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세화는 당황해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방금 제가 무슨 표정을 했는데요?”
그렇지만 최 원사는 본인 할 말은 이제 다 했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결국 세화가 얻은 정보라고는 지금 기태정의 기분이 별로라는 것과 자신의 무식함, 그리고 방금 제가 되게 웃기는 표정을 지은 것 같다는 정도였다.
부군? 세화는 중문을 열며 처음 듣는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보았다. 부군…. 어쩐지 각지고 중후한 울림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군대에서 쓰는 용어 같은 건가?
“준장님?”
안으로 고개만 내밀고 조심스럽게 기태정을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뒤틀린 주인의 심사를 반영하듯 사무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하필이면 맞은편 하우스 건물도 불을 켜기 전이라, 현관의 센서가 아니고선 한 줌의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와중이었다.
어정쩡하게 입구에 서 있던 세화는 조심조심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최 원사는 부정했지만 기태정은 자신을 화풀이용 샌드백으로 쓸 거다. 거칠게 섹스하고, 못된 말로 저를 울리면서 기분을 풀겠지.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결국 기태정의 흔적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하염없이 밖을 배회해 봤지만 결국 돌아올 곳은 여기뿐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남자의 품 안이, 아이러니하게도 사장이나 매조 같은 놈들에게서 세화를 가장 안전하게 지켜 주는 울타리였다.
“준장님….”
현관의 센서마저 꺼지니 이젠 완전한 암흑이었다. 산 채로 무덤 속에 갇히면 이런 기분일까. 시야가 차단되니 익숙한 사무실도 어쩐지 오싹하게 느껴졌다.
“준장님, 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먹먹한 목소리로 그를 찾자, 그제야 소파 옆의 촌스러운 조명이 툭 켜졌다. 간절한 부름에 응답이라도 해 주듯. 세화는 그 불빛을 지표 삼아 앞으로 더듬더듬 나아갔다. 번들거리는 조명을 향해 숨죽이며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타 죽을 걸 알면서도 전구 아래로 모여드는 부나방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테이블 위는 화려한 술병으로 빼곡했다. 꽁지꾼들이 담보로 받아줄 정도로 전부 비싼 것들 뿐이었다. 120억. 다시 생각해도 현실감이 없는 체크 카드의 잔액이 세화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다른 남자랑 뭘 그렇게 속닥대고 있어.”
저 밑에서 끌어오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였다.
“왔으면 재깍 들어와서 검사나 받을 것이지.”
소파의 등받이로 팔을 걸치며, 기태정이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화려해서 오히려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소파도 그가 저렇게 누워있으니 신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소품처럼 느껴졌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팽팽하게 일어선 근육을 따라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잘난 얼굴에 잠시 홀려 이제야 눈치챘는데 드러난 상반신은 헐벗은 채였다. 기겁해서 소파 너머를 흘끔 들여다보니 그래도 허리춤에 수건을 두르고 있기는 했다.
세화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기태정에게 뭐라고 말을 붙이면 좋을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슨 일이냐고,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냐고 물어봤을 텐데 그에겐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전에 선심 쓰듯 건네준 그의 과거의 파편을 줍고서 잔뜩 들떴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돌아왔던가. 제 주제에 감히 남자에게 연민을 느꼈다고 자근자근 짓밟힌 건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벗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길게 고민할 새도 없이 기태정의 명령이 떨어졌다. 손목에 걸고 있던 비닐봉지가 눈치도 없이 시끄럽게 뽀스락대는 바람에 꼴사납게 허둥지둥해버렸다. 그가 불투명한 비닐 속 아이스크림 포장을 들여다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세화는 우물쭈물 패딩을 벗었다.
“아니, 바지부터.”
탈피하듯 패딩을 툭 떨구고 상의를 마저 벗으려고 하자 기태정이 고개를 짧게 저었다. 시키는 대로 순순히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는데… 세화는 그제야 자신이 굉장히 낯뜨거운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나 나신에 가운만 걸치고 있었던 터라, 그의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는 건 처음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기태정의 하관만 겨우 보였지만,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진득하다는 건 충분히 느껴졌다. 차라리 평소처럼 놀리듯 느물느물하게 굴었다면,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 다 하면서 쉽게 벗어던졌을 텐데.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시선의 의미를 헤아리느라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아, 양말은 벗지 말고.”
양말은 왜…?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지만, 어쨌든 볼품없는 스트립쇼는 이걸로 끝이었다. 세화는 니트를 아래로 당겨 패치로 칭칭 묶인 성기를 조금이라도 가려 보려 애썼다.
