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75)화 (75/144)
  • #072

    “…죄송합니다.”

    이세화는 손등으로 입가를 꾹 눌렀다가 떼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내가 일방적으로 찾아온 건데…. 아직도 많이 불편한가?”

    “아, 지금은 괜찮습니다.”

    의례적으로 하는 대꾸일 뿐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식품관에서 이세화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저를 보자마자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기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어쩔 줄을 몰라 그대로 얼어있자, 이세화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꽃’과 ‘냄새’라는 말을 겨우 알아듣고 나서야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김석철이 했던 말이 뒤늦게 머릿속을 내려치고 갔다. 아이를 가졌다고 했었지…. 당장 이세화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꽃부터 준비했다. 안겨주고 싶은 건 고작 꽃다발 같은 게 아니었지만, 빈손으론 갈 수 없으니 급히 마련한 거였는데… 입덧 중일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5성에 있는 꽃가게들은 향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후처리를 하는데, 그 인위적인 냄새를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혹시 먹고 싶은 건 없나? 마시고 싶은 거라도.”

    오선란은 무신경했던 첫 만남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이세화에게 메뉴판부터 안겨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차단된 곳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전용 라운지로 가려다가, 차라리 확 트인 곳이 좋을 것 같아 식품관 근처에 있던 카페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임신한 사람은 당기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아이 눈이 짝짝이로 태어나거든.”

    “…네? 짝짝이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애매하게 돌리고 있던 이세화의 고개가 단박에 이쪽을 향했다.

    “그래, 그러니 편히 주문하게. 한 입만 먹고 버려도 좋으니.”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차피 이 아이는….”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벙긋거리던 이세화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도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선란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이세화를, 아니 이진우의 아이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앳된 얼굴이긴 했어도 미성년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키는 이진우보다 컸고, 다소 마르긴 했어도 골격 자체가 왜소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오선란의 눈에는 이세화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하나도 안 닮았다더니.”

    “예?”

    “아, 아닐세. 혼잣말해 본 거야.”

    무표정할 때도 어쩐지 부드러운 인상인 사람들이 있다. 과거 이진우가 그랬고, 이세화 또한 그랬다.

    이세화는 식품관에서 심각한 얼굴로 체리와 블루베리를 들고 고민하고 있었고, 옆에 선 기태정의 부관은 둘 다 담으시라며 답답해하는 중이었다. 고개를 내젓던 이세화는 저와 눈이 마주친 다음, 군인들이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정복에 박힌 별의 개수를 헤아리며 경악했다.

    직급과 이름을 밝히고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냐고 물으니, 다행히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거부하는 기색이 아니기에 들떴던 것도 잠시였다. 그건 긍정이라기보다 익숙한 체념에 가까웠다. 이세화는 만성적인 불행에 이골이 나, 높으신 분들이 자신의 시간을 멋대로 주무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직 속이 좋지 않아서… 전 괜찮습니다. 편하게 드세요.”

    이세화는 웃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경직되지도 않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가 나게 두리번거리는 건 아니었다. 눈만 도록 굴려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인원의 수, 통로의 구조와 비상구의 위치… 그런 것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오선란은 숨을 크게 골랐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손발이 다 저릿저릿했다. 이세화는, 이진우를 쏙 빼닮았다. 이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핏줄이라고 인정했을 거다. 물론 이세화의 이목구비가 좀 더 화려하긴 했지만, 피부색부터 속눈썹을 깜빡이는 속도까지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 같았다.

    얼마나 이 순간을 꿈꿔왔는지 모른다. 아이를 찾으면 들려줄 이야기를 지겹도록 상상해왔다. 그런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세화는 순순히 저를 따라오면서도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조금 전 최 원사와 편히 대화할 때 살짝 끝을 늘이던 특유의 말투도 감춰버렸다. 그간 이세화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략 훑어보긴 했다만, 그 어떤 자료보다도 그의 지난 삶이 훅 와닿는 순간이었다.

