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3)화 (63/144)
  • #063

    기태정은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닌데 이 새끼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딱 그런 표정이었다.

    “청혼하냐, 지금?”

    “뭐… 맥락상 큰 차이는 없지 않겠습니까? 친구한테 선물하려는 건 아니니까….”

    “반지는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 좀 그렇긴 한데, 이것저것 준비하는 건 좋은 의견 같습니다. 이세화는, 아니 이세화 씨는 준장님께서 디저트류 챙겨 주셨을 때도 무척 좋아했으니 이번에도 감동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 원사에 이어 박 소위까지 슬쩍 동조의 의견을 보냈다. 나 중위는 기가 막혀서 헛숨만 삼켰다. 꽃다발? 선물? 충격으로 몸져누운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인간관계에 서툰 건 나 중위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럴 땐 다정한 위로가 최고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지금은 이세화가 슬퍼하든 화를 내든 묵묵히 그 사람 하는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게 최선일 것 같은데.

    “제가 관사에 있을 테니 최 원사와 함께 다녀오시죠. 아무래도 물건 고르는 안목은 저보다 최 원사가 낫지 싶습니다.”

    나 중위는 마음을 전하는 법도 모르는 동기들이 답답했다. 한편으론 가엾기도 했다. 몰라서 저러는 거니까. 그러지 말라고, 선물 공세보다 미안하다고 한마디 해 주는 게 어떻겠냐 조언해 주고 싶은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선 넘지 말라는 상관의 경고는 허언이 아니었다. 기태정은 타인이 자신의 사연을 멋대로 재단하는 걸 몹시 불쾌해했다. 나도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데 네까짓 게 뭔데. 그런 오만한 얼굴을 하고선 자신의 결벽을 훼손한 사람들을 초주검으로 만들어놨다. 나 중위가 알기론 그의 앞에서 이 주제를 건드리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기태정이었으니 조언이랍시고 보탠 말에 묻어나는 동정을 누구보다 기민하게 알아챌 것이다. 큰 실수까지 한 직후이니 더더욱 사정 봐주지 않고 진심으로 죽이려고 들겠지.

    나 중위는 뒷짐을 진 채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기태정의 말이 옳았다. 조금 전 자신이 벌인 짓은 얄팍한 신념을 지켰다는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환자를 걱정한다는 핑계를 앞세웠던 주제에, 끝내 돌봐야 할 사람보다 자신의 편안함과 안위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 비겁함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으으….”

    세화는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분명 소파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린 곳은 침대 위였다. 어제 잠들었던 게스트룸인 것 같았다.

    시간이 한참 흘렀는지 밖은 어두컴컴했다. 어슴푸레한 방 안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화는 비척비척 욕실로 걸어갔다. 불을 켜고 보니 거울에 비친 몰골이… 참 가관이었다. 눈과 볼만 어디서 얻어맞은 것처럼 새빨갰다.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센서 부근에 손을 휘휘 흔들었다. 몇 번이고 찬물을 끼얹어봤지만, 사실 세화도 알고 있었다. 이런다고 타들어 가는 속이 다스려지진 않는다는 걸.

    임신, 5주 차, 아니 6주라고 했던가. 어쨌든 임신… 세화는 물끄러미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여기에 정말 뭔가가 들어있다고? 허리께를 이리저리 더듬어보던 세화는 이내 손을 축 늘어뜨렸다.

    기태정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세화의 몸이 변한 것도, 아이를 가진 것도 전혀 모르는 일이었고, 이 주제로 음담을 늘어놨던 건 그저 더러운 입버릇일 뿐이라고 했다.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알았더라면 먼저 조심했을 거란 말이, 아이에게 저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다던 고백이 거짓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어?”

    한숨을 쉬며 상의로 젖은 얼굴을 대충 훔치던 세화는 퉁퉁 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까는 반대편을 볼 생각도 안 해서 몰랐는데, 제가 누워있던 방향을 등지고서 어마어마한 양의 상자들이 방 안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게 다 뭐….”

    보관할 곳이 없으니 대충 여기에 던져놓은 건가? 그렇다기엔 층층이 쌓인 모양이라거나 여기저기 놓인 쇼핑백의 각도가 공들여 연출한 것처럼 완벽했다. 자세히 보니 테이블 위엔 거대한 꽃바구니까지 놓여있었다.

