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6)화 (66/144)
  • #시절인연(오선란 외전) 上

    신기록을 달성했다는 팡파르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남자는 책상 위에 다리를 척 올려놓은 채 태블릿 화면을 빠르게 두드렸다. 먼지 하나 앉지 않은 군화가 발랄한 멜로디를 따라 까닥였다. 새카만 명패는 그 리듬에 맞춰 책상 끄트머리까지 아슬아슬하게 밀려난 참이었다.

    대령 오선란.

    최대치로 조도를 밝힌 날것의 불빛 아래, 공들여 새긴 이름이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명패 뒷면에 쓰인 애국충정, 네 글자는 이 나라의 절대자가 손수 써주셨다. 아니, 그렇다고 들었다. 저에게 직접 건네준 것이 아니라 부친을 통해 받은 거라 그러려니 할 따름이었다.

    “대령님?”

    게임에 몰두한 상관과 손목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던 전속부관이 견디다 못해 조심스레 운을 뗐다. 딱 한 판만 하고 도장 찍어주겠다고 해놓고선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다. 자리를 비운 윗분들을 대신해서 해치워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말이다.

    “대령님, 죄송합니다만….”

    “거 되게 깐깐하게 구네.”

    내내 부관의 존재를 모르는 척하던 오선란이 작게 손을 까딱이자, 그가 반색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검토할 서류들이 책상 위에 착착 놓였다. 아니, 검토라는 말도 우습다. 아랫놈들이 친절히 표시해 준 곳에 도장만 찍으면 그만이었으니까.

    “이제 이런 일은 내가 안 해도 되지 않나?”

    종이에 인쇄했다는 건 서버에 남기고 싶지 않은 안건이란 뜻이고, 그런 일은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더 좋은 의견을 내보겠다고 고심할 필요도 없다.

    “내가 찍든 네가 찍든 아무도 모를 텐데.”

    “대령님.”

    “사실이잖아. 누가 결재했든 위에선 신경도 안 쓸걸?”

    오선란은 팡팡 터지는 화면 속 폭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손만 쭉 뻗었다. 책상 위 엉뚱한 곳만 더듬거리자, 보다 못한 부관이 슬쩍 다가와 도장을 쥐여 줬다.

    날인하라는 곳에 하고, 얼굴 좀 내밀라고 하면 가서 머릿수나 채워 주고…. 그런 일이나 하라고 달아준 계급장이었으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오선란도 그 조건으로 사관 학교에 진학한 거였다. 일정 계급 이상으로 진급시키지 않을 것. 풀어 말하자면 책임질 일이 많은 위치에 자신을 몰아넣지 않을 것.

    물론 집안 어른들은 언제고 오선란을 군부의 중추로 밀어 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직은 최소한의 일정은 소화하고 있으니 트집 잡지 못할 뿐, 하나만 삐끗해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제 어른들 말 들으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오선란도 대령이란 계급에 걸맞은 직무는 수행할 의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귀찮고 무용한 일에도 성심을 다해야 하는 건진 늘 의문이었다. 이런 것도 장교의 업무로 쳐야 하나?

    “거기서 세 시 방향입니다. 조금 더 오른쪽, 조금만….”

    게임에 정신이 팔린 상관이 혹여나 엉뚱한 곳에 인주를 묻힐까 봐, 부관은 손을 내릴 방향을 세세히 일러 주었다. 매일 같이 있는 일이어서 그런지 이젠 설명이 제법 능숙하기까지 했다.

    “예, 거기에 찍으시면 됩니다.”

    심드렁하게 도장을 쥐고 있는 오선란의 손가락은 군인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왔다. 총칼보다는 펜을 드는 게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도 남자의 오른쪽 중지, 무기를 받쳐 드는 곳이 아니라 펜대가 눌리는 부위에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제법 오랜 시간에 걸쳐 생긴 게 분명한 단단한 흔적이었다.

    “잠깐만.”

    습관적으로 도장을 찍으려던 오선란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이 서류엔 최고 결정권자 칸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뭐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앞서 처리한 안건을 뒤적여봤다. 다행히도 다른 것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걸 왜 나더러 결정하래.”

    피실험자 폐기의 건. 영 낯선 제목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서류를 처리한 기억이 분명 있었다. 도장 찍는 칸 위로 기계처럼 손만 놀렸던 탓에 무슨 내용인진 살펴보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 서류들은 자신의 이름이 가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제가 바라던 대로 책임질 일이 거의 없는 위치에 말이다.

    “아시겠지만 소장님께서 모레까지 자리를 비우셔서….”

    “아, 그럼 내 소관이라는 거잖아. 이 일 틀어지면.”

    오선란은 도장과 태블릿을 대충 내던지고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합니다, 대령님.”

    혹시라도 상관이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됐는지, 덧붙이는 부관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전에도 몇 건이나 결재해 주셨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손이 드물다는 귀하신 집안에서 태어나 이례적으로 고속 승진한 어린 상관에게선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그저 목을 뒤로 푹 꺾고선 길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부관은 이때다 싶어 손목시계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피실험자 얼굴만 보여드리고 바로 치울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살살 달래자 오선란이 코웃음을 쳤다. 어째 먹기 싫은 반찬을 앞에 둔 어린 아들놈의 불퉁한 낯을 보는 것 같았다. 올해 몇 살이라고 했더라? 겨우 서른 넘겼던 것 같은데. 상관의 눈치를 보느라 진을 빼던 부관의 표정이 잠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 한 가지 양해 말씀을 드리자면 아무래도 폐기 직전의 피실험자다 보니, 보시기에 다소 거북한 모양새일 수도 있습니다.”

    문 너머로 수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시큰둥하게 결재판만 뒤적이던 오선란이 눈이 댕그래졌다.

    “뭐야. 벌써 왔어?”