    지금 스물한 살일 텐데. 아까 과일을 놓고서 고민하던 그 천진하고 순한 얼굴이 잘 어울리는 나이였다. 아니 아까보다도 더 투정을 부리고, 어리게 굴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데. 그런데 이 어린 것은 벌써부터 닳고 닳은 어른들처럼 낯을 갈아 끼우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대단하신 분이… 왜 저를 찾아오신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여전히 얕게 얼음을 두른 듯 굳어있는 표정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나긋나긋한 말씨를 쓴다.

    오선란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아남겠다고 익혔을 이세화의 사소한 습관들에 목이 멨다. 잔뜩 졸아붙은 경계 어린 눈길이 못이 되고 정이 되어, 이미 다 타서 재가 되어버린 심장 위를 퍽퍽 내려쳤다.

    등신이 따로 없었다. 국내에 있었는데. 심지어 김석철과 자주 접촉했던 모양인데… 코앞에 두고서도 몰랐다. 진작 구해주질 못하고, 이렇게 살게 했다. 이진우의 아이를. 우리의 아이를….

    “음, 일면식도 없는 군인이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겠지만… 자네 몸도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겠네.”

    그래서 오선란은, 그간 수없이 연습했던 모든 이야기를 꾹 집어삼켰다.

    고단하게 살아왔을 아이에게 갑자기 나타난 제가 네 아빠라고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심지어 저는 피가 섞인 친부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이진우와 같이 찍은, 아니 이진우의 사진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은 쉽게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아있는 것은 무엇도 없는데, 대뜸 내가 네 친아빠의 연인이었고, 널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며, 이제부턴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을 하면…. 과연 이세화는 이 얘길 믿어줄까. 순순히 납득할까.

    아니다. 저라도 의심할 것 같았다. 당장 김석철도 제가 어린 첩이나 찾는 거라 오해하지 않았던가.

    “널 낳아준 사람, 그러니까 네 친아빠에게… 내가 신세를 졌다. 아주 많이.”

    그래서 오선란은 자신의 욕심을 접기로 했다. 그래, 이 모든 건 욕심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진우의 아이가, 이세화가 이 마음을 곡해한다면 정말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고서 꾸역꾸역 버텨온 이 삶, 빛이 바랜 순정…. 그러나 이세화가 이걸 굳이 받아들이고 이해해줄 의무는 없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건 말 그대로 이세화는 모르는 과거일 뿐이다.

    “군부에서 비밀리에 진행했던 실험이 하나 있었는데, 널 낳아준 사람이 내 소속이었어.”

    뒤늦게 되찾은 이진우의 아이가 저를 아빠라고 불러주는 날을 몇 번이고 상상했다. 이진우가 얼마나 단단한 마음으로 그 안에서 버티다 너를 낳았는지, 또 너에게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너를 사랑해주고 싶어 했는지 들려주고 싶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나 또한 내내 너를 그리워했고, 이미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있었노라 위해주고 싶었다. 힘겨웠을 아이의 지난 시간을 다독여주며 함께 이진우를 추억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세한 건 설명이 어렵지만, 그 사람 덕분에 내가….”

    오선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진우가 나오는 꿈을 꿀 때마다 느끼곤 했던 차가운 바람이 몸을 감싸고 갔다. 환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대장까지 진급할 수 있었단다.”

    진우야, 이진우.

    “그래서 널 계속 찾아다녔다. 그 사람에게 은혜를… 갚아야 해서.”

    너를 너무 사랑해서, 아직도 잊지 못해서 이 아이를 여태 찾아 헤맸다는 건… 아무래도 우리 둘의 이야기로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아. 평범한 집에서 탈 없이 잘 자라왔다면 또 모르겠는데, 너만큼이나 불행했을 이 애한테 내 마음 편해지자고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할 수 없어.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진우야.

    “또… 약속했거든. 내가 널 아빠처럼 보살펴주겠다고.”

    우리는. 너와 나는. 우리끼리만 아는 불멸로, 영원으로 남도록 하자.

    “빼앗겼던 아일 꼭 되찾아서, 그 애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주고 아껴주겠다고… 그렇게.”

    오선란은 끝이 너덜너덜해진 서류 봉투를 열었다. 분명 새 봉투에 담아왔는데도 내내 세게 쥐고 있었던 탓에 이곳저곳에 손자국이 남아버렸다.

