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1)화 (61/144)
  • #061

    “나 중위.”

    기태정의 부름에 살얼음 같은 분노가 어려있었다.

    “준장님, 누구보다 본인이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문젭니다.”

    “그래서 지금 이 얘길 나한테 보고도 없이….”

    “이게 뭔데요?”

    덜덜 떨리는 여린 목소리가 기태정의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평소의 세화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행동이었다.

    “이게 대체 뭔데, 무슨 뜻인데….”

    세화는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손바닥만 한 출력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어떻게든 용지를 낚아챈 건, 흐려진 초점 너머로 마주 앉은 남자가 몸을 들썩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에게 빼앗기면 안 돼. 내가 먼저 확인해야 해. 오직 본능만 남아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세화를 보고 놀랐는지, 당장이라도 다가올 듯 반쯤 일어섰던 기태정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크게 한숨을 내쉰 게 전부였다.

    경련이 온 것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사지를 펼쳐 들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뭐부터 물어봐야 하지?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 없어서, 세화는 물끄러미 종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황스러울 거 알아요. 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하듯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지금이 이세화 씨에게 정말 중요한 시기라서 그래요.”

    중요한 시기…. 세화는 삿된 것이라도 본 듯 들고 있던 물건을 내팽개쳤다. 결과지는 나비처럼 공기 중을 부유하다 러그 위로 매끄럽게 안착했다. 발아래 떨어진 것이 혹시라도 몸에 닿을까, 세화는 다리를 가슴까지 끌어당기며 잔뜩 웅크렸다.

    “거짓말….”

    웅얼거리며 내뱉는 말은 헐떡이는 숨소리에 뒤섞여 발화자인 세화조차 알아듣기 어려웠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으니 말문이 막혔다. 문자 그대로 목청이 콱 틀어막혀버렸다.

    “거짓말, 이죠.”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감쳐무는 나 중위의 표정이 백 마디의 말보다 절실히 와닿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이런 장난을 하시는 거예요? 군의관님이 그러면 농담으로도 안 들린단 말이에요.”

    진짜다. 이건 재미없는 농담 같은 게 아니다. 거짓말도 아니다. 그렇지만 부정이라도 하지 않으면. 화라도 내지 않으면.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이세화 씨, 진정해요. 우선 내 얘기랑 준장님 말씀부터 듣고….”

    “…나 중위, 나가.”

    기태정이 아득 이를 갈며 세화의 등을 두드려주려는 나 중위의 손을 뿌리쳤다.

    “귀관은 상관의 지시가 아주 좆같고 우스운가? 체질이나 설명해주랬지, 나도 아직 전해 듣지 못한 얘길 누가 멋대로 나불대라고 했어?”

    귀관. 기태정이 평소엔 잘 쓰지도 않던 말까지 입에 올린 이후에야 나 중위가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다만 저는, 당사자인 이세화 씨에겐 사실을 알 권리가 있고, 또 갑작스레 변한 탓에 수치가 좋지 않으니….”

    “씨발, 상태 안 좋은 걸 뻔히 알면서 다짜고짜 결과부터 들이밀고 사람 까무러치게 만들어? 그래서 나 중위가 보기엔 지금 이세화 상태가 좋아 보이나? 감기약도 계산하면서 쓰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던 게 조금 전이야. 안정제 놔줘도 듣기는 할까 싶은 이 상황이 괜찮아 보여?”

    “준장님, 잠시만 제 얘기 좀…!”

    “소명은 나중에 들을 테니까, 꺼져.”

    “…아, 으윽….”

    시끄러워. 토할 것 같아. 세화는 느리게 도리질했다. 나 중위가 뭐라 말을 하는 중인 건 알겠다. 간간이 끼어드는 남자의 거친 음성도 들렸다. 고장 난 스피커처럼 온갖 소음이 한데 모여 와글거렸다. 길게 이어지던 이명은 문이 쿵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사그라들어버렸다. 그리곤 정적이었다. 느껴지는 거라곤 제 심장 박동뿐이었다. 발끝에서 밀려온 맥동은 이내 거대한 해일이 되어 세화의 귓전을 퍽퍽 때리고 갔다.

