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76)화 (76/144)

#073

쾅! 비상구의 철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뒤이어 군화의 뒤축이 땅을 박차는 마찰음이 쩌렁쩌렁 조용한 백화점 안을 울렸다. 목적지가 분명한 듯 거침없는 그 걸음을 따라 충, 성, 하고 배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낸 군인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파도처럼 이어졌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에 오선란 대장님이 계십니다.”

절도 넘치는 경례는 불청객이 카페로 이어지는 통로에 다다르자 뚝 끊겼다. 밖을 지키고 서 있던 놈들보다 계급이 조금 높은 부관들이 들이닥치려던 상대방을 제지하자,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삽시간에 시퍼렇게 벼려졌다.

“준장님, 잠시만…!”

“안 돼, 막아!”

막으려는 사람들과 안으로 파고들려는 사람들로 작은 소요가 일었다. 때리고 밀치는 파열음이 요란했다. 그리고 그 난장을 헤치고서, 길쭉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남색의 공군 정복이 날 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리는, 기태정이었다.

이 모든 쟁란함은 자신과 관계없다는 듯, 빚은 듯 초연한 얼굴을 한 그가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개싸움을 벌이느라 뒤엉킨 군인들을 배경 삼은 기태정의 등장은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준장님….”

얼굴을 알아볼 순 있어도 그렇게 불러 봤자 부름이 닿지 않을 거리였다. 무엇보다 이세화의 목소리는 가까이에 있는 오선란도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맸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세화는 거듭 중얼거렸다. 준장님, 준장님… 하고.

지금껏 아무 곳에나 내던지고 있던 아이의 시선이 또렷이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오선란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는 눈길엔 낯섦과 막막함이 어느새 사르르 녹아내린 채였다.

아. 오선란은 캄캄한 탄식을 삼켰다.

조만간 기태정과 독대할 생각이긴 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김석철의 개소리를 믿는 건 아니었어도, 기태정 또한 수상쩍은 건 사실이었다. 특히 이세화의 임신과 관련해서. 이 일이 ‘추수’로 인한 약 때문에 벌어진 것인지, 이세화의 타고난 체질 덕인지, 그리고 기태정은 이걸 다 알면서도 아이를 이용한 것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가 지금은 아니었다. 이렇게나 기태정에게 마음이 쏠린 것이 훤히 보이는 아이 앞에서 이 사건의 경위를 따져 물을 순 없었다.

이제 기태정이 눈썹을 까딱이는 것까지 식별이 될 만큼 가까워졌다. 한 손엔 정복 모자와 넥타이를 구겨 쥐고 있던 그는, 반대편 손으로 재킷이며 뺨에 붙은 이파리를 성의 없이 털어 냈다.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이며, 살짝 구겨진 바짓단이며… 보아하니 회의장에서 여기까지 헬기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무도한 침입자는 손가락을 날처럼 만들어 흐트러진 머리를 멀끔히 빗어 넘기곤, 공군의 상징인 남색 정모를 걸쳐 썼다. 그러곤 손바닥에 감고 있던 타이를 셔츠 깃 아래에 둘렀다. 풀어 헤치고 있던 가장 위쪽의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의 매듭을 조이고 당기는 남자의 손길을 따라 이세화의 목울대가 작게 일렁거렸다.

마지막으로 소매와 앞쪽 재킷을 두어 번 툭툭 털자, 적어도 상관의 앞에서 흠 잡히지 않을 모양새는 되었다.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성큼 다가온 기태정이 까딱 성의 없이 경례를 올렸다.

“오선란 대장님.”

인사에 대한 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최소한의 예의만 갖춘 기태정은 이세화가 앉은 자리로 곧장 다가갔다. 속삭이는 입 모양을 보니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냅다 아이의 손목부터 붙드는 무도한 꼬락서니에 오선란 또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고 했는데…. 이세화를 뒤로 숨기며 몸은 어떠냐고 나름대로 다독여 주는 것을 보자… 팔걸이를 부술 듯 쥐고 있던 악력이 아주 약간은 풀어졌다.

“저 못 배운 놈인 거 다 아실 테니 더는 예의 차리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이세화를 꼭꼭 숨겨 두고선 다시 오선란을 돌아보는 기태정의 얼굴에 어린 형형한 것은… 분노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이세화에게 접근하신다면, 그땐 고발장에 대장님의 이름도 적히게 될 겁니다. 재판 당일에 해명하실 일이 이미 충분히 많으신 것으로 아는데요.”

