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언제….”
끝이 삐죽 엇나가는 목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세화는 민망함에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언제… 오셨어요?”
얼굴에 달라붙는 눈길이 집요했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피할 수도 없게. 눈 돌릴 곳을 찾아 헤매던 세화는 결국 기태정의 목 언저리에 애매한 시선을 떨구었다.
“조금 전에.”
그리고 그 방향으로 고개를 고정하고 나서야 썩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각도에선 기태정이 입을 열 때마다 느리게 일렁이는 목울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신체 기관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인데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고 어쩐지 불손한 상상을 하게 된다.
“내일 아침 일찍 나 중위 올 거야. 전에 말한 군의관.”
관사에 도착할 때쯤 최 원사도 일러준 내용이었다. 일단 기본 검사부터 받고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면 천천히 고민해보기로 했다고. 병원이 아니라 관사에서 진행한다기에 첫날 박 소위가 피를 뽑았던 것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최 원사 말로는 그건 약식이었고 이번 검사는 장비부터 다를 거라고 했다.
“뭐, 흐앗…!”
뭘 알아보려고 장비까지 갖춘 거냐 물어보려고 했는데. 기태정이 자신의 가슴팍에 세화의 얼굴을 냅다 처박아버렸다. 난데없는 기습이라 미처 방비할 틈도 없었다. 돌덩이를 들이받은 것처럼 이마가 시큰시큰했다.
얼얼한 부위를 문지르는데 뉘고 있는 옆얼굴 아래로 단단한 것이 쑥 밀려왔다. 그의 팔이었다. 아까 뒷덜미를 움켜쥐었던 남자의 손은 이제 허리춤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둘려있었다. 당황한 세화는 빠르게 눈만 깜빡였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그저 가만히 그러고 있었다. 이건 꼭… 기태정의 품에 파고든 것 같은 모양새 아닌가.
용기 내 움직여보기로 한 건 등줄기를 타고 땀이 뚝뚝 흐를 때쯤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기태정은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칼이 쏟아져 드러난 이마와 턱의 선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려했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한량 같은 이 남자가 수용소 출신의 고아라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세화는 최 원사가 들려줬던 얘기를 마음속으로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만약 기억이 종이책이었다면 페이지 끝에 손자국이 남았을 만큼, 오랫동안.
그렇게 기태정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던 세화는, 이내 무거운 숨을 뒤채며 꿈지럭꿈지럭 움직였다. 덥고 불편해서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저 너무 더워서… 겉옷만 좀 벗을게요.”
혹시나 해서 말도 걸어봤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이다. 세화는 조심조심 걸치고 있던 아우터를 벗었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몸이 들썩이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기태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세화는 허물처럼 벗어둔 옷 무덤에서 쏙 빠져나와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낑낑대며 손을 떨군 겉옷을 멀찍이 밀어내고 나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5성은 완연한 봄이었다. 아직도 쌀쌀한 4환에서 걸치고 온 옷을 껴입고 있기엔 지나치게 따뜻한 날씨였다.
“다 벗겨줘?”
등 뒤에서 울린 낮은 목소리에 꿈질대던 세화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잠든 게 아니었나?
“아뇨, 좀 더워서… 이거 멀리 치워두려고….”
“그러니까.”
커다란 손이 불쑥 상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더우면, 벗어야지.”
“아, 아니에요. 이제 안 더워요. 정말로 괜찮아요.”
체온은 이토록 뜨거운데 피부 위를 짚는 감각은 서늘하기만 하다. 아랫배부터 명치 아래까지 살살 쓸어올리는 손길에 순식간에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구나 싶었다.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았다가 겨우 숨을 내쉬는 통에 호흡이 불안정했다. 세화는 그저, 있는 대로 어깨를 옹송그리고서 이어질 행위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체감상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남자의 손은 그대로 배 위에서 멈춰있었다. 세화의 마른 뱃가죽을 주무르며 희롱하지도, 다른 행위를 암시하듯 느른하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대신 숙이고 있는 뒤통수에, 등 뒤로 무언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어떤 상황인진 잘 모르겠지만 동그랗게 말고 있는 제 몸을, 기태정이 빼곡히 감싸 안고 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정수리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내쉬는 숨에 뒤섞여 분명하게 들리진 않았는데, 그만 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도 제법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세화는 잔뜩 경직됐던 근육에 힘을 풀었다.
처음으로 기태정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잠자리에서 못된 말을 듣지 않은 것도, 그의 앞에서 벌거벗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이 누워있는데도 섹스 없이 지나가는 밤도… 전부 처음이었다. 세화는 흘깃 눈만 굴려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기태정의 팔을 바라보았다.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세화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길게 뻗은 그의 팔을 시선으로 덧그리는 것뿐이었다. 맞대고 있는 살결 틈으로 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기태정에겐 괜찮아졌다고 했지만 사실, 아직도 더웠다.
