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59)화 (59/144)

#059

“하긴. 간도 크게 국제 협약에 위반하는 짓을 벌인 새끼한테 계급장 같은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증거도 없이 사람을 몰아가시는군요.”

“글쎄. 그건 재판에서 밝혀보자고. 고발장은 접수됐으니까.”

“그렇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습니까?”

군사 재판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없다. 여기엔 피의자와 판결권을 가진 배심원들만 있을 뿐이다. 군부의 원로와 장교들로 구성된 그들이 곧 판관이요, 법전이었다. 재수 없으니까 죽이자,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이 뭉텅 죽어 나갔다. 쟤네 집이 나한테 해준 게 좀 있으니 이번엔 넘어가자고 살살 꾀면 살려 줄 때도 있었다. 원형 경기장처럼 구성된 재판장 한가운데 장난감 하날 세워 두고,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조롱하는 것에 불과했다. 외부에 그 과정이 공개되는 것도, 보안을 빌미로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으니 보통 사람들이 막연히 기대하는 엄숙함이나 지엄함 같은 건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김석철처럼 파문이 커진 사건은 배심원들도 신중하게 굴긴 할 거다. 그렇지만 그 협의와 타결은 전부 재판장 밖에서 이루어진다. 원래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은 언제고 아랫사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상부의 허락을 구할 것도 없이, 기태정은 진작 김석철에게 고발장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태 잠자코 때를 기다렸건 김석철과 그의 집안, 거기에 얽힌 모두를 다 쓸어버리자고 배심원들을 설득할 구실이 부족해서였다.

“끽해 봐야 저는 감봉이나 정직 몇 개월로 끝날 겁니다.”

김석철은 벌벌 떨리는 손을 뒷짐으로 감춘 채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저에겐 기태정이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무기가 있다. 오랜 시간 굳건히 버텨온 집안과 핏줄로 맺어진 인맥.

“그렇지만 먼저 이를 드러낸 준장님은 저희 집안에서 그냥 두고 보진 않을 거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군요.”

“그러게. 안타까운 일이야. 제법 유서 깊은 가문이 멍청한 아들놈 때문에 풍비박산 나게 생겼으니.”

기태정은 김석철의 퉁퉁한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김석철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데다 이런저런 장치까지 달아놓긴 했으니 조금 묵직한 건 사실이지만, 성인 남성이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 중량도 못 견디는 새끼가 소위까지 달고 있다니. 그래, 김석철의 집안이 대단하긴 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동안 그 잘난 집안에 이를 갈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걸 기억했어야지. 너희들이 뭐 하나 미끄러지기만 기다리던 사람들 말이야.”

“그건…!”

“그리고 증거가 너무나도 완벽하잖아? 여기 있는 건 전부 타버렸대도….”

기태정이 흘끗 뒤를 살펴보다 다시 김석철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범죄자 나부랭이들이 빼돌린 물건은 변명조차 할 수 없을 텐데?”

“그건 단순한 마약에 불과합니다.”

“임신 가능한 체질로 변하게 하는 단순한 마약? 재미있는 소릴 하네, 김 소위.”

“제가 ‘추수’ 프로젝트를 지지한 건 사실이지만, 실제 결과물을 만들어내진 않았습니다.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 무고한 사람 몰아가지 마십쇼.”

“그러고 보니까 최근 갑자기 사라진 육군 병사들의 흔적도 여기에서 뚝 끊겼던데….”

기태정은 불타고 있는 창고를 흘끗 바라보았다.

“현대 군의 기술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불에 탔어도 흔적은 충분히 추적할 수 있어. 죽기 직전까지 그 사람이 뭘 먹고 마셨는지, 무슨 약을 마셨는지 전부 훑을 수 있다고.”

아, 김 소위는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본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가? 비웃는 어조에 울컥한 김석철이 참지 못하고 대들었다.

“지금 제가 그 병사들을 데려다가 무슨 짓이라도 했다고 우기시려는 겁니까? 이상한 약이라도 먹였다고?”

