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8)화 (68/144)

#시절인연(오선란 외전) 下

놀란 37번의 눈이 화등잔만 했다. 그 속에는 얼마간의 공포도 서려 있었다. 오선란은 자꾸 씨근거리며 일어서려는 마음의 심지에 찬물을 끼얹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쟤를 괴롭히던 새끼들과 뭐가 달라.

“미안, 나는 그냥 너랑….”

비스듬히 눈을 비끼고서 주섬주섬 사과를 건네려는데, 오선란의 뺨 위로 돌연 무언가가 와닿았다. 뼈와 살갗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놀랍게도 메마르고 버석한 그의 입술엔 지금 자신의 마음과 꼭 닮은 열기가 번져있었다. 37번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또 많이 놀란 것 같았지만… 그 안에 피어난 다른 감정 또한 분명히 전해주려는 것 같았다.

“…이거 무슨 뜻이야?”

툭 이마를 맞댔다. 시선조차 섞을 수 없는 가까운 거리에서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초자 놀랄 정도로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돼?”

“…….”

“나… 너랑 네 아이랑 같이 있어도 되는 거야?”

더운 숨이 훅 끼쳐왔다. 언제나 그랬듯 그것만으로도 37번의 뜻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좋아. 조금만 기다려. 도망갈 준비 내가 다 해놓을게.”

오선란은 등뼈가 툭 불거진 마른 등을 힘껏 끌어안았다.

들뜬 마음에 아무 말이나 막 튀어나왔다. 우리 아예 외국으로 가버릴까? 어디서 살고 싶어? 난 바닷가는 싫어. 비행장 근처도 싫고. 집 근처에 커다란 공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 이거 너무 철없는 소린가? 참, 아이 이름은 생각해봤어? 아이가 나도 좋아해 줄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이제 그 애도 내 애니까. 흠… 그나저나 아기한테 주사가 안 들었다는 건 무슨 소리였을까? 항체가 생기지 않았다는 건가? 예방 접종 같은 건 아니었을 것 같기도 한데. 음, 이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봐야겠어. 너도 우리 아이도 체질이 특이한 것 같으니까 내가 돈 열심히 벌어야겠다. 아프면 큰일이잖아. 물론 도망가면 더는 대령 같은 게 아니니까 당장은 좀 쪼들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뭐든 해볼게. 꼭 행복하게 해줄게.

“그리고 나는….”

난, 너를.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기 직전, 영원 같은 시선이 맞물렸다. 오선란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37번은 온 힘을 실어 스스로를 내던졌다.

처음으로 몸을 맞댄 밤이었다.

***

“늦어서 미안.”

37번은 양순한 낯으로 가만가만 도리질을 쳤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꽁꽁 언 발을 바닥에 콩콩 내리찍었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계속 문가에서 서성였던 게 분명했다.

“이리 와. 발 주물러줄게. 하여튼… 이불 속에 있으라니까 말은 지지리도 안 듣지.”

“…….”

“참, 나 당분간 못 올 것 같아. 오늘 저녁부터 밖에서 할 일이 있거든. 위험한 건 아니고 이맘때쯤 군에서 하는 행사가 있어서 거기에 얼굴 내비쳐야 해.”

“…….”

“그래도 며칠 후엔 올 거야. 해 바뀌기 전에는. 한… 28일쯤?”

오선란은 난방 장치로 겹겹이 둘러 제법 따끈따끈한 침상 위에 37번을 앉히며, 품 안에서 카드 뭉치를 꺼내 보였다.

“이게 뭐게?”

“…….”

“하필 크리스마스에 못 만나니까 기분이 좀 그렇더라고. 어쨌든 우리….”

오선란은 혀끝에 맴돌던 말을 꿀꺽 삼켰다. 도망가자는 유치한 말까지 해놓고서도 아직도 입에 익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애인이라는 지칭이라거나. 너 참 예쁘다는 칭찬이라거나. 사랑한다는 고백이라거나….

“우리는, 흠, 그런 사이니까. 못 보는 대신 서로한테 카드 써주기로 하자. 크리스마스 전까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편 도착하게 할 테니까.”

“…….”

“왜 자꾸 웃어. 진짠데.”

“…….”

“뭐야? 무슨 욕을 하려고 그렇게 숨어서 쓰려고 그래?”

카드와 펜을 움켜쥐고선, 37번은 꾸물꾸물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무슨 고슴도치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던 오선란도 이내 엉덩이를 쓱쓱 밀어 연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가만히 등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편지를 썼다.

“와, 이거 나한테 너무 불리한데? 난 다리가 길어서 너랑 같은 자세 하려면 엄청나게 몸 구겨야 한다고. 글씨가 이게 뭐야….”

