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4)화 (64/144)
  • #064

    세화는 입 모양으로만 그의 말을 따라 해 보았다. 바라는 거?

    “잘 생각해 봐.”

    느물느물하게 구는 걸 보니 저에게 바라는 답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리듬을 타듯 세화의 허리께를 톡톡 두드렸다. 크게 터지려는 한숨을 꾹꾹 삼켰다. 더는 뭔가를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눈치 보며 그의 장단을 맞춰 줄 기운도 없었다.

    “그럼 놔주세요.”

    “진심이야? 고작 그런 부탁으로 날리기엔 아까운 기회 아닌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기태정의 상의를 사락사락 스치고 갔다. 깨질 것 같은 위태로운 적요가 세화를, 아니 정확히 세화만 짓누르고 있었다. 저는 압사당하기 직전인데, 정작 같은 공기를 떠받들고 있는 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게 새삼 억울했다.

    “정말 없어?”

    “…….”

    “내가 필요한 일이 있을 텐데.”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세화는 조심스럽게 기태정을 밀어냈다. 아까 난리를 칠 때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강철 같은 몸이 조금 느슨해졌다. 봐주는 건가? 그래 봤자 허리에 감고 있는 손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였다. 그의 발등 위에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의 시야 안에서 숨을 쉬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세화.”

    가만히 눈만 내리깔고 있자, 그제야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기태정이 세화의 턱 끝을 휙 들어 올렸다. 물을 잔뜩 먹은 속눈썹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아래로 고꾸라졌다.

    희게 질린 얼굴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던 기태정은 작게 혀를 차고는, 아까처럼 세화를 번쩍 들어 올렸다. 몸이 안착한 곳은 푹신한 침대 위였다. 지난밤을 되풀이하듯 그가 저를 부드럽게 쓰러트렸다. 무너지는 몸 뒤로 남자의 팔이 베개처럼 놓였다.

    “더 자. 원래 임신하면 종일 잔다고 했으니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엔 마주 보고 있다는 정도일까.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기태정이 낯설었다. 아까 전 화대냐는 물음에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이 또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파헤치는 시선이 집요했다. 눈썹이 몇 가닥이나 났는지 헤아릴 것처럼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저를 직시한다. 굳게 다물린 입꼬리는 미동조차 없었지만 어쩐지 그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씹어 삼킬 것 같은 집요한 눈길을 견디기 어려워 꾸물꾸물 돌아눕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짧은 숨을 들이켰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애완동물이 당돌한 짓을 했을 때 재밌어하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그에게서 등을 지자, 기태정이 기다렸다는 듯 바투 몸을 붙여 왔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웅크리며 복부를 감싸 안았다. 그가 만질 수 없도록. 지난밤처럼 여기를 쓰다듬으며 잠들지 못 하게 하려고.

    교차한 손으로 배 부근의 옷감을 구기듯 움켜쥐는 순간, 기태정이 제 목빗근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면서 힘이 잔뜩 들어가 딱딱해진 세화의 어깨며 팔뚝을 꾹 주무르다 놓기도 했다. 긴장 풀라는 듯이.

    그 손길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 몸 전체에 우릿한 느낌이 번져나갔다. 불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지겨운 서러움이 지치지도 않고 또 몰려왔다.

    “초진은 나 중위가 보겠지만 이후론 다른 사람들한테 진료받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

    “내일 아침에 다시 오기로 했어. 초음파로 뭐 본다고 아까 이것저것 가져다 놓던데.”

    상의를 움켜쥐고 있는 세화의 손등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못된 짓 하지 말라고 어르듯 부드럽게 옷에서 떼어내고는, 세화의 손까지 그대로 구속한 채로 잠들려고 했다.

    “…옷.”

    손 모양대로 늘어난 니트를 빤히 내려다보던 세화의 입술이 툭 벌어졌다. 불가항력이었다. 겹쳐진 그와 자신의 손을 보고 있자니 숨이 콱 막혔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기태정을 붙들고서 끊임없이 도돌이표를 그릴 것 같았다. 거짓말이에요, 아니에요. 나는 대체 뭘 믿어야 해요. 뭐라도 좋으니 몰랐다는 걸 증명해 줄 방법은 없어요?

    “옷, 입게 해주세요.”

    “옷? 무슨 옷?”

    “저 준장님이랑 있을 때는 아무것도 입으면 안 되는 사람이잖아요.”

    피부 위로 쏟아지던 뜨거운 숨이 일순 뚝 멎었다.

    “아까 물어보셨던 거… 그럼 이걸로 할게요. 가운 말고 옷 입게 해주세요.”

    익숙해져서 그런가, 사실 그렇게까지 마음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 옷 같은 게 문제가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 되는 대로 말을 내뱉고서 생각해 보니, 기태정이 최초로 저를 서럽게 했던 일이 이것 같았다. 속옷도 안 주고 가운만 덜렁 내던져 준 거. 남들 다 입는 옷가지를 걸칠 자격마저 박탈해간 거.

