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78)화 (78/144)

#075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별로였어?”

답을 독촉하는 기태정의 목소리에선 아닐 거라는 확신이 묻어났다.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하다. 당황해서 입술만 달싹이던 세화는, 이내 대꾸를 포기하고서 비스듬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체리, 블루베리… 사과였던가?”

그것도 잠시였다. 웃음기가 잔뜩 밴 목소리로, 그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얘기를 꺼낸 탓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퍼뜩 고개를 치켜들고 말았다.

“…….”

“눈치나 살살 보길래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먹고 싶어서 저러나, 했더니.”

“어떻게… 아셨어요?”

“사람 붙였다고 했잖아. 사과야… 어제 네가 냉장고 안에 없냐고 물어서 찍어 본 거고.”

기태정이 손목시계를 두드리며 밀린 알림을 확인했다. 판 위로 작게 홀로그램 화면이 떠오른 탓에, 본의 아니게 그가 최 원사와 나눈 대화를 슬쩍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 주고받은 대화는 세화로선 알 수 없는 코드명이었다. 그 바로 위에 기태정 쪽에서 보낸 메시지에는… 오늘 세화가 관심을 보인 물건은 전부 집어 오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원산지와 품종별로, 있는 대로 모조리 긁어 오라는 무뚝뚝한 지시에 최 원사가 사모님이 어쩌고 대답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세화.”

“…….”

“다음엔 그냥 사 달라고 말해.”

훔쳐보고 있던 걸 들켰나 싶어 모르는 척 흠흠 헛기침이나 하자, 기태정이 홀로그램을 끄며 어이가 없다는 듯 핀잔을 줬다.

“사람 포를 떠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과일 좀 먹고 싶다는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층이 바뀌자, 양 벽면에 설치된 기다란 화면에 바다가 꽉 들어찼다. 곧 다가올 휴가철을 우리 브랜드와 함께 준비하라는 광고 문구가 하얀 물거품 위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화면 속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 바다를 닮은 향이 밀려왔다. 세화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끝도 없이 일렁이는 새파란 물결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기태정이 걸치고 있는 남색 제복 또한 연속되는 풍경인 것처럼, 밀려오는 푸른 파도 끝에 자연스레 물들어 있었다.

“어차피 다 눈치채게 될 거, 네 입으로 재깍 말해. 먹고 싶은 게 생기든, 꼴릴 때든.”

“…….”

“아니면 내 멋대로 오해할 테니까.”

별것도 아닌 거로 속 터지게 하지 말라면서 기태정이 쯧쯧 혀를 찼다.

세화는 이번에도 어물거리며 목을 움츠렸다.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 아래, 길쭉한 틈새로 비치는 제 얼굴이 낯설었다. 기태정의 말마따나 뽀얗게 살이 오르고, 윤기가 돌아 반들반들했다. 요 며칠 충격을 받아 내내 울고 그러다 쓰러져 잠만 잤는데도, 하우스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더 보기 좋은 낯빛인 건 맞았다. 그리고….

기태정 역시 처음 봤을 때와 인상이 많이 달라졌다. 현실감이 없는 수려한 외모는 여전했다. 다만, 분위기가 변했다. 모서리가 조금 깎여 둥글어진 것 같았다. 물론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배회하던 시선이 발치로 흘렀다. 기태정의 군화와 꼬질꼬질한 자신의 운동화가 같은 칸 안에 나란히 서 있었다.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기태정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이세화였다.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저였다.

청량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세화는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여태 저는 모든 감정을 흑과 백으로만 나누어 생각했다. 기태정을 좋아한다는 모순은 어찌어찌 받아들이긴 했으나,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은 무조건 서글픈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예전의 불행을 자꾸만 곱씹고, 울적함에 취해 제 못난 점만 헤아리고 있었다. 상대방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건 그런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믿었다. 곱고 예쁜 감정은 아니니, 새카맣게 덧칠하고 꼭꼭 숨겨 마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게, 그 체념이… 반드시 우울한 색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같은 칸 안에 올라선 두 사람분의 발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끝이 다가오더라도 이 시간이 거짓이었던 건 아니다. 이 마음이 허상이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주는 행복을, 굳이 부정하며 덜덜 떨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더 기쁘게 끝을 기다리는 것 정도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 관계에 임하는 것 정도는, 건방진 바람이 아니지 않을까.

세화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구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독여 주기 위해서.

그래, 이건 분명 깨어나는 것이었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잔뜩 구겨져 있던 이름 모를 감정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남루한 껍데기가 쩌적 갈라지고, 세화조차 거기 있는 줄 몰랐던 따뜻하고 뭉클한 감각이 서툴게 날갯짓을 했다.

“…준장님.”

다 해진 마음의 올을 단단히 여미고서, 조심스레 한 발 더 앞으로 내디뎌 보았다. 주제도 모르는 열망이라 저를 꾸짖는 대신, 최선을 다해 마음을 퍼부어 보기로 했다.

저 남자를 좋아… 하니까.

무수한 일이 있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태정을 틀림없이 좋아하고 있으니까.

“제복이 멋있었던 게 아니에요.”

