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연동된 컨트롤러는 최신식이 분명한데, 거대한 창문은 세월아 네월아 태평하게 움직였다. 사람 약이라도 올리려는 건가. 빠르게 버튼을 연달아 누르자 안전상의 문제로 잠시 가동을 멈춘다는 속 터지는 멘트나 흘러나왔다.
“이, 씹….”
이세화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바깥 공기를 쐰 게 도움이 되긴 했는지, 이전처럼 격렬한 구토 증상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 건 또 아니었다. 헛구역질만 겨우 멎었을 뿐, 이세화는 여전히 몸을 잘게 떨며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만약 이세화의 철천지원수가 온다고 해도, 애가 저렇게 널브러진 꼴을 보고 있으면 절로 연민이 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처량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였다.
“……님.”
대체 왜 저러는 거지? 화병 속 물도 밖으로 부어버릴까, 아니지 병째로 집어 던져버릴까…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었는데.
“준…….”
그러는 와중에 얼핏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기태정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방금 날 부른 게 맞나?
“나 찾은 거야?”
저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되물음이었다. 물론 이세화가 듣기엔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하고 무심한 음성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태정의 속내는 그러했다.
바로 직전에 이세화가 하는 말을 다 잘라먹고서, 제 성질대로 몰아가다 이 사달이 난 거였다. 혹 상태가 더 안 좋아졌는데도 말도 못 붙이고 혼자 끙끙 앓는 거라면. 체질도 이상한 와중에 애까지 들어섰으니, 여기서 더 안 좋아지면 그땐 진짜 수습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이세화가 얘기하면 귀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보호자 등록은 물러주지 않을 거지만.
“아, 네… 저 죄송한데 조금… 만….”
이세화는 다시 구역감이 이는지 눈을 꾹 감고는 침을 크게 삼켰다. 그런데,
“조금… 만 가까이… 와주실 수는 없는지….”
마른 목덜미를 울리며 그가 겨우겨우 내뱉은 말은,
“…가까이 와달라고?”
기태정으로선 짐작조차 못 했던 내용이었다.
“너한테? 내가?”
이세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 갈라진 목소리만큼이나 형편없이 작고 힘겨운 몸짓이었다.
다가와 달라고…. 기태정은 홀린 듯 발을 뗐다. 어려울 거 하나 없는 부탁이었다. 부탁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다만…. 이세화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찾는 건 처음이라 조금 얼떨떨할 뿐이었다. 아파서 열에 들떠있을 때나 겨우 가지 말라고 했고, 그나마도 희미하게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을 땐 죄송하다는 사과부터 했는데.
물론 이전에도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린 적은 있었다. 강아지도 산책하러 나가는데 저는 왜 외출할 수 없냐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고, 눈치를 보면서도 이런저런 얘기를 쫑알쫑알 잘도 늘어놓았다. 초반에 비하면 확실히 저를 덜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편해졌대도 어느 이상으로는 선을 넘지 않으려 들었다. 김 소위 일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체크카드가 뭐냐고 묻지도 않았고, 기태정이 사무실을 비우는 날이 많아져도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대체 언제 들어오는 거냐, 이런 가벼운 물음도. 먹고 싶은 게 있으니 사다 줬으면 좋겠다, 이런 별것 아닌 부탁도. 이세화는 일절 입에 올린 적 없었다.
“더 가까이?”
“…네.”
그러던 놈이, 그 어느 때보다 저를 불편해할 게 뻔한 이 상황에서 가까이 와달라고 애원하다니. 연유를 알 수 없어 의아하긴 하다만, 귀찮고 싫은 건 아니었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유령처럼 제 뒤만 쫓아오는 모습보다야 훨씬 보기 좋았다.
“하아….”
이세화는 제 기척을 느끼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좁은 곳에 갇혀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사람처럼. 한참 만에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기태정의 체향이 너무나도 간절했던 사람처럼.
“향수 냄새 많이 날 텐데, 나한테서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차라리 이쪽이 괜찮은 것 같아서….”
이세화는 애매하게 시선을 비낀 채로 웅얼거렸다.
기태정은 허공에 손을 툭툭 털어냈다. 혹시라도 꽃물이 묻어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으니까 쉬어.”