    …저게 다 내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지만, 사실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너무도 명확했다. 묵는 사람이 있는 손님 방에 저 많은 물건을 가져다 놓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괜히 테이블 앞을 서성거리던 세화는 새빨간 장미 틈에 꽂힌 하얀 봉투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편지…?”

    홀린 듯 뻗으려던 손을 잽싸게 붙들었다. 열어보면 안 된다. 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기태정에게 온 편지일 수도 있는데, 함부로 뜯어 보면 큰일이잖아. 군부에서 보낸 중요한 메시지일 수도 있으니까….

    세화는 한참 동안 그 근처만 맴돌았다. 부산스럽게 굴다가 허리 높이까지 쌓인 초록색 상자를 와르르 무너뜨리고 나서야, 일단 열어보자는 결심이 섰다.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이걸 보면 누구에게 보내는 물건인 건지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내 것일 수도 있다고 착각하는 게 더 큰 실례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세화는 속으로 주절주절 핑계를 대며 비닐 포장을 찍 뜯어냈다.

    기태정이 다른 사람에게 받은 거라면 차라리 상관없을 것 같은데. 만약 그가 저에게 쓴 편지라면…. 그러면 어떡하지. 심각한 낯으로 고민하던 세화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렸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잔뜩 긴장한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그랬다. 지금 이 상황이 기가 막힌 것과는 별개로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저에게 편지를 쓰겠답시고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든 그의 모습이.

    세화는 봉투를 들고서 잠시 망설이다, 눈을 꼭 감고서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무언가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아.”

    세화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푹신한 러그 위로 툭 떨어진 것은, 카드였다. 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지 않았더라면 120억이 들어있었을 연방 은행의 검은색 체크 카드. 발치에 떨어진 물건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화는 반으로 접힌 편지지를 펼쳐보았다. 백지였다. 5성의 주민도 쉽게 발급받을 수 없다는 그 대단한 카드 한 장이 전부였다.

    구구절절한 이야긴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이거 너한테 주는 거 맞다는 시시한 얘기라도 적혀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봉투를 감싸고 있던 비닐에 문구 브랜드의 포장 스티커가 여태 붙어있었다. ‘당신의 마음을 표현해보세요!’ 웃는 얼굴에 달린 말풍선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점 하나 찍히지 않은 새하얀 내지와 비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화는 몸을 굽혀 카드를 주워 들었다. 편지지와 체크 카드는 다시 봉투 안에 넣어, 있던 자리에 조심히 돌려 두었다. 당신의 마음을 표현해보세요…. 맞는 말이었다. 이게 기태정이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일 거다. 상대방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데도 멋대로 폭격처럼 퍼부어대는.

    “…하아.”

    무슨 일이 생겨도 조금 앓다 금방 털고 일어나는 게 자신의 장점이었다. 체념이 빠른 만큼 쉽게 수용했고, 또 금세 의욕적으로 덤벼드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거, 세워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는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다가 약 먹으라면 먹고, 수술받으라면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기태정의 뜻대로 흘러가게 될 텐데.

    …그만두자. 혼자 의미를 헤아리느라 고민하고, 멋대로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했다. 주저앉아서 울어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데, 뭐하러.

    “왜 다시 꽂아 둬.”

    꽃바구니에서 두어 걸음 물러서던 세화는,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누구 주려고 사 온 건지 뻔히 알면서.”

    기태정이 문설주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언제, 아니 어떻게…. 세화는 머릿속에 번지는 물음표를 재빨리 거두었다. 뭐가 어떻게야. 발소리도 났고 물소리도 들렸으니 저거 일어났나보다, 한 거겠지.

    “내내 울다가 지금까지 잤으니 배고플 것 같은데.”

    “…….”

    “…뭐 당기는 거라도 있어?”

    “…….”

    먹고 싶은 게 있냐고? 세화는 자꾸만 무너질 것 같은 다리에 힘을 꾹 주고서 간신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풍선처럼 부푼 눈을 힘겹게 깜빡이면서.

    “저거….”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민망해 목울대를 꼬집듯이 쓸었다. 한참 목을 두드리던 세화는 울음기를 완전히 걷어내고 나서야 또박또박 되물었다.

