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7)화 (67/144)

#시절인연(오선란 외전) 中

“어? 그거 뭐야?”

하릴없이 퍼질러 앉아있으면 37번이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아서 오늘도 게임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문득 그의 등 뒤에 놓인 낯선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책이었다.

“봐도 돼?”

37번은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세히 봐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이긴 했지만, 분명 허락이었다.

“누가 줬어?”

형편없이 마른 손이 하염없이 꼼지락거렸다. 뭔가를 설명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 내 전속부관? 나이 좀 있는 아저씨.”

“…….”

“아닌가? 그럼 이마에 상처 있는 교관? 오, 그놈이 줬다고?”

“…….”

“짜식들이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아. 누구한테 잘 보여야 되는지 알고. 그렇지?”

농담을 건네자 37번이 머리통을 푹 숙였다. 처음엔 놀렸다고 우는 건가 싶었는데, 이젠 그가 당황하면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안다. 이런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몰라서, 가만히 숨 쉬는 것조차 어색해서 저러는 거다. 매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책 좋아해?”

다시 말을 걸자 속이 터질 정도로 느리게 끄덕거린다. 그렇지만 37번의 그 달팽이 같은 속도가, 오선란은 싫지 않았다.

“그렇구나…. 몰랐네.”

37번을 데리고 온 브로커의 행방이 묘연해진 탓에 그에 대해 남아있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여기 끌려온 순간부터 주민등록부는 물론이고 피실험자의 생활을 추적할 수 있는 모든 기록이 삭제된다. 그래서 현재 오선란의 선에서는 37번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었다.

차라리 일급 범죄자였다면 어떻게든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텐데, 원수 같은 원수元首가 끝까지 비밀에 부치고 싶어 한 프로젝트다 보니 고작 대령의 직급으론 한계가 있었다.

연구원들을 쪼아 있는 대로 정보를 긁어모아 봤지만, 37번이 겪은 불운의 찌꺼기나 겨우 주울 수 있었다. 아버지가 크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 일가족이 동반 자살을 시도했으나 재수도 없게 37번만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빚이 모조리 그에게 지워졌다는 것 정도였다.

오선란은 관심도 없는 책을 휘적휘적 들춰보았다. 팔랑거리는 종이 사이에 37번의 마음이라도 쓰여있기라도 한 듯 제법 오래 뒤적이다, 대뜸 뜬금없는 이야길 꺼냈다.

“나도 책 좋아해. 원래 꿈은 시인이었거든.”

평범한 대화도 받아치기 어려워하는 37번이었으니, 이런 뜬금없고 무거운 이야긴 더더욱 곤혹스러워할 거라는 걸 안다. 그걸 아는데도 어쩐지 그에게 전부 털어놓고 싶어졌다. 무엇이라도 고백하고 싶은데 당장 떠오르는 얘기라곤 이것뿐이었다.

“기자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영화감독도 좋았고… 한적한 곳에 서점이나 차릴 생각도 했었고….”

오선란은 눈을 감고서 피 끓던 어린 날을 더듬어보았다.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자신의 미래가, 남들은 갖지 못해서 안달이 난 그 행운이 버겁고 싫었던 때가 있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 설계가 끝난 것도 억울했다. 심지어 군인이 되라니. 군사학으론 재능도 흥미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오선란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과 가장 대척점에 서 있었다.

“결국은 게으르고 비겁해서 집에서 시키는 대로 군대에 말뚝이나 박게 됐지만.”

저것도 다 한 때라고 어른들이 가볍게 혀를 찰 때마다 씨근덕거리며 다짐했다. 두고 봐. 나는 당신들처럼 안 살 거야.

그렇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패기, 들불처럼 번지던 반항심. 금수저가 아니라 금강석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데도 이렇게 깨친 사고를 하기 쉽지 않다며 내심 뻐기던 때가 있었다. 누구나 앓고 가는 사춘기 시절의 격통이었을 뿐인데, 그땐 그 마음이 되게 특별한 건 줄 알았다. 집안 어른들이 곱게 만들어준 유리 온실 너머 진짜 세상이 얼마나 가혹한지도 모르고, 입으로만 떠들어댔다.

“와, 나 이런 얘기 남한테 처음 해 봐.”

밀려오는 민망함에 어색하게 웃으며 37번을 돌아보았다. 그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그 위로 번진 것은, 그래 그건 동정이었다.

“이런 표정은 또 처음 보네.”

오선란 또한 어색한 미소를 지우고서,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오늘도 이름은 안 알려줄 거고?”

