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52)화 (52/144)

#052

기태정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이 일만 아니었어도 이세화를 직접 미행했을 텐데.

크림색 니트 위에 종아리까지 오는 검은색 패딩을 걸친 이세화는 잘 말은 김밥이 따로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예민하고 서늘한 인상인데도, 따뜻하고 도톰한 옷에 폭 감겨 있으니 어쩐지 동그랗고 어리숙해 보였다.

“준장님….”

무장하듯 두르고 있는 옷을 벗기면 회음부에 찍힌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 거다. 이세화는 다른 곳엔 살집도 없으면서 거기만 통통했다. 만질 맛 나게.

다음엔 구멍에 도장을 꽂아 넣고 서류 결재라도 시켜 볼까. 이세화가 책상 위에서 스스로 엉덩이를 짓찧는 모습을 상상하니 좆이 터질 것 같았다. 애액으로 종이가 다 젖지 않았느냐고 꾸짖으면 온몸이 새빨개져선 눈물만 뚝뚝 흘릴 거다.

“저기, 준장님….”

씨발. 걘 뭐 그렇게 야해 빠졌지? 역시 괜히 내보냈지 싶다. 그런 건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되는데.

“죄송하지만 준장님, 곧 영업 준비를 할 때라….”

“알았으니까 입 좀 다물어.”

안달이 난 못생긴 새끼가 자꾸 끼어들어선 즐거운 상상을 망쳐 놨다. 기태정은 손가락으로 마른 얼굴을 크게 쓸곤, 툭 팔을 뻗었다. 시립하던 최 원사가 재빨리 글록을 건네주었다. 그래. 우선 재미없는 일부터 끝내고 보자. 그래야 돌아가서 이세화와 마저 놀 수 있지.

“주, 준장님. 설마….”

방아쇠에 손을 걸자, 손병규의 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난데없이 끌려온 하우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걱정하지 마. 손 사장은 안 죽일 거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수십 개의 총구가 꿈지럭거리는 손 사장의 이마로 향했다. 성벽처럼 도박장 안을 두르고 있던 기태정의 수하들이 전원이 오직 그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손병규는 오들오들 떨며 벌을 서듯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안 죽인다고 했지, 가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김석철에게 연락을 받자마자 저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움직인 놈이었다. 박쥐처럼 이권을 따지는 놈들에겐 이런 방식이 최고였다. 까딱 잘못했다간 자신이 처할 수도 있을 상황을 직접 지켜보게 하는 것.

“준장님, 이 사람들은 사쿠…, 아니 이세화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선수들이 이세화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알아. 그리고 씨발, 손 사장은 걔랑 친하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이름으로 불러?”

“예? 그거야… 아, 아닙니다. 안 부르겠습니다.”

김석철의 고발장이 접수되면, 이곳저곳에서 이세화를 찾아댈 게 뻔하다. 과거를 전부 숨길 순 없어도, 최소한 이세화의 특이한 체질이 약 장사에 도움이 됐다는 흔적 정도는 지워둬야 했다. 대단한 극비 문서도 아니었으니 정보가 새는 건 곧이겠지만, 적어도 이세화를 자신의 관사 안에 가둬 두기 전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선수들이야, 기태정이 직접 나설 것도 없었다. 이 바닥에서 위명이 높다는 건 여기저기서 원한을 많이 샀다는 뜻이다. 벼르고 있던 놈들에게 슬슬 말을 흘려주니, 전부 군침을 흘리며 앙갚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선수 타이틀을 달고 있는 놈들은 이세화에 관해 뭘 얼마나 알고 있든 다 뒈지게 될 거다.

그렇지만 이런 잔챙이들은 그런 식으로 상대하면 안 된다. 모아 놓고 한 번에 기를 꺾어놔야 한다. 그래야 무서워서 헛소리를 안 하지. 철컥. 섬뜩한 장전 소리에 사람들이 히익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도주를 시도하는 놈들도 일부 있었지만, 기태정의 수하들에게 멱살이 잡혀 도로 내던져졌다.

“다 죽이진 않을 거야.”

이건 진심이었다. 기태정은 목적 없는 살인을 즐기지 않았다. 몰살은 전쟁터에서도 지겹게 하고 있는데 굳이 밖에서도 피를 보고 싶진 않았다. 박 소위는 가끔 감성에 젖어 준장님도 외롭고 힘드신 거죠, 이딴 개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런 건 절대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공과 사를 구별하는 거였다. 사람 잡는 게 일인데. 일터도 아닌 곳에서 또 멱을 따려니까 지겨워서.

