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48)화 (48/144)
  • #048

    “그냥….”

    세화는 손등을 들어 입가를 꾹꾹 눌렀다. 손가락 끝은 아직도 축축했다. 상추에서 묻어난 물기 때문인지, 기태정의 타액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맨몸으로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을 붙이고 서 있을 곳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가시고 나면, 기태정은 적선하듯 저에게 뭔가를 던져줬다. 당장 눈앞에 차려진 밥상이 그랬고, 이전에 받은 케이크와 장난감이 그러했으며, 사장 놈에게서 빼앗아 온 장부가 그랬다. 과자 부스러기에 꼬이는 개미처럼 발치에 떨어진 것을 하나둘 주워 먹다 보면 기태정에게 당했던 일들이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곤 했다.

    “이세화.”

    습격처럼 불린 이름에 세화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껍질 안으로 숨어버리는 거북이처럼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

    “아… 그게….”

    기태정의 미간에 힘줄이 빡 일어섰다.

    아니라는 걸 안다. 이번엔 놀리고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저를 부르려고 했던 거다. 아는데도… 일순 벙커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나 저도 모르게 과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방금 그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변명해보았지만, 세화의 표정에서 이미 많은 것을 읽은 기태정은 말을 말자는 듯 도로 집게를 집어 들었다. 새빨간 고기를 줄지어 불판 위로 눕히곤, 싸움이라도 걸듯 가위질을 해댔다.

    “준장님.”

    “…….”

    “제가 잘못….”

    고깃덩어리는 싹둑싹둑 잘리다 못해 거의 가루가 되어버렸다. 닥치라는 뜻이었고, 그다음은 네 차례가 될 거란 경고이기도 했다. 늘 그랬듯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도망치려고 했는데, 이 지랄맞은 남자는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세화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사과를 건넨 사람은 지극히 적었다. 이렇게 비싼 밥을 사주면서 어긋난 기류를 봉합해보려던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기태정이 처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건 싫은 기색이고. 그렇다고 아예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는데…. 그가 나름대로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건 알겠으나, 해석하기는 막막했다. 세화는 눈치껏 고개를 푹 숙이고서 느릿느릿 깻잎이나 뜯어 먹었다.

    “죄송해요, 저는 그냥….”

    “…….”

    “그냥, 맛있어서요.”

    생각 끝에 둘러댄 변명은 세화가 듣기에도 허술했다. 기태정은 화를 삭이려는 듯 냉수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음이 불편한 와중에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릴 생각이 든 건 이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 먹어봤기 때문이었다.

    “고기도 맛있고… 전에 주신 케이크도 맛있고… 다 맛있어요.”

    쌈을 싸주는 건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싶어서 둘둘 말아 올렸던 소매를 슬쩍 내렸다. 기태정은 가느스름한 눈매를 하고선 자취를 감춘 세화의 마른 팔 언저리만 바라보았다.

    “…너.”

    “네?”

    먼저 불러놓고선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두부를 퍼먹느라 빵빵하게 부푼 세화의 뺨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바라보다 못해 아주 그냥 쥐어 터트리고 싶다는 듯 시선만으로 잘근잘근 온 살갗을 짓씹어댔다. 어찌나 따갑게 쏘아보는지 지금 거울을 보면 죄 물어뜯겨 볼때기가 벌겋게 부풀어있을 것 같았다.

    “넌… 그거 다 먹고 나와라.”

    한참을 그러더니, 기태정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숨어있던 종업원들이 공손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벌써 다 먹은 건가? 운동도 열심히 하는 것 같고 체력도 좋아 보여서 많이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나보다. 물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두고서 세화 또한 허둥지둥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기태정은 아우터를 들고 오려는 종업원을 손짓으로 대충 물려버렸다.

    “괜히 눈칫밥 먹고 체해서 남 원망하지 말고.”

    세화는 멀거니 서서 눈만 깜빡였다.

