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57)화 (57/144)
  • #057

    “아… 네, 건물이… 엄청 화려하네요.”

    어렵사리 대꾸할 말을 찾아내 아무렇게나 읊자, 최 원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까딱이는 눈썹에서 흐뭇함이 배어났다.

    “장관이 찾아와도 본인 관사 안으로는 절대 안 들이시는 분입니다. 하물며 민간인의 방문은… 지금껏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즉 직속 부관 몇몇을 제외하곤 관사에 방문하는 사람은 세화가 처음이라는 거였다. 놀라운 이야긴 아니었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기태정? 최 원사 말마따나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방문자를 전부 쏴 죽였다는 쪽이 차라리 신빙성이 있었다.

    이후로도 최 원사는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건 좋은데, 은근슬쩍 기태정에 관한 이야기를 내비쳐서 문제였다. 기태정이 어느 정도로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지, 이전 상대에게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뭐 그런 것들. 무슨 의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얘길 자꾸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세화는 최 원사가 좀 불편했다. 부군이니 뭐니, 이상한 말이나 가르쳐줘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고.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십쇼, 침대처럼 좌석 눕혀드릴 수 있습니다.”

    최 원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차로 이동하는 거니 아무래도 시간은 꽤 걸릴 것 같습니다.”

    그의 시계는 기태정이 착용하는 것과 디자인은 비슷했지만, 화려함은 덜했다. 판도 조금 더 작아 보였다. 계급이 다르니 당연한 건가? 시계를 보고 있자니, 그걸 이용해 사전을 화면에 띄웠던 며칠 전이 절로 떠올랐다. 세화는 괜히 뜨거워지는 귓불을 꾹꾹 누르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저희가 준장님보단 일찍 도착하지 싶습니다. 오늘 김 소위 고발장이 넘어가는 날이니까요.”

    멀거니 차창 밖을 내다보던 세화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고발장이라고?

    “고발장이요? 그게 오늘이에요?”

    “네. 2환에 있는 창고에 김석철 소위가 만든 약들이 쌓여있지 않습니까. 남은 물품 전부 수거하시고, 그길로 바로 고발장 접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2환에 있는 창고…. 어디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몇 번 가본 적도 있으니까.

    “그럼 대피소에서 훔쳐 온 약들도 지금 공개되겠네요. 고발장 접수하면서.”

    “네. 준장님께 들으셨습니까?”

    “…아뇨.”

    고발장이라니. 그런 얘긴 들어본 적 없었다. 물론 기태정이 저에게 앞으로의 계획이나 속내 같은 걸 말해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세화는 김 소위의 약물 제조를 도운 공범이었다. 굳이 세화의 능력이 필요한 상황도 아닌데 이러저러하게 일이 진행될 거라고 설명해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러니까 아무 언질도 없었던 게 당연한 거라고, 이성은 그렇게 말하는데… 마음이 멋대로 꿈틀거렸다.

    기태정은 필요하다면 자신의 체질부터 부모님에 관한 사연까지 전부 휘두르겠다고 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받게 할 수도 있고, 재판 도중 세화의 개인사를 말하게 될 수도 있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저도 이제 단순한 공범이라곤 할 수 없지 않나?

    뭐 대단한 비밀을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하우스 잡역들 다 죽여놓곤 무슨 이유였는지, 아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말도 안 해주고, 갑자기 숙소에서 짐 다 빼라고 명령하고, 이제 관사로 가서 며칠 있으라고 통보만 할 게 아니라. 자지에 패치를 둘러주다 서로 빨아주며 엉킬 때, 오늘이 김 소위 고발하는 날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밤에 또 기분 상해서 오시겠네요.”

    최 원사는 세화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잠시 눈을 굴리다, 돌연 열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어, 예! 생각해보니 그러시겠죠. 누구 고발하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심지어 상대는 김 소위고.”

    기대 어린 최 원사의 시선에 쓴웃음이 번졌다. 역시 몸 바쳐서 상관을 달래주길 원하는 거다. 제가 몇 번 박혀주기만 하면 모두가 평화로워지니까.

    “그나마 사람 죽이고 오는 건 아니라니 다행이긴 하네요.”

    “예?”

    “준장님이 하우스 사람들 다 죽이고서 기분 가라앉았던 거잖아요. 그래서 최 원사님이 부군이라는 말 알려주신 거고.”