    야매긴 했어도 피검사는 제법 자주 했다. 사장이 부리는 꽁지꾼들은 돈 갚을 날짜가 밀리면,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한데 모아 놓고 피부터 뽑았다. 묶어놓고서 커다란 바늘을 막무가내로 꽂고는 이거 장기 떼다 팔 수 있겠냐, 없겠냐 그런 소리를 면전에다 대고 했다. 작업장에서 미라처럼 피만 쪽쪽 빨리는 사람들도 보여줬다. 장기 팔기 어려우면 피라도 팔아야지 않겠냐면서 실실 웃으면서. 일종의 쇼였다. 겁먹고 돈 빨리 갚으라는.

    그리고 그때마다 세화는 같은 결과를 받았다. 깨끗한 피를 가진, 임신 불가능한 남성체. 유통책으로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당했던 일이긴 했지만, 고작 몇 년 사이에 체질이 변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앞으로 임신할 수 있다, 도 아니고 배 속에 이미 아이가 있다고?

    “이세화!”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세상이 온통 하얗다가, 갑자기 빨갛고 파랗고 또 시커멓게 변했다. 의학적 지식이라곤 쥐뿔도 없는 세화가 보기에도 결과지 속 그래프의 모습이 심상치 않긴 했다. 유의미한 증상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폭발하듯 곡선을 그릴 순 없을 거다.

    “이세화, 정신 차려!”

    단단한 체온이 목 뒤를 받쳐주었다. 제 팔뚝을 움켜쥔 커다란 손을 보자마자 눈꺼풀 뒤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고일 새도 없이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임신이라고? 초음파인지 뭔지 하는 걸 들이민대도 곱게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짜고 치는 거 아닌가 의심하기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 금세 납득하게 된 건, 이 손의 주인 때문이었다.

    이 남자 때문에.

    기태정 때문에.

    세화가 알고 있던 상식이나 사실 같은 것보다 여태까지 그가 저를 취급했던 태도가 이 현상을 쉽게 수긍하게 했다.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으니까. 내 몸이 이렇게 된 거, 다 알고서 처음부터 임신이니 뭐니 그런 소리를 했던 거다.

    속에서 잉걸불이 괄게 일었다. 어젯밤 이 손이 뒷구멍을 들쑤시지 않아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꼭 끌어안기만 해서. 그래서 계속 고민했다. 우리 사이가 뭔가 달라지긴 한 것 같다고. 생각해 보니 처음처럼 모질게 굴지도 않고, 눈치 보면서 부탁하면 대부분 다 들어주고, 가끔 웃어주기도 하고… 또 울면 울지 말라고 달래주기도 하니까. 단순히 놀이 상대를 대하는 태도론 보이지 않지 않나? …등신처럼 그딴 고민이나 하고 있었다.

    다소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방향으로 흐르던 의구심이 급격히 방향을 선회한다. 그래, 이래야 맞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불운이, 멍청하게 뒤통수나 맞는 게 제 인생에 훨씬 더 걸맞은 것이었는데.

    언제고 쓸모를 다하면 그에게서 버림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아니, 애초에 버림받을 수 있는 것도 온전히 누군가의 소유가 됐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걸 모르고서. 저는 기태정에게 버림받을 자격조차 없었는데, 또 혼자 들떠서….

    “흐으, 으….”

    양껏 숨을 들이쉬려 입을 벌려보았지만, 폐부에 와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화는 호흡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컥컥대며 울었다. 그렇게 축 늘어져서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올라 손을 크게 휘둘렀다.

    “뭐 하는 짓이야!”

    배를 힘껏 내리치려던 세화의 양 손목을 붙들고서, 기태정이 화를 냈다. 세화는 어이가 없어서 울면서 웃었다. 아이라잖아. 배 속에 애가 있다잖아.

    “그럼, 이걸 그냥, 두라고요?”

