

    의외의 대답에 기태정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자지나 구멍, 뭐 그런 직접적인 묘사를 고를 줄 알았는데.

    “그, 물… 자꾸 흘린다는… 거….”

    “아하. 씹물 흐른다는 얘기만 안 하면 덜 부끄러울 것 같아?”

    “아, 네, 그, 으응, 그것… 만….”

    “그래. 그럼 이제 그 말은 안 할 테니까… 너도 내가 바라는 거 하나 들어줘.”

    구멍을 살살 때리듯 손가락을 세게 쳐올리자 멀건 씹물, 아니 체액이 왈칵 쏟아졌다.

    “싫고 안 되는 거 말고, 나랑 씹질할 때 좋은 걸 말해 봐.”

    “…네?”

    “내가 어딜 씹고 빨아 주면 속살이 떨리는지, 어떻게 찔러 주면 좋겠다든지, 지금 기분이 어떻다든지… 그런 것들.”

    기태정은 이세화를 꼭 끌어안았다. 둥글게 구부린 등 뒤로 자신의 가슴을 맞대고 있으니, 맞춤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한 품에 쏙 들어온다.

    “흣…!”

    열매처럼 빨갛게 물든 젖꼭지를 비벼 주다 민둥한 좆으로 손을 뻗으니, 뭘 하기도 전에 울음 같은 신음부터 잔뜩 흘렸다.

    “주, 준장니임….”

    애원하는 말끝이 평소보다 길게 늘어진다. 일부러 애교를 부리는 것 같진 않고, 마음이 녹으니 저도 모르게 내보이는 어린 모습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좋아, 싫어?”

    “…, 아, 요….”

    “안 들려.”

    귀두 아래 움푹 팬 곳과 소대를 튕기듯 문지르자 이세화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잘게 몸을 떨었다.

    “이세화. 약속 지켜야지?”

    “아흣!”

    “씹물 소리 듣기 싫다며?”

    “흐으… 조, 좋….”

    “뭐라고?”

    “좋, 아… 요….”

    “아아, 여기? 자지 주물러 주니까 좋아?”

    “응, 네, 좋… 흐읏….”

    “이렇게 좆 잡고 흔들면서 구멍도 씹어 줄까? 그럼 더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아, 아니….”

    “부끄러워서 싫은 거 말고, 네 몸이 느끼기에 좋은 건지 묻는 거잖아.”

    “그게….”

    이세화는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콱 찌푸리는 걸 보니, 이제야 저만 손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준장님 이거, 불공평, 한 것….”

    “그걸 이제 알았어?”

    싫은 것 하나만 빼는 것과 좋은 건 전부 읊어 달라는 것. 당연히 이세화에게 불리한 거래였다.

    “속은 사람 잘못이지. 너 하우스에서 패 돌릴 때도 그랬을 거잖아.”

    “아, 으읏!”

    손가락 두 개를 절반 정도만 쑤셔 넣은 채로 가위질하듯 벌려 댔다. 여기서 조금만 더 크게 휘저어주면 이세화가 절절 끓는 곳이 나온다. 음. 한 번 크게 울리고 앞을 만져 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준장, 준장님, 저, 저어….”

    이세화가 꼼지락꼼지락 상체를 틀며 기태정을 돌아보았다. 살짝 입을 벌리고서 고개를 기울이는 것을 보니, 키스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준장님….”

    유혹도 재촉도 아닌 어설픈 부름이긴 했으나,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기꺼이 몸을 기울이고 입술을 맞댔다. 웅웅 목을 울리는 이세화의 신음마저 전부 집어삼킬 정도로 탐욕스러운 입맞춤이었다.

    키스는 싫다고, 뒤를 어떻게 쑤셔도 상관없지만 그건 싫다고 거부하던 게 이제는 먼저 입을 맞춰달라고 졸라 대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더 큰 쾌락이 두려워서 어떻게든 제 시선을 돌려보려는 꼼수인 것 같았지만….

    저렇게 속이 다 보이는 게 어떻게 실장까지 달았는지 모르겠다. 피식 웃던 기태정은, 그러다 문득… 처음부터 이세화를 험하게 다루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없게도 저에게 순순히 몸을 내맡기고 있는, 수가 다 읽히는 이세화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점처럼 조그맣던 궁금점은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내 진짜 신분은 뭐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혔다면. 김 소위가 먹인 약 때문에 앞으로 너 임신할 수도 있는데 알고는 있냐고. 그렇게 모든 걸 밝히고서 시작했더라면….

    그래도 넌 나를 좋아하게 됐을까? 그때는 아까처럼 웃으면서 안기고, 조금 더 빨리 키스해 달라고 졸랐을까?

    “준, 장님…?”

    입술을 머금은 채 갑자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이세화가 작게 저를 불렀다. 생기가 넘치는 따뜻한 숨이 흘러 들어왔다. 죽은 듯 멈춰 버린 사고를, 기태정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이세화.”

    “…네?”

    “만약 평범하게 만났더라면… 넌 날 뭐라고 불렀을 것 같아?”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이세화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준장님 말고, 날 뭐라고 불렀을 것 같냐고.”

    뺨을 두드리는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이세화의 한쪽 어깨가 슬쩍 올라갔다. 양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이내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걷어 올리며 저를 정시한다.

    “갑자기 그건 왜….”

    “나도 너 불러 달라는 대로 불러 주고 있잖아.”

    돌연 명치 아래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졌다. 아니, 간지러운 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가시 같은 게 속을 갉작이는 것 같기도 하고. 자꾸만 울렁거려서 뭐든 토해 내고 싶기도 하고….

    “아읏…!”

    기태정은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떨쳐 내려, 엄지로 젖은 회음부를 꾹꾹 눌렀다. 갑자기 안팎으로 가해지는 압박 덕에 이세화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준…, 그거 그만, 아앗!”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아저씨는 좀 그렇고….”

    그러면서 기태정은, 아마도 오늘 이세화를 처음 봤을 오선란이 거리낌 없이 입에 담았던 다정한 세 음절을 속으로만 중얼거려보았다.

    세화야.

    “형? 삼촌?”

    내가 그렇게 불러 주면. 성은 떼고 이름으로만 부르면… 너는 이번엔 또 어떤 얼굴을 할까. 울까, 웃을까.

    “빨리.”

    겸연쩍은 마음에 소리 내어 발음하지는 못하고 괜히 이세화만 독촉했다. 그러면서 입속말로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세화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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