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67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안에서 구겨져 있던 이세화를 끄집어냈다. 맥없이 시들시들한 꼴이 아주… 도살장에 끌려온 소도 이보다는 표정이 밝을 것 같았다.
“저, 실례지만 임부 보호자 등록이라고 하시면… 준장님께서 절차 밟는 것만 도와주러 오신 건지, 아니면….”
“내가 보호자야.”
기태정은 자꾸만 뒤로 물러서려는 이세화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왔다.
“이 사람이 내 아이를 가져서.”
피하지 마. 경고라도 하듯 손목과 손바닥이 이어지는 우묵한 곳을 두어 번 문지르자, 동그랗게 옹송그린 어깨가 얕게 들썩였다. 그 몸짓이 꼭 자신을 향한 거부처럼 느껴져서, 기태정은 일부러 이세화의 손을 꼭 잡았다. 아니, 단단히 손가락을 얽어 아예 깍지를 껴 버렸다. 허튼 생각 못 하게 하려고.
꾹 쥔 손을 타고 이세화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것이 느꼈지만, 그것도 처음에만 그랬을 뿐이었다. 그 이후론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서 기태정을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싫다고 우겨 대는 꼴이 보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끌고 온 건데, 얌전하게 구니까 그건 그것대로 또 별로였다.
“아아, 그러시군요. 잘 아시겠지만 장교께서 보호자를 자청하시는 경우가 흔치 않다 보니….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부군께서 참으로 다정하세요.”
눈치 없는 칭찬에 이세화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싫은 건지, 긴장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도통 짐작하기 어려운 낯이었다. 어쩌면 그 모두일 수도 있고.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기태정도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알게 된 터라 좀처럼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충격을 받은 것도, 여전히 제 말은 믿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그런데 그렇다고 나 중위에게 보호자가 되어 달라는 말을 해? 옆에서 내내 수발을 들어 주던 저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심지어 이세화는 군부 내 서버에 영구히 기록이 남을 거란 얘길 듣자마자 더더욱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식의 책임은 바라지 않는다고도 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임부의 보호자 등록이 법적 의무인 건 맞지만, 준장씩이나 되는 고위 공직자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특히 기태정처럼 아이에게 친권이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직계 가족을 포함해 타인이 나서 줄 땐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친권자는 주민등록부에 보호자로 이름을 올리는 순간부터 단순한 비상 연락망이 아니게 된다. 출산 시까지 무조건 상대방을 책임질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원활한 출산이 목적이라면 임부는 보호자의 모든 정보를 합법적으로 열람할 수 있다. 위치 추적은 물론이고 사유 재산 조회도 가능하며, 만약 보호자가 거부하면 강제 집행까지 요구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야 딱히 거리낄 일 없겠지만, 직위가 높은 사람들의 사정은 달랐다. 계급장이 화려할수록 뒤가 구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교쯤 되는 인사의 개인 정보는 어쩔 수 없이 국가의 기밀과 직결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상류 사회에선 열애 끝에 결혼한 부부일지라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직계 가족이 보호자로 나서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니, 그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태정은 이세화의 보호자가 되어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세화는 적어도 임신 중엔 준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으며, 친권자이자 보호자인 기태정의 재산도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다. 물론 출금은 아이 관련한 일로 한정되긴 하지만, 핑계야 만들기 나름 아니겠는가. 순산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보석류 좀 샀다고 할 수도 있는 거고, 나중에 아이를 위한 놀이터 좀 짓고 싶다며 금싸라기 부지를 사들일 수도 있는 거다.
신분이 높은 친권자가 임부 보호자로 나선다는 건 그 모든 걸 감수할 용의가 있다는 의미였다. 기태정은 이세화가 자신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벌여도 눈감아 줄 마음으로 지난밤 슬쩍 운을 떼 본 거였다.