    기태정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는 앓는 것도, 한숨을 쉬는 것도 아닌 불분명한 소리를 내고는 세화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자라, 그냥.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다.

    막 일어났던 터라 다시 잠들긴 어려울 것 같았는데, 지친 몸은 금세 의식을 저 멀리 띄워 보냈다. 이것도 임신 때문이겠지? 눕기만 하면 까무룩 졸음이 밀려오는 거…. 수마가 덮쳐오기 직전의 몽롱한 순간, 세화는 문득 시가 향이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남이 있든 말든 언제고 뻑뻑 담배를 피워대던 남자에게선 즐겨 뿌리는 향수 냄새만 감돌 뿐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단단한 기태정의 팔뚝, 시퍼렇게 돋은 그 핏줄 위로 질기게 고여있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

    일어나니 옆자리는 또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차곡차곡 쌓여있던 선물 탑은 형편없이 무너진 채였다. 아슬아슬하게 침대까지 밀려온 쇼핑백의 산 위로 상당수의 상자가 입을 헤 벌린 채 놓여 있었다. 안에는 태그조차 떼지 않은 새 옷이 담겨 있었다.

    세화는 코로 길게 숨을 내쉬며 시위하듯 펼쳐진 옷더미로 손을 뻗었다. 옷 입게 해달라는 어제 요청의 답인 거겠지. 저 물건들이 다 쏟아졌으면 제법 요란한 소리가 났을 텐데 그 와중에도 깨지 않은 게 용했다.

    달랑거리는 가격표를 애써 외면하며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서자,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최 원사가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반가워하는 중이라는 걸 이젠 알 것 같았다.

    “이세화 씨가 깨기 전까지 그냥 두라고 하셔서 계속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어제와는 다른 방이었다. 세화는 잠시 문가에 멈춰서서 땀이 차오른 손바닥을 바지춤에 쓱쓱 문질렀다. 나 중위에게 들었던 이야기, 그때 느꼈던 감정, 기태정이 했던 말…. 마구잡이로 범람하는 어제의 기억에 저도 모르게 덜컥 몸이 굳어졌다.

    무서워. 임신할 수 있는 몸으로 변한 게 정말이라면. 그럼 앞으로 나는….

    “아, 왔어요?”

    이것저것 눌러보던 나 중위가 세화의 기척을 느끼고 반갑게 인사했다.

    “몸은 좀 어때요?”

    “…뭐, 그냥….”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다보던 기태정이 흘끗 저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시선이 몸에 두른 천 쪼가리를 훑고 갔다.

    “오늘만 여기에서 초음파 보고, 다음부터는 병원에서 진료받기로 계획 짰어요. 준장님께서 아무리 좋은 기계 갖춰놔도 병원만큼 완벽할 순 없다고 그러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나 중위가 앉으라며 기다란 의자를 가리켰다. 뉴스에서 가끔 봤던 병원의 진료 의자와는 전혀 다른 생김이었다. 반쯤 누울 수 있는 곡선 형태라 편안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장식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5성 사람들이 다니는 병원에선 이런 걸 쓰나 보다.

    “상의만 조금 걷어줄래요? 네, 좋아요.”

    기태정이 바로 옆에 놓인 스툴에 앉자, 진료가 시작되었다. 나 중위가 배 위로 차가운 젤을 쭉 짜냈다.

    “음?”

    하얗고 둥그런 막대기로 복부 위를 문지르던 나 중위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곤 조금 더 범위를 넓혀가며 기기를 움직였다.

    “아… 이제 찾았다. 보이죠?”

    세화는 잔뜩 움츠린 채로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임신이란 걸 하긴 한 건지 직접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무서워서 보고 싶지 않았다. 어제까진 기태정이 했던 말을 계속 복기하느라 다른 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눈앞에 결과물이 들이 밀어지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임신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여기가 아기집이에요. 이세화 씨는 보통 남성체보다 조금 아래에 있네. 5주에서 6주 사이일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발달 정도를 보니 6주 꽉 채운 것 같고….”

    “위험한 건가? 저만큼 아래에 있으면.”

    “당장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습니다. 사실 지금은 아기집의 위치보다는 모양이 좋지 않은 게 문제라서… 물론 아직 초기니 시간 지나면 변할 수도 있습니다. 지켜봐야죠.”

    기태정은 턱을 쓸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찌나 기세가 살벌한지 애가 아니라 무슨 적군이라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화는….

    “…저기, 중위님.”

    “네, 이세화 씨. 혹시 어디 불편해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이거 아기 아니고 무슨, 다른 거 아니에요?”

    세화는 입을 작게 벌린 채로 무채색의 화면만 들여다봤다. 아, 이거 진짜 어떡하지. 여전히 얼떨떨했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만큼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원뿔의 전개도처럼 펼쳐진 검고 하얀 공간 속에 콩 같은 게 콕 박혀있었다.