37번이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웃음을 참는 모양이었다. 그 선명하고 뚜렷한 흔들림이 좋아서, 오선란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벌써 크리스마스네.

잘 지내고 있지?

부관한테 알아서 챙겨달라고 부탁해두긴 했는데

혹시라도 누가 괴롭히면 꼭 말해.

네가 숨겨도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남의 입으로 들으면 더 속상하기만 하다고. 알았지?

그리고… 나 사실 네 이름 알아.

아이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됐는데 너한테 직접 듣고 싶어서 여태 내색 안 하고 기다렸어.

그래서 말인데, 나 돌아오면… 그땐 알려줄 수 있어?

결혼할 사람을 계속 37번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고민할 것도 없이 쭉쭉 적어 내려갔다. 내내 하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그래도 괜히 얼굴이 타들어 갈 것 같아 애꿎은 콧잔등만 벅벅 문지르던 오선란은, 떨리는 숨을 꾹꾹 가라앉히며 마지막 말을 썼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사랑해. 많이.

으아아, 오선란은 괜히 요란하게 손부채질하며 봉투 안에 카드를 욱여넣었다. 부모님 몰래 문예지 공모전에 응모할 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사랑한다는 말이나 결혼과 관련한 얘길 이걸로 흐지부지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오선란은 이런 쪽으론 제법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미 37번을 닮은 하얗고 청초한 꽃을 골라두었고, 반지도 주문해두었다. 돌아오면 군복 대신 잘 빠진 슈트를 차려입고서, 한쪽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말할 계획이었다. 새해가 오면 나와 결혼해달라고.

“아직도 써?”

빠르게 끝낸 오선란과 달리 37번은 제법 오랫동안 카드를 붙잡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었나 본데.”

“…….”

“어? 아니야? 그럼 뭔데? 왜 이렇게 길게 써?”

“…….”

“알았어, 안 볼게. 편하게 써.”

37번이 마침표를 찍은 건 이후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오랜만에 힘이 들어가 아린 손목을 탈탈 털고는, 봉투에 붙일 스티커를 발견하자 옅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만 붙여도 문제없어. 아, 내가 몰래 볼 것 같아서 그래? 진짜로 안 볼 거라니까?”

그래도 37번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입 모양으로 몇 번이고 안 된다고 벙싯거리면서. 결국 오선란이 게으른 몸을 일으켜 봉투를 밀봉할 수 있는 수단을 모조리 가져온 이후에야 그는 자신이 쓴 카드를 넘겨주었다.

오선란은 이것저것 칭칭 둘러 보통의 봉투보다 훨씬 두툼해진 카드 두 장을 푸르스름한 독방의 불빛에 비쳐 보았다.

“나도 종이로 된 우편물은 오랜만에 받아보는 것 같아. 물론 서류 같은 거야 자주 받아보지만… 이런 사적인 편지 말이야.”

“…….”

“나 오기 전에 부관시켜서 연락 넣을 테니까, 문 앞에서 기다리지 마. 춥잖아.”

“…….”

“밥 잘 챙겨 먹고.”

“…….”

“…벌써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오선란은 37번의 머리꼭지 위로 스르르 몸을 무너뜨렸다. 볼에 닿는 부들부들한 머리칼의 감촉이 좋아서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다.

37번은 아무런 말도 되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오선란은 그가 지금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소리를 내보겠다고 얕게 들썩이는 어깨와 배. 텅 빈 목청을 몇 번이나 두드리고 가는 가냘픈 공기.

도망가자느니, 같이 살자느니… 호기롭게 그런 말을 내뱉긴 했지만. 37번은, 이 사람은 저보다 훨씬 강했다. 감히 들춰보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끔찍한 일을 겪어놓고선. 세상이 죽으라고 떠미는데도 굴하지 않고서 비틀비틀 일어나, 다시 살아가려 하고 있다. 저와 함께 걸어보겠다고 이렇게나 용기를 내고 있었다.

“내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다행이야.”

흘끗 내려다본 하얀 뺨이 동그랗게 솟아있었다. 참을 수 없어 쪽하고 입을 맞추자 37번이 작게 몸을 뒤틀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청아한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니, 사실 뭐라도 상관없었다. 저만 맡을 수 있는 37번의 향기처럼, 그의 실제 목소리가 어떻든 그저 아름답게만 들릴 테니까. 성탄의 날 종소리가 널리 울려 퍼질 때처럼 벅차고 사랑스럽기만 할 테니까.