다른 건 힘들어도 37번의 원래 이름 정도야 못 알아낼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꼭 본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혹시라도 연구원들이나 부관들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릴까 봐, 관련 주제가 나오면 귀 꼭 막고 버티는 중이었다. 37번이 스스로 나는 누구누구라고 자신에게 직접 알려주었으면 했다. 그래야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알았어. 오늘은 그만할게.”

“…….”

“내일은 책 좀 가져다줄까?”

“…….”

“그래도 이렇게 말 걸어주는 게 좋지? 옆에서 퍼질러 자고 게임이나 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해 종잇장보다 허연 목덜미 위로 옅은 빗금이 그어졌다. 열병처럼 번지는 선홍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선란은 급히 고개를 틀었다. 자신의 귓불에도 그의 것과 꼭 닮은 말랑말랑한 붉은 기운이 사르르 번지고 있었다.

***

“휴, 뭘 좋아할지 몰라서….”

쇼핑백 여러 개를 툭 내려놓자, 37번이 오선란의 곁을 하염없이 맴돌았다. 당황한 모양이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고, 만약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만 같다.

“일단 아무거나 골라와 봤어.”

거짓말이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던 책 위주로 신경 써서 골랐다. 그렇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어물거리다 또 숨으려고 들 테니까.

일단 혹여라도 37번의 트라우마를 건드릴만한 소재, 이를테면 아이에 관한 이야기나 군의 색이 입혀진 서적은 최대한 걸러냈다. 혹여나 자신이 말해보라고 독촉하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서 실어증 증세가 나오는 심리학 서적도 전부 제외했다.

“이건 고전 설화 모음집인데 오히려 이렇게 현실이랑 동떨어진 이야기가 가볍게 읽기 좋다더라. 아, 이 봉투 안에 있는 건 전부 심리학 관련 책인데 그렇게 안 어려웠어. 심심할 때 쉽게 읽을 수 있을 거야.”

“…….”

“여기 안에 있는 것들은 다 종교 서적이고.”

멀뚱멀뚱 오선란의 옆을 지키고 서 있던 37번이 어색하게 손을 뻗었다. 그것도 잠깐일 뿐, 37번은 여태까지 중 가장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무시무시한 요괴가 그려진 표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심리학 도서가 들어있는 쇼핑백에는 코를 박고서 한참이나 뒤적였다. 종교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지 전부 꺼내 보진 않았고, 제일 위에 놓인 책만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불교 서적이었다.

“뭐 마음에 드는 부분이라도 있어?”

빠르게 안을 훑어보던 37번은 어느 부근에서 잠시 멈춰 섰다. 책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열렬한 시선이었다. 뭔데 저렇게 집중하는 거지? 궁금한 마음에 오선란도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디 보자.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37번의 눈길이 닿는 페이지 중 눈에 들어오는 유명한 글귀가 있었다. 매체에서 운명론적 만남을 그릴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었는데, 오선란이 보기엔 그리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날 것이고 헤어질 사람은 때가 되면 헤어지게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순리라는 게 있으니, 발버둥 쳐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은가.

“음, 이거는….”

37번이 조금 귀여워서 놀려주려던 오선란은 이내 심각한 낯으로 턱을 쓸었다. 이건 잘못 고른 것 같은데…. 37번에게 네가 겪은 불행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고,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으음. 이거 말고 다른 책 볼까?”

“…….”

“잠깐만, 너 설마 울어?”

37번이 붙들고 있던 책이 맥없이 추락했다. 당황한 오선란만큼이나 그 역시 놀란 것 같았다. 아. 37번은 탄식하듯 작게 입을 벌린 채 젖은 눈가며 볼을 정신없이 눌러댔다. 자기도 왜 우는지 모르겠다는 듯 영문을 모르는 낯으로 그러고 있으니, 오선란 또한 당황스러웠다. 폐기 운운할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했으면서…. 이게 그렇게나 감동적이었나? 아니면 슬펐나?

“불교 믿어?”

겨우 꺼낸 물음은 이따위 거였다. 그렇지만 37번의 눈물은 영적으로 기댈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보다는 회한과 서러움으로 가득해 보였다. 오선란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시절인연…. 인연이라.”

“…….”

“혹시 보고 싶은 사람… 음, 애인… 이라도 있었어?”

“…….”

“아, 그건 아닌가? 그러면 친구? 아니면 가족, 아….”

떠오르는 대로 말을 늘어놓던 오선란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합 다물었다. 37번의 가족은 전부 죽었다. 홀로 살아남은 대가로 37번은 지금껏 이 지옥을 헤매는 중이었다.

오선란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가족들 이름만 알려주면 당장 소식을 알아보겠다고 큰소리나 뻥뻥 치려고 했는데. 자신의 무신경함에 저조차 질리는 기분이었다.

“미안.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고, 내가….”