기태정은 울다 기절한 이세화를 침대에 눕혀 주고,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수척해진 얼굴을 닦아 주었다. 최 원사의 조언이긴 했어도 그런 낯간지러운 보살핌은 처음으로 해 보았다. 그리고 당일 사들일 수 있었던 사치품은 모조리 쓸어 와 방 안을 가득 채워 주었다. 부하 놈들이 권유한 대로 큼지막한 꽃바구니도 준비했으며, 처음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이후론 이세화가 손도 대지 않던 체크 카드도 꽃송이 틈에 꽂아 두었다.
이후 정신을 차린 이세화가 화대 같은 개소리나 하면서 속을 긁어 대도 꾹 참았다. 예전에 자신의 발등 위로 올라서게 했던 걸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 그렇게 안아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바라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속삭였다. 내가 필요한 일이 분명 있을 테니 잘 생각해 보라고 슬쩍 힌트까지 주면서.
예상대로 이세화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래서 기태정은 속으로 짧게 웃었다. 뒤늦게 보호자 등록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어렵게 얘기를 꺼낼 이세화의 얼굴이 기대돼서.
속내는 그랬어도 이 문제론 이세화에게 심술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울리거나 놀리지 않고, 부탁하면 순순히 그렇게 해 주겠다고 바로 대답할 생각이었다. 체크 카드에 꽂힌 120억에 대한 비화도 들려주려고 했다. 손 사장 이렇게 조져 놨다고 내세우려는 건 아니고, 그저… 그러면 이세화도 마음 편하게 돈 쓰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저 답답이는 앞으로 마음대로 옷을 입게 해 달라는 요구나 했다. 하우스에서 벗겨 놓고 있었던 게 그리도 서러웠는지, 등을 돌린 채로 그 얘기를 하다가 또 울었다.
하긴, 당시엔 보호자 등록법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고서 그런 소릴 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지금 이세화가 하는 꼴을 보아하니, 알고 있었다고 한들 저에게 부탁하진 않았을 것 같다. 나 중위가 거절했으니 그다음은 최 원사나 박 소위를 찾아갔으려나? 차라리 하우스 사람들에게 돈을 쥐여 주며 부탁을 할지언정 자신에겐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을 거다. 그건 확실했다.
기태정은 저에게 붙들린 이세화의 손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옴짝달싹 못 하게 얽어매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이세화가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청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준장님. 그리고 사모님.”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장교가 떴다는 말이 짜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사모님의 보호자 등록을 하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모님이라는 해괴한 호칭에 이세화가 어물어물 저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에게 그런 말 쓰지 말라고 선을 그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물론 기태정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익숙해져.”
“…….”
“싫든 좋든 내가 보호자인 이상 앞으로 사람들은 널 그렇게 부를 테니까.”
“…그렇지만….”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에 서 있던 공무원들이 바싹 달라붙어 말을 거는 통에, 두어 번 벙싯거리던 이세화는 이내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캐물으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뻔하다. 보호자 같은 거 필요 없다는 소리나 하려던 거겠지.
“힘드시죠? 접견실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도열한 사람들은 기태정보다도 이세화에게 극진하게 굴었다. 무려 준장이 법적 보호자를 자청했을 정도니, 실세일 게 분명한 ‘사모님’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바닥 조심하시고요.”
아무것도 걸릴 게 없는 대리석 복도를 걷고 있을 뿐인데도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 댔다. 회임한 중궁을 모시는 궁인들도 이보다 유난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기태정은 이런 식의 환대를 좋아하지 않았다. 챙겨 준답시고 설쳐 댈수록 일 처리만 늦어질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세화를 떠받드는 걸 보는 건 그리 싫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세화는 잔정이 많았다. 저를 염려하고 아껴 주는 손길을 꺼릴 리 없다. 그래서 기태정은 미간을 옅게 찌푸리면서도… 다과를 챙겨 오겠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라 부산을 떠는 놈들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 이세화의 마음도 좀 녹을까 싶어서.
“쉬고 계시면 바로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접견실은 관공서라기보다 호화로운 호텔의 로비 같았다. 혹은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역사를 떼어다 놓은 미술관이라거나. 문을 열자마자 거대하고 섬세한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고, 고개를 들면 천장을 뛰노는 아기 천사들이 보였다. 날씨를 그대로 투영할 수 있는 장치가 달린 것인지, 펼쳐진 하늘은 생동감이 넘쳤다.