계급장만 아니었다면 당장 저를 죽여 버렸을 것 같은 활활 타오르는 눈을 하고서, 기태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돼먹지 못한 하극상에 화가 나야 하는데. 어이없게도 기태정이 제법 진지하게 이세화를 싸고도는 것을 보니 오히려 불쾌함이 가라앉았다. 다정함이 뚝뚝 흐르는 것까진 아니었어도, 적어도 오선란이 기억하고 있는 기태정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김석철의 주장대로 기태정이 이세화를 강간했던 거라면, 혹은 가둬 놓고서 멋대로 대하고 있는 거라면… 군사 재판까지 갈 것도 없었다. 자신이 나서서 즉결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서먹하게나마 둘이 하는 양을 보고 있으니, 어찌어찌 마음이 통한 사이인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하필 골라도 저런 놈을…. 평소의 개망나니 같은 모습은 아니라곤 해도, 기태정은 아이의 짝으론 마음에 차지 않았다.

출신이나 배경 같은 걸 따지려는 게 아니다. 이세화는 잠깐 얘길 나눈 걸로도 유순한 성정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저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그런 아이의 성품과 어울리는, 좀 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과 연을 맺었다면 기꺼이 축복해 줄 수 있을 텐데.

아니, 축복 정도가 아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이세화의 짝을 끌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태정은 임신한 상대를 배우자로 올려 주지도 않았고 법적 보호자로도 나서 주지도 않았다. 이런 놈을 대체 뭘 믿고….

“세화야.”

다글다글 끓어 넘치는 걱정을 다스리며, 기태정의 뒤에 선 아이를 불렀다. 이세화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다정하게 불린 자신의 이름이 어색한 듯, 동그란 눈을 느리게 슴벅거리면서.

“내가 말했던가? 네 친아빠와 너, 아주 쏙 빼닮았어.”

오선란은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번 이진우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세화를 처음 봤을 때 자기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저런 사소한 표정까지도 빼다 박았는데…. 이젠 꿈에서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부질없는 생각이나 했다.

“어쨌든 오늘은 내가 무례하게 굴었던 게 맞으니 이만 가 보마.”

“…….”

“조만간 또 연락해도 되겠니?”

기태정이 이세화의 손을 꼭 붙들었다. 가뜩이나 하얀 피부가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질릴 정도로, 세게. 혹 강제하는 기미가 느껴지면 바로 제지하려고 했는데, 이세화는 오히려 조금 감동한 낯으로 기태정을 흘끔 훔쳐보았다. 그가 낯선 사람에게서 자신을 지켜 준다고 느낀 모양이다.

“네가 들을 준비가 된다면 전부 설명해 주마. 네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그간 내가 왜 너를 찾지 못했던 건지, 그런 것들.”

“…네. 다만 저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이지. 기태정 준장 통해서 확인할 거 다 확인해 봐도 좋다. 아까 그 증서는 내 집무실로 같이 찾아와서 살펴봐도 된다. 관사든 집무실이든, 궁금한 게 있거든 언제든지 오렴. 아이 문제도 좀 더 고민해 보고. 아직 초기라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얘기해 보자꾸나.”

오선란은 봉투 안에 증서를 갈무리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기태정의 시야에서도 충분히 물건이 들어왔을 것이다. 준장인 그라면 모를 수가 없을 터였다. 유려하게 뻗은 기태정의 눈매가 아몬드형으로 좁혀 들었다. 지금 무슨 개수작인 거냐고, 눈빛만으로 저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저래서야. 오선란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자세는 좋은데, 지나치게 거칠다. 이세화에게도 분명 그런 면모를 보였을 것 같았다. 조금 전 아이가 고작 과일 두 종류를 두고서 고민하던 것만 봐도 그렇다. 평소에 잘해 주었더라면 뭘 망설였겠는가, 원하는 대로 몇 개고 덥석 집어 들었겠지.

“참, 세화야.”

“…아, 네.”

“네 아빠는 널 가졌을 때 백설기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고 했어.”

“백설기요?”

“그래. 날 만난 건 널 이미 낳은 이후인데도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했단다.”

이진우와 필담을 나누게 된 건 한참 후인데도 두어 번 이 얘길 끄적였을 정도니까. 그 순하고 덤덤한 사람에게도 어지간히 마음에 사무치는 일이라는 뜻일 거다.

“그러니 먹고 싶은 게 생기면 꼭 챙겨 먹으렴. 입덧으로 힘들더라도. 알았지? 괜찮겠지, 하고 대충 넘기지 말고. 나중에도 계속 생각나서 속상해지니까.”