    “이게 뭔가요?”

    금박을 두른 빳빳하고 화려한 증서에는 온갖 길한 동물들이 수 놓여 있었다. 이 나라의 절대자만 쓸 수 있는 문양들이었다.

    “읽어 보렴.”

    코앞까지 밀어줘도 이세화는 잔뜩 경계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다.

    “14년 전, 대장으로 특진하면서 국가 원수께 보증을 받은 문서야.”

    오선란은 옅게 웃으며 증서에 적힌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첫 번째, 오선란은 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국외 체류를 정식으로 허락받는다. 단, 이는 이진우, 실험 코드명 L318-37의 아이, 이하 ‘아이’를 찾기 위한 목적일 때만 가능하다. 두 번째, 오선란 명의의 모든 재산과 부속된 권리 일체는 ‘아이’에게 양도되며, 이는 오선란의 직계 가족일지라도 간섭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세 번째, 5성과 4성 경계에 있는 오선란 소유의 대지는 국가와 군부에서도 영구히 침범할 수 없다. 만약 ‘아이’를 찾지 못할 경우, 사후 오선란의 모든 재산은 이 공터를 유지하고 가꾸는 데 사용된다. 정확한 대지 면적과 주소는 별첨한 등기 서류로 갈음한다.”

    위의 내용을 국가 원수의 이름과 권한으로 보증한다.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주자 이세화는 아무 말도 못 한 채로 눈만 깜빡였다. 뭐라고 대꾸하면 좋을지 감도 오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원한다면 기태정 준장을 불러 문서의 진위를 확인해봐도 좋다. 그 새, 아니 그 사람은 날 무척 싫어하니, 굳이 나 좋은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이후로 오선란은 자신이 준비해왔던 이야기를 급히 늘어놓았다. 좀 더 천천히, 다정하게 말해주고 싶은데 잘 안 됐다.

    이제 이진우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저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를 만나게 됐을 때 자신의 마음을 증명할 방법을 오랜 시간 고심해서 준비해왔다. 전부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겁을 먹은 이세화가 더는 저를 안 보겠다고 할 수도 있으니, 지금 최대한 모든 것을 꺼내놓아야 했다. 아이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도록. 앞으로 몇 번 더 만나면서 가까워지면 이세화도 언젠가 마음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네가 그간 겪은 일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만… 하우스에서 오래 일했으니 너도 들어본 적 있을 게다. 군부의 거물급 인사가 오래전부터 신원 미상의 아이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 그게 바로 나였단다.”

    “…….”

    “또… 네 팔뚝에 주사 자국이 여러 개 남아있지 않니? 그런데도 항체는 안 만들어졌지? 네가 진우… 그러니까 네 아버지와 체질이 완전히 같은 건 아니긴 하다만, 아마도 어릴 때 널 데려간 브로커들이,”

    “저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오선란의 말을 막으며, 이세화가 곤란한 듯 입을 달싹였다. 대장님이라는 호칭도, 아저씨라는 부름도 부담스러운 듯 저어, 하고 말끝을 흐리면서.

    “솔직히 하시는 말씀을 다 믿을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으음, 저를 낳아주셨다는… 그분과 각별하셨다는 건 충분히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

    “그러니까 그렇게 필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잠시 멍하니 이세화를 바라보던 오선란은 멋쩍은 듯 웃었다.

    “내가… 그랬니?”

    “네. 계속 울 것처럼 절 쳐다보셔서.”

    오선란은 버석하게 마른 얼굴 이곳저곳을 쓸어보았다. 내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울 것처럼. 필사적으로….

    “미안하다. 침착하게 굴고 싶어도… 너무 오랫동안 널 찾았던 터라 쉽지가 않구나.”

    설득도 설명도 아닌 성마른 대화가 끊기자 버거운 고요가 흘렀다. 이세화는 어색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번쩍이는 증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뭐라 답을 드려야 하는 건가요? 당장?”

    “아니, 아니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말했듯 갑작스러울 거라는 것도, 믿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안다.”

    이세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증서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제 체질은… 저도 얼마 전에야 정확하게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뭐? 얼마 전에 알았다고? 약물에 중독되지 않았다면서.”

