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2)화 (62/144)

#062

“…제가 남자랑 잔 게 처음도 아닌데.”

아까보다 차분해지긴 했어도 말아 쥔 주먹이며 어깨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목소리도 형편없었고… 무엇보다 이세화가 자기 입으로 손님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세화가 그 주제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잘 알아서, 이 신호의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남자를 잘 받아들이는 게, 그게 차라리 낫겠다고, 살아남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변해야 한다고 제 몸이 판단했던 거라면… 그러면 처음 뒤 따였을 때부터 잘 젖었게 변했어야 했던 아닌가요.”

그간 절 함부로 대했던 사람이 준장님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던 이세화가 픽 웃었다. 비눗방울을 닮은 조소였다. 예쁘고, 쓰고, 덧없는.

“그런데 하필 지금 그렇게 변했네요. 준장님을 만난 이후로.”

“이세화.”

기태정은 입술 안쪽을 깨물며 최대한 초조한 기색을 감추려고 애썼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면서. 초조하다고? 지금 내가, 이세화 기분이 어떨지 몰라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이러고 있다고?

“씨발, 내 말버릇이 더러워서 오해하는 건 알겠는데….”

다시 한번 성급히 짠 각본을 훑어본다. 다행히도 이세화에게 늘어놓은 얘기 중 거짓은 알고 몸을 섞은 건 아니라는 것뿐이라, 말이 엉킬 것도 없었다.

“사람 말 좀 들어, 아니라고 하잖아.”

기태정은 이세화의 어깨며 팔뚝이며 얼굴을 정신없이 쥐었다가 놓았다. 처음 보는 성마른 손짓과 다급한 말투에 이세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처음에 말한 적 있지, 너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그래, 그런 얼굴을 해. 그런 표정하고서 이것저것 묻고 조르고 떠들어, 차라리.

“김 소위 때문이었어. 처음엔 네가 김 소위랑 붙어먹는 사인 줄 알았으니까.”

이 또한 생각도 못 했던 이야기였는지 이세화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서렸다.

“제가요? 김 소위랑요?”

“어. 김 소위 그 새끼가 나한테 좆같이 굴어서, 나도 똑같이 기분 더럽게 해 주고 싶었거든.”

사관 학교도 나오지 않은 수용소 출신이 비슷한 쓰레기들 몇 명 데리고 승승장구하는 게 못마땅해서, 죽으라고 적국으로 혼자 보내도 잘도 살아서 돌아오니까, 가끔 군량에 독극물을 풀어도 안 죽고, 발정제 먹여서 아무하고 흘레붙게 하려고 해도 뜻대로 안 움직이고….

“독극물? 발정제라뇨?”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이세화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여전히 가라앉아있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더 유순해진 목소리였다. 기태정은 새카만 속내를 감추고서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씨도둑질이라도 하겠다던 새끼들이 줄을 선 참이라.”

“그게 무슨….”

“넌 이해가 안 되겠지만 무슨 추잡한 수를 써서라도 더 높은 계급장 갖고 싶어 하는 새끼들이 한 트럭이야, 군대 내에선.”

“…….”

“괴물이긴 해도 우수한 자원인 건 사실이고, 또 고아라 눈치 볼 뒷배도 없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내 계급장 거머쥐고 싶은 거겠지.”

그래서, 하며 기태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썩 유쾌하지 않은 이야길 하려니 목소리에 절로 어두운 기색이 서렸다. 상황이 뭐 어떻든 간에 남에게 속을 죄 내보이는 건 기태정에게도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사연 조금 털어놓으면 물기로 부푼 이세화의 동공이 저렇게 잘게 흔들릴 거라는 걸 아니까. 그래서 꾸역꾸역 참고서 말을 이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나랑 한 섹스가 보통 사람보다 네 몸에 영향을 줬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

기태정은 투박한 손길로 이세화의 옷 위를, 배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는 게 좋았으려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세화는 어쩐지 그 어색한 손짓에서 조금 더 진정성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 헐떡이던 숨소리가 평소와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특이 체질 같은 건 아니지만 이 몸 자체가 정상이 아닌 건 사실이니까.”

기태정은 이세화의 마른 손등을 느리게 문지르다가, 짧게 입을 맞추었다. 움찔거리긴 했지만 밀어내진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애쓰던 시절 얘기, 더 궁금하다면 박 소위나 최 원사 불러줄 수도 있어. 내가 애새끼와 약이라면 치를 떠는 건 군부 인사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알 정도고….”

팔자로 축 구부러진 눈썹에 어린 건 분노만이 아니었다. 이젠 연민 또한 어른거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몰랐어.”

“…….”