    이 애는 저처럼 살 게 될 거다. 사람들에게 무슨 취급을 받게 될지 뻔하다. 그럴 바엔 태어나지 않는 쪽이 차라리 행복할 거다. 세화도 셀 수도 없는 무수한 밤을 그런 생각이나 하다가 잠들곤 했다. 차라리 낳지 말지. 아무것도 모를 때 죽여주지…. 그래서 세화는 핏발이 선 눈으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5주밖에 안 됐다고 했으니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다. 배를 세게 내리치면. 아니면 어딘가에 몸이라도 내던지면. 그러면 금방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죽, 죽어… 죽여야…, 아….”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

    단단하고 너른 품이 세화를 꽉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실이 끊긴 인형처럼 맥없이 흔들리는 세화의 고개를 딱 고정한 손은 불처럼 뜨거웠다. 벌어진 입술을 성큼 헤집는 젖은 살덩이도 딱 그만큼이나 열이 올라있었다. 혀가 엉키고, 타액이 고이다 꿀꺽 넘어가고, 그러면서 조금씩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부족했던 숨이 아주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제 속을 시커멓게 태워놓은 주제에 기태정은 어떻게든 제 호흡을 돌려놓겠다고 애쓰고 있었다.

    “이세화.”

    눈동자의 쪼개진 결까지 전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어이없게도 남자는, 기태정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거죠.”

    “아니야.”

    “어제 아무 짓도 안 하고 잔 것도, 그냥 자라고 배 만져줬던 것도… 다 알고, 처음부터 알고서….”

    “아니라고 했잖아.”

    “차라리 처음처럼 계속 막 대하지 그랬어요.”

    몸 안에 약 숨긴 거 있는지 보겠다고, 앞으로 말 잘 듣게 하겠다고 오로지 힘으로만 사람을 찍어누르던 그때의 기태정은 다시 생각해도 무서웠지만, 그의 입장에선 타당한 행동이었을 거다. 마약 제조에 유통까지 책임지고 있는 일급 범죄자. 심지어 김 소위와 수상한 일까지 벌이고 있던 공범. 심문 과정에서 자비를 베푸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됐겠지. 그런데, 그럴 거면.

    “계속 처 패고, 발로 차고, 가둬놓고 그냥 막 대하지….”

    사장한테서 장부 뺏었으니 울지 말라고 안아주지도 말고. 생전 처음 보는 케이크 같은 것도 안겨주지 말고. 범죄자에 한낱 4환 주민의 기분이나 풀어주겠다고 좋은 식당에 데려가지도 말고. 왜 키스는 안 해주냐면서 초조한 얼굴로 다그치지도 말고… 차라리 계속 고문이나 하지.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든 말든 함부로 이름 부르고, 좆 닦는 걸레 취급이나 계속하지, 왜. 대체 왜….

    “아니라고요? 그래서… 그때 수고했다고 해준 거 맞잖아요.”

    열이 펄펄 끓는 혼곤한 상태로 세화는 떠오르는 아무 문장이나 끄집어냈다. 조리 있게 말하고 싶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이 분노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바보처럼 자꾸 눈물만 흘렀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제대로 벌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뭐?”

    “애 배고서도 끝까지 좆 잘 물었다고, 그런 뜻으로….”

    “아니, 너는 대체… 하, 미치겠네.”

    기태정에게 처음으로 들었던 다정한 말이, 그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 천 개, 만 개의 바늘이 되어 세화의 심장을 터트리고 갔다.

    “그냥 밟아 죽이면 되는 버러지잖아요, 저는….”

    세화의 고개가 푹 꺾였다. 이렇게까지 공들여 잔인하게 굴 이유는 없잖아요.

    “버러지?”

    기태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널 그렇게 여겼다고? 진심이야?”

    “…….”

    “내가 버러지만도 못하다고 여기는 새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단호한 기태정의 말에 더 큰 눈물방울이 세화의 턱 끝을 타고 방울져 떨어졌다.

    “씨발, 진짜….”

    기태정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세화가 되도록 부드럽게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그리고 깊은 사정까진 되도록 모르게. 마지막 섹스가 강렬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장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닐 테니 그사이 이세화를 충분히 달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애가 들어선 지 5주나 됐을 줄은, 그리고 그걸 나 중위가 상의도 없이 다 떠벌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나 중위가 물불 안 가리고 환자에게만 집중하는 거, 군의관보다는 의사로서의 신념이 더 크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수용소에서 생긴 일종의 트라우마라, 가끔 도에 지나치게 굴긴 했어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태정은 나 중위의 그런 확고한 태도가 이세화를 오히려 안심시켜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선을 넘을 줄이야. 물론 그만큼 이세화의 몸이 좋지 않다는 뜻이겠지만….