그리곤 조금 더 가까이 와달라 말도 못 하는 미련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태 이세화를 다루었던 것 중 가장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는데도, 지치고 마른 몸은 크게 휘청이며 자신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어머, 사모님 어디 아프신가요? 안색이….”
마침 태블릿을 챙겨 온 담당자가 화들짝 놀라 이쪽으로 달려왔다.
“구급차를 부를까요? 의료용 헬기라거나….”
잠시 편안해 보였던 이세화의 낯에 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더니 금방이라도 헛구역질을 시작할 것처럼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냈다.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공기 중의 향이 일렁이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접견실에 대체 뭘 뿌려둔 거지?”
“예?”
“무슨 짓을 해놨길래 사람이 이렇게… 아니 됐고, 꽃과 방향제가 없는… 하여튼 향기 나는 좆같, 아니 그런 물건은 아무것도 없는 방 없나?”
잠시 아리송해하던 담당자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덧이 심하시군요.”
“…입덧?”
기태정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이세화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뭐? 입덧?
“아, 혹시 지금까진 별다른 증세를 안 보이셨나요? 준장님께서 이렇게 놀라시는 걸 보니….”
그러니까 이세화가 갑자기 픽 쓰러진 게.
“으음, 아까 홀로그램에 6주라고 쓰여있던 것 같던데. 그럼 슬슬 시작할 때도 됐네요.”
약간의 훈향도 못 견디고 허우적거리는 게… 내 애를 배서 그런 거라고?
“저도 입덧이 좀 심했던 편이라… 멀쩡한 물에서도 비린내가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마시질 못했거든요.”
미간에 절로 골이 팼다. 유경험자가 들려준 실제 사례는 기태정의 상상 이상이었다. 물도 마시기 어려웠다니. 입덧이란 게 그렇게 무서운 거였나?
“바로 맞은 편에 작은 유리 온실이 있는데, 거기서 잠시 쉬시는 건 어떨까요? 자연 그대로의 풀냄새는 저도 크게 거슬리지 않아서, 일하다 너무 힘들면 거기서 잠시 숨 좀 돌리곤 했어요.”
“그런데 그 입덧이라는 게….”
“예?”
“…아니, 그 유리 온실.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기태정은 자꾸만 뻗어나가려는 생각의 가지를 뚝 잘라냈다. 하. 지금은 입덧이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답이 나오지도 않는 문제를 붙들고 있어봤자 이세화의 몸만 괴로워질 거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바로 근처에 있어요.”
이세화의 오금 아래로 손을 쑥 밀어 넣으며, 옆으로 길게 안아 들었다. 부축해서 가자니 키 차이가 상당해서 그가 힘들어 할 것 같고. 그렇다고 업고 가자니 배 속의 애가 신경 쓰였다. 정확히는 저 손톱만 한 게 짓눌려서 혹여 이세화의 몸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줄까 봐.
자기를 어떤 방식으로 들어 옮기든, 이세화는 기태정의 몸통에 얼굴을 들이박고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심장이 자리한 부근에 따뜻한 숨결이 와닿았다. 그 미약하고 나약한 숨소리가, 어쩐지 자신의 살가죽을 뚫고 들어와 몸 안쪽을 묵직하게 휘감고 가는 기분이었다.
***
축 늘어져 있던 세화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보이는 건 온통 초록빛이다. 전부 유리로 지어진 비현실적 공간 속, 이름 모를 식물들이 곧고 예쁘게 자라나고 있었다. 계절도 계절인 데다 복사열이 상당할 시간대인데도 그리 뜨겁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아할 적당히 따뜻하고 또 선선한 온도. 내부에 자체 환기 시스템이라도 있는지 미풍이 뺨을 살랑이고 갔다.
세화는 멍하니 싱그럽고 인위적인 풍경을 바라보다, 기대고 있던 것에 다시 이마를 파묻었다. 시원하고 익숙한 향을 들이켜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지. 천국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으로 느껴 본 강렬하고 불쾌한 통각 덕분에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있었다. 너무 괴로워서 기태정에게 도와달라고 했고, 그가 화를 냈고, 그러다 갑자기 저를 들쳐 안고서 어디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까진 생각이….