“아이는… 낳든 지우든 뜻대로 해. 무슨 방향이든 나도 끝까지 책임질 테니까.”

기태정은 더는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이세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전 자신이 그랬듯, 이세화 또한 본인 마음속의 천칭을 들여다보고 있을 거다.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을지는 뻔했다.

“…일단.”

이세화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울컥 치솟는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운 듯, 감은 눈꺼풀이 몇 번이고 움찔거리면서.

“…저 진정제 좀 주세요. 수면제도 좋고….”

“뭐? 아까 나 중위 말 못 들었어?”

“이러다 쓰러져서 수액 맞는 거나, 맨정신일 때 약 미리 먹는 거나… 무슨 큰 차이가 있겠어요.”

이세화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왕진 가방을 향해 손을 뻗는 걸 보니 패치를 꺼내고 싶은 모양이다.

“아윽….”

일어서려던 이세화의 몸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려고 했다. 갑자기 움직이니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알았어, 뭐든 줄 테니까 일단 앉아.”

그래도 진정제나 수면제는 안 될 말이었다. 기태정은 덜렁거리는 이세화의 손목에 패치를 둘둘 감아주고서, H1을 꺼냈다. 어떤 환자에게 먹여도 가장 탈이 없을 치료제였다. 진정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탈수나 탈진은 막아줄 테니까….

입술 새로 알약을 밀어 넣어주고, 엄지로 짓무른 눈가를 더듬더듬 어루만졌다. 키스해도 받아들이려나? 잠시 고민하던 기태정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러나 아직 입맞춤을 받아들일 정도까진 아닌지 이세화는 미미한 힘으로나마 얼굴을 돌리며 거부했다.

잠시 멈칫했던 기태정은, 강요하는 대신 이세화의 머리만 쓰다듬어주고 물러섰다. 지금은 강제할 때도, 변명을 길게 덧붙일 때도 아니었다. 실컷 구석으로 내몰았으니 이세화에게도 혼자 있을 시간을 줘야 한다. 포로를 심문하고 포섭할 때도 이런 순간은 꼭 필요했다.

“쉬어.”

이세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집스레 눈을 감았다. 기절할 것 같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둥글게 말고 있던 몸이 이내 소파 위로 조금씩 무너져내렸다. 또 우는 건지 어깨가 작게 들썩이고 있었다.

달칵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정원의 스프링클러가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창 너머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 높이까지 물보라가 튈 리 없는데도 어쩐지 산란하는 빛살은 무지개를 닮아있었다.

기태정은 옹송그린 이세화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돌아섰다.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니 앞으론 그 어떤 진실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게 해줄 거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준장님.”

밖으로 나가자마자 최 원사가 심각한 낯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발바닥에 용수철이라도 단 것처럼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은근슬쩍 이세화를 싸고도는 놈인지라 상황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박 소위 또한 반쯤 열어 둔 문 너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나 중위는 이 일에서 손 떼.”

기태정은 나직한 목소리로 축객령부터 내렸다. 전투를 앞둔 엄격하고 예민한 상관일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환자 목숨 우선으로 하는 거, 다르게 해석하자면 나 말고 다른 놈이 계급으로 찍어 눌러도 꺾이지 않는 성격이라는 뜻이기도 해서 여태 나 중위를 높게 샀던 건데….”

쏟아지는 앞머리를 넘기다 잠시 멈춘 손끝에, 질끈 감았다 뜬 기태정의 눈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사리 분별도 못 하는 사람한테 더는 일 못 맡기지. 박 소위.”

“예.”

“나 중위 대신해서 이세화 봐줄 수 있는 사람 수배해. 군의관이든, 시중 병원 의사든. 입 무거운 놈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실력은 나쁘지 않고 여차하면 처리해도 탈 없을 놈으로.”

“준장님, 잠시만 제 얘기를….”

“이 와중에도 변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나?”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네 알량한 신념에 취해서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덤벼들어 놓고선, 뭐? 당사자에겐 알 권리가 있어? 개소리하지 마. 넌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의사로서 올바른 판단도 내리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나 중위라 이 정도 선에서 끝내주는 거였다. 수용소에서 사람들 살려보겠다고 애썼던 게 습관이자 증후군으로 남았다는 걸 알아서. 그렇지만 이 이상의 월권은 수용해줄 수 없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눈물만 쏟아내던 조금 전 이세화의 얼굴이 더는 그럴 수 없게 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초진… 그러니까 처음 초음파 보는 일과 추후 이세화 씨의 수술만 제가 맡게 해 주십시오.”

나 중위가 태블릿을 다급하게 몇 번 두드렸다.

