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49)화 (49/144)
  • #049

    육중한 세단은 시동을 걸자마자 스스로 운행을 시작했다. 불이 켜지기 시작한 4환의 가게들을 배경으로, 기태정은 외출의 진짜 목적이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모에 대해 알려주겠다기에 빚 얘기부터 나올 줄 알았는데, 생뚱맞게도 그는 세화의 체질에 관한 주제부터 꺼내 들었다.

    “어쨌든 이건 추측에 불과하니 자세한 건 전문가한테 듣고. 솔직히 나도 뭔 소린지 못 알아먹겠으니까.”

    곧 군의관에게 직접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을 거라고 했다.

    세화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기태정의 말에 따르자면, 세화는 제 몸에 유리한 성분만 쏙쏙 골라서 받아먹고 아니다 싶은 건 버려버리는 체질인 것 같다고 했다. 기태정이 그렇게 추측한 이유를 듣다 보니 그쪽이 훨씬 더 그럴싸하긴 했다. 세화 본인조차 설명하기 어려웠던 부분까지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그렇지만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은 것과 별개로 실감은 나지 않았다.

    “만약에요, 제 체질이….”

    조잘조잘 흘러나오려던 세화의 물음이 탁 막혔다. 커다란 손이 뒷덜미를 덮더니 상체를 옆으로 쑥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입술이 잡아먹혔다. 키스는 부드럽지도 거칠지도 않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그저 닳아 없어질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분위기가 조금 녹긴 했어도 세화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방음도 시원치 않은 곳에서 일을 치려는 건가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기태정은 키스만 하고서 깔끔하게 물러섰다. 아니, 그걸 키스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세화에게서 복종의 맹세를 받았다고 하는 게 옳지 싶었다.

    어쨌든 필요한 게 있으면 챙기라고 해놓고선 그는 세화에게 아무것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매일 같이 뿌렸던 싸구려 스프레이 한 통이 손에 쥔 전부였고, 그나마도 기태정이 지시를 해서 챙긴 거였다.

    ‘속옷은 주셔도 되잖아요. 어차피 옷도 못 입고 있는데….’

    세화가 조금 불퉁하게 중얼거리자, 기태정이 어림도 없다는 듯 엄한 얼굴을 했다,

    ‘유명한 전래 동화 있잖아. 원래 애 낳기 전까진 옷 주는 거 아니야.’

    그래도 저질스러운 농담이나 하는 걸 보니 기분은 완전히 풀렸나보다, 할 따름이었다.

    “준… 장님….”

    숨이 모자라 헐떡이던 세화는 허벅지 위로 선명하게 부푼 그의 성기를 보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차에 탄 이후로도 몇 번이나 키스했다. 지금까지야 키스에서 그치고 있었지만, 계속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뭐가… 뭐가 바뀌는 거예요?”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자 애쓴다는 듯 기태정이 목에 감고 있던 손을 놔주었다. 세화는 바지 위로 길게 일어선 살덩이의 실루엣을 흘끔 바라보다가, 괜한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대체 어떻게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왔을까.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글쎄. 널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이 더 생길 수도 있겠지. 나처럼.”

    나처럼…. 기태정의 좆을 밀어내려, 여운을 길게 남기는 말을 괜히 곱씹던 세화는 퍼뜩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어 기태정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혹시 저희 부모님이 이런 체질이었어요?”

    분명 기태정은 사무실을 나서기 전, 세화의 ‘체질’ 이야기가 아니라 ‘널 낳아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뜸 체질 이야기부터 꺼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자신의 이 특이한 기질이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하려고 그런 것 아닐까?

    “군인 중에 이런… 저같이 특이한 사람이 있는 거죠?”

    기태정은 군인이었다. 그것도 계급이 제법 높아, 내부 사정을 훤히 꿰고 있을 상급자. 그는 벙커에서 세화에게 치료제가 잘 듣는 걸 보고 다른 방향으로 체질을 추측하게 된 거라고 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이나 구체적인 단서를 찾아낸 걸 보면 부모가 군부 쪽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세화는 괜히 가슴께를 꾹 눌렀다. 군과 어떻게 얽힌 건진 모르겠지만 좋은 방향은 아닐 게 분명했다.