“과민 반응은 의심만 살 뿐이라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증거도 없이 그렇게 몰아가는데 차분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증거가 왜 없어, 가장 완벽한 증명을 하우스에 남겨뒀으면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기태정이 김석철의 어깨를 짚어 주었다. 대단히 힘을 주지도 않은 것 같은데, 손아귀가 살점을 찢고 뼈를 으깨는 것만 같았다.

“이세화가 임신 가능한 몸으로 변했다는 거, 모르고 있었나?”

너무도 평온한 목소리라 김석철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얼이 빠진 채 방금 들은 이야길 몇 번이고 되새김질해야 했다. 뭐라고?

“원래 그런 체질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던데.”

이세화가? 임신이 가능해졌어? 언제? 마지막 피검사가 언제였지? 그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는데…. 아, 잠깐만. 기태정은 이세화에 대해, 아니, 그 몸이 변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세화에겐 그 약의 효과를 말해 준 적 없었다. 놈이 아는 걸 전부 불었다곤 하더라도 이것까진 몰랐을 텐데….

“설마, 설마 둘이서 붙어먹은….”

…그런 거였다. 정말로 이세화와 자 봐서, 기태정은 그 뒷구멍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있는 거다. 제대로 약효가 돌았다면 임신이 가능한 여느 남성체처럼 뒤로 애액을 흘렸을 테니까.

“붙어먹다니, 듣기 거북한 말이군. 김 소위 협박에 내내 휘둘리다 자기도 모르는 새 체질까지 변한 불쌍한 사람한테 말이야.”

“흘레붙은 게 아니고서야 이세화가 애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된 걸 네놈이 어떻게 아느냐고!”

이성을 잃은 김석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실핏줄이 터진 눈이 벌겠다. 무도했다. 상관에게, 하물며 원스타 장교에게 감히 퍼부을 수 있는 언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기태정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시계의 버튼을 누를 뿐이었다. 작은 홀로그램이 판 위에 동동 띄워졌다. 그제야 이 모든 과정이 영상으로 남았다는 걸 깨닫게 된 김석철이 입을 딱 다물었다.

“여러 가지 계획이 있었지만, 김 소위가 그간 저지른 짓을 확실히 실토하게 하려면 그래도 한 번은 이세화와 대면시켜야 할 것 같았어. 그 꼴은 보기 싫었지만 제일 확실한 방법이긴 하니 어쩔 수 없군, 그렇게 생각했는데….”

상세한 계획까지 미주알고주알 터놓은 건 아니더라도, 이 홀로그램으로 인해 이세화의 변한 체질이 김석철이 몰래 만든 약과 상관이 있으며, 그걸 김석철이 모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증명할 수 있게 됐다.

“김 소위가 내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

기태정은 작게 혀를 찼다. 김석철의 아둔함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그 잘난 집안 어르신들 때문이다. 최소한 이런 행동은 조심하라는 것 정도는, 커버해줄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있다는 건 가르쳐놨어야지. 무슨 사고를 쳐도 어떻게든 권력의 그늘로 가릴 수 있다는 대를 이은 오만함이, 그 위세를 믿은 대가가 결국 저런 결과물을 낳은 거다.

“그러게 조금만 덜 좆같이 생기지 그랬어. 그럼 이세화가 나한테 넘어 올 일도 없었을 텐데.”

기태정은 씩 웃으며 놈의 얼굴 위로 나머지 장갑 한쪽도 벗어 던졌다. 명백한 고의였다. 저를 향한 김석철의 열등감이 어디에서 가장 크게 폭발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과연 완전히 이성을 잃은 김석철이 욕설 섞인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지만, 그 발악은 착륙을 시도하는 헬기 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질 않았다.

조명탄이 몇 개나 더 터지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창고를 둘러싸고 있던 담벼락과 철문이 크게 흔들렸다. 지축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태정의 수하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굳게 무장한 군인들은 창고의 불을 점화하러 달려갔고, 나머지는 김석철을 빙 둘러쌌다. 기태정은 지루한 낯으로 자신에게 날아온 불티를 무심히 튕겨냈다.

“끌고 가.”

김석철은 요란한 모양새로 질질 끌려갔다. 평소 훈련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았는지, 저 지랄을 떨어대는 데도 군인 한 사람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준장님.”

