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56)화 (56/144)
  • #056

    세화는 한 시간째 주차장 안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하우스 인근엔 딱히 산책할 곳이 없어서였다. 듬성듬성 놓인 차 너머로 수상쩍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기태정이 붙여놓고 간 꼬리들이다. 아예 외부로 나갈 땐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데, 이렇게 하우스 안에 있을 땐 감시 중이라는 걸 숨기지 않는다. 음습한 고의였다. 덕분에 세화는 밖에서도 누군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반대로 하우스에 있을 땐 저런 식으로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주지시킨다.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기태정을 의식하게 된다.

    “…이게 뭐야.”

    애 같은 투정이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세화는 가만히 멈춰서서 아직 길이 들지 않은 새 신발을 빤히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짧은 외출을 허락받았다. 물론 좆에 패치를 두른 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처음 묶였을 때처럼 구속이 심하진 않았다는 거다. 그냥 자지 뿌리에 한 바퀴 빙 둘러 묶은 게 전부라, 아프지도 않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

    회음부에도 더는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기태정은 놀랍게도 아침마다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흔적이 남는 건 좆이 터질 것처럼 좋은데, 시퍼렇게 물이 드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전에도 기태정은 몇 번이나 왜 이렇게 샅의 색이 옅으냐고 추궁했고, 이후엔 으레 세화의 아래를 게걸스럽게 빨아댔다. 그래서 기태정의 취향이 그런가보다, 할 따름이었다. 본인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색이 망가져서 저렇게 질색하는 것 아니겠냐고.

    ‘물 좀 든 거야 시간 지나면 어련히 빠지겠지. 내가 지금 거슬리는 건 그게 아니야, 자기야.’

    그러나 기태정은 진중하게 고개를 저으며 세화의 오해를 부정했다. 잉크가 번져 얼룩덜룩해진 회음부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라고 했다.

    ‘이건 내 명령 밖의 일이잖아.’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손에 글씨를 써도 하루는 가던데….’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씹스러운 거라니까?’

    아무리 깨끗하게 닦아도 희미하게 남은 푸르딩딩한 자국은 그가 의도한 바도 아니고, 예상했던 상황도 아니라고 했다. 기태정은 자신의 통제 밖에서 일어난 일이 몹시 싫은 모양이었다. 그게 한낱 도장의 잉크 자국일지라도.

    ‘차라리 문신 같은 게 나을 수도 있겠어.’

    심지어 오늘 아침엔 패치를 묶어 주면서 저런 말까지 했다. 세화가 다리를 벌린 채로 얼어붙자, 농담이었다며 작게 웃고 넘어가긴 했지만… 마냥 허튼소리는 아닐 거다. 세화의 의지와 관계없이 본인이 원한다면 충분히 일을 치고도 남을 남자였다.

    세화는 무릎을 짚은 채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난… 뭘까. 그 남자에게 난 대체 무엇이기에.

    공식적으로 외출을 허락받은 첫날은 좋았다. 두 시간이 지나기 전에 돌아와야 해서 멀리 나가진 못했어도, 바깥바람을 쐬니 확실히 잠도 덜 왔다. 그렇지만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왔다. 특히 기태정에 대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넓고 단단한 가슴에 기대고 있을 때의 감각, 귓가에 가만가만 속삭이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자신의 발아래를 받쳐주던 남자의 발등. 혼자 있으면 끊임없이 그날의 일이 재생되고, 망막 속 검은 화면은 기태정과 만난 이후 지금까지를 모조리 되감는다.

    여느 때보다 진득하고 깊은 관계를 가졌던 그 날, 기태정은 저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줬다. 대피소에서 약을 빼돌렸을 때도 노고를 치하해준 적 없었는데, 그의 성욕을 풀어주고 나서야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심지어 그렇게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는 처음 들어보는 거였다.

    분명 좋은 일인데. 더는 모질게 굴지 않으니 오히려 안심해야 하는데… 수고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기태정에겐 야한 물을 쏘아 올리고, 커다란 좆을 끝까지 품은 게… 유일한 칭찬거리였나보다. 그가 보기에 제가 잘한 일이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대피소를 털러 갔을 때 쌍피 무늬도 발견했고, 약도 잘 옮겨 담고 그랬는데. 엉엉 울면서도 폭탄 껍데기는 끝까지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 모든 일은 단 한 번의 섹스만도 못한 거였다.

    쩍쩍 갈라진 가슴 속 실금으로 헛헛한 바람이 밀려왔다. 이제 기태정은 저를 발로 차지 않는다. 벙커에서 심하게 다룬 이후엔 나름대로 달래주겠다고 같이 외출도 했고, 손수 고기도 구워줬다. 순복하며 키스에 응했던 그 날 이후로 기태정은 이제 세화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일, 이를 테면 이름을 부르며 빈정거린다거나 남창이라고 놀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한낱 작전의 유인책을 대하는 태도라곤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몇 번 먹고 버릴 상대 취급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세화에게도 느껴졌다. 제가 기태정에게,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걸. 그렇지만… 그걸 과연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이게 진짜 좆집이 아니면 뭐야….”