이세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태정에게 붙들리지 않은 쪽의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더듬었다. 혹시 내가 짝눈이었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 무구함이 사랑스러워, 오선란은 작게 웃으며 돌아섰다. 이세화가 못된, 악질의 범죄자였다고 해도 품어 주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아껴 주려 애썼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햇살 같고 고운 아이일 거라곤… 이진우와 생김부터 성격까지 판박이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화와 거리를 어느 정도 벌리고 나니… 그제야 턱을 따라 굵은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아이를 찾아내어 구해 주고 아껴 주겠다던 다짐은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던가. 따지고 보면 세화의 인생이 꼬이게 된 데엔 저 역시 한몫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 그 애의 인생에 참견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손으로 눈가를 짚은 채 울컥 차오르는 숨을 견디던 오선란은,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겼다. 이젠 정말로 쓰러지면 안 된다. 이렇게 청승맞게 미안해할 시간에, 지금이라도 세화가 잃어버렸던 지난 삶을 돌려주어야 했다.

이진우와의 약속을 지킬 시간이었다.

***

“준장님이 여긴 어떻게… 앗!”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오선란과 그의 무리를 끝까지 노려보던 기태정이 별안간 저를 세게 끌어안았다. 밀어 내려면 밀어 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몸을 숙인 채 자신의 턱 언저리에 맞대고 있는 그의 뺨이, 목에 파묻고 있는 그의 입술이. 아주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불안하게 펄떡이는 맥박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어쩐지 놓아 달라고 하기 어려웠다.

“준장님.”

“…….”

“혹시 저 걱정… 하셨어요?”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행동이 가리키는 바가 어쩐지 한 방향으로 좁혀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면서 분명 씨발, 하고 욕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용케도 소리 내어 발음하는 건 꾹 참은 기태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크게 터질 뻔한 웃음을 잘 감추었다. 애꿎은 아기한테 욕하지 말라고 했던 거지, 평소 입버릇까지 다 뜯어고치라는 건 아니었는데….

“최 원사만 달랑 붙여서 내보낸 내가 미친 새끼지.”

속을 가라앉혀 주는 싸하고 시원한 남자의 살 내음을 들이켜던 세화는, 그가 묻히고 온 바람 냄새와 더불어 최근 맡지 못했던 알싸한 담배 향을 느끼곤 기분이 묘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흡연하는 모양인데, 왜 저와 같이 있을 땐 담뱃대를 입에 물지도 않는 걸까. 정말… 나를, 내 몸을 걱정이라도 하나?

“앞으론 나하고만 나가. 그나마 준장 정도 되니까 이 정도로 비벼 보는 거지, 씨발 상대가 대장이니 소위나 원사 가지곤 되지도 않겠어.”

“왜요? 뭔가… 위험한 일이 있는 건가요?”

“김 소위 편을 들고 싶은 놈들한텐 네가 좋은 먹잇감이 될 테니까. 어떻게든 너에게 일을 다 뒤집어씌우려고 벼르고 있겠지.”

아…. 세화는 그제야 꽃밭을 뛰놀던 정신을 붙들 수 있었다.

무려 대장이 찾아와 얘기 좀 하자고 했을 땐 너무 놀라서. 심지어 그 내용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것이라 멍하기만 했는데….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니 조금 무서워졌다.

오선란 대장은 제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서 찾아왔다. 게다가 기태정의 아이를 가진 것도 다 알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저를 회유하거나 협박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군부 인사라면 쉽게 자신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긴 하다. 제 정보 또한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5성에서, 그것도 내 아일 가진 사람에게 무턱대고 접근했다간 자기들에게 역풍이 불 수 있을 테니 함부로 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선란 대장이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다며 기태정이 중얼거렸다.

“네 눈엔 안 보였겠지만 지키고 있는 다른 놈들도 적지 않았어. 동선도 전부 따고 있었고….”

세화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뭐랄까. 놀랍게도 기태정은… 저에게 변명, 을 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널 위험 속으로 내던진 게 아니라고, 다 알면서 방치했던 게 아니었다고. 이건 정말 예상 못 했던 사고였노라고.

“하여튼 앞으론 뭘 사러 가든 나하고만 움직여.”

“…….”

“왜 대답이 없어?”

묵묵부답인 제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듯, 숙이고 있던 그의 상체가 크게 들썩였다. 잠시 망설이던 세화는 까치발을 들었다. 발끝까지 힘껏 들어 올려도 남자의 머리꼭지엔 닿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손을 뻗어, 기태정의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그럴게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세화의 손길에, 강철로 빚은 것 같은 단단한 남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준장님하고만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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