뒤늦게 사과하려고 하자, 37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른 흉통이 제법 부풀도록. 그는 무언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

결연한 얼굴을 한 37번이 오선란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왜 그래?”

뭐지? 가느다랗게 좁혔던 오선란의 눈동자가 서서히 크게 뜨였다. 젓가락처럼 가냘픈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 위로 획을 그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글씨를 써서 말을 전하려는 모양이다. 물론 쉽진 않은지 평소보다 허옇게 뜬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움직일 의지를 보인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댄 채로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37번이 어렵게 써 내려간 말은. 그가 안 하던 짓까지 하게 만든 그 대단한 문장은….

“…아기?”

“…….”

“아, 네가 낳은… 음, 그 아기?”

이런. 오선란은 반대편 손으로 입가를 연신 쓸었다. 아이가 자신과 연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서 이리 서럽게 울었던 건가.

어쩌다 아이가 생긴 건진 몰라도 애틋하고 예쁜 사연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다지만 오선란 또한 군부의 개였고, 계급장을 단 사람들이 하층민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묻지 않았던 건데…. 아이를 그리워하고 있었구나.

오선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네가 더는 울지 않을까. 아니,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는 한가? 나는 네가 처박힌 이 지옥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고, 어떻게 생긴 아이든 소중히 하고 싶었던 네 외로움, 아픔, 슬픔… 그 고통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데.

“…찾아줄까?”

목 끝까지 차오르는 못난 독을 겨우 밀어내자, 충동적인 물음이 튀어나왔다. 다 뭉개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37번은 멍하니 오선란을 올려다보았다.

“네 아이. 찾아줄게.”

“…….”

“그러니까 울지 마.”

분명 볼품없는 사내놈인데. 그렇게까지 예쁘지도 않은데. 허여멀겋기만 한데, 그런데…. 오선란은 어느 순간부터 초점을 잃은 깊고 아득한 그의 눈동자 속에 영영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37번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오선란은 머뭇거리다 고단해 보이는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위로 같은 걸 해본 적 없는 도련님의 손길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브로커들 추적하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물론 집에 밝히지 않고 내 힘만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시간은 좀 걸릴 수 있어도….”

반쯤 끌어안고 있는 37번의 몸은 놀랍도록 따뜻했다. 안색도 파리하니 체온도 서늘하지 않을까, 멋대로 그렇게 상상했는데. 형편없이 마른 몸일지라도 37번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평범하게 뜨거웠다.

“시절인연, 그거 좋은 말이니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해.”

이 또한 거짓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잔인하고 서느런 글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37번이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어설프게나마 웃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믿자. 지금은 헤어져 있지만, 다시 만날 인연이라고. 아이 꼭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품 안의 37번에게선 책이 가득한 도서관에서 날 법한 향이 났다. 햇빛이 잘 드는 고즈넉한 건물에서 풍기는 청결하고 다정한 내음. 쿰쿰한 지하 독방에서 그런 뽀송뽀송한 향이 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때론 어떤 향기는 후각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영원히 새겨지기도 한다.

***

“어때? 예쁘지?”

벽에 걸린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을 살펴보던 37번은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형편없이 말랐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제법 살이 올랐다. 창백하던 피부에도 조금씩 윤기가 돈다. 수시로 먹을 것을 챙겨준 덕분인지, 마음이 조금 편해져서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든 이유는 저였다.

특히 아이를 찾아주겠노라 약속한 이후로 37번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표정도 없고 반응이 굼뜬 것은 여전했지만 나름대로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오선란의 손등 위나 바닥에 글씨를 쓰며 이것저것 묻기도 했고, 새로운 물건을 가져오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가장 큰 변화는 37번이 길이 든 여우처럼 자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빠질 수 없는 회의가 있었던 탓에,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걸음 한 적이 있었다. 그가 저를 기다렸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여느 때처럼 별생각 없이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는데…. 뻐억 하는 굉장한 소리와 함께 종이 인형 같은 몸이 휘청이며 뒤로 넘어갔다. 문짝에 이마를 얻어맞은 거였다. …저를 기다리겠답시고 내내 문가를 서성이고 있었던 거다.

“춥지 않아?”

오선란은 물론이고 눈치가 빠른 그의 수하들이 이런저런 장비들을 가져다 놓은 탓에 방 안이 써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훈풍이 맴돌아 살짝 건조하기까지 했다. 다 알면서도 묻는 거였다. 춥지 않냐는 말은 두 사람만의 신호였다.

팔을 벌리자 37번이 어색하게 품에 안겼다. 꼭 붙어 온기를 나누는 짐승처럼 그렇게 서로를 안고만 있었다. 아주 가끔, 그를 고쳐 안다가 이마쯤에 입술이 스칠 때도 있긴 했다. 그럴 때면 괜히 어색해지는 게 싫어서 장난스럽게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고, 뺨을 맞대고, 코끝을 깨물기도 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의 어떤 성애적인 행동도 없었다.