    그제야 세화의 말에 박힌 가시를 읽은 최 원사는 당황해서 입만 벙싯거렸다. 이세화의 입장에선 몸으로 기태정을 달래보라고 떠민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몸만 섞는 사이였다면 부군 같은 애교는 알려주지도 않았을 거다. 최 원사는 이세화가 기태정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었노라 굳게 믿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부군이나 남편 같은 소릴 했다면 술이 아니라 피로 소파를 적셨을 거다. 최 원사는 기태정이 이세화에겐 그러지 않을 거란 본능 같은 확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다음 날 마주친 상관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앞으론 이세화가 주기적으로 외출할 수도 있으니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두라는 지시까지 내렸을 정도로.

    “물론 제 참견은 철저히 준장님의 편에서 행한 일이긴 하니, 이세화 씨에겐 이기적으로 느껴졌겠죠.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베갯머리 송사 같은 걸 바라고서 이세화 씨를 떠민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상관이 사람의 온기로 위안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세화의 기분을 배려하지 못했던 건 맞다. 그렇지만 최 원사는 기태정을 달래주는 방식이 꼭 섹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능성을 믿고서 이세화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본 거였다.

    “무엇보다 그날은….”

    준장님이 잡역들을 전부 쏴죽인 건 그 사람들이 당신을 가당치 않은 말로 모욕했기 때문이지 않냐고 덧붙이려던 최 원사는,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있어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기태정이 이세화에게 그 일의 공치사를 늘어놓았을 거라고 여겼다. 너 괴롭히던 놈들 다 죽이느라 힘 좀 썼다면서. 그런데 정작 이세화는 잡역들을 몰살한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준장님은 이세화가 사실을 듣고 마음이 다치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저의 대외적인 이름은 최석영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최 원사는 깊이 묻어뒀던 사연 하나를 불쑥 꺼내 들었다. 기태정이 묻고 넘어간 몰살의 경위를 들춰내고 싶진 않았다. 그건 정말 자신의 권한 밖이었다. 그렇지만 주제넘게 나서서 이세화더러 애교나 부려보라고 종용했고, 그로 인해 이세화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 이 부분만큼은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었다.

    “주민등록부상의 실제 이름은 최포탄이고요.”

    새치름하던 이세화의 눈매가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당신이 아는 그 포탄을 가리키는 게 맞다며 최 원사가 멋쩍게 웃었다.

    “박 소위님의 대외적인 이름은 박성학이지만, 서류상 실제 이름은 박연중입니다. 내일 만날 나 중위님은 아마 본인을 나소연이라고 소개하시겠지만 진짜 이름은 나대포고요. 저희끼리야 최포탄, 나대포, 박연중… 이렇게 편하게 부르는데, 밖에서 누군가에게 소개할 땐 꼭 대외적인 이름을 불러주고 있습니다.”

    아…. 세화는 표정을 흩트리지 않으려 애썼다. 저 또한 누구보다 남들의 부름에, 호칭에 민감했다. 그런 제가 남의 이름을 듣고 놀라거나 호기심을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최 원사는 놀라는 게 당연하다는 말을 덧붙여 세화를 짧게 달래주곤, 설명을 이어갔다.

    “수용소에서 저희는 사람이 아니라 살육 병기였기 때문에, 이름 또한 코드명처럼 대충 지어졌습니다. 저는 ‘바’ 그룹에 속해있어서 바씨 성을 받았어요. 네, 원래 이름은 바포탄이었습니다.”

    가나다라마바사, 혹은 일이삼사오육칠, 그런 식으로 그룹을 나누어 성으로 붙이고, 눈에 띄는 아무 사물의 이름을 가져다 댄다. 기태정과 박 소위의 경우는 태정태세문단세, 그렇게 분류되는 작전명 중 일부를 따온 거였고 최 원사와 나 중위는 그날의 훈련 교관이 당장 생각나는 무기 명을 이름으로 받은 거였다.

    “그나마 준장님 밑에서 군공 열심히 쌓은 덕에 성을 바꿀 기회까진 얻었는데, 이름은 아직입니다. 저희는 마음대로 개명할 수 없거든요.”

    “왜요? 거기서 나와서, 지금 이렇게 군인이 되신 거면… 그때 일은….”

    “네, 수용소에서의 일은 다 끝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부 임관까지 마쳤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같은 수용소 출신에겐 몇 가지 제동 장치가 걸려있습니다.”