그리고 며칠 후, 프로젝트 책임자 전원에게 은밀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국제 사회 여론을 의식해 모든 실험실을 비밀리에 폐쇄한다는 내용이었다. 오선란이 복귀를 하루 앞두고 있던 날이었다.

***

관사의 문을 여는 오선란의 손이 몇 번이고 헛돌았다. 짐승 같은 거친 숨이 툭툭 흘러나왔다. 아니, 금수가 맞았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으니까….

메시지를 받자마자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집무실, 실험실, 연구소, 수용소… 위에서도 뭐라 불러야 할지 정해주지 않았던 추악하고 은밀한 곳으로. 모든 걸 내던질 정도로 사랑하는 37번을 만났던 곳으로.

분명 AI는 차가운 회색 건물이 우뚝 서 있던 그 주소지로 저를 안내했는데… 보이는 건 눈 덮인 광활한 공터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폭파했다고 들었는데 잿가루조차 흩날리지 않았다. 건물의 철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튼 희망 같은 건 품지도 말라는 듯이.

털썩 무릎이 꺾였다. 오선란은 더듬더듬 기어가 한참이나 눈과 흙더미를 파헤쳤다. 부모님의 부관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를 끌고 갈 때까지, 계속. 놈들은 앵무새처럼 전부 폐기 조치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피실험자들뿐만 아니라 책임자와 부책임자를 제외한 모든 군인, 그러니까 오선란의 부관들마저, 살아있는 건 전부 다 묻어버렸다고. 여긴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아니, 처음부터 무엇도 없었던 거라고.

“이 등신 새끼….”

같이 살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빼돌리는 거였다. 어느 남루한 곳에 데려다 놓았다고 한들 지하의 그 독방보다는 나았을 텐데. 아이는 아이대로 찾았어도 될 일이었는데… 무슨 완벽한 준비를 하겠다고 그렇게….

“…아.”

오선란은 바싹 마른 얼굴을 감싸 채로 호흡을 멈췄다.

웃어보겠다고 애쓰던 어색한 입꼬리. 안아도 품에 다 차지도 않던 앙상한 몸. 눈이 내린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하얀 손, 그 끝으로 조심스레 적어 내려가던 어설픈 글자들….

“…아니야.”

이렇게 끝일 리가 없다. 내일 다시 알아봐야겠다. 필요하다면 부모님이 아니라 국가 원수의 집무실이라도 두드릴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모든 기록을 없애진 않았을 거다. 폭파 직전의 상황이라도 살펴보면 뭐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정처 없이 흔들리던 오선란의 열 오른 눈길이 어딘가에서 우뚝 멈춰 섰다. 현관에 쌓인 의미 없는 서류 위로 꼬질꼬질한 카드 두 장이 놓여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발랄한 색의, 온갖 것으로 둘둘 밀봉해둔 봉투…. 카드가 두 장인 걸 보니 제가 썼던 것도 전해지지 못하고 반송된 모양이었다.

“…읽지도 못했구나, 너는.”

오선란은 가만히 카드의 겉면을 쓸었다. 결혼해달라는 말, 사랑한다는 말… 내가 내내 하고 싶었던 고백은 하나도 못 듣고서 그렇게 가버렸구나.

37번이 열과 성을 다해 붙인 테이프는 선이 죄 삐뚤빼뚤했다. 붙여 놓은 스티커며 실링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약간의 힘만 주어도 뜯어낼 수 있을 정도로.

못 박힌 듯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던 오선란은 결심이라도 한 듯 봉투를 열었다. 허술하고 어설픈 너의 마무리에 감사해야 하나? 나는 이렇게라도 남은 네 흔적을 도저히 건드리지 못했을 거고, 그러면 네가 쓴 카드를 영영 열어보지도 못했을 테니까….

늘 궁금했어요. 왜 이렇게 저에게 잘해주시는 건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시작된 당돌한 첫 문장을 보자 웃음이 팩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일 뿐이었다. 깨알 같은 글자를, 꾹꾹 담아 누른 37번의 마음을 읽어 내리면서, 오선란은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다.

아기는요… 저랑 하나도 안 닮았어요.

인큐베이터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만 잠깐 봤을 뿐이지만, 엄청 예뻤거든요.

제 유전자가 좋은 쪽으로 극대화되면 그런 느낌일 것 같다고 사람들이 그랬어요.

예전에 잠깐 아기와 제가 비슷한 체질인 것 같다고 하셨죠?

브로커들 사이에 특이한 체질의 아기 얘기가 돌았다고….

저와 체질이 아주 같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연구원들이 아길 버리지 않았을 테니까….

아기의 체질이 어떻든, 솔직히 긍정적인 생각은 들지 않아요.

