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72)화 (72/144)
  • #069

    기태정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너 하는 꼴만 보고 있으면, 아주.”

    그리곤 배 위에 얹고 있는 세화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 코끝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전부였다.

    세화는 허옇게 마른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내가 뭐? 나 하는 꼴이 왜. 남자에겐 대놓고 묻지도 못할 거면서, 소심한 반항심은 뾰족한 가시가 되어 세화의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사실 평소 기태정의 말씨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반응은 오히려 부드러운 축에 속했다. 수틀리면 주저 없이 혀끝의 칼날을 휘두르는 사람이다. 건방지게 지금 너 뭐라고 했냐고 화내지 않는 것만 봐도,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었노라 드물게 변명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냥 이대로 넘어갈 생각인 것 같은데….

    기태정이 자기 하는 짓을 궁상맞게 여기는 것 같다고 확대해서 해석하는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겨우 몇 음절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고서, 그에게 자신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 사람인지 곱씹고, 그리고 혼자 마음 아파한다. 이제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도 매번 이러고 있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아기한테 욕하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나는 대체 당신에게 뭐냐고 그렇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한 발자국을 떼기가 쉽지 않아서, 예전에 기태정에게서 받았던 날카로운 말을 또 듣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저 속만 푹푹 끓었다.

    “일단 사인부터 해. 앞으로 애한테 욕을 하든 안 하든, 애를 낳든 떼든… 어쨌든 해야 할 일이니까.”

    테블릿을 앞으로 끌어와 화면을 터치하자, 서류가 두둥실 떠올랐다.

    임부 보호자 등록 신청서.

    이미 자잘한 내용은 입력을 마쳤는지, 화면에는 서명해달라는 메시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기태정은 세화가 태블릿을 밀어낼 수 없도록 패널의 귀퉁이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거리에 두고서,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듯이.

    세화는 한숨을 꾹 삼키고, 애매하게 자세를 고쳤다. 눈치가 보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볼 수도 없어서. 여전히 기태정의 무릎 위에 앉은 채로 꾸물꾸물 등만 돌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보호자 등록에 집착하는 걸까? 저야 이 시기가 끝나면 어느 서류에서도 기태정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군부에 몸 담고 있는 이상 영구히 남은 기록을 보며 기분만 잡치는 건 본인일 텐데.

    게다가 기태정은 절차 같은 건 전부 무시할 수 있는 계급이었다. 그와 동행한 저에게도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았을 정도니, 멋대로 서명하고 통보만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아니, 그게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 그런데 굳이 저를 청사까지 끌고 와서, 직접 내용 다 살펴보고 서명하길 종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세화는 태블릿 화면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려다 말고, 도로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어보자.

    왜 이렇게 나의 기록에 당신의 이름을 올리고 싶어 하는 건지.

    내가 입덧을 하든 몸이 축나든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이렇게 챙겨주려 드는 건지.

    떠올리기도 싫은 못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으면서, 왜 지금은 내가 당신을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건지.

    왜.

    대체 왜.

    “안 해?”

    “…….”

    “네가 안 할 거면 내가 대신 하고.”

    세화는 대답 대신 팔을 뻗었다. 서툰 그 움직임을 따라 부드러운 니트가 팔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화는 잔뜩 긴장해 핏줄조차 숨어버린 창백한 손으로, 태블릿을 쥐고 있던 기태정의 손등을 간신히 감쌌다.

    “준장님.”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리고 입을 떼자마자 후회했다.

    똑바로 기태정을 쳐다볼 용기도 없으면서, 이런 얘길 꺼내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미약하고 초라해도 반란은 반란이었다. 일을 벌인 이후론 두 번 다시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없을 텐데….

    “그러니까….”

    이러다 또 과호흡이 올 것 같아 반대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무섭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말문을 열었으니… 마무리는 지을 거다.

    이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던 정체 모를 의문들은, 오늘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점점 어떠한 확신으로 굳어졌다. 마냥 외면하기엔 이미 커다랗게 부풀어 버렸고, 모르는 척 묻고 있기엔 너무 아파서… 그래서 기태정에게도 묻고 싶어졌다. 당신도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지.

    “준장님은 저를….”

    “너를 뭐.”

    “저를…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화는 눈을 질끈 감고서, 내내 머릿속에 떠다니던 문장을 왈칵 뱉어냈다.

    “…뭐?”

    “예전에 그러셨죠. 말 안 들으면 도박장 한가운데 엎어놓고서, 제가 뒷구멍으로 몇 번이나 가는지 손님들에게 판돈 걸게 할 거라고.”

    자신의 말랑한 손바닥에 아래 놓인 남자의 손등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깔고 앉은 허벅지, 애매하게 안긴 품… 닿고 있는 그의 모든 부분이 경직된 게 느껴졌고, 규칙적이던 숨소리는 뚝 끊겨버렸다.

    “부르는 말에 굼뜨게 대꾸했다고 제 발목 부러트리려고 하셨고, 부하도 아닌 주제에 네가 왜 날 준장이라고 부르냐고도… 음, 그리고….”