    솔직히 부모와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들이 저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환상 같은 건 코흘리개 시절에도 품어본 적 없었다.

    자신의 출생은 명확했다. 판돈으로 내걸려 포대기 대신 초록색 모포를 두르고 자랐다. 그게 전부다. 돈은, 특히 빚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 만약 부모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신분이 멀쩡했다면, 빚쟁이들은 끝까지 그들을 물고 늘어졌을 거다. 언제 뒈질지 모르는 신생아가 아니라.

    그러니 애틋함이나 그리움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미련도 없었다, 다만… 세화는, 저 또한 남들처럼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인데… 군에서 민간인을 데려다가 이런저런 화학 실험을 한 적이 있었어.”

    감상에 잠길 틈도 없이 기태정이 다소 주제에서 비낀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말과 행동이 그러하듯 불쑥 찌르고 가는 기습이었다.

    “그래서 네 수상쩍은 체질이, 당시 그 실험의 대상자였던 부모에게서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추측하는 중이야.”

    “실험… 이요?”

    “그래, 실험.”

    “…….”

    “물론 네 부모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건 국내외 여론을 이기지 못해 은폐한 프로젝트였고… 군부에서 치부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만약 살아있다면 만나게 해줄 수는 있어. 물론 상황은 끝까지 살펴봐야겠지만.”

    내가 이 얘기를 꺼내는 건, 하고 기태정이 말끝을 늘였다.

    “그 화학 실험 문제에 김 소위가 모시고 있는 거물 하나가 걸려 있어.”

    “거물이라면….”

    “대장.”

    국가 원수 바로 아래라는 말에 세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에 올리기도 거북스러운 계급이었다.

    “잘하면 김 소위 사건과 같이 엮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필요하다면 네 사연도 이용할 생각이야.”

    그래서 앞으로 여러 가지 검사를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재판장에서 끄집어낼 수도 있다고 했다. 세화는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저 호의로 부모를 찾아주겠다고 했다면 오히려 수상했을 거다.

    “그러니까 그 대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말해. 부모 문제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기태정이 말하는 ‘원하는 대로’의 범위는 어디까지인 걸까. 그 자리에서 2억에 가까운 빚을 한 번에 갚아준 사람이었다. 부모에게 새로운 신분을 달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들어줄 것만 같았다.

    “…아뇨.”

    그래서, 세화는 이 이상의 호의는 거절하기로 했다. 정당한 대가라는 말을 써도 되는 건진 모르겠는데, 어쨌든 과한 대가도 결국 빚으로 남는 법이었다. 세화는 이제 빚이라면 치가 떨렸다.

    “살고 있으면 어떻게 살고 있고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다… 그런 정도만 알려주시는 걸로도 충분해요.”

    세화의 거절이 예상 밖이었는지 기태정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떴다.

    “의외네. 그런 거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라뇨?”

    “가족이니, 곁에 두는 사람이니… 그런 것들.”

    로고가 박힌 가죽 핸들이 혼자서도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런 것들, 뒤에 숨겨진 말을 알 것도 같았다. 너 사실 외로움 많이 타잖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눈이 멀 것 같은 색색의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4환은 낮보다 밤에 활기를 띠는 구역이었다. 여기저기서 손님 받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화는 가게 주인에게 얻어맞으며 비질을 하는 길가의 어린아이에게서 어느 날의 자신을 겹쳐보았다.

    “…저는 저를 잘 알아요.”

    세화는 깊숙이 묻어두었던 자신의 이기심을 전부 꺼내 보이기로 했다. 부끄러운 부분도 전부 내보였는데 기태정 앞에서 새삼 못할 얘기가 뭔가 싶었다.

    “이렇게 미운데도, 지금 와서 부모랍시고 다시 마주치면 모르는 척하지는 못할 거예요. 조금은 도와주고 싶어지게 될 게 뻔해요. 당연한 말이지만 도와주는 일은 ‘이번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고요.”

    “…….”

    “그런데 21년간 남으로 살았던 사람들까지, 날 이렇게 살게 한 사람들까지 제가 다 끌어안기엔…. 지금 저는, 너무….”

    부모라는 사람들에겐 또 얼마나 많은 빚이 있을까. 지금이야 서류상으로 고아니까 아무도 찾아온 적 없었지만, 자식새끼의 존재를 알게 되면 채권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들이닥칠 게 뻔했다.