뒤늦게 헬기에서 내린 박 소위가 서둘러 기태정의 곁으로 달려왔다.

“왜 이렇게 늦어?”

“소방 헬기를 호출하는 도중 교신이 자꾸 끊겨서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파 방해야?”

“폭발로 인해 인근의 통신 상태가 일시적으로 마비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태정이 벗어 던지고 간 정복 모자를 건네주며, 박 소위는 무너지기 시작한 창고를 바라보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최근 들어 재만 남은 화재 현장을 어떻게든 수습하는 게 그의 막중한 임무가 되어버렸다. 대피소에 이어 이번엔 창고까지…. 김석철이 사고를 칠 거라 예상하긴 했다만 이렇게 무식한 방법일 줄이야. ‘추수’ 관련한 일이 아니더라도, 유해 물질을 고의로 전소시킨 사건까지 집안 어르신들이 무마해 줄 거라고 여긴 건가?

“이세화는.”

“예? 아, 예…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다만 조금 지쳤는지 식사도 거르고서 내내 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밥도 안 먹고 잠만 잔다고? 이세화가?”

“네. 차로 긴 시간 이동한데다, 놀라기도 했으니 피곤하긴 할 겁니다.”

성 안으로, 그것도 5성 안으로 발을 들인다는 건 성 밖의 주민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며 심지어 이세화는 5성은커녕 1성 시내를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지 않았냐며 힘주어 강조하자, 그제야 기태정이 얼굴에서 날카로운 기색을 걷어냈다. 저러니 최 원사가 뒤에서 이세화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거였다.

“…최 원사 말로는….”

이걸 진짜 말해줘도 되나? 최 원사가 준장님께서 꼭 아셔야 한다며 이세화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긴 했다. 물론 기태정이 이세화를 여러모로,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에선 제법 관대하게 다루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이세화는 김 소위 사건을 해결할 증인이자 증거물에 불과했다. 그런 이세화가 바깥 구경하느라 신난 이야기 좀 듣는다고 기태정의 기분이 좋아질까? 박 소위는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어쨌든 이세화가 관사로 이동할 때 어떤 상태였는지 보고하는 것 자체는 업무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겨져서, 최 원사에게 들은 얘기는 전부 털어놓기로 했다.

“성 안으로 진입하자 눈이 댕그래졌다고 합니다. 놀란 척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기색이었지만, 내내 창밖만 바라봤다고 했습니다.”

기태정은 대꾸는커녕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수하들이 무사히 김석철을 압송하는지, 창고에서 무엇 하나라도 건져낼 수 있을지 확인하느라 이세화의 얘기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박 소위는 괜한 짓을 했나 싶은 민망한 마음에 몇 번 헛기침했다.

“그게 다야?”

“…예?”

“이세화.”

“…아, 네. 여기가 어디라고 설명해주면 신기해하고… 높은 빌딩은 처음 봤는지 어떻게 건물 한가운데 구름이 걸려있을 수 있냐며 감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박 소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최 원사가 줄줄 늘어놓은 얘기는 보고서에 올리기 민망할 정도로 시시콜콜한 것들이라 전부 기억이 나진 않았다. 뭐라고 했더라?

“4성에 있는 유명한 베이커리 건물을 보고 웃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렇게 커다란 빵집은 처음 본다면서요.”

돌아가는 정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기태정은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래서. 또.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세화에 관한 얘기를 모조리 내놓으라며 박 소위를 궁지로 몰아갔다.

“처음으로 강줄기를 봤을 땐 크게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고 했습니다.”

박 소위는 매서운 눈매로 앞만 보고 있는 상관을 한 번, 얄미울 정도로 혀를 날름거리며 춤을 추는 불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아… 이거 어쩌면 정말로….

“수면 위로 건물 빛이 반사되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이내 손바닥을 창문에 댄 채 바싹 달라붙어서….”