또 만약에 아기가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저 같은 사람이 아빠인 게 싫지 않을까요?

제가 겪어봐서 알아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애일 때 죽여주지, 그런 원망 자주 했거든요.

그래서 대령님이 절 도와주겠다고 하셨을 때 너무 기뻤지만… 무섭기도 했어요.

혹시라도 아기 찾으면 그냥 죽여달라고 할까, 그런 생각부터 드는 제가 끔찍하기도 했고….

물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만약 되찾을 수 있다면… 떨어져 있었던 시간만큼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어요.

비록 원해서 가진 건 아니었어도, 내 핏줄을 품었다는 게 여기서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기도 했거든요. 대령님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대령님, 예전에 시절인연이라는 말, 같이 본 적 있었죠?

그때 아기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어요. 어째 나에게 허락된 인연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이렇게 대령님을 만나게 됐네요.

사실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대령님처럼 멋있고 가진 것도 많으신 분이 왜 저를 이렇게 아껴주실까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 진 모르겠는데….

아 종이가 부족한데 이야기가 자꾸 딴 길로 새네요.

저의 시절인연은 대령님인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이럴 때 쓰는 말 맞나요?)

유치하다고 비웃으셔도 괜찮아요.

언젠가 대령님과 만날 운명이었고, 우리가 인연이라고 생각하니까

저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정말이에요.

또… 요즘은 다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행복해져서 그런가? 점점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돌아오셨을 땐 보고 싶었다고 또박또박 말하고 싶은데 가능할진 모르겠어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제 목소리 이상하다고 놀리시면 안 돼요.

잘 다녀오세요.

그간 용기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는데요, 사랑해요. 대령님.

PS. 제 이름은요, 이진우예요.

잊으려고 애썼던 이름이지만 대령님이 불러주신다면 기쁠 것 같아요.

“…그런 뜻 아닌데.”

오선란은 카드를 그러쥐고서 허탈하게 웃었다. 시절인연은 그렇게 예쁜 말이 아닌데. 또 그런 식으로 쓰는 말도 아닌데….

“카드 제대로 봉하는 법도 모르고….”

직접 우편국에 찾아가 신경 써서 보내라고 닦달하지 않았더라면, 허술한 봉합 덕에 진작 내용물을 분실하고 말았을 거다. 대령 오선란이 보내는 우편물이라고 표시를 달아둔 덕에 이렇게 관사로 반송되긴 했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투덜거리던 오선란은 하릴없이 카드를 내려다보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 너는. 말도 못 하니 도와달라고 외치지도 못했을 텐데. 내가 곁에 있어 줬어야 했는데.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해줬어야 했는데….

벌써 끝이 구겨지기 시작한 카드를 품에 안고서, 오선란은 비척비척 서재로 걸어갔다. 그리곤 어딘가 처박혀있던 종이와 펜을 꺼냈다. 시인을, 기자를, 감독을, 서점 주인 같은 걸 꿈꾸던 그때. 허영심에 사들여 놓고선 끝까지 쓰지도 못했던 것들이다.

책상에 앉을 생각도 못 하고서, 바닥에 엎드려 새하얀 종이 위에 펜촉을 가져다 댔다. 멍하니 있다가 보기 싫게 잉크가 번지는 바람에 종이를 치워버리고. 겨우 적은 첫 마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찢어버리고. 글씨가 보기 싫어서 구겨버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치우고, 다시 또 쓰고, 줄을 그어 박박 지워버리고, 그리고….

“…아.”

참고 참았던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37번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미처 전하지 못했던, 속에서 들끓던 이야기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아끼고 아꼈던 예쁘고 소중한 말들. 맹세. 고백. 가슴에 사무칠 그 모든 말들이.

오선란은 차라리 눈을 질끈 감기로 했다. 웅크린 채로 어둠 속을 더듬으며 한 획, 한 획 그어 내렸다. 내가 너에게서 따뜻한 햇볕 내음을 맡았던 것처럼, 들리지도 않던 너의 웃음소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너 또한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을 다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늦게 와서 미안해.

아이 꼭 찾아줄게.

우리 아이 꼭 찾아서, 네가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말해줄게.

그 애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거야.

정말로 뭐든지.

그러니까 너는.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새해가 오기 전까진 내걸린 장식을 치우지 않아서, 밖은 대낮처럼 환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관사 밖에 장식되어있던 은종이 작게 울었다. 그 자그마한 종소리가, 어쩐지 37번이 저에게 들려주는 답처럼 느껴졌다.

사랑해.

사랑해, 진우야.

사랑해.