    가끔 온 세상이 저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움직이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겹겹이 겹친 악재를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세화는, 이번에는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다.

    “하긴. 여기서 어영부영 빚이나 더 안 늘리면 다행이지.”

    다행히도 기태정은 별 꼬투리를 잡지 않고 수긍해주었다. 비웃는 것도 따지는 것도 아닌 선선한 긍정이었다.

    “그래도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까 그동안 잘 생각해봐. 난 정말, 뭐든지 이용할 생각이니까.”

    “그럼… 저한테 함부로 접근 못 하게 해주실 수 있어요? 멋대로 찾아오는 건 물론이고 제 명의로 허튼짓할 수 없게…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래.”

    “진심이에요. 저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주셔야 해요.”

    “그래. 너 죽을 때까지.”

    세화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 전에도 생각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지금부터 널 남김없이 강탈할 생각인데 혹 바라는 대가가 있다면 들어주긴 하겠다는 기태정의 방식이, 이젠 제법 신사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멀리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경광봉의 불빛이 보였다. 본격적인 밤이 내리기도 전부터 하우스 앞은 인산인해였다. 세화는 사이드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벌건 후미등에 눈이 다 시려서, 문득 기태정에게 지난번처럼 훌쩍 날아갈 수는 없는지 묻고 싶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긴 밤을 헤치고 멀리 날아가서, 괴로운 일은 다 지나고 없을 한참이나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기태정은 같이 외출했던 이후로 계속 자리를 비웠다. 세화의 일상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맨몸에 가운만 걸치고서, 가라로 만든 ‘기태정 이사’의 사무실에 갇혀있다는 소리였다.

    세화가 하는 일이라곤 먹고 자는 것밖에 없었다. 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어디 병에라도 걸린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끝도 없이 잠이 쏟아졌다. 이젠 물침대의 출렁임이 불편하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알아서 눈이 번쩍 뜨였다. 꾀죄죄한 몸을 일으켜 씻고 나오면, 기태정의 수하들이 소파 앞 테이블에 상을 차려주었다. 열심히 밥을 먹고, 또 자고, 가끔 기태정이 사다 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갔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는데…. 일단 사장 놈이 잠잠한 게 제일 불안했다. 수수료 문제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데, 정작 장부를 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구경하기도 힘드니 뭘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 그러고 보니까 김 소위한테서도 연락이 없네?”

    이것도 이상했다. 제법 요란하게 대피소가 털렸는데 하소연하는 말도 없다니. 물론 세화의 핸드폰은 진작 빼앗겼지만, 제가 아니면 사장이라도 찾아와서 드러누웠을 위인이 조용한 것도 수상했다. 혹은 기태정이 하우스 돌아가는 이야기는 전부 차단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인데…. 여기고 저기고 작정한 듯 입을 다물고 있으니 찜찜하기만 하다.

    어쨌든 오늘도 밥을 먹으려고 씻고 나와 머리를 탈탈 털고 있는데,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보니, 반쯤 열린 기태정의 침실이 보였다.

    며칠 만에 저 남자를 보는 거더라?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세화는 가운의 끈을 최대한 단정하게 동여매고서 쭈뼛쭈뼛 침실로 향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까지 그를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기태정은 나갈 준비를 하는 건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단추를 채울 때마다 옷감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능선 같은 등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왜.”

    도둑고양이처럼 문 앞만 뱅글뱅글 맴도는 걸 눈치챘는지, 기태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무심하게 물었다.

    “…오늘도 자리 비우시는 거예요?”

    제가 듣기에도 뭔가 바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사람 올 거야.”

    “사람이요? 왜요?”

    “배고파서 그러는 거 아냐?”

    “아, 그런 건 아니고… 오늘은 저도 나가서 일 좀 볼까 싶어서….”

    기태정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소매를 정돈했다. 요 며칠 저걸 너무 봐준 거 아닌가 고민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별 건 아니고 은행 좀 다녀오려고요. 사장이 때 되면 멋대로 출금해가거든요. 그런데 준장님이 빚 전부 갚아주셨으니까… 그러면 더는 빼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거 확인 좀 하려고….”

