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58)화 (58/144)

#058

“가서 기름이나 더 부어!”

잘생긴 손님이 어쩌고 했던 그 메시지도 분명 기태정과 시시덕거리며 함께 썼을 거다. 빈정거리는 모양새는 기태정의 평소 말투와 똑 닮아있었으니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게 딱해서 팔자 좀 고쳐주려고 했더니…. 얼굴 좀 예쁜 거 빼곤 볼 것도 없는 새끼가 장교 둘이 접근 좀 했다고 주제도 모르고서 눈이 돌아간 게 분명했다. 이래서 사람을 볼 때 집안과 혈통을 따지는 거다.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놈과 붙어먹는 꼴이 아주….

“천박한 새끼.”

그런 싸구려를 잠시나마 첩으로 끼고 살 생각을 했던 제가 미친놈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태정과 아주 잘 어울렸다. 둘 다 사람 구실 못하는 하자품이니까. 그래, 끼리끼리 잘도 만났네.

“소위님, 오선란 대장님께 무전이 왔습니다.”

“…일단 모르는 척해. 사후 보고할 테니까.”

“이미 상황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미리 말씀을 드리는 쪽이….”

“미쳤냐? 여기서 미리 다 불어버리면 일 망쳤다고 자수하는 꼴밖에 더 돼?”

뻔히 다 들여다보여도 어쨌든 핑곗거리를 만들어 둬야 한다. 명분. 허울뿐인 그것이 생각보다 중요했다. 오랜 독재를 거치며 국가 원수를 떠받드는 권력의 축은 이제 제법 공평하게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저 새낄 죽이고 내가 다 먹고 싶어도, 무너진 균형이 결국 자신에게도 독으로 돌아올 걸 알아서 모두가 적당한 선에서 몸을 사리는 거였다. 그러니 무슨 일을 벌이려거든 얄팍하나마 근거를 확보해야 했다. 오로지 명분에 기대 계급장을 뺏고 달고,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 판국이니까.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창고가 전부 불탄 정도로 끝내야 한다. 이 정도 실수는 집안 어르신들이 수습해 주실 수 있을 거다.

대피소를 털었다던 범죄자 새끼들이 오늘 창고를 털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누가 봐도 함정이었다. 애초에 그 새끼들의 신병을 인도해 간 게 기태정인데, 어디 믿을 걸 믿어야지. 그렇지만 대피소가 털린 정황과 과정 자체는 흠잡을 곳이 없었기 때문에, 기태정이 고의로 낸 일이라는 걸 주장하려면 김석철 측에서 다른 증좌를 찾아내야 했다. 그게 어렵다면 남은 흔적마저 깨끗이 치워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석철은 다 알면서도 2환의 창고로 걸음 할 수밖에 없었다. 기태정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할 범죄자 새끼들도, 창고에 쌓인 약들과 실험체도 전부 처리해야 하니까.

솔직히 기태정은 무섭지 않았다. 제까짓 게 준장을 달고 있다고 한들 밀어줄 집안도 없고, 데리고 있는 놈들이라곤 같이 수용소에서 뒹굴었던 찌꺼기들뿐이다. 쓰레기도 못 되는, 한낱 찌꺼기들.

다만 기태정이 지금 무엇을 더 쥐고 있는지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과… 그 돌아 버린 새끼라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이 프로젝트를 폭로할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 김석철을 불안하게 했다. 뭐 하나라도 뜯어먹겠다고 각국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가장 무거운 국제 협약을 어긴 정황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면… 그땐 김석철이 나서서 전부 책임지겠다고 빌어도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다. 모름지기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청렴함이 아니라 애국충정의 마음이건만, 기태정은 그런 걸 단 한 톨도 기대할 수 없는 놈이었다.

