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9)화 (69/144)
  • #066

    “예? 대장님, 방금….”

    누굴 찾고 있다고? 김석철은 실컷 얻어터져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끔뻑거렸다. 첩이 아니라 아이? 지금 자기 자식새끼 찾고 싶어서 여태 그 지랄 떨었다고 한 건가?

    “기태정에게 감사하도록 하게. 고발당해서 갇힌 게 아니었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자네 멱을 땄을 테니.”

    “대, 대장님! 잠시만…! 제 이야기도 들어주십시오! 전부, 이세화에 대해 전부 알려드리겠습니다.”

    김석철은 입에 고인 핏물을 퉤 뱉고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염병할. 난데없이 혼외 자식이라니….

    언젠가 부친이 이런 얘길 해 준 적이 있다. 사실 오선란 대장이 잦은 출국을 허가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결벽처럼 독신을 고집해서라고.

    지금이야 기태정이 세운 무공의 기록이 워낙 어마어마해 다소 존재감이 옅어지긴 했어도, 한창때의 오선란은 전쟁터를 휩쓴 군부의 영웅이었다. 유서 깊은 가문의 총아에, 교과서에 기록될 법한 대승을 몇 번이나 이끈, 심지어 인물마저 훤칠한 젊은 장교. 원로들이 위협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반란의 싹은 주모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변의 부추김 덕에 자라나기도 한다. 가만히 있어도 곁에 추종자들이 몰릴법한 인재는 미리 밟아 두어야 후환이 없었다. 그래서 윗사람들은 오선란이 결혼이라는 전통적인 수단을 통해 자신들과 융합하길 바랐다.

    그런데 웬걸, 혼사에 대한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오선란은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돌연 국외 체류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엔 국가 원수도 말이 되는 소릴 하라며 황당해했다. 그러나 계산기를 두들겨보곤 이내 기쁜 마음으로 재가해주었다. 언제고 깰 수 있는 결혼보다 훨씬 더 견고한 제약이었으니까. 밖으로 나도는 동안 오선란의 영향력은 자연히 약해질 테고, 오선란 본인 또한 장교의 해외 체류라는 이례적인 특혜를 유지하려면 권력의 중추에 선 이들에게 모나게 굴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오선란에게 혼외 자식이 있었다니…. 심지어 이렇게 긴 시간을 찾아 헤맬 정도로 아끼는 아이라니….

    “이세화는, 흐흠, 노름꾼 아비가 도박장에서 판돈 대신 내걸었던 놈입니다. 이건 돈 문제로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 사채꾼, 꽁지꾼들이 보장한 바입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증인들을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일단 김석철은 이세화의 신분이 확실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대장님께선 몇 번이나 찾으시는 분의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점을 강조하셨고, 그래서 저 또한 관련이 있을법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부분부터 확인해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 아이라…. 오씨 일가에게 사람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 집안은 손도 귀했다. 오선란의 잃어버린 자식이라니, 온 나라를 뒤집어서라도 진작 데려왔어야 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핏줄 문제를 여태 해결하지 못한 걸 보면….

    혹시 아이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쪽 집안 어른들이 처리한 것 아닐까? 김석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그래야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가문의 위세를 빌릴 수 없어서 오선란이 지금껏 홀로 뺑이 쳤던 거다.

    “…그렇지만 이세화는 버젓이 주민등록부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등록 날짜와 나이가 맞지 않았다면 저도 한 번은 의심했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라서….”

    “김석철 소위.”

    “거짓말하는 거 아닙니다! 이세화의 주민 등록부 확인해 보시면…!”

    “묻지도 않은 얘기로 열 올리지 말고. 어쨌든 프로젝트에 쓰일 약을 제조한 건 매조가 아니라 이세화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오선란은 바닥에 흩뿌려진 고발장 사본을 무심히 걷어찼다. 발끝으로 툭툭 건드릴 때마다 종잇장이 발랑 뒤집혔다. 우연인진 모르겠지만 그의 발길이 닿는 것마다 ‘추수’와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태정도 ‘추수’와 관련한 증거는 최소한으로 내놨지만, 적어도 이세화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은 했어. 신약 제조를 맡았던 마약 유통책이라고. 그런데 자네는 뒤로 내 이름을 팔고 다니면서, 기태정조차 숨길 생각을 안 한 사실을 나에게 감추려고 들었지.”

    “대, 대장님…!”

    당황한 김석철은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오선란의 군화를 덥석 붙들었다. 씨발. 기태정 그 여우 같은 새끼가 이세화 얘기를 벌써 꺼냈을 줄은 몰랐다.

    “제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상황을 몰라서 그간 삽질을 좀 했습니다만, 혼외자를 찾는 중이라고 언질 주셨더라면 진작 해결 방안 알려드렸을 겁니다! 브로커…, 그래 브로커들 정보도 찾고 계셨죠? 마침 사촌들이 이전에 비슷한 일을 겪어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혼외자 처리로 특히 유명한 심부름꾼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무조건 소개로만 연락처를….”

    “자네가 떠올릴법한 수를 나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나?”

    제발 믿어 달라고 오선란의 발에 뺨을 비비며 애원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냉담하기만 했다. 어떡하지. 김석철은 이대로 오선란이 가 버리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굴렀다. 일단 그를 붙잡고 봐야 했다. 뭐 없을까? 이세화와 관련한 자극적인 얘기가….

    “조, 좋아했습니다!”

    “…뭐라고?”

    “제가 이, 이세화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

    “어이없으시겠지만 진심입니다. 제가 못나서… 누구에게도 그 사람 빼앗기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제 눈엔 너무 예쁜 사람이라, 대장님께서도 당연히 마음에 들어 하실 거라고 지레짐작해서, 그래서….”