    “…….”

    “그리고… 잠깐 상대해주는 장난감 주제에 호감이든 동정이든 그 어떤 감정도 품지 말라고, 그렇게 무섭게 다그치신 적도 있었고….”

    “…이세화.”

    “네, 제 이름… 한 번도 그렇게 불러 주신 적 없었고요.”

    처음엔 그 구멍에 2억이나 꽂아볼 날이 오긴 하겠냐고 했으면서. 요즘은 내기니 빚이니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이젠 세화마저 셈하는 것을 잊었을 정도다.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몸을 섞다가 자신이 호응해주길 기다리기도 하고, 그럴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그리고…. 돈으로 산 섹스가 아니란 걸 확인이라도 받고 싶은 듯 수시로 저에게 키스하려고 들었다. 그 어떤 성적인 접촉도 없이 꼭 끌어안고서 잠을 청한 적도 있었다.

    “그러시던 분이 네 체질 변한 거 몰랐다고, 정성껏 변명까지 하셨죠. 예전엔 제가 관심 보인 걸로도 불쾌해하셨던 어릴 적 이야기… 직접 들려주시기까지 하면….”

    “…….”

    세화는 몇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그리곤 테이블 위로 어색하게 걸터앉았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차피 후회하게 될 거다. 기태정에게서 어떤 답을 받더라도, 내가 그때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자책할 게 뻔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기태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너는 적어도 진심을 내보이려 이만큼이나 애썼다고, 평생 쥐새끼처럼 숨어 살았던 주제에 그래도 없는 용기를 이만큼이나 그러모았다고, 스스로를 위한 핑곗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화는 눈을 꾹 감고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제 보호자가 되는 꼴은 절대 보기 싫다는 듯 자꾸 이러시니까….”

    “…….”

    “자꾸만, 자꾸만 멋대로 오해하게 돼요. 준장님이 저를….”

    “…….”

    “어쩌면 준장님이 더는 저를, 구멍이나 좆집 같은 걸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더듬더듬 내뱉는 음절마다 새파랗게 끓는 잠열이 묻어났다. 제가 듣기에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세화는 왈칵 밀려오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흐윽, 작은 숨을 흘렸다.

    벙커에서 손목을 망가뜨리며 키스했던 그때 기태정의 얼굴이, 인대가 뒤틀리던 그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고가의 물건을 탑처럼 쌓아주면 자신의 슬픔을 달랠 수 있으리라 여기던 그의 무신경함이 미웠고, 내가 다 책임지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을 땐 정말이지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분명 그랬는데….

    그래서 이 남자를 마냥 싫어하기만 하는 건 또 아니었다.

    좋아하냐고 물으면 어떻게 그런 사람을 상대로 예쁜 감정을 품을 수 있겠냐고 답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싫어하냐 물으면… 그 또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기태정이 무서운데, 무섭지 않다.

    싫은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다.

    아니, 싫은데… 좋다.

    배 속을 뜨겁게 달구고 가는 모순적인 마음을 저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세화는 물에 젖은 속눈썹만 하릴없이 깜빡이다,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4환은 3월에도 눈이 내린다. 살이 벌겋게 부르틀 정도로 춥고, 한겨울처럼 함박눈이 수시로 쏟아진다. 오물과 녹은 눈이 뒤섞인 아침의 거리는 짙은 회색이다. 거기에 눈치도 없이 잠깐 피었던 잡초들까지 가세하면 더더욱 가관이었다. 더럽고 질척이는 흙탕물이 사람들의 발목을, 옷을 엉망으로 적시고. 그래서 손님들은 씨팔 개팔 쌍욕을 하면서 하우스의 문을 쾅 열어젖혔다.

    세상엔 그런 봄도 있는데. 이 유리 온실처럼 아름다운 계절만 있는 게 아닌데.

    그렇다면 이런 엉망진창인 감정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더는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

    “그러면 저를….”

    “…….”

    “이름으로 불러 주실 수 없는지….”

    자기야, 삼월아, 사쿠라. 혹은 장난감, 좆집, 구멍 같은 게 아니라.

    “박 소위, 최 원사 이렇게 부르듯이… 그냥 평범하게 이세화, 그렇게….”

    특별한 의미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녹을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곳에나 놓인 물건 부르듯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당신의 눈앞에 있는 게 피와 살로 빚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해주기만 한다면.

    “보호자 등록… 그런 거 이전에, 저는 여기서부터 준장님과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

    “이것도 제가 건방… 떠는 일인 걸까요. 그런… 거겠죠.”

    그리고 여기까지가 세화의 한계였다. 똑 부러지게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더는 씩씩한 척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

    기태정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없었고, 그래서 세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이제 폭격처럼 모진 말이 쏟아질 테니, 눈치도 없이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서둘러 흘려보내야 했다.

    워낙 가까이 마주 선 탓에 바닥이 아니라 바지 위로 동그랗게 물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의 앞에서 울었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방금 헛소리도 잘만 늘어놓았는데.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 정도는 이제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세화.”