그러니, 창고를 전소시켜야 한다. 위험하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어쩌면 2환 전체를 봉쇄해야 할 수도 있는 큰일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김석철은 이 정도는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국내 여론을 주무르는 거야 일도 아니고, 투자자들에게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건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어차피 그들도 대대로 군부를 지탱해 왔던 집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거다. 무엇보다 모르는 척 ‘추수’ 프로젝트에 판돈을 건 내부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기태정이 홀로 적국을 통째로 궤멸시키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지금 군부 요직에 있는 모든 인사들을 몰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김석철은 창고에 불을 지른 이후, 모든 일은 하우스의 손 사장과 이세화에게 떠넘길 작정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놈들에게 접근한 거였다. 이세화가 좀 예쁘장해서 나중엔 마음을 달리 먹었던 건데… 그런 배은망덕한 새끼는 총살을 당해도 모자라다. 그러니 저는 도박이나 하고 마약이나 빨러 성 밖에 나갔던 거지, 이런 위험한 약은 만든 적 없는 거다. 임신 가능한 남성체로 변하는 약 같은 게 세상에 어디 있냐고, 그게 마약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대피소의 테러범이 기태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 못 했던 것처럼, 기태정 또한 이 약에 대해 대뜸 트집을 잡긴 어려울 거다. 남은 약과 실험체도 이 자리에서 전부 사라지게 될 텐데, 이 약이 국제 협약을 위반한 중차대한 사안이라는 걸 뭘 어떻게 증명하겠다고.

“소, 소위님!”

내부에 고루고루 기름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제법 소요됐다. 창고 입구에 축 늘어진 시체의 옷가지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을 보고 이제야 한시름 돌리려는데, 옆에서 어리바리하게 굴던 졸개 놈이 저 먼 곳을 손가락질하며 턱을 덜덜 떨었다.

“아, 뭔데?”

짜증 섞인 얼굴로 부하의 시선을 따라가던 김석철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황혼을 등지고서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은… 전투형 헬리콥터였다. 한 대를 선두로 열을 맞춰 두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땅으로 바로 착륙할 예정인지 조명탄을 쉼 없이 터트려 대면서. 손톱만 하던 헬기는 순식간에 주먹만 하게, 얼굴만 하게 크기를 불려 나갔다. 인위적인 돌풍이 스산하게 창고 터를 감돌았다. 문짝에 새겨진 것은 공군의 상징이었고, 가장 선두에 선 헬기에는 거기에 별 하나가 추가로 그려져 있었다. 저거 누구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기태정이다.

주먹에 힘을 꽉 쥔 채 하늘만 노려보던 김 소위는 기름통을 들고 있던 졸병들을 마구잡이로 밀어댔다. 그 악명 높은 준장의 등장에 정신을 놓고 있던 놈들은 어어, 하며 김석철이 떠미는 대로 흔들렸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놈들을 창고 안으로 처박듯 내동댕이쳤다. 뚜껑이 열린 기름통에서 누런 액체가 사방으로 튀고, 허우적거리다 불이 붙은 시체 위로 넘어진 어떤 놈이 꽥꽥 비명을 질러댔다. 자작자작 옅게 타오르던 불꽃은 사람 하나를 더 잡아먹고 나서야 훅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석철은 재빨리 창고 밖으로 달려 나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놈의 바이크를 탈취했다. 속도를 최고치로 올리며 내달렸다. 창고 안이 열기로 들썩이는 게 노면으로도 느껴졌다. 뒤따르던 놈들이 애타게 김 소위를 불러댔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곧 폭발이 있어날 테니 거리를 벌리는 것이 최우선이다. 여기서 무사히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은, 단연 소위인 저였다.

바퀴 아래로 느껴지는 진동이 점점 거세지는가 싶더니, 이내 벼락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는 분명 무형이건만 균열이 이는 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폭발음이었다. 뒤에서부터 훅 밀려오는 열기에 바이크가 크게 미끄러졌다. 김 소위는 빠르게 차체 뒤에 숨은 채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끓는 기름과 약이 만나 폭발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새카만 연기가 너울너울 춤을 췄다. 마치 창고 위로만 검은 장막이 둘린 것 같았다. 헬기도 시야 확보가 어려운지 더는 가까이 다가오질 못하고 제 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상황을 관망하던 김 소위는 이내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뭐 어쩔 건데.”