    처맞고 구멍 소리나 듣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자위했는데, 곱씹을수록 아니었다. 포장하는 말만 달라졌을 뿐 취급은 더 나빠진 것 같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져서 콩콩 두드렸다. 수고했다는 말이, 그 낮고 고아한 목소리가 자꾸만 마음에 얹혀 울컥 눈가를 뜨겁게 달군다.

    기태정과 얽힌 이후로 매일이 눈물 바람이긴 했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심해진 것 같았다. 시시때때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서 저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간 이렇게 하릴없이 생각에 잠길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왜 이러냐, 진짜.”

    차라리 다시 외출을 금지해줬으면 좋겠는데. 사무실 안에만 있으면 또 트집을 잡을까 봐 때마다 꾸역꾸역 밖으로 나오고는 있지만… 이렇게 혼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평범하게 일하고 생활하는 걸 보고 있으면…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제 내기 같은 건 입에도 올리지 않고 기태정에게 안기는 걸 당연히 여기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만 같았다. 갇힌 채 물침대 위에서 잠이나 처자던 때가, 이 모든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핑계를 댈 수 있었던 때가 차라리 속은 편했지 싶다.

    “정신 좀 차리자, 정신 좀….”

    중얼거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빠르게 체념하고 살 궁리부터 하는 게 자신의 장점 중 하나였는데, 이젠 그것마저 잘 안 된다. 자꾸만 속 깊은 곳에 응어리가 맺힌다. 기태정 때문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외의 모든 것은 먹먹하기만 했다.

    세화는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는지 몰랐다. 정확히는 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는 중이었다. 죄 으깨진 덩어리에서 적확한 문장을 뽑아내게 되면. 모르고 싶었던 감정을 깨닫게 되면. 훅 무너져서 다신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아서….

    “…그만 좀 생각하자.”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세화는 자신의 볼을 몇 번 내리쳤다. 스스로를 조소하고 또 독려하며 축 처진 발걸음을 담금질했다.

    오늘은 숙소에서 중요한 물건을 전부 빼 왔다. 기태정은 자리를 비우면서 오후에 관사로 이동할 거라고 했다. 물론 거기선 며칠만 머무르고 돌아올 거긴 한데, 기태정은 이후로도 세화가 그 작은 방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라고 못 박았다.

    ‘나랑 있을 땐 어차피 사무실 밖으로 나갈 일 없을 거고, 일 다 끝난 다음엔 새 신분 얻어서 성 안에서 살 거 아닌가?’

    보안이라곤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이것저것 꿍쳐뒀다가 다 털리고서 질질 짜지 말고, 이참에 개인 물품은 전부 가져오라고 했다. 새 신분을 주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지만, 따르기 어려운 지시는 아니었다. 숙소에 숨겨둔 물건이라고 해봐야 약물 유통 계보나 현금 약간에 불과했으니.

    “어? 너 삼월이 아니냐?”

    주차장 입구에서 누군가 손을 휘휘 흔들며 아는 체를 해왔다. 장물아비 이모였다.

    “이야… 이거 인물 좋은 거 봐. 진작 이러고 다니지, 그동안은 왜 그렇게 거지꼴을 하고 다녔어?”

    “잘 지내셨어요?”

    시끄러운 속을 꾹 누르며 애써 살뜰하게 묻자, 장물아비가 부르르 떨며 말도 말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얼마 전에 여기 잡일 하던 놈들 다 죽은 거 알아? 화투장 청소하던 김 씨랑 최 씨도 갔다던데.”

    “네? 왜요?”

    “그걸 모르겠으니까 다들 환장하겠다는 거 아냐. 새로 온 이사란 놈이 아주 사람을 닭 잡듯이 잡는 것 같더라고.”

    청소부 김 씨와 최 씨라면… 하우스 안에서도 제법 잔뼈가 굵은 잡역이었다. 가끔 세화를 챙겨주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빚 늘리기 싫은 마음에 툭하면 굶는 걸 알아서, 먹을 게 생기면 꼭 나눠줬다. 나름대로 손님도 소개해줬고. 물론 크게 돈이 되진 않았다. 솔직히 손해였다. 그래도 거절하면 다음부턴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봐 내색하진 않았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친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만큼이라도 챙겨주는 사람이 여태 아무도 없었던 터라, 변덕에 불과한 베풂마저 기꺼울 따름이었다.

    원래 여기서 일하면 당장 다음 날에도 말없이 사람들이 사라지곤 했다. 죽음이 낯설고 슬픈 것은 아니었지만… 아저씨들을 죽인 사람이 기태정이라고 하니, 그건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다. 그 아저씨들이 절 챙겨줬던 걸 알고 있었으려나. 아마 그랬겠지…. 기태정은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으니까. 그 남자는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저의 것을 모조리 깨부술 작정인 듯했다.

