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74)화 (74/144)
  • #071

    “아….”

    세화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걸 깨닫고는, 여린 살을 짓누르고 있던 윗니를 슬그머니 떼어 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척 바 너머로 눈을 돌렸다.

    “그럼 뭔데.”

    불쑥 다가온 기태정이 자꾸만 물었다. 높은 콧대가 세화의 말랑한 뺨에 뭉개졌다. 축축한 숨이, 술에 젖은 입술이 얼굴 여기저기를 간지럽혔다.

    “아니면 뭐냐니까?”

    “괜찮… 은데, 진짜로 괜찮아요.”

    물론 거짓말이다. 지금도 체리 생각이 간절했다. 조금 전까진 다른 과일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젠 오로지 체리만 먹고 싶었다. 딱 한 번 맛봤던 주제에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갈 정도였다. 그렇지만….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소화도 안 될 것 같으니까 내일 먹을래요.”

    세화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정말로 괜찮은 것처럼,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기태정이 뭐 먹고 싶은 게 있냐고 거듭 물어 오니 자꾸만 기대가 부풀었다. 기계 속에서 돌돌 돌아가며 몸집을 키워 가는 솜사탕처럼. 그 몽글몽글한 감정은 달기만 하고, 해롭기만 하다. 그래, 꼭 솜사탕처럼.

    지금 이러저러한 것들이 당긴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그가 어떻게든 구해다 줄지도 모른다는… 그런 허튼 상상을 자꾸 하게 된다. 내일 사람 붙여 줄 테니 나가서 먹고 싶은 것 실컷 골라 오라고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민망한 곳에 패치를 둘둘 감지 않고도 외출할 수 있게 됐으니, 그게 어딘가 싶었다.

    이전보다 기태정과 조금 더 말랑말랑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들, 앞으로도 그가 저를 대하는 태도가 대단히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기태정은 기태정이다.

    심지어 그는 5성에 사는 공군 준장이었다. 남자의 평소 인품이 어떠한가를 떠나서, 신분의 격차가 너무 컸다. 이런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김 소위 관련한 일이 다 끝나고 하우스를 정리하고 나면, 저를 찾는 횟수도 서서히 줄어갈 거다. 태어날 때부터 보석처럼 반짝이는 사람들이 5성 안에 널리고 널렸을 텐데, 기태정이 뭐하러 저 같은 하층민을 상대해 주겠는가.

    좋아한다. 기태정을. 원망하면서도 좋아하고, 믿지 못하면서도 좋아한다. 불순물이 섞인 어두침침한 감정이긴 했어도, 그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세화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신, 그를 상대론 아주 조그만 것도 꿈꾸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정도의 다정에도 면역이 없는데.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마음이 식어 버린 기태정이 다시 예전처럼 저를 아무렇게나 대하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아렸다. 그러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이렇게 좋아만 할 거다. 어느 순간 마음이 다 닳기를 기다리면서. 그래야 끝이 오더라도 크게 상처받지 않을 거다. 다시 혼자가 되어 남겨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

    “괜찮아요, 정말로요. 내일 사러 갈게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덧붙이자, 그가 가만히 입을 맞춰 주었다. 어느새 고개가 비틀리고 입술이 깊이 맞물렸다. 세화는 눈을 감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뜬금없이 음식이 당길 때마다 무심했던 언젠가의 기태정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았다.

    세화는 체리체리 노래를 불러 대는 철없는 아기의 애원을 꾹꾹 눌렀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견딜 만해졌다.

    ***

    “김 소위 집안을 빼놓고서라도 봅시다. 장교 아닙니까, 장교. 일개 병사였으면 뭐가 문제였겠냐고. 대충 사형 때려 버리면 그만이지.”

    “장교인 게 뭐요. 그게 무슨 만능 방패라도 된답니까? 장교가 군법보다 위에 있어? 이 양반이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

    “아니, 내 말은…!”

    대회의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기태정은 따분한 낯으로 눈앞에 펼쳐진 촌극을 관망했다. 군사 재판이 열리기 직전, 원로들이 그래도 대충 가닥은 잡아 둬야 모양새가 좋게 않겠냐며 억지로 만든 자리였다.