    세화는 다소 두서없는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굳이 밖에 나가서 할 일인가? 여기도 ATM기 있는 걸로 아는데.”

    “이상한 수 써놨을 게 뻔해서 저는 하우스 기계는 잘 안 써요. 그리고 나간 김에 저 머리도 조금 자르고 싶고….”

    재킷을 걸치고 벨트를 집으러 돌아선 기태정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긴가민가해진 세화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더 졸라도 되는 건가?

    “요즘 내가 너무 봐줬지?”

    아. 안 되려나 보나…. 시무룩하게 물러서려던 세화는, 순간 기태정의 입가를 스친 묘한 웃음기를 읽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순식간에 사라진 신기루 같은 미소여서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강아지도….”

    잠시 망설이던 세화는 조금만 더 매달려보기로 했다.

    “강아지도, 때 되면 산책은 시켜주잖아요. 법으로 정해진 시간만큼 산책 안 시켜주면 벌금 내야 한다고 그러던데….”

    “강아지? 네가 강아지야?”

    기태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세화는 붉어진 귓불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저라고 자신을 기르는 개에 비유해야 하는 상황이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가고 싶었다. 그의 등쌀에 어설프게 봉합해둔 옷장 속의 돈도 제대로 갈무리하고 싶었고, 바깥 공기도 쐬고 싶었다. 이전까진 별생각 없었는데 한 번 나갔다가 돌아오니 외출이 절실했다.

    무엇보다 매조를 만나봐야 했다. 사장과 김 소위의 동향도 궁금했지만, 최음제에 관해서도 물어보고 싶었다. 최음제를 섞어 먹으면 보통 남자의 뒤도 젖어 든다는 걸 기태정과 섹스하면서 처음 알았다. 그때야 그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해서 별생각 없었는데, 며칠 전 체질에 대한 다른 가능성에 대해 듣고 나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약을 먹고 애액을 흘리는 게 통상적인 반응인 건지, 제 수상쩍은 몸이 벌인 유별난 일인 건지 확인해둘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사람 붙일 거야.”

    초조하게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기태정의 입에서 다소 긍정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 하는 거 봐서 앞으로 어떻게, 얼마나 풀어줄지 나도 생각 좀 해볼 테니까 처신 똑바로 해. 알았어?”

    농담하는 거 아니라며 기태정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신이 난 세화가 냉큼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그는 조금 어이없어하며 시계의 버튼을 꾹 눌렀다.

    “박 소위.”

    - 예, 준장님.

    박 소위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기태정이 턱짓으로 침대 위를 가리켰다.

    “옷 좀 가지고 와. 우리 자기가 입을만한 사이즈로.”

    - 예, 알겠습니다.

    옷까지 준다는 걸 보니 정말 나가게 해주려나 보다. 이번엔 포댓자루 같은 거 말고 제대로 된 걸로 줬으면 좋겠다. 세화는 조금 들떠서 매트리스 위에 답삭 앉았다.

    “뭐해? 다리 벌려.”

    기태정은 협탁 서랍을 뒤적이더니 예의 그 패치를 꺼내 들었다.

    “…네?”

    “이거 감아야 할 거 아냐.”

    “그걸 왜….”

    “밖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저번처럼 허벅지에 감으려는 거면 일어나서 해도 충분할 텐데 기태정은 구태여 행위를 암시하는 것 같은 자세를 요구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저였다. 세화는 팔꿈치를 시트에 기댄 채 상체를 반쯤 눕혔다. 덤덤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흥분한 기색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눈길을 받고 있자니 절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세화는 주춤주춤 다리를 벌리고서, 최대한 가운 자락을 끌어 내려 헐벗은 성기를 감춰보려 애썼다.

    “주, 준장님…!”

    기태정은 그런 세화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민둥민둥한 자지를 손쉽게 끄집어냈다.

    “잠깐만요, 거길 왜…!”

    세화의 목이며 허벅지에 감기곤 했던 그 새까만 끈이, 이번엔 귀두 아래 우묵한 곳에 꼼꼼하게 둘렸다. 그새 익숙해진 손길이 닿았다고 성기의 심이 속도 없이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벌어진 다리 틈으로 공기 중에 노출된 구멍은 무언가를 기대하듯 작게 벌름거렸다.