    “예, 아까 전부터 밖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아니, 진작 그 말부터 하지. 그럼 게임 안 했을 거 아냐. 당황한 오선란의 구시렁거림은 육중한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대령님.”

    교관이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경례를 올리곤 안으로 들어섰다. 더운 계절인데도 지하 건물의 돌벽이 내뿜는 찬 바람이 훅 끼쳐왔다.

    “됐으니까 보고부터 해.”

    “예. L318-37, 통상 37번, 알코올과 몇 가지 약물에 중독 증세를 보이지 않는 체질이었으며, 이를 활용한 실험에 임하고 있었으나 더는 지속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폐기하려 합니다.”

    오선란은 목을 길게 뺐다. 얼굴만 확인하면 된다더니. 눈에 보이는 거라곤 거대한 곰 같은 부하놈 뿐이었다.

    “비켜봐. 안 보여.”

    “아, 죄송합니다.”

    솥뚜껑만 한 커다란 손이 아래에서 무언가를 쑥 건져 올렸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것은 사람이라기보다 넝마주이에 가까워 보였다.

    고개를 떨구고 있어 앞으로 죄 쏟아진 머리칼.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피부에 깡마른 몸. 힘없이 덜렁거리는 손목은 겨울날 고목의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미추를 떠나 제법 강렬한 인상이긴 했다.

    “음….”

    오선란은 턱을 긁적이며 서류를 휙휙 넘겨봤다.

    “그런데 왜 정리하는 거지?”

    “…예?”

    “왜 37번에게 실험을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냐고.”

    상관이 이유를 물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어어, 하며 잠시 어리바리하게 굴던 부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어 갔다.

    “임신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실험도 하지 못했는데, 아이를 낳은 이후론 이전과 달리 생체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계속 데리고 있기엔 효율적이지 않다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오선란은 보고서를 마저 훑었다. 여기로 발령받은 지 석 달은 됐던가? 하는 일이라곤 부관이 가져다준 서류에 결재하고, 행사에 차출되어 얼굴마담 노릇이나 하는 것뿐인지라 실험이고 나발이고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L318-37. 이름과 성별을 대신하는 분류 번호 뒤로 입소 후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바코드가 붙어 있었다. 투여한 약물과 그에 따른 증상도 간략하게 적혀있긴 했지만, 어차피 봐도 모를 얘기였다.

    “어?”

    페이지를 넘겨보던 오선란의 손이 어느 부근에서 삐걱거리며 멈춰 섰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기라도 한 것처럼.

    “실어증?”

    “예. 그것도 아이를 낳은 이후 생긴 증상이라고 합니다.”

    오선란은 정물처럼 미동도 없는 37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코앞에서 폐기 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데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 살려 달라는 애원도 하지 않았다.

    “그….”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37번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빤히 바라보던 오선란은, 부관의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말을 이어 갔다.

    “흐흠, 폐기 절차는 어떻게 되지?”

    “처음 피실험자를 인계해 준 브로커들이 다시 수거해가고 있습니다.”

    “…그게 끝이라고?”

    “예.”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었어도, 쓸모를 다 한 피실험자들을 병원이나 요양 시설로 보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퇴소나 퇴임이 아니라 폐기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래도 그렇지, 브로커한테 도로 넘겨주는 줄은 몰랐다. 말이 좋아 브로커지, 인신매매나 하는 조폭 새끼들 아닌가? 그런 놈들 소굴로 보내느니 지금이라도 고통없이 죽여 주는 게 자비로운 일일 것 같은데.

    “…이 일 나한테 전권이 있다고 했지?”

    “예.”

    “보류하지, 37번의 일은.”

    “예, 그럼 바로 브로커를…, …예?”

    “지켜보겠다고. 당분간.”

    “그렇지만 37번은 더는 이 프로젝트에 이바지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한들 살려 두면 안 되는 중대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내버려 둬.”

    부관은 이내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오선란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아랫사람들 몰래 땀이 찬 손바닥을 허벅지에 쓱 문질렀다. 처음이었다. 집안의 명예나 이해득실 같은 걸 계산하지 않고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지시를 내린 건.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37번의 몫까지 대신하려는 듯,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확실히 저답지 않은 행동이긴 했다. 직전까지 자신의 소임으로 아니지 않냐며 짜증을 냈던 주제에. 집안의 위명과 멍에처럼 따라오는 본분이 숨이 막혀, 매번 깃털보다 가볍게 굴어왔으면서. 다른 일도 아니고 충동적으로 사람 목숨을 붙여두겠다고 하다니….

    “참, 여기 계속 있으면 기본적인 것들은 계속 챙겨 주지? 식사라거나.”

    “일단은 그렇습니다.”

    오선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37번을 추스르는 교관의 손길이 아까보다 조심스러웠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라도 느낀 것처럼.

    ***

    “또 벽만 보고 있네.”

    오선란은 37번의 옆에 자리 잡고선 애꿎은 태블릿만 두드렸다. 슬쩍 손 언저리로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자신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젠 눈길이라도 준다. 본 척도 안 하던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충동적으로 37번의 폐기 처분을 반려한 이후, 오선란은 심심하면 그가 갇힌 지하의 독방을 찾았다.

    수하들이 결재 좀 하라고 귀찮게 굴 때마다. 할 일도 없는 윗대가리들이 불러내 부모님 안부를 캐물을 때마다. 집에서 저를 찾는 연락이 올 때마다. 일하기 싫을 때. 졸릴 때. 심심할 때. 그냥 이유도 없이 도망치고 싶어질 때….

    37번이 묻지도 않은 이유를 줄줄 늘어놓으며 매일 이곳으로 걸음하고 있었지만, 포장지를 벗겨보면 결국 알맹이는 같았다.

    그냥 네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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