    그래서 마약 유통책을 맡았던 것 아니었나? 김 소위도 콕 찍어 이세화와 함께 일을 했던 이유가 있을 텐데….

    “아, 그건….”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듯 이세화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오선란에겐 더는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믿음이 가서가 아니라, 여기까지 찾아온데다 신분도 높으니 이미 알 걸 다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듯했다.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는데, 저는 여태 제 몸이 마취약이나 마약류에만 반응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다른 약… 예를 들면 감기약이나 최음제 같은 것도 잘 듣지 않았거든요.”

    “…….”

    “그런데 이 문젤 깊이 의식하지 않고 있어서 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약을 파는 게 제 주된 수입이었고, 퍼먹고 맛을 보는 것도 전부 그런 종류들이어서. 다른 쪽으로도 반응이 없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어요.”

    무슨 얘긴지 이해 못 하시겠죠, 하며 이세화가 말을 얼버무렸다.

    “아냐, 알 것 같다.”

    오선란은 칼에 베인 것 같은 낯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심이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

    어렸던 이세화의 곁에서 세심하게 상태를 관찰해줄 사람이 없었던 거다. 감기약이 듣지 않아 열로 절절 끓든 말든, 영양제를 먹어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든 말든… 어쨌든 마약류만 잘 팔 수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했겠지. 아니, 애초에 이세화가 마약 말고 몸에 좋은 약이나 치료제를 먹어본 적이 있기나 할까?

    살아남기 급급했던 이세화 본인 또한 자기 자신에게 무심했을 거다. 그러니 당장 가장 크게 느껴지는 신체 현상에만 집중했겠지. 제 쓸모와 체질을 오직 마약 쪽으로만 한정 지으면서, 그렇게.

    “음, 그럼 이것부터 시작해볼까?”

    오선란은 애써 유쾌한 척 이세화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넌 아이를 낳고 싶으니?”

    “예?”

    “임신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하고 싶어?”

    여태 잘 뒤집어쓰고 있던 탈을 모조리 깨고서, 이세화가 말간 낯으로 허둥거렸다.

    “어, 아뇨….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번엔 내 얘기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어쩌다 아이가 생긴 건진 모르겠다만 나와 핏줄을 나눈 존재라는 게… 가족이라는 게 사무치게 갖고 싶을 수 있어. 그건 이상한 감정이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이진우도 그랬으니까. 오선란은 자꾸만 목구멍 너머로 올라오려는 뜨거운 것을 꾹 눌렀다.

    “만약 키울 여건이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물론 원치 않는다면 그 또한. 내가 무엇이든… 정말로 무엇이든 도와주마.”

    “…….”

    “…제발 내가 그렇게 해줄 기회를 다오.”

    오선란은 주책맞게 떨리는 손을 감추려 앉은 자리에서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봐도 물기가 묻어나는 음성을 더는 감출 수 없었다.

    “당장 내 양자로 들어와달라는 게 아니다. 물론 그래 준다면 고맙겠지만….”

    다만, 언젠가 이세화를 데리고 그 공터로, 찾을 수 없는 이진우의 흔적이 묻혀있는 그곳에 방문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실험실과 수용소가 무너진 텅 빈 그 땅은 위에 무엇을 올려도 좋을 금싸라기 부지였다. 그렇게 놀리고 있을 거면 제발 팔아달라고 여기저기서 성화였다. 그러나 오선란은 그곳에 나무를 심었다. 묵묵히 잔디를 깔고 틈이 나는 대로 온갖 예쁜 꽃을 들여다 놓았다. 그리고 거대한 담을 둘렀다.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거대하고 고요한, 숲도 정원도 식물원도 아닌 환상의 공간을 짓고는 국가 원수의 이름까지 빌려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을 영원으로 남겨두었다.

    “원한다면 네가 낳을 아이에게도 책임을 다한다는 증서도 받아오마. 아직 몇 번의 권리가 남아있거든. 아까 본 그 증서 있지? 대령은 국가 원수에게 다섯 번 증명을 요청할 수 있어.”

    “저는….”

    조심스레 배를 감싼 채로 이세화가 머뭇거리며 입을 연 순간, 멀리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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