열기를 견디다 못한 창고의 외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안에서 쓸만한 건 건질 수 없을 거다. 김석철은 검댕이 묻은 손바닥을 탁탁 털며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오래간만에 날렵하게 움직였더니 허리며 무릎이 시큰시큰했다. 이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놈들에게 빠릿빠릿하게 화재 진압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지시하면 끝이었다.

뚜둑 소리가 나는 허리를 펴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정수리 위로 선득한 바람이 맹렬히 불어왔다. 김석철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가장 선두에 있던 헬기가 좀 더 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렇게 위로, 좀 더 위로 솟구치던 기체는 돌연 휙 물러섰다. 꼭 도움닫기를 딛기 전 몸을 물리기라도 하듯이. 아예 경로를 우회하는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뭐야?”

그런데 이상 행동을 보인, 아마 기태정이 타고 있을 그 헬기에서 뭔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거센 바람을 타고 하느작거리는 것은 아마도 로프 같았다. 김 소위는 어안이 벙벙해져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설마 저걸 타고 내려올 생각인 건가? 제일 긴 로프를 가지고 왔대도 끝나는 지점에서 지면까지의 높이가 3m는 족히 넘을 거다. 기태정이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한들 놈도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다른 장비도 없이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다치는 게 당연하다. 아니, 그 전에 로프를 타고 무사히 내려오는 것부터가 관건이었다. 이건 레펠 하강 훈련 같은 게 아니었다.

“저 미친, 미친 새끼…!”

무전기를 든 채 밖에 지시를 내리려던 김석철의 입이 경악으로 떡 벌어졌다. 얇은 줄에 매달린 인영이, 그야말로 거침없이 추하했다. 문자 그대로 물처럼 빠르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헬기가 뒤로 물러섰던 건 바람의 방향을 고려하기 위함이었던 건지, 기우뚱 기운 줄은 어느새 정확히 김석철의 머리 꼭대기 위를 조준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 낙하산 같은 걸 착용한 것 같지도 않은데, 기태정은 허공에 계단이라도 놓인 것처럼 거침없이 지상을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로프 끝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남자는 한치의 미련도 없다는 듯 손을 탁 놔버렸다. 낙하하는 몸은 물살을 가르듯 검은 연기 속을 우아하게 유영했다. 그게 전부였다. 무사히 착지하다 못해, 너무도 아무렇지 않아 보여 김석철은 눈만 끔벅였다. 태연하게 중력을 거스른 기태정이 기다란 몸을 굽이굽이 일으켰다. 먹잇감을 노리느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시커먼 범이 도약이라도 준비하는 것 같은 꿈틀거림이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 위로 검고 붉은 화마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괴, 괴물 같은 새끼….”

저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김석철은 저도 모르게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기태정은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져 버린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다치긴커녕 빗어넘긴 머리카락이 몇 올 흐트러진 게 전부였다. 그렇게 김석철의 코앞까지 다가온 기태정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억…!”

잠시 그 추레한 꼴을 들여다보던 기태정이 제법 세게 김석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놈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짚은 손이 기괴한 모양으로 꿈틀대는 것을 보니 넘어지면서 손목까지 삐끗한 모양이었다.

“으, 끄으, 으….”

“상관에게 인사 올리는 법까지 직접 지도해야 하나, 김 소위?”

그 나이를 처먹고도 계급장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면 어떡하냐고, 기태정이 김석철을 비웃었다. 조각상 같은 남자는 삐딱하게 입술을 올린 채였다. 아름다운 그의 얼굴은 싱그럽다 못해 새파랗기까지 했다. 굳이 이런 피조물을 빚어 범인들 틈바구니에 밀어 넣은 이유가 무엇인지 신에게 따지고 싶어질 정도로 불공평한 완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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