욕구가 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대체 저 꼬챙이 같은 몸의 어디에 동하는 건진 모르겠다만, 가끔은 37번과 선을 넘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어미를 처음 본 새끼 오리처럼 저만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37번이 귀여워서. 인형 같던 텅 빈 눈동자가 저만 보면 또렷해지는 게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그 충만한 마음이 저열한 성욕을 압도적으로 이겨냈다.

“맞다, 아이 말이야. 대충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인신매매 쪽에선 제법 유명한 브로커들 손에 넘어갔다는데… 그래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 주로 국외에서 활동하긴 하던 놈들이 요즘은 성 밖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고 했거든.”

“…….”

“폐, 아니 버려진 실험체들의 행방을 생각보다 빡세게 관리하고 있어서 나도 좀 늦었네.”

집안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려니 여러모로 제약이 많긴 했지만, 어떻게든 덤벼보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37번의 진짜 이름도 어영부영 알게 됐다. 내색할 생각은 없었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던 얘길 뻐기듯 늘어놓아봤자, 그의 마음속에 들어선 벽만 더욱 견고해질 뿐이다. 무엇보다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내 이름은 무엇이라고. 37번이 아니라 이렇게 불러달라고.

“잔챙이들 얘기라 확실하진 않은데, 주사를 놔도 안 먹히는 아기가 있는데 데려갈 사람이 있는지 묻는 말이 파다하게 돌았대.”

“…….”

“너와 완전히 같진 않아도 얼추 비슷한 체질인 것 같기도 해. 어쨌든 특징은 확실하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환 위주로, 주민등록부가 없는 아이들 정보는 전부 올리라고 했어.”

그리고 오선란은 잠시 말을 아꼈다. 저를 낳아준 37번과 함께 갇혀 실험실에서 자라나는 게 나은 건지, 브로커들에게 팔려 비참한 생을 연명하는 것이 나은 건지… 아이 입장에선 무엇이 덜 고통스러운 선택일까. 유서 깊은 군인 가문의 독자로 태어난 저는 이 문제로는 감히 어떤 말도 얹기 어려웠다. 이해한다는 말도, 안 됐다는 말도… 그 어떠한 위로도 기만일 뿐이다. 그래서….

“그냥 가볍게 묻는 건데….”

아이를 찾으면 37번과 함께 빼돌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는 저의 변덕으로 살려두고 있는 거였다. 지금까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자신의 권한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나가자마자 병원에서 충분히 치료를 받게 하고, 그 뒤론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줄 것이다. 살 곳과 일자리도 알아봐 주고. 솔직히 일은 무슨, 그냥 내 돈 쓰면서 살아도 된다고 하고 싶은데… 그럼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이 문제는 천천히 해결해 볼 생각이다.

어쨌든 물어보고 싶었다. 나갈 수 있게 도와줄 테니, 도움을 받을 생각이 있는지. 아니, 생각이 없더라도 승낙해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같이 살래?”

난데없는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계획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왜 이 생각을 진작 못 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쳤다. 계속 함께 있고 싶다. 이 회색 벽을 벗어나, 진짜 햇살 아래서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

“도망가자.”

같이 여기서 나가자. 조용한 속삭임에 37번의 커다란 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는 눈물만 흘리지 않았을 뿐 온몸으로 울고 있었다.

아무리 철이 없다고 한들 오선란도 어린 애는 아니었다. 당장 그와 야반도주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군부를, 집안의 눈을 영영 피할 방법이 있겠는가. 지금이야 37번도 저에게만 기대고, 의지하고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숨 쉬듯 당연했던 부와 권력이 사라진 자신을, 대령이란 허울마저 내던진 저에게 과연 매력 같은 게 남아있기는 할까. 아니, 당장 제 마음조차 변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세상에 영원한 사랑 같은 게 어디 있다고. 그렇지만….

“같이 살고 싶어. 너랑 네 아이랑… 사람답게, 평화롭게.”

허름한 곳에서 하루하루 빌어먹으며 살아도 좋으니 우리의 뜻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에서.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둘이 머리 맞대고서 고민하고. 그러다 지지고 볶고 싸울 때도 있겠지만, 다음 날엔 소소한 찬거리를 늘어놓고 다시 서로를 다독여주면서. 네가 잠든 밤이면 나는 너에겐 차마 보여주지 못할 연정으로 가득한 부끄러운 시를 쓰고, 그렇게 젊은 날 우리의 치기를 되새기면서… 그걸 함께 만든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었으면.

“37번 너는… 나를 그렇게 살고 싶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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