    마음이 급해져서 아무 말이나 내지르고 본 거였다. 생각나는 대로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도, 멍청한 얘기나 지껄인다고 오선란에게 몇 대 더 맞겠구나 싶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데 놀랍게도 오선란은 반쯤 돌아서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심지어 이쪽을 지그시 바라봐 주기까지 했다. 이, 이 말을 믿어 준다고? 여태 어떤 그럴싸한 말을 해도 무시했으면서. 이 허접한 변명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든 거지? 어쨌든 오선란이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김석철은 얼떨떨한 얼굴로 이세화를 좋아해서 그랬노라 거듭 읊었다. 이렇게 보니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헛짓거리 저지르곤 하는 거, 아주 없는 일도 아니잖아.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이해가 힘든데. 마음에 둔 사람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시켰다고?”

    “아, 그게… 그 사람이, 그러니까 이세화가 몇몇 약물에 내성이 좀 있어서….”

    순간 오선란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김석철은 얼어붙은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채 자기변호만 중언부언 늘어놓기 급급했다. 조금 전에 오선란이 뭐라고 했더라? 기태정도 이세화를 ‘언급’은 했다고 했었나? 그럼 이세화의 이름만 리스트에 올렸다는 거겠지? 그럴 것 같다. 방금 한 말만 들어보면 오선란도 자신이 이세화에게 신약 제조를 맡긴 이유를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뭐라더라? 이세화 본인 말로는 중독되지 않는 체질이라고 했습니다.”

    김석철은 신이 나서 주절주절 본인이 아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갑자기 살길이 트인 기분이었다. 기태정 측에선 아직 이 주제를 감춰두고 있는 것 같으니, 자신이 먼저 정보를 건네줌으로써 조금이나마 오선란에게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사자에게 위험한 일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될 것 같았으면 이세화에게 약물 제조나 테스트 같은 걸 왜 부탁했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보기엔 이세화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진, 으헉, 대, 대장님!”

    “다시 말해 봐.”

    “가, 갑자기 왜 이러시는…!”

    난데없이 멱살을 붙들린 김석철은 벌겋다 못해 자줏빛으로 익은 얼굴로 컥컥거렸다. 공중에 붕 뜬 발을 허우적거렸다. 살려달라고. 그냥 숨통을 죄는 것도 아니고, 오선란이 그의 눈높이에 맞게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린 터라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내성이 있다고? 약물에?”

    “그, 우욱, 그게….”

    “정확히 증세가 어땠지? 이세화가 주로 어떤 약물에 그런 반응을 보였나?”

    “그… 저도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마약류에는 반응하지 않았던 건 확실합니다. 그래도 약이 아주 안 듣는 체질은 또 아닌 것이, 쿨럭, 이세화가 기태정의 아이를 가진 것을 보면….”

    “…뭐?”

    그대로 영영 놓아줄 것 같지 않았던 오선란의 손에 일순 힘이 탁 풀렸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김석철은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어보겠다고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전부 털어놓으려 애썼다.

    “기태정이 저에게 고발장을 내던질 때 분명 그랬습니다. ‘추수’의 신약 덕분에 이세화가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됐다고.”

    붙들렸던 목이 쓰라렸다. 김석철은 손자국이 났을 게 분명한 부분을 더듬거리며 애써 웃어 보였다. 망할. 이쯤 되니 이세화가 정말로 오선란의 자식새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른 건 몰라도 기태정을 가만히 두진 않을 테니까. 이 수모를 겪고 있으니 저에게도 좋은 일이 하나쯤은 있어야 공평할 것 같았다.

    “그간 주사를 놓을 때 이세화의 팔에 패치를 감아줬던 터라, 내성의 정도라거나 관련한 증상은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만….”

    “…패치.”

    뭘 알고 그런 건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랬다. 이세화가 약에 중독되지 않는다기에 혹시라도 신약이 빨리 듣지 않을까 봐서. 대단한 효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미신을 믿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기대였다.

    물론 멍청한 이세화는 아무것도 몰랐다. 급이 낮은 의료원에서 쓰는 싸구려 패치는 의료용 압박 고무줄과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다. 저급한 물건이긴 했어도 이세화의 처지로선 그조차도 구경하기 어려웠을 거다.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인지 짐작도 못 하고서 소위님이 가져오신 고무줄은 특이하다,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까?

    이세화는 팔뚝에 패치를 감아 줄 때마다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이곤 했다. 손님에게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라는 건 알았어도, 그 꼴이 그렇게나 우스워서 매번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약발 잘 듣게 하려고 수 쓰는 거라는 것도 모르고서, 혈관 잘 짚으라고 도와주는 줄 알고 꼬박꼬박 고맙다고 굽신거리는 꼴이라니.

    “패치, 패치라….”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잠시 이세화 생각에 잠겨있던 김석철은 오선란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뒤늦게 눈치채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김석철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해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를 가졌다고….”

    독방 안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미약하긴 하지만 처음으로 긍정적인 가능성을 움켜쥔 오선란의 눈에서 격렬한 불꽃이 튀었다.

    ***

    “여기에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

    관공서 입구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자, 헐레벌떡 다가온 청원 경찰이 정중하게 제지했다.

    “직진하시면 민원인 전용 주차장이 있습니다.”

    기태정은 코웃음을 치며 품 안에서 빳빳한 가죽 케이스를 내보였다. 공군의 상징이 새겨진 엠블럼을 확인한 경찰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헉…! 주, 준장님 되십니까?”

    “경례는 됐고, 임부 보호자 등록을 하려고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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