    자꾸만 차오르던 물막을 거두어내던 세화는, 기름칠이 덜 된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준장님. 방금,”

    “이세화.”

    “…….”

    “이렇게?”

    기태정의 눈이, 저를 해체할 듯 직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시선으로, 저 아래에서부터 길어온 듯한 목소리로.

    “물었잖아, 이렇게 부르면 되냐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아닌가. 잘 모르겠는데. 사람 이름을 의식하고 부른 적이 없으니.”

    “아, 아뇨…, 맞아요.”

    세화는 자꾸만 물기가 어리는 눈가를 소매로 꾹꾹 누르면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애정도 조롱도 없는 그런 평범한 부름.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에게 그렇게 불리고 싶었다. 그 느낌이 궁금해서, 이날 이때까지 소원했다.

    “그럼 이제, 저한테 하나 주셨으니까….”

    얼결에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은 세화는 헐떡이며,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제 준장님이 저한테, 흑, 받아 가실… 차례인데… 보통은, 아니 늘, 그랬으니까….”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 울음이 자꾸 비집고 나와서, 내뱉는 말마다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안 쫓아가니까 천천히 말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게…, 흐, 이번에는 입 벌리라는, 그런 말 하지 말고….”

    예전에도 기태정과 몇 번 이런 식의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봤자 겨우 두어 번뿐이긴 했어도, 다행히 이야기가 좋게 마무리가 될 때쯤이면 그는 언제나 보상처럼 키스를 요구했다. 정확히는 순순히 입을 벌리라고 세화에게 하명했다.

    “키스해도 되냐고, 그렇게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협상을 했으니, 당연히 그런 수순으로 흘러갈 게 뻔했다. 어쩌면 키스보다 더한 것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화는 조금만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여기서 선을 넘는대도 어차피 저는 거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럴 거라면.

    “오늘만요, 오늘만….”

    자신에게 이름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안다면, 제발 오늘은 조금만 더 관대하게 굴어줄 순 없을까.

    “다신 안 조를 테니까….”

    “뭘 다신 안 졸라.”

    기태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하여튼 바라는 것도 많지.”

    으음. 세화는 잔뜩 울어 쪼글쪼글해진 턱을 하고서 고개를 얕게 갸웃거렸다. 이건 또 무슨 뜻이지. 욕심 작작 부리라고 타박을 놓는 건지, 앞으로도 바라는 게 있으면 졸라도 된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저, 준장님….”

    “그래, 이세화.”

    “…….”

    “이제 키스해도 돼?”

    봄인데도 눈이 내렸던 어느 추운 밤, 허름한 한 칸짜리 숙소 안에서. 그때 세화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기태정은 대답 대신 입을 벌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지금, 햇볕이 내리쬐는 사치스러운 솔라리움 안에서. 기태정에게 평범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기태정은 입을 벌리라는 말 대신 키스해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다.

    아. 세화는 결국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려버렸다. 진창으로 엉킨 감정들 틈새로, 내가 그래도 이 사람을 좋아하긴 하는 것 같다는 아주 얇은 실타래를 겨우 건져내고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다정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꿈을 꾸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처럼 싱그럽게 반짝였으면 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는 2원짜리, 4원짜리 인생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애정이 이 정도인 거라면. 그렇게라도 손에 쥐어보고 싶었다.

    “저는, 흐윽, 준장님 말 안, 믿어… 요, 제 몸 변한 걸 모르고서 그런 소릴 했다니, 나더러 그 얘길 믿으라고….”

    “…….”

    “그런데, 그렇다고, 체질 바뀐 거 알았으면 함부로 안지 않았, 윽, 않았을 거란 말을, 아이라면 끔찍하다는 얘기가… 그게 또 믿기지 않는 건 아니라….”

    예전에 기태정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이런 사람 좋아해봤자 자기 신세 조지는 꼴이라는 거 아는데. 이런 사람에게 흔들리고 만 제가 등신이라는 걸 아는데, 그래도…. 처음 마주했을 때보단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까, 이제 저 사람이 내 이름도 평범하게 불러 주고, 겨우 하는 부탁도 다 들어주려고 하니까….

    “이름도 불러 주고, 키스해도 되냐고 물어봐달래서 그렇게 해줬더니 자꾸 다른 소리나 하고.”

    쏟아지는 햇빛을 등지고서, 거대한 해일처럼 남자가 일어섰다. 세화의 뺨을 감싸는 손길은 거칠지도,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했다. 그토록 갈구하고 바라던 보통의 따뜻함이었다.

    “이젠 무서워하는 시늉도 안 하지?”

    “그게 아니라….”

    “됐어.”

    “…….”

    “다 알겠으니까….”

    젖은 얼굴 위로 천천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조금 전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던 익숙한 살 내음이 세화의 몸을 투박하게 감싸 안았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이세화.”

    세화는 눈먼 사람처럼 더듬더듬 남자의 각진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아프고 서러워도 평생 처음으로 가져보는 계절이어서, 눈이 녹지 않은 봄이라도 마냥 좋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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