소파에 앉으니 섬유 유연제와 비슷한 포근하고 달콤한 향이 훅 올라왔다. 눈높이에 맞춰 싱그러운 생화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것도 눈에 들어왔다. 사실 기태정에겐 다소 정신없게 느껴지는 정경이었으나, 달짝지근한 걸 좋아하는 이세화의 취향엔 제법 잘 맞을 것 같았다.
“참, 진단서는 가지고 오셨는지요?”
“진단서?”
이런.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뻘쭘하게 볼을 긁적이던 기태정은 문득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홀로그램 두 장을 떠올렸다. 차에 타고서도 이세화가 하염없이 그것만 만지작거리길래, 답답한 마음에 빼앗아 챙겨 두었던 거였다. 저 어리바리한 놈이라면 그러다가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가락이 베이고도 남을 것 같아서.
“이걸로 등록 절차 들어갈 순 없나? 애가 저 사람을 쏙 빼닮아서 이 정도면 증빙 서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요, 진단서야 나중에 보완해 주셔도 되니까… 어머나!”
어깨 너머로 홀로그램을 들여다본 담당자가 깜짝 놀라 안경을 치켜올렸다.
“사모님하고 아주 판박이네요. 어쩜 이렇게 예쁠까…. 아기 성별은 어떻게 되나요?”
“글쎄, 물어보진 않았는데….”
“…준장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이세화가 기태정을 불렀다. 거의 속삭이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감출 수 없는 불편함이 묻어났다. 혹은 언짢음이라거나.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아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아이고, 피곤하신 분을 붙들고 제가 주책이었네요. 얼른 준비해 오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담당자가 수선을 떨며 자리를 떴다. 이세화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시선 신경 쓸 것 없이 마음껏 기태정을 불편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준장님, 죄송한데….”
“하… 작작 좀 해.”
“…….”
“뭐가 그렇게 싫은 건데? 아까 사람들 놀라는 거 못 봤어? 군인인 친권자가 나서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은 알아?”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뭐.”
허벅지 위에 올리고 있는 이세화의 양 주먹이 형편없이 떨렸다. 인제 보니 이마엔 식은땀까지 맺혀 있었다.
“그런 거 아니라면서 낯짝은 왜 그렇게 구기고 있어. 내가 네 법적 보호자가 된다는 게 그렇게 끔찍해?”
“아니… 저는… 여기 향이 너무 역한 것, 우욱!”
이세화가 돌연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몸을 크게 숙였다. 신랄하게 몰아붙이던 기태정마저 잠시 주춤할 정도로 힘겨운 기색이었다.
“욱…!”
시퍼렇게 질린 낯을 하고선 이세화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 그마저도 힘에 부치는지 소파 등받이를 쥐고선 밭은 숨만 겨우 몰아쉬었다. 아무리 봐도 꾀병은 아닌 것 같았다.
“후욱, 욱…!”
기태정은 몸을 잔뜩 말고서 헛구역질하는 이세화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일부러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열에 들떠 기절했을 땐 나 중위를 불러 상태를 살피게 하고 수액을 놔 주면 그만이었는데, 이세화가 멀쩡한 정신으로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건 처음 봐서…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흑, 으, 으윽….”
“…이세화.”
체하기라도 했나? 등이라도 쓸어 줄까 싶어서 뒤늦게 다가가려고 하자, 이세화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이젠 말을 하기조차 어려운지 간신히 손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형편없이 작은 몸짓이라 그것만으론 무슨 의미인진 알아채기 어려웠지만, 직전에 향이 역하다고 했으니 창문을 열어 달라는 것 아닐까 싶었다.
“환기해 줘? 그거면 돼?”
물어봐도 대꾸가 없었다. 시원하게 구토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맹렬한 기세로 우욱, 하고 목구멍만 울려 댈 뿐이다. 아, 씨발. 기태정은 다급히 컨트롤러 버튼을 두들겼다. 창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살짝 벌어진 틈새로 빌어 처먹을 꽃장식을 죄다 내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