    물론 기태정은 놈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조금도 타협할 마음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내건 조건은 명확했다.

    김 소위의 지위를 영구적으로 박탈할 것, 프로젝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김 소위 측의 집안 또한 군부 관할 의국 사업에서 손을 뗄 것.

    또한 자칫 국제적 분쟁으로 번질 수 있던 사건을 밝혀낸 자신의 공로를 인정하여 1계급 이상 특진시켜 줄 것, 박 소위를 비롯한 휘하 군관들의 군공 또한 인정해 줄 것.

    마지막으로 수용소 출신 군인들 또한 보통의 군인들처럼 제대 이후로도 원로로서 군사 재판의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줄 것.

    이 요구 사항을 단 하나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땐 군법대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김 소위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형이다. 멍청한 자식 놈 기 좀 살려 주겠답시고 기밀문서에, 허가받지 않은 의약물까지 턱턱 내준 그쪽 집안사람들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을 거고.

    그러니 오늘의 회의는 기태정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소득을 얻긴커녕, 밥만 축내는 늙은이들의 개소리나 듣게 될 거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핑계를 대지 않고 굳이 얼굴을 내비친 건 오선란 대장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관사에서 이세화의 체질을 확인하던 날, 나 중위가 읽어 보라며 건네준 자료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일단 이세화의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의 기록에만 여러 차례 손을 댄 흔적이 보였다. 그것도 있던 내용을 삭제하려던 게 아니라, 지워진 정보를 굳이 복원해 보겠다고 애쓴 것 같았다. 그리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고 신변잡기에 가까운 시시콜콜한 얘기들이긴 했다만, 그래서 기태정은 그 문서가 더더욱 수상쩍게 느껴졌다.

    굳이 이런 걸 뭐하러 되살렸지? 당시 전시에 준하는 급박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마무리도 섬세하지 못했다. 전산이 아니라 눈으로 대충 봐도 제법 요란하게 이 문서를 뒤적였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도 오직 한 사람의 자료만.

    게다가 이세화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그 실험자만 오선란 대장, 아니 당시 기준으론 오선란 대령이 책임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뭐라고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기태정은 이런 순간마다 자신의 감을 믿었다. 분명 뭔가가 더 있다.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숨은 이야기가.

    그래서 박 소위에게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 지시를 내려 뒀고, 그와는 별개로 오늘 오선란 대장과 독대할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사람은 자리를 비웠고, 하등 쓸모없는 멍청한 새끼들이 멍청한 소리나 늘어놓는 걸 한 시간이 넘도록 강제로 관전하고 있었다.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이세화 데리고 쇼핑이나 갈걸. 휘황찬란한 5성의 백화점을 보면 또 얼마나 신기해할까.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놀리면 아니에요, 하고 말꼬리를 늘이면서도 동그랗게 솟은 볼을 하고는 커다란 눈을 슴벅거리겠지.

    어째 매번 최 원사 좋은 일만 시키는 기분이었다. 저번에 4환에서 관사로 넘어올 때도 이세화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감탄했는지, 그 새끼만 봤잖아.

    기태정은 목을 길게 빼고서 천장을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세화가 느지막이 일어난 탓에, 조금 전에야 외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금 헬기로 움직이면 같이 장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어? 기태정 너 어디 가!”

    자기들끼리 왁왁 소리를 질러 대던 늙은 원숭이들이 그제야 이쪽을 돌아보았다.

    “할 일이 많아서 저는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스스로 이룬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면서 오직 집안의 후광에 기대어 원로 대우를 받는 놈들이었다. 계급 자체는 기태정보다 낮은 사람들도 대다수라, 법대로 하자면 상관인 자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야, 기태정. 다른 걸 다 떠나서 이렇게 무식하게 굴어서 너한테 좋을 게 대체 뭐가 있냐? 네놈이 김 소위한테 감정 안 좋은 건 알겠는데, 이럴 때일수록 똑똑하게 굴어야지.”

    “그건 이 대령 말이 맞네. 이렇게 터트리기 전에 김 소위네 집안에 먼저 찾아가서 협상할 생각부터 했어야지. 도와줄 애미 애비가 없으면 다른 어르신들한테 조언이라도 구해 보든가. 네 기분 좀 상했다고 지금 온 군부가 뒤집혀서 이게 무슨 꼴이냐, 엉?”