***
“어지럽진 않죠?”
채혈은 다 끝났다며 나 중위가 팔뚝에 밴드를 붙여줬다.
“간식이라도 먹고 있어요. 배고플 텐데.”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세화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바구니를 뒤적였다. 손에 잡힌 건 금괴처럼 묵직한 커다란 초콜릿이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검사 결과는 바로 확인이 어려워요.”
“어떤 건데요?”
“유전자 감정 비슷한 건데, 이 결과를 바탕으로 이세화 씨의 부모님을 추적해볼 생각이에요.”
최 원사의 말대로였다. 나대포 중위는 본인을 나소연이라고 소개했고, 세화는 모르는 척 그러냐고 대꾸하고 말았다. 나 중위는 비교적 밝은 목소리로 세화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는데, 그렇다고 마냥 무르고 상냥한 태도는 아니었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베푸는 친절함 딱 그 정도 수준이었고, 세화는 오히려 이렇게 선이 확실한 그녀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다.
“잠깐 쉬고 있어요. 호출 넣었으니 준장님도 곧 오실 거예요.”
나 중위가 장비를 만지는 동안 세화는 초콜릿을 문 채로 창밖을 구경했다. 기태정의 관사는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뉴스에서 본 군인들의 관사는 아파트 한 호실 정도였는데. 장교쯤 되면 독채를 받나 보다.
집은… 글쎄. 하얗고 검었다. 그 외의 다른 감상이 떠오르질 않았다. 좋은 자재들로 지어졌고, 비싼 가구들로 가득 채웠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전부였다. 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선 하우스의 가라 사무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당장 정원만 봐도 그랬다. 제법 너른 앞마당엔 잔디가 쫙 깔려있었다. 물을 머금은 풀이 일정한 높이로 다듬어진 걸로 봐선 관리인이 있는 건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꽃도, 나무도, 돌도 없이 그저 휑하기만 했다.
텅 빈 잔디밭 끝에 솟아나듯 놓인 대문은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탱크로 밀어도 부서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문 양쪽으로, 그만큼이나 살벌한 생김의 담벼락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담장 위로는 촘촘한 간격으로 불빛이 번쩍였는데, 뭔진 몰라도 무시무시한 물건일 게 분명했다. 전기 충격기 아니면 감시 장치겠지. 게다가 발광하는 빨간 구체 양옆엔 손가락만 한 원뿔형 작대기가 삐죽 솟아있었다. 느릿느릿 회전하는 그것은 수상한 물체를 감지하면 당장이라도 뭔가 발포할 것만 같았다. 아무 잘못 없는 사람도 괜히 주눅 들게 하는 살풍경한 풍경이었다.
“아직 멀었어?”
습격처럼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난데없이 기태정이 들이닥쳤다. 세화는 초콜릿이 목에 걸리는 바람에 캑캑 잔기침했다. 깜짝 놀랐다. 집이 주인과 아주 똑 닮았다고 속으로 흉을 보던 중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지금 딱 들어왔는지.
“일반 검사 결과는 곧 나올 겁니다.”
그는 예전에 고깃집을 갔을 때처럼 편안한 차림이었다. 빗어넘기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운동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다.
“흠, 그럼… 이세화 씨?”
나 중위의 부름에 세화 또한 기태정 맞은편에 쭈뼛쭈뼛 착석했다. 문득 남자의 시선이 제 손에 들린 초콜릿으로 향했다. 세화는 괜히 민망해져 잽싸게 눈을 내리깔았다. 시야에 걸리는 건 그의 삐뚜름한 입매뿐이다. 웃는 걸까. 아니, 비웃는 건가?
세화는 저도 모르게 치미는 한숨을 삼켰다. 기태정의 턱과 목을 보고 있자니 이상했던 어젯밤이 떠오른 탓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이미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흐트러진 시트가 아니었다면 꿈이라고 여겼을 거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기태정도 기태정인데, 그의 품 안에서 쿨쿨 퍼질러 잔 저의 무쇠 같은 신경줄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잔뜩 긴장해서 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잠들었던 걸까.
더 이상한 것은 저를 보고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기태정이었다. 마주치면 빈정댈 거라고 생각했다.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길래 그렇게 얼어있었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야해 빠졌다, 덜덜 떨어놓고선 잘만 자더라…. 당장 떠오르는 시빗거리만 해도 이렇게나 많은데, 저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 같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니까. 그냥 좀… 이상했다. 기태정이, 한 침대에 눕는 것도 자신의 당연한 권리이자 일상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
괜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섹스와는 확실히 다르지 않나. 가끔 마주 보고 밥 먹는 것과도 전혀 다른 얘기다. 이건, 오히려 이런 건….
“우선 검사 결과와 관계없이 이세화 씨의 체질은, 기태정 준장님의 추측이 맞는 것으로 보여요.”
“아… 네.”