“방금 이세화 씨 검사 결과 보내드렸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든 게 불안정합니다.”

기태정의 손목시계가 반짝 빛났다. 검토할 서류가 도착했다는 알림엔 긴급 표시가 붙어 있었다.

“현대 의학 기술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아이는 생각보다 어이없는 이유로 잃게 될 수도 있고, 그 타격은 고스란히 임부에게 돌아갑니다. 하물며 이세화 씨는….”

나 중위는 후, 숨을 고르며 목소리를 줄였다.

“뒤늦게 아기집이 생긴 상태고, 그것도 인위적인 방법이어서 그런지 터무니없이 약해 보입니다. 물론 원인과 상황은 좀 더 면밀히 파악해야 하겠지만… 지금도 태아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가 형편없습니다.”

“하….”

…터무니없이 약하다고.

기태정은 마른세수를 하며 그간 이세화가 겪었던 일을, 특히 최근 5, 6주간 있었던 일을 헤아려 보았다. 섹스는 언제나 과격했고, 패치를 두르고서 술까지 마셨다. 아니, 섹스까지 갈 것도 없다. 이세화의 입장에선 제가 나타난 이후로 세상이 뒤집힌 것과 다름없었을 테니까. 과도한 스트레스가 태아에게 치명적이라는 것 정도는 기태정도 알았다. …이렇게 보니 배 속의 애가 제 새끼인 건 확실했다. 별일을 다 겪고서도 죽지도 않고 이세화 몸에 끝까지 달라붙어 있는 걸 보면.

“지금 이 수술이 이세화 씨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든 떼든 최소 한 달의 준비 시간은 무조건 필요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이세화 씨에게 무리 가지 않도록, 완벽하게 설계하겠습니다.”

나 중위는 뒷짐을 쥔 채 초조하게 상관의 지시를 기다렸다. 기태정의 지적대로 자신의 신념에 취해 실수한 건 맞다. 대비할 틈도 없이 충격적인 얘기부터 꺼내서 이세화를 까무러치게 했으니. 그래서 나 중위는 조금이라도 이 일의 봉합을 돕고 싶었다. 다른 놈들 데려와 봤자 지시는 고분고분하게 들을 진 몰라도 진심으로 환자를 돌봐 주진 않을 거다.

“일단 필요한 기기들부터 가지고 오는 게 좋겠습니다. 나 중위가 계속 일을 돕든, 여기서 손을 떼든 밖에서 이세화 씨 진료를 볼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잠시 틈을 엿보던 박 소위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좋은 생각입니다. 당분간 관사와 4환 하우스를 오가야 하니까, 거기에도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최 원사도 잽싸게 숟가락을 얹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장비 갖춰두는 건 좋지만 병원보다 완벽할 순 없어. 외래 진료 볼 수 있게 사람 수배는 해. 그리고….”

삐딱하게 다리를 짚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기태정이 애매한 허락을 내렸다.

“초진과 마지막 수술 준비, 나 중위 역할은 거기까지야.”

이 이상 선 넘어서 내 손으로 널 죽이게 하지 마. 덤덤한 상관의 경고에 나 중위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징계는 생각 중이니까 이후 처분 따르도록 하고, 그리고 최 원사.”

“예.”

“이세화가 보고 좋아했다던 4성의 베이커리, 이름이 뭐지?”

“베이커리… 요?”

상관의 심중을 모르겠다는 듯 최 원사가 눈을 데굴 굴렸다.

“애를 한 달 있다 지우든 어쩌든, 평소보다는 잘 먹여야 할 거 아냐. 임신한 건 사실인데.”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래도 빵 종류보다는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이 좋지 않겠습니까? 또 이세화 씨를 챙겨 주시려는 거라면 먹거리만이 정답은 아니기도 하고요.”

“그러면?”

나 중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박 소위와 최 원사를 쳐다보았다. 놀란 건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기태정은… 뭐랄까. 덜컥 아이를 가진 상대방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범한 남편 혹은 아이 아빠처럼.

“선물이라도 준비하는 건 어떨까요?”

“120억 꽂힌 체크 카드 줬는데도 별말 없었잖아, 이세화는.”

질문이나 감상을 들을 짬도 없이 이세화의 몸부터 냅다 물고 빨았던 건 생각도 안 하고서 기태정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럼 이참에 그 얘기도 같이하시면 되겠네요. 이세화 씨 성격상 카드가 진짜 자기 거일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최 원사는 싱글벙글한 낯으로 선물하기 좋은 품목을 헤아렸다.

“커다란 꽃다발은 기본으로 준비하고, 여기에 다른 선물을 추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시계라거나, 반지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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