오선란은 울면서 편지를 썼다. 1년, 2년, 3년… 10년이 지나고 그보다 더 긴 세월이 또 흘러가는 동안. 이 계절이 오면 매번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고, 이미 빛이 바랜 고백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런 밤이면 아주 가끔, 회신이라도 해주듯 그리운 얼굴이 꿈에 고개를 내밀곤 했다. 오선란은 용기를 내어 37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진우야, 이진우.

어느 날은 그를 꼭 안고서 미안하다고 울었다. 또 어느 날은 제발 한 마디라도 들려달라고, 아무 말이라도 써달라도 손바닥을 내밀면서 울었고… 그리고 언제나 끝에 가서는, 사랑한다고 말하다가 울었다.

37번은, 아니 이진우는, 매번 길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오선란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제 울음이 잦아들 때쯤 꼭 안아주었다. 그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허겁지겁 마른 몸을 붙들려고 하면 어김없이 꿈에서 깨어난다.

강산도 변할 만큼 긴 시간, 그동안 오선란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네 아이를 찾아줄 거야, 그 애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해줄 거야, 네 몫까지 아끼고 사랑해줄 거야…. 눈이 먼 목적만이 남은 생귀요, 지박령이나 다름없었다.

이진우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더 높은 권력이 필요했고, 더 많은 재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충실한 군부의 개가 되었으며 원수의 그림자 같은 충신으로 거듭났다. 최근엔 김 소위가 자신의 이름을 팔아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묵인했다. 아니, 오히려 비호해주었다. 그렇게라도 그 시절 브로커들의 흔적을 찾을 수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아. 이진우의 흔적이 아주 조금만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온 나라 사람들의 유전자를 다 들쑤셔라도 기어이 아이를 찾아냈을 텐데. 대령을 지나 이젠 대장까지 달았는데도, 가슴에 별을 무려 네 개나 박고서도 오선란은 여전히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지금 와서 이진우의 아이를 찾게 되는 건 그가 살아 돌아오는 일만큼이나 어렵다는 걸. 그렇지만 여기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정말로 이진우가 죽었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부질없는 걸음을, 습관 같은 헤맴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왔어?”

팔걸이 위로 얹고 있던 지친 손등 위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내가 언제 잠이 들었더라…. 나이가 드니 이제 까무룩 의식을 놓곤 한다. 어쨌든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운 환상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면.

“사는 게 참 무상하더라. 너와 관련된 건 하나도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나 악을 썼는데….”

이제는 자신이 품었던 연정의 형태마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날 안았던 네 손이, 또 그 체온이 어땠더라.

“그래도 너는 여전히 예쁘네.”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세월은 이렇게나 흘렀어도, 너는. 날 보고 애써 웃던 네 미소는 여전히 그 시절처럼….

“나중에 다시 만나면 이 늙은 아저씨 누구냐고 싫어하려나.”

“…….”

“아니지, 만날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나는 여태 해온 짓이 있어서 천국엔 못 갈 것 같아.”

“…….”

“이번에도 몇몇 패거리가 수상쩍은 프로젝트를 가동할 생각인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냥 제약회사 배만 불려주는 헛짓거리에 불과해. 그래도… 예전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기다려볼 생각이야.”

그래,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이제 안 와도 괜찮아.”

안쓰럽다는 듯 저를 바라보던 이진우의 입매가 더없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선란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걸.

“뭐가 좋다고 자꾸 보러 와. 다 늙은 꼴 보면서 정 떼려는 거 아니면… 이제 오지 마.”

이렇게나 숱한 날이 흘렀는데도, 나 아직도 안 죽고 잘 살아있잖아.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거였어도 말이야. 그러니….

“그만 다 잊고… 행복하게 살아, 천국에서.”

이젠 거의 글씨도 알아보기 힘든 낡은 카드의 내지가 툭 떨어져 나갔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닳고 닳은 종이는 고작 그 정도의 충격으로도 모서리가 파삭 부서져 내렸다.

밖에선 바람이 불고, 자그마한 은종이 울리고, 감촉도 느낄 수 없는 너의 손이 부드럽게 뺨에 닿았다가 사라지면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라는 걸 잘 안다.

“나는 괜찮아.”

오선란의 시간은 하얀 눈이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그 날의 공터에서 멈춰버렸다. 아직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지나고 새해는 아직 오지 않은 애매한 연말. 나는 결혼해달라고 너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청혼하고, 너는 그런 나에게 보고 싶었다고 목소리를 들려주려 했던 날…. 가장 아름다웠고 애달팠던 그 시절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괜찮아….”

눈가에 팬 주름을 따라 뜨거운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37번에게, 이진우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12월 28일 밤이었다.

<3월 외전 ‘시절인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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