“그, 그 새끼가 좋다고 몸 팔고 다닌 겁니다!”

팔이나 허벅지가 찢기는 정도면 충분하겠지. 탄환의 개수와 조준할 포인트를 계산하고 있는데, 앞줄에서 덜덜 떨던 놈이 별안간 소리를 내질렀다.

“사쿠라 그 새끼가 저희가 자기 괴롭혔다, 자기한테만 일 다 시켰다… 뭐 그렇게 일러바친 것 같은데, 그거 다 오해입니다! 저흰 강요한 적 없어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시가를 문 채로 빤히 바라보자, 놈은 기태정이 흥미를 보인다고 착각했는지 조금 밝아진 얼굴로 빠르게 기어 왔다.

“사쿠라 그거 다른 거물 손님 하나 물고 이 바닥 뜨려던 놈입니다. 그래놓곤 지금은 또 이사님께 바로 붙은 걸 보세요. 원래 그런 놈이라니까요? 저희가 뭐 강요한 적 없습니다. 그 새끼는….”

“아까부터 강요 어쩌고 하는데, 그 맥락이 뭐지?”

“예?”

“이세화한테 강요한 적 없다며.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아, 그게….’ 하며 놈이 잠시 우물쭈물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쳐든 놈에게선 어떻게든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의지까지 느껴졌다.

“돈은 좀 모자라지만 사쿠라를 꼭 만나고 싶다던 손님들이 몇몇 있어서… 그래서 소개를 해 줬는데요… 저희는 그냥 운만 띄운 거고, 결국 자기가 돈에 미쳐서 다 받아 준 겁니다!”

“돈에 미쳤다면서 돈도 없는 손님한테 걔가 왜 약을 팔아? 말이 안 되잖아.”

“그, 그게… 자, 장사 공치는 것보다야 낫잖습니까? 아마도 그래서….”

“걔가 여기서 제일 잘 파는 건 나도 아는데? 약물 유통 손댄 이후로 이세화가 장사 공친 날이 있기는 했나?”

“그건… 그건… 그, 걔가 마약만 파는 게 아니라서요! 딱 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습니까?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수로 그 많은 손님을 낚았겠어요. 마약 안 듣는다는 것도 순 구라일 겁니다. 그런 체질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손 사장은 제발 입에 자크 좀 채우라는 듯 손을 바쁘게 움직였지만, 겁에 질린 잔챙이들은 신호를 읽지 못한 채 왁왁 소리만 질러댔다. 한 놈의 입이 터지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목청을 높여댔다. 기이한 열기가, 아니 광기가 굳게 잠긴 도박장 안을 감돌았다.

“마, 맞습니다! 돈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놈이 워낙 생색내는 걸 좋아해서… 그래서 자기가 먼저 돈 빌려준 겁니다. 저희가 뺏은 적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그 새끼가 얼마나 독한 새낀데요. 2원에서 태어났다고 이씨 성 붙은 놈이 4원까지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거 보면….”

기태정은 제 앞에 놓인 면상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요약하자면 이 새끼들은 이세화한테, 돈도 없는 손님에게 싸게 마약 좀 대 주라고 윽박지르고, 갈취하듯 돈도 빌려 갔다는 건가. 손병규는 분명 여기 모인 놈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잡역들이라고 했다. 고작 그런 놈들도 이렇게나 살뜰하게 이세화의 등골을 뽑아 먹었던 모양이다. 그간 이세화가 하우스에서 무슨 취급을 받았는지 알고는 있었다. …알고 있기는 했는데.

“저도 보고 들은 게 있습니다! 삼월이가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어찌나 잘 꼬셔 대는지….”

“보고 들은 게 있어?”

“예? 예, 그럼요…!”

“이세화가 몸 파는 건 직접 봤고? 눈알 두 개 다 걸고서 확실히 봤다고 장담할 수 있나?”

“그, 그건….”

기태정은 피로가 밀려와, 잠시 눈을 꾹 감았다.

“이 씹새끼들이 진짜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깊이 감긴 기태정의 눈꺼풀 위로 여러 갈래의 선이 짙게 드리워졌다.

“최 원사.”

“예, 준장님.”

탕! 일부러 소음기도 장착하지 않은 탓에 날것의 금속음이 도박장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으아악!”

이세화에게 손님도 떠넘기고 돈도 빌려 갔다던 그놈은 무릎에 고작 총알 한 방 맞았다고 게거품을 질질 흘려댔다.