    “저거 혹시 화대 같은 건가요?”

    “…뭐?”

    “그럼 못 받죠. 그것도 몸으로 갚아야 하는 빚인데….”

    씹어먹을 것 같은 시선이 메다꽂혔다. 남자는 처음 보는 낯을 하고 있었다. 치켜뜬 눈썹 산이 아슬아슬했다. 대단한 모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툭 불거진 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 구멍에 2억 꽂아 볼 날이 오긴 하겠냐고 하셨잖아요. 그 빚도 아직 다 못 갚은 것 같은데 이 많은 걸 어떻게 받아요.”

    세화는 별것도 아닌 말로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의 표정을 끌어냈다는 기묘한 고양감에 휩싸였다. 또 무슨 말을 해 볼까. 내뱉을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문장을 뒤적였다. 기태정 또한 멋대로 부풀었다 꺼진 감정의 상실감을 느껴보길 바랐다, 그렇지만….

    괴이한 열기는 이내 부메랑처럼 세화에게로 되돌아왔다. 복수는 화투패와 달라서 상대방에게 똑같이 갚아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남에게 비슷한 타격을 주려면 저 또한 곪은 자리를 끊임없이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 그런 점에서 복수는 차라리 마약과 닮았다. 필요한 만큼의 환각을 샀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남은 건 너덜너덜해진 육신과 영혼뿐인 것처럼, 상대를 한 방 먹인다고 해서 내 마음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프고 허무하기만 했다. 내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다시금 깨달을 뿐이었다.

    이것도 참… 못 할 짓이구나. 세화는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꾹꾹 누르며, 불처럼 끓는 그의 눈길을 외면했다. 당장이라도 몸통을 쪼갤 듯 잔뜩 벼려진 공기가 매서웠다. 그렇게 모르는 척 꽃바구니만 고집스레 바라보고 있는데, 시야로 단단한 팔이 불쑥 들어왔다. 피하지 말라는 듯 기태정이 몸을 휙 돌려세웠다.

    “화대?”

    말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는지 그가 차게 웃었다. 뭔가를 참는 듯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낸 낮은 목소리였다.

    “말은 정확히 해야지. 몸 팔아서 준 게 아니라 너 애 가졌다고 준 거잖아.”

    기태정의 어깨쯤에 내던지고 있던 세화의 시선이 쩡하니 얼어붙었다.

    “…….”

    “그럼 화대가 아니라 위자료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은데.”

    흔들리던 시선이 얽혔다. 기태정의 눈동자에 못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북받치는 것을 애써 참으려 잔뜩 일그러진 낯짝.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이던 세화는 이내 고개를 툭 떨궜다. 상처받은 게 역력한 얼굴을 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준장님은,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눈물 대신 버석 마른 웃음이 흘렀다. 이젠 울 기운도 없었다. 울고 싶지도 않았고…. 어떤 기대도 없었으니 괜찮다. 원래 기태정이 이런 성격인 거 모르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세화.”

    기태정이 세화의 허리를 덥석 붙들었다. 놓으라며 발버둥 쳐 봤지만, 이 정도 반항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제 몸을 높이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발끝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세화의 발바닥이 천천히 내려앉은 곳은 차가운 대리석이 아니라 단단한 그의 발등 위였다. 화대가 아니라 위자료 주는 거란 말이나 하는, 오늘 내내 저를 부수고 울렸던 남자의 품 안이었다.

    “…내가 하려던 말은.”

    먼저 운을 떼 놓고선, 기태정은 말을 잇지 않은 채로 세화를 끌어안고 있기만 했다. 강고하게 붙들어 조금도 자신과 거리를 벌릴 수 없게 했다.

    “아까도 말했지.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한테 어떻게 대하는진 네가 더 잘 알지 않냐고.”

    “…….”

    “그렇게 여겼으면 임신했다는 거 알자마자 너 뒈지든 말든 수술대 위로 올렸어.”

    매캐하고 짙은 향수 냄새가 잘게 떨리는 세화의 몸을 견고하게 감싸 안았다.

    “…몰랐다고 했잖아.”

    “…….”

    “전부 책임지겠다고도 했고.”

    그게 아니면, 하고 기태정이 잠시 뜸을 들였다.

    “혹시 따로 바라는 거라도 있나? 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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