    “에휴. 난 아직도 모르겠수다, 대체 김 소위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그놈의 추수인지 촉수인지 하는 거, 실제로 상용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던 기태정의 군화가 우뚝 멈추어 섰다.

    “…똑똑하게?”

    밑창이 바닥을 긁으며 돌아서는 소리가 스산했다. 목소리를 높였던 게 언제였냐는 듯, 원로들은 헛기침하며 기태정의 눈을 피했다.

    “지금 저더러 똑똑하게 굴라고 하셨습니까?”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원로들을 경호할 목적으로 문가에 시립한 부관들은 당장이라도 무전을 칠 기세였다. 원칙적으로 회의실 내 무기 반입은 금지였으나, 기태정은 맨주먹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괴물이었다.

    “제가 수용소 끌려오고서 처음으로 모의 전투 치렀을 때 말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의 면면을 무표정하게 훑어보던 기태정이 차게 웃었다.

    “아, 물론 모의는 아니었죠. 붙인 이름은 그랬어도 패배하면 진짜로 뒈졌으니까.”

    룰은 간단했다. 전투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가, 지시대로 적군을 격파하고 나오면 그걸로 끝이었다. 시간 내에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대로 사살될 거라곤 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축이었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것도 아니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트리는 것도 아니다. 시키는 대로 함정을 헤치고 지정된 곳에 깃발만 꽂으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제법 괜찮은 작전을 짰고, 그 결과 적군 역할을 맡았던 애들까지 모두 살려서 무사히 데리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관은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며 다시 하라고 하더군요.”

    같은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었다. 자꾸만 효율성을 언급하기에 시간을 단축해 보려 애썼다. 선두에 나서서 어렵고 까다로운 일은 전부 해치웠다. 덕분에 처음보다 2분이나 빠르게 탈출했으나, 교관은 여전히 고개를 내저었다. ‘군인으로서의 효율성’에 대해 잘 생각해 보라는 아리송한 조언만 던져 주면서.

    “그래서 이번엔 적군은 전부 죽이고, 아군만 살리는 방향으로 틀어 봤습니다.”

    그런데도 교관은 엄격한 얼굴로 기태정과 아이들을 도로 프로그램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직전에 임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반복되는 고된 전투에 열 살 남짓한 애새끼들이 지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어쨌든 효율성, 효율성 노래를 부르기에 이를 악물고 좀 더 기상천외한 작전을 구상해 보았다. 말도 안 된다고 벌벌 떠는 애들을 다독여 어찌어찌 또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두어 명은 체력이 부족해 나가떨어졌지만, 직전보다 10분이나 빨리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번엔 주어진 자원도 거의 낭비하지 않았다. 그래도 교관은 틀렸다고 말했다.

    “그렇게 일곱 번째로 시뮬레이션 안으로 들어가니, 이젠 작전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지쳐서, 졸려서, 배고파서, 다른 놈들은 뒤지든 말든 나부터 빠져나오고 봤습니다. 그제야 통과를 시켜 주더군요.”

    교관은 흡족해하며 기태정에게 오늘 몫의 식사를 던져 주고는, 미련 없이 빨간 버튼을 눌렀다. 그 가벼운 손짓에 모든 것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안에서 아등바등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다.

    거기엔 기태정의 동기들도 있었다. 꼬나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며 교관들에게 뒤지게 처맞고 쫄쫄 굶고 있던 저에게, 조금이나마 먹던 밥을 덜어 주던 애들이었다. 이번 모의 훈련에서도 걔들은 군소리 없이 저를 따랐다. 선두에서 애써 줘서 고맙다고도 말했다. 진짜로 이거 수료하면 군인 시켜 준댔는데, 기태정 너는 정말 장교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소리나 하면서 자기들이 뿌듯해하곤 했다.

    기태정은 주저앉아 겨우 건네받은 빵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저에게 온정을 베풀었던 동기들이 다 죽고 나서야 배급받은 고무 같은 빵을 허겁지겁 삼키고, 차가운 바닥에 지친 몸을 뉘였다.