    “그래서 어제까지 장사 제대로 못 했잖아, 사방에서 락스 냄새가 진동해서. 짭새 뜰 때도 그렇게 열심히 청소한 적 없는데 안에서 얼마나 피를 봤으면 그러겠어.”

    아직도 속이 역하다며 장물아비가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아….”

    설마… 그땐가? 저더러 수고했다고 말해줬던 날.

    그날 최 원사는 갑자기 저한테 말을 걸어와선 상관이 울적하다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기태정은 테이블 위에 술병을 늘어놓은 채 소파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사무실로 올라오면서도 평소보다 락스 향이 심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기태정은… 자기가 부리는 부하들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반병신으로 만들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일면식도 없던 하우스 잡역들 좀 죽였다고 기분이 가라앉았다고? 그건 말이 되지 않는데.

    “참, 너 만난 김에 이것 좀 봐줄 수 있냐?”

    생각에 잠긴 세화를 일깨우듯 장물아비가 알약 몇 개를 들이밀었다.

    “이거 케포랑 디나 섞은 신제품이라는데… 3원 놈들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걔네 안방 망하고 요즘 눈에 뵈는 게 없잖냐.”

    “아… 여기서는 사람들도 볼 수 있으니까 좀 그렇고. 일단 주세요. 저 심부름 갔다가 며칠 후에 오니까 그때 알려드릴게요.”

    어쩔 수 없었다. 패치를 두르고 있으니 당장 맛을 봐줄 수도 없고, 당분간은 기태정의 관사에 머무를 테니 만나기 어려울 거다. 장물아비는 껄끄러운 듯 볼을 긁적이다 세화의 손에 약을 쥐여줬다.

    “뭐, 네가 어디 가서 말 퍼트릴 놈은 아니니까.”

    “네. 일주일 후에 여기서 봬요. 이 시간쯤 나와 있을게요.”

    약을 받아 크로스백 앞주머니에 챙겨 넣던 세화는, 안에 깊숙이 박혀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돌아서려던 장물아비를 붙들었다.

    “이모. 혹시 이거 뭔지 아세요?”

    어차피 가져올 짐이라곤 돈과 문서 약간뿐이어서 오늘 숙소 정리할 때도 이 가방만 덜렁 들고 갔다. 벙커에서 사무실로 돌아온 이후론 옷이며 가방이며 도로 다 빼앗겨서 저 또한 잊고 있었는데, 그때 기태정이 무슨 배지 같은 걸 챙겨두라며 건네준 적이 있었다. 그조차도 용도를 모르는 것 같아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물건이었다.

    “이야… 오랜만에 보네, 이거. 엄청 옛날에 포트 이동할 때 쓰던 거야. 반군 신고자한테 포상으로 주겠다고 만들었는데, 5성 양반님들이 이럴 거면 구역 왜 나눈 거냐고 성내서 바로 사라졌지. 30년도 넘었을걸? 아니지, 거의 40년 됐나?”

    “아… 자유 이용권 같은 건가 봐요.”

    “어어. 나도 밀수꾼들이 가끔 찾아서 알았지, 요즘 사람들은 봐도 모를 거야. 이거 다 팔려고?”

    “아, 아뇨. 제 거 아니에요. 아는 사람이 물어봐달라고 해서요.”

    장물아비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팔 거면 꼭 나 찾아와. 다른 놈 주지 말고.”

    “그럴게요.”

    배지 묶음을 크로스백 안으로 밀어 넣는 것과 동시에 핸드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짧은 외출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

    “여기서부터 2성입니다.”

    최 원사가 창문 너머 건물을 가리키며 여기는 뭐고 저기는 뭐라며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세화는 얼떨떨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오후 3시 43분. 뭘 하기 애매한 시간에 최 원사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기태정은 일이 있어 저녁에나 바로 관사로 올 테니, 슬슬 출발하자면서. 건물 앞에 세워진 차는 난생처음 보는 종이었다. 바퀴 네 개로 굴러갈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차체가 기다랬고, 조금 독특한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

    힐끔대는 세화의 시선을 느꼈는지 ‘장교들만 탈 수 있는 리무진입니다.’하며 최 원사가 슬쩍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여기저기에 익숙한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번호판 정 가운데 놓인 새의 눈이 위협적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렇게 희한한 차에 몸을 싣고서 5성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한 3성 정도만 됐어도 긴장했을 텐데. 5성이라니. 심지어 타고 있는 차도 전혀 일반적이지 않아서 하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화도 이런 자신이 낯설 정도로 덤덤하기만 했다.

    “포트로 움직이는 편이 빠르고 편리하긴 합니다만, 5성으로 진입할 땐 사, 아니, 그… 이세화 씨에게 한 번 경치를 구경시켜주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준장님이요?”

    “예. 5성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시니까요.”

    그러면서 최 원사는 세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선이 올곧았다. 뭔가… 자신의 이야길 듣고 세화가 엄청난 반응을 보이길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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