적절한 타이밍에 운을 떼준 나 중위 덕에 허튼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정작 기태정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세화는 어색하다 못해 간질간질한 기분까지 들었다.
“예전의 화학 실험에서 이세화 씨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 중위가 기태정에게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피실험자의 기록은 대부분 소실된 상태였지만, 상황을 추측해볼 수 있는 구절을 발견했다면서.
“아마도 그 사람이 이세화 씨의 부모님 중 한 분이겠죠?”
기태정에게 비슷한 얘기를 이미 들어서인지 그렇게 놀랍진 않았다. 저를 만들고 낳은 존재가 진짜로 있기는 했구나. 딱 그 정도였다. 구체적인 신상이 밝혀진다면…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알 수 있다면 그제야 실감이 나려나?
“…나 중위, 이 문서 말인데.”
기태정은 두 사람의 대화엔 관심이 없는 듯 태블릿만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발견했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아냐, 일단 계속해. 이건 나중에 따로 얘기하지.”
“네. 제가 듣기론 이세화 씨가 꽤 오랜 시간 마약을 복용했다고 들었어요.”
“약을 했다기보다 그냥 맛만 본 정돈데….”
“그래도요. 누적된 양만 따지자면 적진 않을 거잖아요. 이세화 씨의 몸이 알아서 해로운 물질을 거르고 해독까지 하는 건 맞는데, 몸이 판단하는 기준은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이거든요. 그런 와중에 오랜 시간 마약에 노출되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더더욱 예측이 어려워졌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큰 문제 없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세화가 속으로 태평한 생각이나 하는 걸 다 꿰고 있다는 듯 나 중위가 잽싸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만약 이세화 씨가 감기에 걸려서 약을 먹었다고 쳐봐요. 빨리 나으려고 영양제도 몇 알 복용했다고 칩시다. 이때 이세화 씨의 몸은 약은 유해하니까 전부 거부하고, 영양제 일부만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것 정도는….”
“아이고. 예시를 감기로 들어서 실감이 잘 안 오는 것 같은데…. 그럼 맹장 수술을 예로 들어볼까요? 수술하려면 마취부터 해야겠죠? 그런데 이세화 씨의 몸이 마취약을 혹은 간단한 치료제를 해로운 것으로 판단하고 거부하면 그땐 어떡하려고요.”
그럼 그대로 맹장 터지는 거라고, 그 간단한 수술도 받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고 나 중위가 겁을 줬다.
“그럼… 그럴 땐 패치를 두르면 되지 않나요?”
“준장님께서 이세화 씨에게 사용한 패치는 군인, 그것도 전투에 임하는 군인에게만 지급되는 최고급 물품이에요. 시중에 있는 물건은 훨씬 부실합니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패치를 갖추고 있는 병원이 몇이나 될까 싶네요.”
나 중위는 농담하는 거 아니라며 엄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앞으론 일상의 모든 수를 계산하면서 행동해야 할 거예요. 이세화 씨의 몸속 필터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모르니까.”
농담이 아니라 앞으론 절대 아프면 안 된다고, 감기에도 걸리지 말라며 나 중위가 진심을 담아 당부했다. 이상한 건 주의를 주면서도 빤한 시선은 기태정에게 향해있다는 거였다. 세화가 아니라 그더러 명심하라는 듯이.
“이미 준장님께 체질 관련한 얘기 들었을 거 알아요. 그런데도 굳이 또 강조하는 이유는….”
나 중위가 검사 기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혹시 최근 들어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 없었어요? 잠이 쏟아진다거나, 이상하게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거나, 옷깃만 스쳐도 피부가 따가워서 견딜 수 없다거나, 유독 거북한 음식이 있다거나….”
생각에 잠긴 채 태블릿 화면을 툭툭 두드리던 기태정의 손짓이 뚝 멎었다.
“글쎄요… 피곤하긴 했지만….”
요즘 기분이 널을 뛰긴 했다. 확실히 잠도 늘었고…. 그렇지만 그건 몸이 아파서라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잘 모르겠어요. 이상한 증세는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나타난 기태정은 세화의 지축을 사납게 흔들어댔다. 지금까지의 일상이 모조리 뒤집혔으니 생각이 많아지는 게 당연하고, 갇혀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잠만 퍼질러 자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징후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남성의 경우 훨씬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이거든요.”
반응? 무슨 반응? 세화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남자가 더 예민하다고요?”
“네. 일단은… 5주에서 6주 사이인 것으로 보이네요. 다른 수치가 너무 불안정해서 자세한 건 초음파를 봐야 알겠지만….”
“초음파요?”
자꾸만 대화가 어긋나자 나 중위가 설명을 멈추고 세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가 5주예요? 저 어디 아파요?”
나 중위는 으음, 하고 길게 앓는 소리를 내다가 출력된 검사 용지를 세화에게 내밀었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듯이.
“이세화 씨, 임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