    막상 보니, 아이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가라앉았다. 사실 세화는 초음파 기기를 들이대면 아기가 배 속에서 저를 빤히 바라보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저건… 1cm도 되지 않는 것 같은, 아직 얼굴조차 없는 그저 조그만 콩알에 불과했다.

    “아직 6주밖에 안 됐으니까요. 이 시기엔 태아도 아니고 배아라고 불러요. 너무 작아서. 그래도 시뮬레이션은 다 해 볼 수 있어요. 어제 이세화 씨 피검사 정보 넣어 놔서 태어날 아이 얼굴도 대충 예상해 볼 수 있으니까, 홀로그램 다 만들어지면 화면에 띄워 줄게요.”

    혹시 지금 아이가 움직이고 있는 건가? 찌그러진 콩 아래로 그래프가 활발히 춤을 추고 있었다.

    “아,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들어볼래요?”

    “…심장이 있다고요? 저렇게 조그만데요?”

    “그럼요. 딱 6주부터 들을 수 있는데 어떻게 주 수가 맞았네요.”

    “보여, 아니 들려주세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나 중위가 버튼을 탁탁 눌렀다. 그러고도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지금 귓가에 펄떡이는 맥박은 제 심장 소리인 것 같은데. 기다리던 세화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콩콩콩… 뭔가 내 달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저 뭉개진 콩알 같은 게 내는 거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힘찬 고동이었다.

    세화는 초음파 화면과 자신의 배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살아있다. 이 안에 정말로, 살아 숨 쉬는 것이 들어있다. 손톱만 한 주제에 심장까지 달고 있는 생명체가 있다.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제 기태정 때문에 무너져 울면서도, 임신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감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 생각만큼은 확고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나처럼 자라게 될 아이는 필요 없다던 기태정의 말은 세화 또한 십분 공감하는 바였다.

    아기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면 당연히 더 좋은 환경의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싶지 않을까? 저는 가진 건 쥐뿔도 없는 4환의 범죄자였다. 기태정이야 당연히 애 문제로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아 할 거다. 양쪽 모두 껄끄러워하는 아인데. 태어나는 게 오히려 불행일 거다.

    다만… 세화의 그런 결심과는 별개로 확실히 경이로운 광경이긴 했다. 원해서 가진 것도 아닌 아이의 심장 소리 좀 들었다고 갑자기 사랑스럽고 소중한 마음이 움트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매번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만 보던 제가 생명의 시작을 맞닥트릴 거라곤 여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마약이나 말고, 화투패나 돌리는 게 전부였는데. 그런 못된 거나 팔면서 살아왔던 주제에. 이런 몸으로 아이를 품었다는 게….

    “아이를 낳든 지우든 이세화 씨는 한 달 정도 준비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사이 자연 유산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세요. 그랬다간 일 정말 커질 수도 있으니까. 원래도 이때가 유산이 많은 시기긴 한데, 이세화 씨는 체질이 체질이다 보니 남들보다 배로 신경 써야 해요.”

    “어, 음… 그런데… 저거요, 심장 너무 빨리 뛰는 거 아니에요? 얘도 갑자기 자기 들여다봐서 좀 놀란 것 같은데.”

    머뭇거리며 어떻게 아이를 달래 줘야 하냐고 묻자, 기태정이 구부린 검지로 세화의 뺨을 톡 건드렸다. 엉뚱한 소리 한다는 듯. 일순 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는 것도 같았지만,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터라 세화는 자신이 본 게 진짜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 bpm이면 정상이에요. 흠. 아기집은 상태는 약간 걱정스러운데, 대신 태아는 발달 상황이 아주 좋네요. 그러니까 이세화 씨는 스트레스받지 말고 무조건 본인 몸을 더… 아, 홀로그램 나왔다.”

    나 중위가 키보드처럼 생긴 버튼 여러 개를 타다닥 눌렀다. 처음엔 덤덤하게 설명하던 그녀 또한 점점 들뜬 기색이었다.

    “갓 태어났을 때 붉은 기 가시고 나면 이런 외모일 거라고 예측해보는 프로그램인데, 제법 정확해요. 그래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미리 주문해요. 인큐베이터 넣을 때 얼굴 어디 어디 좀 더 만져 달라고.”

    또로롱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화면이 분할됐다. 왼쪽엔 그새 조금 익숙해진 새까만 강낭콩이 둥실둥실 떠 있었고, 오른쪽에는 벌거벗은 신생아가 누워 있었다.

    “어머, 아기가….”

    나 중위가 감탄하며 버튼을 콕콕 누르자, 눈을 꼭 감고 있는 아기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었다.

    “와. 정말 예쁘네요. 이세화 씨 판박이다.”

    여태까진 무덤덤하게 화면을 지켜보던 기태정의 눈썹 끝이 작게 움찔거렸다. 나 중위의 말마따나 화면 속 조막만 한 얼굴엔 세화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아가 시절의 저는 꼭 이런 모습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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