이쪽을 돌아보는 남자에게 관모를 도로 씌워 주었다. 아무리 발끝을 들어도 그보다 키가 작았던 탓에, 머리 앞쪽에 겨우 걸쳐 둘 수밖에 없었다. 거의 이마에 올려 준 수준이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는데 조금 전 자신의 시야를 가렸던 그의 행동을 앙갚음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분명 중요한 일이 있다고… 높으신 분들이 불러서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

“그런데 저 걱정, 되어서 와 주신 것 같아서… 그게 멋있, 어 보여서… 쳐다봤던 거예요.”

중간중간 딸꾹질이라도 하듯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는 구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던 말은 전부 늘어놓았다. 처음이었다. 끝을 흐리지 않고, 기태정에게 투명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무서워서, 이젠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냐고 돌려 물어보았는데. 이렇게나 덤덤히 남자를 향한 감상을 꺼낼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불시에 한 뼘 더 자란 마음이 저를 이만큼이나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바쁜데도 저 보러 와 주셔서.”

세화는 옅게 웃었다.

눈가를 덮고 있던 모자를 걷어 내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 새파란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

“흣, 준… 장님….”

세화는 등줄기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속절없이 몸을 무너뜨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관사로 이동하는 동안은, 글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기태정도 저도 민감한 주제는 알아서 피해 갔다. 이를테면 오선란 대장이라거나, 배 속의 아이라거나, 하우스나 김 소위 문제 같은 것들.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창문 너머 보이는 휘황찬란한 5성의 스카이라인에 대한 감상, 구역마다 다른 기온과 날씨… 그런 이야기들.

어색한 침묵을 피해 보려는 세화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기태정도 담백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는 계절이 바뀌려고 하니 새 옷을 사 주겠다고 말했다. 또 아이 일이 ‘해결’되면 휴양지로 유명한 섬에도 가자고 했다. 조금 전 디스플레이 속에서 펼쳐졌던 바다를 실제로 보여 주겠다면서.

해결….

세화는, 기태정이 아기를 떼어 낸다거나 죽인다거나 하는 말 대신 ‘해결’이라는 좀 더 무른 표현을 고른 것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또 따져 보기엔, 이미 오늘치 모든 용기는 소진된 상태였다.

그저… 그가 자연스럽게 미래를 언급할 때마다, 아까 전부터 가슴 속을 뛰놀던 나비의 날갯짓이 한층 더 거세진다고 느꼈다. 이러다 심장이 설탕에 절여져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우스운 생각이나 하면서.

어느새 관사에 다다라 현관의 잠금장치를 해제할 때였다. 세화는 홍채를 인식하고 판 위로 손을 가져다 대는 기태정의 몸짓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꾹 누르고 있는 남자의 손톱에 붉은 기가 물들고, 경쾌한 해제 음이 울렸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려 별생각 없이 발을 뗀 그 순간, 기태정과 시선이 얽혔다. 찰나였지만 그의 눈매가 평소보다 깊고 짙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이후론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었던 것까진 생각이 났다. 당장 키스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들처럼 갈급하게 서로에게 입술을 묻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 사람의 숨이, 필요했다.

정신을 차린 건 기태정이 저를 번쩍 안아 들었을 때였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선 솜씨 좋게 옷을 벗겨 냈다. 세화는 남자의 허리에 서툴게 다리를 감고서, 세상에 그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간절하게 매달렸다. 발꿈치가 잔뜩 불거진 등 근육을 스치고 갈 때마다, 그가 사납게 욕설을 뇌까렸다.

“아, 준… 장님….”

받쳐 들고 있던 손이 속옷 안으로 불쑥 침입했다. 기태정은 떡 반죽 주무르듯 멋대로 엉덩이를 주물럭대면서, 귓불부터 턱을 따라 쪽쪽 짧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다 아프지 않게 뺨이며 코를 깨물고, 입술을 맞물리다 몸을 추어올리면서 목과 어깨를 또 잘근잘근 씹어 대고, 그러다가….

“하….”

낮게 울리는 기태정의 탄식 같은 감탄에, 세화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 안쪽을 꽉 조여 댔다. 그런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벌써부터 선액으로 축축해진 앞섶이 부끄러웠다.

어느새 땀으로 미끌미끌해진 나신을 얼러 주던 그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내 세상이 천천히 기울었다. 언제 방까지 이동한 건진 모르겠지만, 등에 닿는 감촉은 틀림없이 침대 시트였다.

“흐, 아앗….”

“벌써 쌌어?”

미치겠다.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부드러운 천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남자의 체향이 진동을 했다.

방 안은 썰렁했다. 거울이며 협탁이며 보통 침실에 놓는 가구라곤 아무것도 없이, 그의 신장에 맞춘 거대한 침대만 덜렁 놓여 있을 뿐이었다. 기태정이 오직 몸만 파묻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견디기 어려워졌다. 시원한 향수 냄새, 희미하게 풍기는 쌉쌀한 담배 향…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단단한, 어른 남자 특유의 살냄새.

“하,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끝까지 안 해.”

“그렇지만….”

“어차피 너 내 손가락만 물고서도 좋아 죽잖아.”

잔뜩 젖은 속옷을 찢어발기는 기태정의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울컥 일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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