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박 소위가 건네준 옷은 흠잡을 데 없이 멀끔했다. 니트와 바지의 색은 무난했고 패딩은 가벼우면서도 따뜻했다. 잘 맞는 속옷까지 주어진 건 물론이었다. 기태정만 아니었다면 기분 좋은 외출이었을 거다.
세화는 씩씩거리며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맴돌았다. 사실 할 일은 금세 다 끝냈다. 돈은 잘 숨겨뒀고, 은행 계좌도 이상 없는 거 확인했고, 많이 자란 머리도 멀끔하게 다듬었다. 그러고 나니 할 게 없었다. 돌아가긴 싫은데, 그렇다고 이 꼴을 하고서 카페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큰일이니까 가능하다면 기태정이 돌아오기 전까진 아무것도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따라 거리도 한산했다. 그나마 여기가 제일 번화가라 언제 나와도 하우스 사람 한 명 정도는 꼭 마주치곤 했는데…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처음엔 당연히 매조를 불러낼 생각이었다. 저 다음으로 약에 대해 많이 아는 게 그놈이었으니까.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놈에게 최음제에 관해 묻는 게 제 무덤 파는 일 아닌가 싶었다. 참견이 많은 만큼 말도 많은 놈이었다. 기태정도 자신의 체질 문제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 와중에 수상한 얘기가 돌아봤자 좋을 게 없을 거다. 무엇보다… 섞어 먹으면 애액이 나온다는 걸 누구에게 들었냐, 혹시 네가 당한 건 아니냐… 별별 소리를 다 들을 걸 생각하니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라 그냥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쓰던 핸드폰은 빼앗겨서 당장 연락처를 모르기도 하고.
“…그냥 돌아갈까.”
아무리 가벼운 재질이어도 패딩을 걸치고 있으니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여전히 한겨울처럼 추운데, 그림자 길이가 가장 짧아지는 시간이 되니 봄이 아니라 여름 날씨 같았다. 덥고, 몸도 무겁고… 다 귀찮다. 진짜 돌아갈까. 어차피 사람도 붙여놨다고 했으니, 이렇게 같은 자리만 빙빙 돌고 있는 것도 기태정에게 보고가 들어갈 텐데.
“아, 들어올 거야, 말 거야?”
“아… 아뇨. 죄송합니다.”
“그럼 썩 꺼져! 가뜩이나 오늘 장사 공쳤는데 재수 없게 남의 가게 앞에서 바람만 넣고 있어!”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하던 세화가 못마땅했는지 분식집 주인이 튀어나와 버럭 호통을 쳤다. 세화는 입술을 삐죽이며 좀 더 멀리 걸음을 옮겼다.
“이건 또 왜 이래….”
속도 좀 냈다고 옷감이 살에 착착 감겼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피부가 예민한 편은 아니었는데. 거슬리는 감촉에 눈살을 찌푸리던 세화는 혹시 이것도 기태정의 농간이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설마 이걸 노리고 그간 속옷도 못 입게 했던 거 아닐까? 세화는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일단 눈에 보이는 마트로 들어갔다.
정신 좀 차릴 겸 냉기가 폴폴 솟아오르는 아이스크림 코너를 괜히 서성거리다 보니, 문득 군것질거리 정도는 기태정이 준 카드를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머리를 자를 땐 잔액이 영 신경이 쓰여서 결국 제 돈을 냈는데, 아무리 그가 저를 놀리려는 속셈이었더라도 계좌에 만 원은 넣어줬을 것 같았다.
고민하던 세화는 이내 신중하게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청소한 지 오래됐는지 케이스 안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얼음은 오래된 빙하처럼 굳건했다. 한참을 파헤치다 얼음 가루 범벅이 된 손으로 집어 든 건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던 초콜릿 맛 콘이었다. 심지어 이건 세일 품목도 아니라 제법 비쌌다.
“계산해주세요.”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직원을 불러 카드를 내밀었다. 껌을 짝짝 씹으며 귀찮은 티를 팍팍 내던 직원은 오, 하고 동그랗게 입을 벌리며 검은색 카드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건 뭐 이렇게 생겼대? 신기허네.”