    처음 받은 이름은 함부로 손댈 수 없다. 수용소 출신이라는 멍에를 쉬이 지우지 않기 위함이다. 당연히 제대도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다. 성과 이름을 바꾸고 싶으면, 제대를 앞당기고 싶으면 모두가 인정하는 공로를 세워야 한다. 죽지 않는 게 용할 정도인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야 겨우 신청서를 내밀 수 있었다.

    “대신 능력만 있다면 사관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장교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긴 합니다. 기태정 준장님처럼.”

    그래도 자기는 한참 멀었다며 최 원사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가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애쓰려는 것 같았다. 원체 표정이 없는 그가 지금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이야기를 늘어놓는 중인지 여실히 느껴져서, 세화도 삐딱하게 굴었던 태도를 그만 버리기로 했다.

    “연줄로 똘똘 뭉친 군부 안에서 수용소 출신의 살육 병기가, 오직 능력만으로 별 하나를 달았다는 건… 그러기 위해서 기태정 준장님이 해낸 모든 일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준장님은 수용소에서부터….”

    “네, 어떤 상황인지 대충 이해했어요. 더 안 들어도 괜찮아요.”

    세화는 최 원사의 말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듣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요, 다른 사람 입으로 들으면 안 될 사연 같아서요.”

    “아… 예, 그건 그렇죠. 하여튼 제가 굳이 불편한 과거까지 들먹인 건 준장님의 성격이 좀, 음…, 하여튼 이렇게 되신 이유가 있긴 있다는 정도는 알려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세화 씨가 몸으로 준장님을 달래드리길 바랐던 것도 아닙니다. 저는 준장님이 이세화 씨의 얼굴만 봐도 충분히 기분이 나아지실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어찌 됐든 주제넘은 참견이었다고, 죄송했다며 최 원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세화는 뭐라고 대꾸할지 한참 망설이다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알겠다고 긍정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노력해보겠다거나, 이해한다는 답은 더더욱 우습고.

    “저도 최 원사님한테 괜히 화풀이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제 불찰입니다. 앞으론 괜히 나서지 않겠습니다.”

    이세화는 괜히 귓불만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사실 최 원사를 붙들고 묻고 싶었다. 그럼 기태정이 평소에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식사나 놀거리를 챙겨주면서 덧붙인 얘기 같은 건 없었는지. 한낱 부관이 제 얼굴만 봐도 그의 기분이 풀어질 거라고 확신할 정도로… 자신을 남들과 다르게 대하고 있는 건지. 그렇지만 이건 기태정의 입으로 직접 듣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얘기들이다.

    “…혹시 싫어하실까요?”

    평소 같았으면 꾹 삼키고 말았을 물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인지를 했을 정도로, 생각을 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와 버렸다.

    “예? 어떤 것을요?”

    “아, 그러니까… 이것저것 물어보면요.”

    “무엇을… 아, 혹시 준장님께요? 아이고, 절대 아닙니다. 안 싫어하실 겁니다.”

    최 원사가 요란하게 손을 내저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진심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열렬한 몸짓이었다.

    “만약 이 일로 이세화 씨한테 문제 생기면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대신 맞든, 죽든 이세화 씨가 다칠 일은 절대 없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궁금한 건 다 물어보세요.”

    세화는 대꾸 없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세게 만지작거린 탓인지 귓불이 뜨끈뜨끈해졌다.

    보이는 풍경은 전부 눈에 담아두라는 듯, 리무진은 적당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지기 직전의 하늘은 분홍색이었고, 생전 처음 보는 높다란 건물엔 구름이 뉘엿뉘엿 걸려있었다. 현실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

    “이 등신 새끼들아! 뭐 하고 있어! 불 안 붙여?”

    “그렇지만 소위님….”

    군인들 몇몇이 머뭇거리며 김석철을 돌아보았다. 창고의 규모가 큰 건 아니었지만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해 물질이었다. 단순한 의약품도 태워서 없애진 않는데, 창고에 불을 지르라니.

    “전소시켰다간 일이 정말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 멍청한 새끼야, 지금 여기서 제일 일 커지는 건 기태정이 나타나는 거라고!”

    김석철은 머뭇거리는 놈을 뻥 걷어차고, 화염방사기를 뺏어 들었다. 대피소가 털렸다는 얘길 들은 이후로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의 배후에 기태정이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고, 집안 어르신들과 투자자들은 매분 매초 김석철을 쪼아대는 중이었다.

    “씨발, 이세화 그 걸레 같은 새끼가….”

    예쁘다, 예쁘다 해줬더니 이게 고마운 줄도 모르고 기태정에게 홀라당 정보를 팔아넘긴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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