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77)화 (77/144)
  • #074

    “…….”

    “그래도 아까 그분이 뭐 엄청난 위협을 한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너무 믿을 수 없는… 좋은 얘기만 들어서.”

    기태정이 토해 내는 숨결 때문에 촉촉하고 간지러웠다. 지금 이 남자가 숨을 쉬는 건지, 감탄을 하는 건지, 제 목에 입을 맞추는 건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였다.

    “…아까 오선란이 친아빠가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아아… 네. 절 낳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했어요.”

    기태정은 세화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에 꾹 한 번 힘을 주었다가, 풀어 주었다.

    “저한테 예전의 화학 실험과 연관된 거물이 있다고 하셨죠? 혹시 그 사람이….”

    “맞아. 오선란 대장이야.”

    “으음….”

    세화는 애꿎은 눈썹만 문지르며 말을 골랐다. 영 연관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그렇지만 방금 들은 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너무 어리둥절한 이야기라,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들어 주고 있었냐고 기태정이 어이없어할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세화는, 우선은 기태정에겐 오선란 대장이 들려준 얘기는 전부 털어놓지 않기로 했다. 그런 대단한 인사가 친아빠를 대신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뭐 이런 말은 믿기지도 않았다.

    다만 정황상 저를 낳아 준 사람과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기태정 또한 이전에 지나가듯 언급해 주지 않았던가.

    최근 자신에게 벌어진 일은 행운 정도론 표현할 수 없었다. 화투판에선 이 정도로 패가 짝짝 붙으면 오히려 빠르게 손을 털어야 한다. 운발 같은 걸로 설명할 수 없는 좋은 흐름이라면, 그건 누군가가 설계한 것일 테니까.

    그러니 괜히 들뜰 것 없다. 지금 확실한 건 생각보다 자신의 출생이 군부와 깊게 얽혀 있다는 것 정도일 뿐이다. 기태정도 부모님에 대해서 알아봐 주겠다고 했으니까… 어려운 퍼즐은 단서를 다 찾은 이후에 맞춰 봐도 충분하다.

    “아까 증서에 적힌 내용이 네 출생과 관련한 거였어?”

    “아, 네. 근데 정말 그런 물건이 있긴 있어요? 높으신 분이 보증하는 내용이라는데….”

    “대장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긴 한데… 오선란 말대로 진품인지 확인은 해 봐야지.”

    아무리 국가 원수래도 보증은 함부로 서는 거 아닌데….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기태정은 난데없이 세화를 돌아보고는 이상한 말을 했다.

    “같이 가든가, 그럼.”

    “네?”

    “김 소위가 모시는 사람이라 내가 오선란에게 감정이 안 좋은 건 사실인데… 이런 것까지 널 속일 생각은 없어.”

    “아아, 네….”

    “그렇게 불안하면 같이 확인해 보자고. 그런데 그 새끼도 한창때는 나만큼이나 미친 짓 하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라… 아니다, 됐다. 나중에 질질 짜지 말고, 처음부터 같이 가. 그럼 될 거 아냐.”

    으응? 세화는 아리송한 낯으로 기태정의 뒤를 따라 종종 걸었다. 그 또한 딱히 답을 바라고서 하는 말 같진 않았다.

    왜 저렇게 열을 올리는 거지? 혹시 오선란과 몰래 연락할까 봐 그러는 건가? 떠오르는 대로 생각을 나열해 보던 세화는 문득, 아주 작게 스치고 간 어떤 문장에 온 마음을 흘리고 말았다.

    …또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자길 의심할까 봐. 그래서 부연 설명을 덕지덕지 붙이는 건가?

    “준장님.”

    “…….”

    “준장님….”

    내가 생각하는 거 맞아요? 더는 내가 속상해하는 거, 의심하는 거, 우는 거 보기 싫어서… 당신답지 않게 몇 번이나 말해 주는 거예요?

    “준장님, 조금만 천천히….”

    “…….”

    “…저랑 같이 가요.”

    곁에서 걷고 싶다는 작은 애원에, 성큼성큼 앞서 나가던 기다란 다리가 고장이라도 난 듯 끽 멈추어 섰다. 반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조심스럽게 다가왔는데도, 남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저를 바라보기만 했다.

    세화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의 바로 옆에 서 보았다. 그제야 기태정 또한 다시 발을 뗐다. 이번엔 또 지나치게 느려서 약간 답답할 정도였다. 남과 나란히 걸어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춰 준 적은, 더더욱.

    두 사람은 거북이보다, 달팽이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릴 수 있었던 건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세화는 가슴 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얇고 고운 날개가 팔랑일 때마다 심장 위로 설탕 가루 같은 게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간지럽고, 달았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기태정이 먼저 다가와 준 거니까. 그냥 조금 기뻐하는 것 정도는….