그리고 잠시, 기태정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만약 온도에도 무게가 있다면 이 후덥지근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축축 늘어질 것 같았다. 세화는 땀이 어린 맨다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발끝으로 반대편 다리의 복사뼈를 문질렀다. 뺨이며 무릎 뒤며… 누가 손으로 쿡 찌르기만 해도 물기가 배어날 것 같았다.
“외출 허락해 주는 대신 돌아오자마자 검사받기로 했잖아.”
느른한 말투엔 살짝 세화를 책망하는 기색도 느껴졌다.
“자기 자지랑 구멍.”
그러니 눈치껏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기태정은 게으른 사자처럼 도로 길게 몸을 뉘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세화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 각도에서 올려다보니 집요하게 저를 바라보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눅진한 그의 눈길에 이미 이곳저곳 실컷 빨린 기분이었다.
이후론 다시 침묵이었다. 작살에 꿰뚫린 것처럼 자꾸만 몸이 흠칫 떨렸다. 정작 기태정은 아무런 지시가 없었는데도, 혼자서 온갖 음란한 가능성을 헤아리고 있는 게 민망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한참이나 멀거니 서서 그의 시선만 받아내던 세화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머뭇머뭇 몸을 움직였다. 아랠 살펴보겠다고 하면서 저렇게 누워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바라는 자세가 있는 걸 테고. 그가 어떤 체위와 애무를 특히 좋아하는지는 이제 세화도 잘 알고 있었다.
세화는 패치로 동여맨 좆을 가리려 조심하며, 그의 배 위로 올라탔다. 다행히 정답이었는지 그는 느린 움직임을 제지하지 않았다.
한 손은 소파 등받이를 짚고, 반대편 손으론 기태정의 허벅지 옆을 짚었다.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내민 채로, 세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부터 계속 잡아당긴 니트는 목이 늘어나다 못해 한쪽 어깨가 헐렁하게 다 드러날 정도였다. 뒤를 돌고 있었지만, 그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세화가 부끄러움에 숨을 헐떡일 때마다 의도와 관계없이 꽉 닫힌 구멍이 작게 우물거렸다.
“자기야.”
안개처럼 흩어지는 저음이 일순 뒷골을 뚫고 가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엉덩이가 붙들렸고, 몸이 위로 쭉 당겨졌다.
“주, 준장…!”
상체가 앞으로 크게 쏟아져 기태정의 복부를 짚자, 그가 엄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허리 제대로 세워. 지금 씹질하는 거 아니고 검사하는 거라고 했잖아.”
숙인 상체를 일으키며 무릎과 허벅지에 힘을 꽉 줬다. 소파의 등받이를 꾹 쥐고, 갈 곳 잃은 다른 손으론 제 입을 틀어막았다. 몸이 힘든 걸 떠나서 이 자세가 더 민망했다. 예전에는 그의 배를 짚고서 엉덩이만 내어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기태정의 얼굴 위로 몸을 곧게 세우고 있으니 살짝 드러난 남자의 턱 끝과 목울대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가 제 아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어떻게 물고 빠는지 움직임이 전부 드러날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민망해서 울고 싶어졌다.
“아….”
기태정은 동그란 둔부를 반으로 가르듯 벌리고, 자신의 얼굴 위로 정확히 조준했다. 어쩌면 앞에 달고 있는 좆보다도 남들에게 내보일 일 없었을 은밀한 부위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땀으로 살짝 번진 음탕한 흔적을 보며 기태정은 기이한 만족감을 느꼈다.
도장의 글씨가 가로로 살짝 늘어날 정도로 살을 쫙 잡아 벌렸다. 간질이듯 혀를 굴리자, 손에 쥔 볼깃살이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회음부는 양껏 씹기엔 부위도 좁고 살도 얕아서, 입술로 감싸듯 흡입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목구멍이 일렁일 정도로 부위 전체를 쭉쭉 빨아대자 머리 위로 울음 같은 신음이 쏟아졌다.
“음, 씹물은 안 흘린 거 맞고.”
“아, 으응…!”
패치로 묶인 음낭을 입에 넣고 굴리던 기태정이, 드디어 아래쪽의 구속을 살짝 끊어주었다. 잇새로 끈만 당겨 씹고, 끊어내는 감각이 선득했다. 그래도 꽉 조이던 것이 일부라도 사라지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물론 처음에만.
이 해방감이 보상이 아니라는 건 금세 깨닫게 됐다. 샘처럼 고인 쾌감은 어정쩡하게 차오르다 꺼지길 반복했다. 세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작게 흐느꼈다. 또 울어버렸어. 저도 모르게 기태정의 앞에서만 점점 쉬워지는 기분이었다.