    기태정은 잇새로 길게 숨을 내뱉으며 치미는 분노를 삼켰다. 나 중위의 징계는 당장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임신했다는 건 몰랐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임신했다는 건 저도 몰랐으니까.

    “정말로, 몰랐어.”

    기태정은 그 깊은 울음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이세화를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몸이 변했다는 말을 들으면 엉엉 울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원래 이세화의 우는 얼굴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저런 식으로 무너지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이건 진심이었다.

    머릿속 천칭이 좌우로 기울다 떠오르길 반복했다. 원래 계획했던 일 전부 다 들려줄까, 아니면 나도 몰랐던 일이라고 우길까….

    죽이느냐 살리느냐, 이 질문은 오히려 쉽다. 무조건 살릴 거다. 처음엔 이세화가 죽든 말든 증좌인 애나 잘 품고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멀쩡히 살려두고 싶다. 일 끝났다고 버리기엔 아까워졌다. 제법 관계에 재미가 붙어서, 이후로도 질릴 때까지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세화에게 해야 하는 얘기는, 단순한 생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앞으로 ‘어떻게 살게 하느냐’의 갈림길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이세화에게 사실대로 말해준다고 치자. 김 소위가 그간 너에게 먹인 약이 문제가 있었고, 나도 처음부터 그걸 알고는 있었고, 아니 그걸 알았기 때문에 너와 잤던 거다, 그렇게 전부 말해주면…. 아마 이세화는 무너지고 말 거다. 숨만 붙어있으면 곁에 둘 수야 있겠지, 그렇지만….

    먼저 손을 뻗으며 안기던 언젠가의 이세화가, 그 말간 낯이 반대편으로 기우는 추를 붙들었다. 더듬더듬 제 어깨에 올리던 손가락의 감촉이, 꼬물거리며 품을 파고들던 몸짓이, 어설프게 키스를 허락하던 얼빵한 입술이, 그리고 지금 흘리는 저 위력적인 눈물이… 기태정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저렇게 진이 빠지도록 우는데.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서 서러워하며 저를 밀어내는데. 이미 다 알고서 관계를 종용했던 거고, 임신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이세화는 다시는 저를 쳐다보지 않을 거다. 살려둔다고 한들 곁에 끼고 있는 건 다 망가진 껍데기일 거다.

    그건, 싫다. 확실하게 싫었다.

    “말한 적 있지 않나, 나도 수용소 출신의 고아라 애라면 질색한다고.”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뭐일 것 같아.”

    굳이 사실대로 다 말해줄 필욘 없지 않나? 이세화는 괴롭기만 하고, 나는 원하던 걸 잃게 될 텐데. 이건 누구에게도 좋은 결말이 아니잖아.

    “애 낳아봤자, 나랑 같은 일 겪을 게 뻔하니까.”

    그래서 기태정은 이세화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꺼내 들기로 했다. 이것마저 거짓인 건 아니었다. 원래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거짓말이 가장 완벽한 법이기도 하고.

    “왜… 의심하는 건진 알겠는데 정말 몰랐어, 나도.”

    흠뻑 젖은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멀거니 저를 바라보았다. 기태정은 이세화의 물기 어린 뺨을 움켜쥐고,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마음먹고 나니 그럴싸한 말이 뱀처럼 스르륵 흘러나왔다. 거짓말은 이토록 쉬웠다.

    “알았다면 당연히 피임 신경 썼을 거야.”

    사특하고 간교한 꼬임에 어린 양은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빡이기만 했다. 아까보다는 진정이 된 건가? 잘 모르겠다. 기태정은 그저, 이세화의 속눈썹에 알알이 맺힌 눈물을 핥아주고 싶을 뿐이다. 언젠가 느껴본 적 있던 따끔함이 예전보다 훨씬 크게 번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명치 아래를 박박 긁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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