세화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계좌 잔액이 문제가 아니었다. 네 주제에 어디서 이런 카드가 난 거냐고 직원이 매섭게 추궁할 것 같았다. 뭐라고 변명하지. 심장이 콩닥콩닥 내달리는 소리가 제 귓가까지 울렸다. 지금이라도 기태정에게 연락해야 하나?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세화는 뒤늦게 미친 생각에 또 한 번 핏기가 싹 가셨다. 이 핸드폰이 애초에 그의 물건인데… 대체 어디로 어떻게 연락해야 한단 말인가.
“봉투 줘요?”
“네? 네.”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만약 저 사람이 경찰이라도 부르면…. 온갖 부정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직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돌려주었다. 호출 버튼을 누르진 않을까 끝까지 살펴봤는데, 직원은 다시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 신기하게 생긴 카드가 특수한 물건이라는 걸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세화도 통장 같은 걸 담보로 꽁지를 꾸는 사람들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 이런 종류의 카드가 있다는 것도 영영 몰랐을 거다. 마트의 직원처럼 평생 이 좁은 구역이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니까.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트를 나서자마자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다행히 군부에서 온 비상 연락 같은 건 아니었고 카드 결제 명세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놀란 가슴을 쓸며 화면을 바라보던 세화는,
“이게 무슨….”
생전 처음 보는 숫자의 나열에 넋을 잃고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BOUK (0430) 체크승인
이*화님
3,000원
04/02 14:27
잔여 11,999,997,000원
24시초록마트 4환2거리점
“일, 십, 백, 천, 만, 십만….”
세화는 더듬더듬 몇 번이고 금액을 헤아렸다. 10억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자꾸 헷갈려서 처음부터 다시 세야 했다. 아이스크림을 사는 데 3천 원을 썼으니까… 그러면.
“…원래 잔액은 120억이었다는 거야?”
핸드폰으로 빨려 들어갈 듯 목을 구부리고서 다시 세어봐도, 120억이 맞았다.
“잠깐만… 이거 이름은 또 왜 이래?”
비현실적인 숫자에 정신이 팔려 뒤늦게 발견했는데, 위에 뜨는 카드 주인의 이름도 이상했다. 기태정의 것이니까 기*정으로 표기돼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화라고 뜨는 거지?
“…이거 설마 내 이름인 건….”
그건… 아닐 거다. 기태정이 알고 있는 이*화가 저 말고도 더 있지 않을까? 세화는 팔목에 걸린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오랫동안 메시지를 노려보았다. 그가 저와의 섹스를 즐긴다고 하더라도, 그게 120억이나 내어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지? 어찌나 놀랐는지 아래에 뭘 묶고 있는지도 다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앞면을 문질러보니 점자처럼 조그맣게 새겨진 영문 이름이 있기는 했다. 이것도 이세화… 인 걸까. 중요한 물건인데 큼지막하게 좀 박아놓으면 어디가 덧나는지, 명의자 이름을 구석에다 조그맣게 새겨놔서 알아보기 어려웠다. 카드의 위협적인 광택도 가독성을 방해하는데 한몫했다.
“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드를 뒤집어보니 서명란엔 낯선 글씨로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이세화. 힘은 넘치지만 어쩐지 건성으로 보이는 필체. 기태정이 글을 쓴다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세화는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가만히 서서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태어나 세상을 처음 인지한 새끼 오리처럼, 그냥 낯선 물건을 보듯 신기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진짜 내 거라고?”
정신을 차린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까 남의 카드가 아니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새삼스럽게 그가 개인 정보를 건드린 걸로 놀란 건 아니었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이 비정상적인 금액이 문제일 뿐이었다. 120만 원, 아니 1,200만 원 정도만 됐어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신나게 썼을 거다. 1억 정도면… 놀라긴 했어도 그러려니 했을 거다. 그렇지만 120억은. 이건 정말 아니었다.
세화에게 가장 끔찍한 걸 꼽아보라면 날 때부터 어깨에 얹은 채무였고, 가장 무서운 걸 고르라면 인과를 알 수 없는 돈이었다. 꽁돈에도 사연이라는 게 있다. 이유도 모르고 받은 거금은 추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고, 그건 대개 끔찍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다.