“안, 응, 안 흘렸는데, 읏, 왜….”
“누가 이걸 다 내놓고서 다니래.”
아래에서 뻗어온 손이 더듬더듬, 가느다란 세화의 목덜미를 느리게 쓸고 갔다.
“내가 조신하게 있으라고 했지.”
좆 달린 새끼라면 한 번은 물어보고 싶었을 거라며 기태정이 혀를 찼다. 세화는 그가 트집을 잡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고개만 도리도리 내저었다. 옷을 다 벗고 다닌 것도 아니고 머리 좀 단정하게 잘랐는데 뭐가 그렇게….
“술은 좀 하나?”
엄지로 구멍을 문지르자, 이세화가 몸으로 대꾸했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볼기가 얕게 흔들렸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진 모르겠으나 영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이세화의 몸은 알코올도 해로운 것으로 간주했을 테고, 즉시 해독해주었을 테니.
기태정은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휩쓰는 듯 상 위를 더듬는 손길에 대충 놓여있던 술병들 몇 개가 나자빠졌다. 쨍강, 파열음과 함께 진한 위스키 향이 훅 퍼졌다.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잡아 내밀자, 이세화가 머뭇머뭇 병을 받아들었다. 패치를 두르고 술을 마시는 건 이번이 처음일 것 같은데. 기태정은 언뜻 이세화가 열에 들떠 온갖 헛소리했던 때를 떠올렸다. 저더러 손을 달라고 조르고, 가지 말라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진탕 취하면 그때와 비슷하게 굴려나?
“병나발 불라는 소리 아니야.”
“그, 그럼….”
기태정은 알아서 잘 생각해보라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 세화의 음낭을 빨기 시작했다. 짧은 사이 쾌감에 익숙해진 몸이 더 큰 자극을 졸라댔다. 세화는 술병을 꼭 쥐고서 밭은 숨만 헐떡였다.
그대로 마시라는 게 아니면…. 멍하니 기태정의 발치에 시선을 던진 채 힘만 주고 버티고 있었는데, 문득. 끝에 깔고 앉은 남자의 몸이, 정교하게 갈라진 근육의 결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조금씩 발기하기 시작한 경광봉만 한 좆도.
설핏 들었던 생각이 점점 구체적으로 부풀었다. 잠시 망설이던 세화는 기태정의 몸 위로 술병을 기울였다. 아마도 정답일 거라고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바라던 상황이 아닐 수도 있으니 아주 조금만 부어볼 생각이었는데, 기태정이 돌연 구멍을 길게 핥는 바람에 몸을 크게 들썩이고 말았다. 보통의 위스키보다 훨씬 짙은 빛을 띠고 있는 술이 기태정의 하복부를 질척하게 적셨다.
“그거 다 마실 수 있겠어?”
입술만 뗀 채로 기태정이 작게 말했다. 웃는 것도 같았다. 예민한 부분에 대고 속삭일 때마다 전달되는 진폭에 허벅지 안쪽이 잘게 떨렸다. 이러다 금세 쌀 것 같았다. 좆을 흔들고 구멍을 쑤시는 강렬함만이 사정감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화는 다급히 몸을 숙였다.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이 거지 같은 매듭을 전부 풀어줄 거다. 조금 전 쥐고 있던 술병을 소파 위로 떨어트리는 바람에 사방에서 독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생각해보니 여태 취해본 적이 없었던 것도 술이 센 게 아니라 이상한 체질 덕일지도 모르겠다. 세화는 몽롱한 기분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취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도랑처럼 팬 기태정의 복근에 술이 찰랑찰랑 고여있었다. 어찌나 근육이 단단한지 손으로 더듬더듬 짚을 때마다 물이 크게 찰박였다. 사람 몸이 아니라 대리석 바닥에 술을 쏟은 거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아으, 으…!”
흘린 술을 조금이라도 핥아보려던 세화는, 금세 능란하게 안을 간질이고 빠는 기태정의 혀 때문에 곧장 무너져버렸다. 뭘 해볼 정신이 없었다. 기태정은 숙인 상체 덕에 아까보다 훤히 드러난 구멍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그의 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파고들기도 했고, 두툼하게 주름 전체를 펼치듯 핥기도 했고, 뾰족하게 쿡쿡 찔러대기도 했다. 분명 뒤를 빨고 있는 건 한 사람인데, 여럿에게 번갈아 가며 희롱당하는 기분이었다.