“…아!”
뒤죽박죽이던 기억을 차례로 헤집던 세화는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에 머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여태 볼 아래 뭉개고 있었던 건 딱딱한 베개 같은 게 아니라… 기태정의 가슴팍이었다.
“가만히 있어.”
“제가 왜 이러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머리통 깨지고 싶은 거 아니면.”
남자는 허둥지둥하는 세화를 붙들며 작게 혀를 찼다.
“그래서, 속은 어떤데. 아직도 토할 것 같아?”
당황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서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그러면서도 남자를 향한 미안함보다는 심술이 삐죽 솟아났다. 아니, 심술 같은 표현은 너무 귀엽다. 원망이라고 하는 쪽이 좋겠다. 쓰러지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기태정도 잘한 건 없었다. 웃으며 저를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이 무서웠고, 그들이 툭툭 내뱉고 가는 말에 숨통이 턱턱 막혔다. 다정하신 부군, 좋으시겠어요, 사모님, 보호자 등록….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명치 아래가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기태정은 자신이 입만 열어도 보호자 등록이 그렇게 싫으냐며 화를 냈다.
“…입덧이 심하다고 하던데.”
그런데 정수리 위로 쏟아진 무심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만큼이나 무심히 말하는 내용은 전혀 의외의 것이어서,
“입덧?”
세화는 그가 했던 말을 더듬거리며 따라 할 따름이었다.
“입덧이 심하다고요?”
“…임신하면 나타나는 증상.”
기태정은 반대편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신경질적인, 아니 그보다는… 뭐랄까. 초조해 보이는 손길이었다.
“평소 잘 먹던 것도 싫어지고. 특정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고… 그런 거 있잖아.”
“…아아.”
세화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마른 뱃가죽을 내려다보았다. 입덧이라고? 스트레스로 얹힌 게 아니라? 21년간 임신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서 살아왔던 터라, 이런 증상이 뭘 의미하는지 곧장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입덧보다는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보다, 하고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구나….”
“하여튼 누구 핏줄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갖은 지랄 다 떨어대는 게, 아주….”
기태정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배 속의 아이에게 거친 말을 쏟아냈다. 까탈스러운 입덧 증상이 나타난 게 아기의 성격 문제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저를 닮아서.
“욕하지 마세요.”
세화는 괜히 욱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배를 꾹 감싸며 대들고 말았다.
“뭐?”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제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아직 손톱만 한 애가 저랑 성격이 닮으면 또 얼마나 닮았다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 아….”
기태정은 미치겠네, 하고 중얼거리며 마른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아니, 나는….”
여전히 배에 손을 올린 채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짓씹던 세화는, 어쩐지 갈팡질팡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믿을 수 없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네가 아니라….”
뭐지? 놀랍게도 기태정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한숨을 푹푹 내쉴 때마다 산맥처럼 너른 어깨가 크게 꿈틀거렸다. 세화는 숨을 죽이고서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을 몇 번이고 훔쳐보았다.
“…나 닮아서 애새끼 성질머리가 그 모양인 것 같다고 했던 거야.”
“…네?”
의외의 말을 들으니 턱의 힘이 절로 풀렸다. 세화는 바보처럼 입을 작게 벌린 채 멀뚱멀뚱 기태정을 올려다보았다.
“반은 내 핏줄이라 안에 든 게 그렇게 지랄 맞은 것 같다고. 너 욕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아….”
당황한 세화는 조금 전 기태정이 그랬던 것처럼 뺨이며 콧잔등을 하릴없이 쓸어댔다. 당연히 저에게 면박주려고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
“…그래도 욕은 하지 마세요.”
세화는 갈 길 잃은 손으로 괜히 상의 밑단만 구겨댔다.
“애는 잘못한 거 없잖아요.”
심장만 겨우 달린 조그만 세포에 불과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것 나름대로 살아있는 동안 욕이나 먹은 기억밖에 없다면. “누구를 닮았든 아기는 아무 잘못 없는데….”
그것도 반은 피를 나눠준 사람에게서 저렇게 험한 소릴 듣는다면… 그건 너무 불쌍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