***

“으….”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몸이 꿈쩍도 안 했다. 자세를 바꿔보려 발끝부터 힘을 줘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기태정의 관사는 5성의 중심부에 있었다. 차에 달린 번호판이 워낙 위력적이라 다른 차들이 전부 길을 내주었는데도, 도착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강을 따라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 마천루, 오직 디저트로 가득 차 있다던 거대한 건물, 5성의 검문소를 지나자마자 펼쳐지는 위압적인 풍경. 너무 놀라 입까지 떡 벌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몸집을 부풀린 피곤함이 놀라움과 감탄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도착했을 땐 촘촘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최 원사는 편히 구경해보라 권했지만, 집주인이 자리를 비운 와중에 멋대로 돌아다니긴 좀 꺼려졌다. 기태정 성격상 그런 행동을 관대하게 넘겨줄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많이 졸렸다. 생전 처음 보는, 상상도 못 한 좋은 집에 발을 들이니 두근두근하긴 했지만, 일단 좀 쉬고 싶었다.

그래서 뭘 둘러볼 틈도 없이, 최 원사가 안내해 준 방에서 내리 잠만 잤다. 아우터도 벗지 않은 채로 그대로 쓰러져, 취한 듯 혼곤한 눈을 감았다. 근 두 달 내내 한 거라곤 먹고 잔 것밖에 없었다. 가장 고된 일이 기태정과의 섹스였다. 안락함에 익숙해진 몸은 좋은 차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한 것만으로도 축 까라져 버렸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가위에 눌린다고 헛것이 보이고 하진 않았지만,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계속 괴롭긴 했다. 세화는 발끝을 몇 번 까딱였다. 이 정도는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없었다. 콱 막힌 숨을 크게 몰아쉬며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려봤다. 이 또한 수월했다. 그런데,

“…아.”

코앞에 기태정의 얼굴이 놓여있었다. 세화는 애를 쓴 보람도 없이 그대로 얼어버렸다. 별다른 노력 없이 잠이 싹 가셨다. 언제… 온 거지. 세화는 그제야 제가 땀을 흘린 이유를 깨달았다. 기태정의 단단한 팔이 넝쿨처럼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의 맨몸이 내뿜는 열기가 고스란히 세화를 투과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세화는 빠르게 눈만 깜빡였다. 침을 어떻게 삼켰더라. 눈을 깜빡이는 빈도가 보통 어느 정도였지? 왜 갑자기 시야에 코끝이 걸리는 걸까, 신경이 쓰이게…. 평소엔 의식하지 않던 일들이 움직임이 어색하고 거슬려 견딜 수 없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하던 일을 모두 잊은 몸이 어색하게 삐걱거렸다.

아니, 그런데 진짜로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지? 물론 여긴 기태정의 관사니까 어디에서 자든 집주인 마음이긴 했다. 그렇지만 섹스 이후에도 그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잠든 적이… 거의 없지 않았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끝에 가선 기절하듯 잠들거나, 실제로 정신을 잃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오죽하면 기태정이 몸을 씻겨줬다는 것도 여태 모르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지금은 질펀하게 뒹군 이후도 아니었다. 기태정이 게스트룸의 좁은 침대 위에서, 굳이 저에게 몸을 딱 붙이고서 잠을 청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숨 쉬는 것도 조심하던 세화는 퍼뜩 드는 생각이 있어 머뭇머뭇 이불을 들춰보았다. 옷이 척척하게 달라붙는 게, 혹시 땀을 흘려서가 아니라면…. 기태정은 상대가 자든 말든 이런저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래서 조심스럽게 아래를 살펴보았는데, 다행히도 옷가지는 멀쩡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체액이 풍기는 야한 냄새도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왜.”

별안간 지척에서 음성이 들려와, 세화는 몸을 크게 떨었다. 잠기운이 묻어난 기태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끝이 살짝 갈라진 음성은 두어 번 사정을 마쳤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나른함을 품고 있었다.

“세상모르고 자는 사람 몸에….”

감겼던 남자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진다. 막 잠에서 깬 사람답지 않게 또렷한 눈매였다. 세화는 주술에 걸린 듯 꼼짝도 못 하고서 목전에서 쏟아지는 깊은 시선을 전부 받아내야 했다. 그것은… 그의 성기를 뒤로 물고 삼킬 때만큼이나 버겁고 또 부끄러운 일이었다.

“좆이라도 들이댔을까 봐?”

놀리듯 세화의 몸을 바싹 당겨 안는 기태정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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