    그러고 있자니 속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걔들은 착하고 정이 많아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눈 뒤쪽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아리고 쓰렸다. 그러나 그 감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자야 했다. 지금 쉬지 않으면 다음 훈련을 따라잡지 못할 거고, 그럼 내일 개죽음을 당하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힘들이지 않고 최대 다수가 살아남는 것이 효율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공들여 기른 인간 병기들이 홀로 개싸움이나 하는 동안, 뒤에서 손 놓고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거. 그게 교관들이 바라던 효율성이었던 거죠.”

    그래서 이후론 기태정도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보살피고 다스리고 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파괴를 최우선으로 두고 작전을 짰다. 단신으로 격파 가능한 상황이라면 그렇게 했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는 법을 터득했으며, 필요할 땐 아군도 주저 없이 몰살했다. 그러라고 저 같은 살육 기계를 만들어 낸 거였으니, 지시대로 충실히 움직여 줬다.

    “그래서 이번 일도 그 시절 교관님들이 가르쳐 주신 대로 처리했을 뿐입니다. 여러 사람 귀찮게 하지 않고 직접 움직여 증거 전부 확보했잖습니까?”

    “기, 기태정! 너 지금!”

    “김 소위처럼 군부에 걸림돌이 되는 놈은 아군이라도 싹을 잘라 버려야 하니까요. 윗분들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효율적이고, 똑똑한 일 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손에 쥐고 있던 정복 모자를 삐딱하게 머리에 얹으며, 기태정은 일부러 근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이런 낯짝을 할 때 저 새끼들이 가장 복장 터져 하는 걸 잘 아니까.

    “계급은 제가 더 높으니 경례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럼.”

    “야! 기태정!”

    쓸데없이 육중한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내내 저를 괴롭히던 소음도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차단되었다.

    기태정은 힘주어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고는, 박 소위에게 손짓했다. 대기하고 있던 놈이 건네주는 담배를 낚아채듯 물었다. 즐겨 피우던 시가는 아니었어도 니코틴이 몸에 도니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이세화 곁에 있을 땐 이제 담배도 피우면 안 되고, 애한테 욕도 하면 안 된다. 나 중위는 아침에 득달같이 연락해서는, 간접흡연은 임부와 태아 모두에게 좋지 않으니 되도록 끊으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럼 씨발, 이런 개좆같은 기분이 들 땐 뭘 어떻게 하면서 견디라는 거지. 진짜 약을 빨 수도 없고….

    기태정은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뻑뻑 내뿜으며, 보상이라도 바라듯 이세화를 떠올렸다. 뾰족한 눈매를 하고선 애한테 욕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그를. 어제 제 무릎 위에 앉아서 꼼지락거리던 모습도. 그래도 많이 변하긴 했다. 예전 같았으면 뭘 줘도 받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 이젠 내일 뭘 사러 나가겠다는 얘기까지는 곧잘 하는 걸 보면.

    임신하면 참을 수 없이 먹고 싶은 게 생긴다던데. 어젠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낮에 그렇게 헛구역질을 해 댔으니 속도 좋지 않았을 거다.

    “음….”

    야심한 밤, 당기는 것이 있어 침실 앞을 서성이는 이세화를 상상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저를 깨울까 말까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준장님, 하고 속살대겠지. 언제쯤 그런 부탁을 하려나.

    아아. 기태정은 저도 모르게 자연스레 풀어진 입매를 더듬었다. 저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웃음이 번져 있었다. 그런 이세화를 볼 수 있으니, 담배고 욕이고 참아 보는 것도 감수해 볼 만하지 않냐고,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이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저… 준장님.”

    주변을 살펴보던 박 소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기태정을 불렀다.

    “방금 최 원사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오선란 대장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나타나? 어디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기태정은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는 박 소위를 휙 돌아보았다.

    “최 원사? 걔가 오선란이 나타난 걸 어떻게 알고서?”

    “그게… 이세화 씨와 백화점 식품관을 돌던 중이었는데… 오선란 대장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세화 씨와 할 말이 있다며 사람들을 몰아냈다고 합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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