    세화는 입을 꾹 다문 채 뻣뻣하게 힘을 주며 버텼다. 왜 이런 변태 같은 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그에게 따져 묻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민망한 소리를 흘려버릴 것 같았다.

    “애매하게 남았네.”

    좆을 묶고도 어중간한 길이로 패치가 남자 잠시 고민하던 기태정은, 이내 음낭 뿌리에 끈을 둘둘 묶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길게 잘랐어도 구멍 안에 매듭을 넣어주는 건데.”

    다음부터는 꼭 그렇게 해주겠다며, 기태정이 음낭을 묶은 검은 리본의 위치를 바로잡아주었다. 이게 대체 뭐냐며 따지려던 세화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기태정은 자기 뜻대로 할 거다. 그럴 거라면. 마음 바꿔서 못 나가게 하기 전에 얻을 수 있는 걸 최대한 뽑아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속옷… 주실 거죠?”

    말캉한 살덩이 위에 조그만 리본이 툭 얹히는 바람에, 발기하지 않아도 자지 기둥이 살짝 들린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이대로 바지를 입으면 아랫도리가 비정상적으로 툭 튀어나온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귀두 아래 대롱대롱 매달린 매듭의 모양이 고스란히 비칠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 자지에 리본 달고 있어요, 하는 꼴로 돌아다니게 할 순 없으니까. 설마 안 입고 나갈 생각이었어?”

    기태정이 탱탱하게 올라붙은 세화의 음낭을 철썩 내리쳤다.

    “아주 새빨갛게 익어서는…. 이 꼴을 보면 다 따먹고 싶어 할 거 아니야.”

    그런 또라이 같은 사람 아무도 없을 거라고, 당신뿐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삐딱해진 기태정이 패치로 매듭을 지어 구멍 안에 쑤셔 넣으면 어쩌나 싶어서, 세화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쪼끄만 게 나가서 담배 피울 생각 같은 거나 하지 말고.”

    기태정이 침대 옆에 놓인 생수 뚜껑을 따고는 돌연 세화의 머리채를 붙들었다. 뒤로 고개가 꺾이는 바람에 절로 벌어진 입안으로 물이 콸콸 쏟아졌다.

    “준장, 쿨럭, 님….”

    기태정은 한 걸음 물러서서 흐트러진 세화의 태를 감상했다. 자신이 빚은 결과물이 제법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더럽게 밖에서 볼일 보는 거 아니야. 싸고 싶어지면 재깍 돌아와. 알겠어?”

    세화는 아연실색해서 칭칭 묶인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난데없이 물을 먹인 건가? 화장실 가고 싶어지게 해서, 빨리 돌아오게 하려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쪼르륵 흘렀다. 설마… 앞으로도 이렇게 좆을 묶으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그것보다도….

    “그럼 저… 이거 풀면 안 되는 거예요? 화장실도 가지 말라고요?”

    “그래. 밖에서 얌전히 있었는지 검사 다 하고서 화장실 가게 해줄 테니까….”

    “아윽…!”

    기태정이 자지에 묶였던 끈을 슬쩍 당겼다가 튕기듯이 놓았다. 그리곤 강아지라도 다루듯 세화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나 올 때까지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아프긴 한데… 못 견딜 아픔까지는 또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애매하게 자극을 받으니 그만큼이나 애매한 성감도 함께 피어올랐다. 게다가 좆이 일어서니 패치가 단단해진 살덩이를 사정없이 파고들어서, 그의 말마따나 이렇게 묶인 채로는 싸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조신하게 있으면 아플 일 하나도 없잖아? 왜 자꾸 엄살일까, 우리 자기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아….”

    “자기가 음란해서 묶여놓고도 자지 벌떡 세우고 있는 거잖아. 아니야?”

    “아뇨, 정말, 아픈데….”

    “아프다면서 여긴 왜 그러는 건데?”

    예민한 부위로 전류 같은 통각이 흘렀다. 찌릿찌릿 흐르던 잔잔한 불편함은 어느 순간엔 무시할 수 없는 쾌감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종이 한 장 차이가 된 고통과 성감이 세화를 느른하게 들쑤시기 시작했다.

    “아직 안 끝났으니까 다리 제대로 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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