세화는 아직 우유 마시는 법도 모르는 갓 난 고양이처럼 술로 적신 기태정의 복근에 뺨을 비비다, 겨우 입술을 대었다 떼길 반복했다. 지금은… 술을 마시는 게, 그러니까 그의 명령이 문제가 아니었다.
“준장님, 아…, 잠시만….”
패치가 귀두 아래를 꽉 조일 때마다 아랫배가 저릿저릿하게 당겨왔다. 배설감과는 조금 달랐지만 사정할 때와 비슷한 느낌도 아니어서, 일단 화장실을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화장실, 준장님….”
부탁했는데도 뒤를 빠는 몸짓은 여전했다. 아니, 더욱 거칠어졌다. 심지어 반대편 손이 다리 사이를 파고들더니 좆까지 붙들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아, 흐, 흐읏!”
세화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치켜들고서 몸을 들썩였다. 벌게진 눈가가 뜨거웠다. 안 돼, 안 돼…. 기태정에겐 닿지도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꽁꽁 묶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사무실 한복판에서 실수라도 하면…. 무엇보다 그는 여기에서 싸라는 태평한 소리를 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세화는 고개를 도리질을 치며 혼몽한 머릿속을 더듬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 아아, 흐앗!”
그러다 불현듯 아까… 최 원사라고 했던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 원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면 분명 기태정의 기분이 풀릴 거라고 했다. 그게… 그게 뭐였더라. 세화는 팔에 억지로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얼굴에 튄 술을 훔쳐 냈다. 입으로 코로 꼴깍꼴깍 넘어간 위스키는 독하고 강렬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체질의 특이성을 잃은 저의 몸은 알코올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세화는 으응, 하고 길게 울다 잊고 있던 단어를 간신히 떠올려냈다.
“부, 부군….”
막 구멍 안을 파헤치려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뭐?”
아래를 괴롭히는데 열중하느라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던 그가 드디어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세화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 부군. 그거였어.
“아까… 밖에서, 최 원사가 부군께서 조금 울적하신 것 같다고… 했어요.”
“…….”
“부군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그건 준장님한테 물어보라고… 지금 이 표정 그대로, 으응, 물어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세화는 그것조차 혼란스러워졌다. 처음 제대로 마셔본 술은 독했고, 가장 말초적인 성감을 오랫동안 자극당한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녀와서… 같이 술 마셔드릴게요, 제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구멍이 홉 다물어졌다 벌어지며 조르는 것 같은 모양새를 보이는 것도 모르고서, 잔뜩 빨려 좀 더 짙은 색으로 익은 통통한 회음부를 파르르 떨며 세화가 애원했다.
“준, 아니, 아, 아앗…, 부군님.”
뜻도 모르면서 새로 배운 말을 덥석 입에 올렸다. 좋은 뜻이겠지. 그러니까 안 그러던 사람이 대뜸 저를 붙들고, 힌트랍시고 던져준 거 아닐까. 최 원사도 ‘부군께서’라고 높여 말했으니 상관을 가리킬 때 하는 말은 확실히 맞는 것도 같고…, 아, 아니다. 모르겠다. 이젠 진짜 한계였다. 조금만 방심해도 정말 실수할 것 같았다. 제발, 뭐든 할 테니까, 이사님이든 준장님이든 부군님이든 시키는 대로 부를 테니까, 지금은 일단….
“그러니까 기분 푸시고, 저 화장실… 빨리….”
더듬더듬 내뱉는 말에 몸이 휙 뒤집혔다. 시야가 한 바퀴 크게 도는가 싶더니, 어느새 세화는 기태정의 복근이 아니라 널따란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직시한 채로, 기태정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쉬이 읽히지 않았다.
세화는 턱가에 대롱대롱 맺힌 눈물을 빠르게 훔쳐냈다. 그리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물기가 가신 선명한 시야에 꽉 들어찬 남자의 얼굴이 낯설었다. 저 많은 술을 퍼마시고도 멀쩡하던 기태정의 낯이, 눈동자가… 순식간에 변해있었다. 뭐랄까, 맛이 가버린 것 같았다. 그래. 그 말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부군, 이라고.”
“죄, 죄송…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말부터 대뜸 튀어나왔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는 끝이 가느다랗게 뭉개져 발음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거 무슨 뜻인지 알려줄까, 자기야?”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기태정이 웃었다. 근사한 미소였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벙커에서 건방지게 굴었다고 잔인하게 굴었던 것과는 묘하게 달랐다. 그야말로 이성이 모조리 증발해 버린 것 같은 기태정은, 이런 그의 얼굴은 세화도 처음으로 마주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