    “눈 아파?”

    “…네?”

    “아까부터 자꾸 눈 만지고 있잖아, 너.”

    “아, 그게….”

    저도 모르게 눈두덩이를 문지르고 있던 손을 내리던 세화는, 퍼뜩 궁금증이 일어 기태정을 올려다보았다.

    “준장님, 혹시 저 짝눈인가요?”

    “이건 또 뭔 헛소리야.”

    핀잔을 주면서도 기태정은 세화의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똑같아.”

    속눈썹을 깜빡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구나…. 다행이에요.”

    오선란 대장의 말만 들었을 땐 저를 낳아 준… 사람도 임신했을 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임신했을 때 백설기를 못 먹어서 서러웠다며 토로했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짝짝이가 진 눈은 아닌 걸 보면, 배 속의 아기도 체리 좀 못 먹었다고 눈 크기가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았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던 세화는 이내 화들짝 놀라 짧게 도리질을 쳤다. 알 게 뭐야. 어차피 낳지도 않을 건데, 짝눈이면 뭐가 어떻다고….

    “이세화.”

    빙빙 도는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화려하게 수 놓인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던 기태정이 무심히 이세화, 하고 저를 불렀다. 성과 이름 사이의 간격이 어쩐지 평소보다 긴 것 같았다.

    “네가 뜬금없는 걸 물어봤으니까, 나도 그냥 뜬금없이 하는 소린데.”

    운을 떼 놓고도 기태정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따금 한쪽 눈을 작게 찡그리기도 했다. 뭐랄까, 신 것을 깨물어 조금 괴로울 때처럼.

    “…그때 관사로 너 데리고 와서, 그냥 안고만 잤던 날.”

    “……”

    아. 생각지도 못한 서두에 세화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는… 저를 상대로 말을 고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살이 오른 게 신기해서 배 만져 본 거였어. …뭘 알고서 그랬던 게 아니라.”

    어쨌든 저를 배려해 주는 남자의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하필 이 타이밍에서 툭 내뱉은 변명은 도무지 연유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을 위한 해명인지도 모르겠고….

    세화는 멀뚱멀뚱 자신의 배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살이 많이 쪘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아, 그런 뜻이 아니라!”

    “…….”

    “말라비틀어진 것보단 보기 좋다는 소리잖아.”

    무뚝뚝한 남자의 말을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하고서 눈만 끔뻑이던 세화는, 뒤늦게야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이전에도 몇 번 예쁘다고 해 준 적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저더러 자기야, 하고 부를 때만큼이나 의미가 없는 소리였다. 속 알맹이라곤 하나도 없는 희롱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불쑥 꺼낸 말은… 어쩐지….

    세화는 가슴께를 작게 두드렸다. 풍선처럼 부푼 마음이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의심할까 봐 오선란 대장의 집무실에 같이 증서 확인하러 가자고 해 주기도 하고, 난데없이 떠오른 예전의 일을 뒤늦게라도 소명하려고 하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그렇게 빨개져?”

    “네?”

    “봐, 볼에서 피 나는 줄 알겠어.”

    세화는 그제야 스쳐 가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랐다.

    “아, 별것 아니에요. 그냥….”

    “…이세화.”

    뭔가를 가늠하듯 턱을 뒤로 물리고서 잠시 저와 거리를 벌리던 기태정이, 이내 바투 다가오며 허리에 손을 둘렀다.

    “너 혹시 하고 싶어?”

    뭘 하고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화는, 말마따나 피가 나듯 벌게진 낯을 하고서 기태정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평소 같았으면 엄두도 못 냈을 행동인데, 너무 기가 막히고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그를 밀치고 말았다.

    “음… 그런데 지금 섹스해도 되나? 6주라고 했지.”

    나름대로 맵게 손을 날린 건데도, 기태정은 꿈쩍도 안 하고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이나 계속했다.

    “넣는 건 못해도 빨아서 싸게 해 주는 것 정도는,”

    “준장님!”

    세화는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원래 한적한 시간인 건지, 별을 단 장교가 둘이나 떠서 사람들이 다 물러난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왜? 아까 아주 핥듯이 나 쳐다보길래….”

    기태정이 관 같은 모자를 세화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일부러 챙 부분을 당겨 푹 눌러 씌운 탓에 시야가 다 가려져 버렸다.

    “혹시 정복 입은 거 처음 봐서 꼴린 건가, 했는데.”

    엉거주춤 들어 올린 군모 아래로, 기태정이 잘난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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