기태정이 왜 자신의 명의로 계좌를 텄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돈세탁이나 탈세… 뭐 이런 것들이었고, 그다음은 보험금이었다. 비싼 보험을 든 다음 저를 사망 처리해 버린 건 아닐까? 그렇지만 조금 전에 은행 업무도 멀쩡하게 잘 봤고 무엇보다 보험금을 사망한 사람 계좌로 넣어주진 않을 텐데….
“야, 사쿠라!”
얼이 빠져서 핸드폰과 카드만 번갈아 보면서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주먹으로 어깻죽지를 세게 내리쳤다.
“너는 씨발, 왜 연락을 안 받아!”
“아….”
“아아? 이게 정말 사람을 개코로 보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세화는 그제야 눈앞의 인물을 제대로 인지했다. 매조였다. 대체 정신이 있냐 없냐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르던 매조는, 아까 전 분식집 사장의 쩌렁쩌렁한 일갈에 슬그머니 입을 꾹 다물었다.
“허… 이제 보니까 머리도 잘랐네. 얼굴에 이상한 분칠도 안 하고….”
매조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맥락 없는 분노가 가라앉고 나니 세화의 달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매조의 시선이 세화의 뽀얀 뺨에서 손목의 비닐봉지로 흘렀다. 흘끗 보이는 아이스크림은 자기 돈으론 절대 사 먹지 않았을 비싼 제품이었다. 지금 걸치고 있는 옷만 해도 그렇다. 돈 많다던 손님 중에서도 일부나 겨우 입는 유명한 브랜드 로고가 박혀있었고, 손에 든 핸드폰도 이전에 쓰던 고물이 아니었다. 그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몰래 숨어서 잘 먹고 잘 쉬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것도 남의 보살핌을 살뜰히 받은 태가 여실히 났다.
“너 그 새끼 때문에 이렇게 멀쩡한 꼴로 다니는 거지? 그 이사라는 새끼.”
진정된 것처럼 보였던 것도 잠깐이었을 뿐, 마주한 매조의 눈동자 속에선 거센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세화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울화였다. 누구랑 뭘 어쩌든 무슨 상관이라고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씨발… 자기니, 꽃이니 그딴 느끼한 소리 하는 새끼가 뭐가 좋…, 야. 너 그 카드 뭐냐?”
혼자서 꿍얼거리던 매조가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매섭게 노려보자, 놈은 허공에 붕 뜬 손을 천천히 구겼다. 머쓱한 얼굴이었다. 매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커다란 기태정의 손만 보다 놈의 손을 보니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연방 은행 VVIP한테나 준다는 시리즈잖아. 이걸 네가 왜 가지고 있어?”
“손 치워. 내 거 아니니까.”
“허… 그 이사란 새끼가 주든? 이제 자기 돈 쓰면서 편하게 살래?”
또 자기 혼자 열이 잔뜩 오른 매조가 모욕적인 말을 주절주절 쏟아놓았다. 세화는 다리를 삐딱하게 짚고 서서 놈의 길 잃은 분노를 흘려보냈다. 가뜩이나 이 망할 카드로 심란해 죽겠는데 저놈까지 상대해줄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속없는 새낀 건 진작 알았어도… 너도 그런 거나 밝히는 놈인 줄은 몰랐다. 씨발, 어차피 돈 보고 사람 고를 거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딴 소리나 하지를 말든가.”
듣고 있자니 이 새끼 하는 소리가 갈수록 가관이었다. 김 소위와의 사이를 넘겨짚을 땐 어차피 불행해질 거라고 악담이나 하더니. 외양으로는 흠잡기 어려운 기태정이 나타나자 이젠 저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냐? 나한테 카드 준 이 사람은 젊고, 잘생기고, 돈까지 많은데.”
“…뭐?”
“근데 나도 뭐 하나만 묻자. 내가 이 사람한테 갈아타든, 빌붙든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짜증이야?”
평소엔 무슨 소릴 들어도 대꾸도 없던 세화가 냉소적으로 나오자, 당황한 매조가 눈을 끔뻑거렸다.
“이사 놈이 카드 한 장 줬다고 그런 말이 쉽게 나와? 나는….”
“어. 쉽게 나와. 그러는 너는. 나한테 매번 막말하는데 카드 한 장이라도 줘봤어?”
“야….”