“저격 소총 가져와. 고작 글록으로 이걸 언제 다 쏘고 있어.”

반대편 무릎, 양쪽 어깨와 손목, 발목, 목과 배의 정중앙까지 아낌없이 탄환을 쏟아부은 기태정은 텅 빈 총을 집어 던졌다. 그다음으로 왈왈 목청이 크던 놈이 글록에 세게 얻어맞고는 커억,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놈의 관자놀이를 타고 검붉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 흐흑, 살려 주세요….”

죽음 같은 고요를 찢고 얕은 흐느낌이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걸 이 난장을 내고서야 깨달은 모양이다.

“빨리 끝내고 가야 우리 자기랑 재밌는 거 할 수 있거든?”

기태정은 목을 옥죄고 있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좌우로 거칠게 흔들어댔다. 찢듯이 당기며 공간을 벌리는 성마른 손짓에 가장 윗줄의 단추 두어 개가 팡 하고 튕겨 나갔다.

“그러니까 다들 협조 좀 해 달라고.”

최 원사가 건넨 것은 M16 시리즈였다. 빠르게 재장전이 가능해서 저격수들이 특히 선호하는 기종이었다. 기태정은 재를 한 번 툭 털고, 시가의 헤드를 짓씹듯 세게 물었다. 조준경은 일부러 보지 않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가며, 한 번에 죽여줘야 하는 새끼들이 아니었다.

초록색 모포가 덮인 도박장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손병규는 쥐며느리처럼 몸을 웅크리고, 끌려온 놈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이곳에서 기태정은 한 마리의 아귀였고, 야차였으며, 또 준엄한 시왕이었다. 무엇이든지 간에 지옥에서 가장 악독할 남자가 자비 없이 총신을 휘둘렀다.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할 짐승들은 핏물에 절어 허연 눈을 까뒤집었다.

“으아아아!”

그대로 죽긴 싫었는지, 의자 하나를 뽑아 든 남자가 냅다 소리를 지르며 기태정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은 위협조차 되지 않는 반항이었다. 달려오는 속도에 맞서 그대로 세게 걷어차자 놈이 어억, 하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짜고 치는 모의 훈련도 이따위로 임하면 벌점이야.”

발로 깔 때 의자가 반으로 쪼개졌는데, 그 충격이 고스란히 복부로 전해졌는지 남자는 가슴과 배를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이세화가 사람 꼬시고 다니는 걸 봤다던 그 새끼였다.

“반항을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재미도 없게, 씨발.”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두를 때마다 사나운 음절이 툭툭 끊어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고, 이내 놈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운무처럼 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기태정은 얼굴에 묻은 더운 피를 닦아 냈다. 익숙한 나락이었다.

***

세화는 두리번거리며 복도로 들어섰다. 슬슬 장사 준비할 때인데, 하우스는 아직도 여기저기 문이 잠겨있었다. 유독 락스물 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면 짭새들 단속이라도 뜬 건가 싶기도 하고….

“오늘 준장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십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대기하고 있던 기태정의 수하가 난데없이 말을 건넸다. 혹시라도 기태정의 귀에 들어갈까 염려했는지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본인은 부정하시지만, 오늘 같은 날은 어쩔 수 없이 가라앉으시곤 합니다.”

오늘 같은 날? 제 외출이 그렇게나 기분이 더러웠던 건가. 세화는 애꿎은 옆머릴 긁적였다. 얼마나 개지랄을 떨었길래 평소엔 말도 안 붙이던 장승 같은 남자가 먼저 저에게 주의하라고 하는 걸까.

“알겠어요. 그럼 지금 안 들어가고….”

“아뇨, 아닙니다. 들어가세요. 제발.”

세화는 아이스크림 껍질만 달랑 든 비닐봉지를 들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화풀이 인형 같은 게 아니에요.”

“예?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준장님은 세…, 아니, 음, 그쪽과 함께 있으실 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시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덜 잔인해지시고요.”

남자는 입천장이라도 덴 것처럼 우물우물 세화의 이름을 삼켜 버렸다. 그러다 겨우 내뱉는 문장 속엔 새파란 공포가 선연해서,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들어가셔서….”

남자는 눈만 데굴 굴려 사무실 안쪽의 기류를 살피곤, 작게 속삭였다.

“‘들어오는데 최 원사가 부군께서 조금 울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던데요.’ 이렇게 한마디만 해주시면 다 해결될 겁니다.”

“부군? 그게 뭐예요?”

“바로 그겁니다! 방금 그 표정 그대로 준장님께 여쭤봐 주십시오.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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