매조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 그렁그렁한 눈을 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다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좋아한다고? 놈이 저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그렇지만 세화는 거기에 좋아한다는 예쁜 이름을 붙여주고 싶지 않았다. 매조는 그냥 제 마음에 취해 있는 것에 불과했다. 한번 따먹고 싶어서 자기 내킬 때만 잘해줬다. 심지어 잘해주는 것도 자신만의 기준일 뿐이었다. 혹 힘이 있는 사람이 세화를 욕하기 시작하면, 자기도 질세라 목청을 높였다. 세화를 감싸다가 저까지 무리에서 밀려나면 어쩌나 두려웠던 거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마음을 순정인 듯 포장하는 게 역겨웠다. 심지어 기태정도 마음 운운할 때는 저를 이세화라고 불렀는데. 매조는 언제나 야, 사쿠라, 삼월이 그렇게만 불렀다.
“야! 어, 어디 가!”
세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매조는 어쩔 줄을 모른 채 소리만 내지르다가, 이번에도 분식집 주인에게 대차게 욕을 얻어먹었다.
붙여준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 뒤통수가 까일 일은 없을 거다. 기이한 안심이었다. 언제나 저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기태정인데, 그에게 보호를 받는 덕분에 매조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쏟아낼 수 있었다.
손목에 달랑달랑 매달린 비닐봉지가 뽀스락뽀스락 귀여운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하우스까지 거리가 꽤 되지 않나? 다 녹을 것 같은데. 곰곰 생각하던 세화는 껍질을 벗겨내고,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확실히 냉동고 안에서 오래 묵었는지 얼음 맛이 반이긴 했지만 그래도 맛은 있었다. 이 와중에도 꾸역꾸역 뭘 처먹으면서 맛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것 봐, 나 원래 잘 안 우는데….”
세화는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아이스크림을 깨물었다. 기태정이 보면 장하다고 칭찬해줬으려나. 의외라고 놀랄까? 아니다. 크게 휘파람을 불며 놀려댈 것 같다. 우리 자기 안 울었네, 뭐 그러면서.
결국 돌아갈 곳은 기태정의 사무실이었다. 도박장이나 숙소가 아니라, 물침대와 생긴 것만 멀쩡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가짜로 지은 사무실. 오늘 돌아가서 무슨 짓을 당할지 뻔히 보이는데도, 거기로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다면.
“내가 너무 등신 같은 건가….”
오랜만에 쨍하게 얼린 자신의 낯이 낯설어서, 세화는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제 뺨을 연신 어루만졌다.
처음부터 살려달라고 울며 매달려서 그런가. 기태정의 앞에선 전부 내려놓게 된다. 저를 어리게 다루어서 그런가, 문자 그대로 어린 애처럼 굴게 되는 것 같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저를 많이 울린 남자 앞에 있을 땐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게. 당장 얼마 전에도 못된 말로 마음을 다 찢어놓은 그가 매조 같은 놈들보단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게….
“매조 같은 놈이랑 만나느니 차라리 기태정을….”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세화는 화들짝 놀라 콘을 입에 구겨 넣었다. 급하게 먹느라 컥컥 밭은기침이 튀어나왔다. 세화는 고개를 숙이고서 콘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무의식중에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는 자신조차 잊어버리기로 했다.
***
“말씀하신 대로 중요한 선수들 말고 잔챙이들만 모았습니다.”
손병규가 손바닥을 맞비비며 헤헤 웃었다. 기태정은 시큰둥한 낯으로 도박장 안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적지는 않았어도 많은 수는 아니었다.
“이게 다라고?”
강제로 꿇어앉은 사람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사장이 새로 온 이사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보니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별로 없는데?”
“사쿠라 고것도 나름 실장급이니까 아무하고 어울리진 않죠. 걔 알던 놈 중에 이제 이 세상 사람 아닌 놈들도 제법 되고요. 그런데 애들은 왜 부르라고 하신 건지….”
손병규를 시켜 이세화의 체질에 대해 들은 말이 있는 놈은 전부 데려오라고 했다. 이름 좀 알려진 선수들은 제외하고, 밑에서 일하는 시다들로. 이세화가 약발이 잘 안 듣는다더라,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무조건 부르라고 했다.
“청소 좀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