    “지금은 무슨 말 해도 안 들릴 것 같으니까.”

    “…….”

    “먹고 다시 얘기해.”

    기태정이 상을 향해 눈짓했다. 세화는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불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저만 덜렁 남겨두고 가겠다는 소린 건가?

    “아, 안 드세요? 방금 제가 그랬던 건 정말 실수로….”

    “내 목소리 듣는 것도 싫어서 그 지랄을 떨어대는데.”

    “…….”

    “앉혀놓고 무슨 말을 하라고.”

    기태정은 안면이 있는 듯한 종업원에게 담뱃갑을 건네받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겨울 날씨나 다름없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어….”

    문을 여닫느라 써늘한 바람이 가게 안을 크게 휘젓고 갔다. 세화는 어정쩡하게 주저앉아 상 위를 바라보았다. 슬쩍 다가온 종업원이 싱싱한 채소를 새로 내어주었다. 혹시 계란찜 더 드시지 않겠냐며 상냥하게 물어오기도 했다. 황송할 정도로 친절했으나 그 대상은 세화가 아니라 자리를 비운 기태정을 향한 것이었다. 혼자 남은 사람의 난감함 같은 건 고려의 대상이 아닌 듯, 가지런히 담은 각종 밑반찬이 차곡차곡 차려졌다. 아까까지 입에서 살살 녹았던 고기가 이젠 가시처럼 세화의 목구멍을 삐죽삐죽 찔러댔다.

    ***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기태정은 숨도 못 쉬고 헉헉대고 있던 세화를 가게에서 건져내며 미련하다고 타박을 줬다. 자기가 다 먹으라고 해놓고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왜 역정을 부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의 기태정은 확실히 좀 이상했다.

    어쨌든, 도저히 차로 이동할 상태가 아니어서 약국이라도 다녀오겠다고 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저기, 하고 부르는 세화를 무시하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골목 앞에 차를 빼놓은 직원이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제 코가 석 자였던 세화는 남까지 신경 써줄 여력이 없었다.

    어디로 가냐고 묻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기태정의 뒤꽁무니만 쫓아가다 보니 어느덧 눈에 익은 길이 나왔다. 세화가 지내는 숙소 부근이었다. 주소를 말해준 적도 없는데 여긴 어떻게 알았지? 의아했던 건 잠깐이었다. 바보 같은 의문이었다. 자신의 뒷조사는 하우스로 쳐들어오기 전에 진작 마쳤을 게 뻔한데. 집 주소뿐 아니라 가지고 있는 숟가락 개수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간 아예 오질 못해서 많이 지저분할 텐데….”

    구질구질한 살림을 내보이기 부끄러웠지만, 기태정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나온 김에 챙겨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이때가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영영 챙겨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속옷은 꼭 가지고 가고 싶었다. 백만 원도 안 되는 돈이긴 하지만 옷장 속에 숨겨놓은 현금도. 잠금장치가 워낙 허술해서, 길게 자리를 비운 걸 알면 숙소 관리인이 슈킹할지도 모른다.

    “냄새만 좀 빠지면 창문 닫을게요.”

    세화는 기태정을 좁은 현관에 세워둔 채 부리나케 창가로 달려갔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창문을 활짝 열고, 주섬주섬 이불을 갰다. 봄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분명 기다려달라고 말했는데도 기태정은 멋대로 불쑥 발을 들였다. 장신인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원룸 안이 꽉 차는 것만 같았다. 여기 층고가 이렇게나 낮았던가. 제 키도 그렇게 작다고는 할 수 없는데….

    “잠깐만 밖에 계시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시키지도 않은 말이 주절주절 잘도 흘러나왔다. 세화조차 몰랐던 습관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손님들이 면박을 줘서 그런가, 저도 모르게 이런 버릇이 생긴 모양이었다.

    세화가 떠들어대든 말든 기태정은 감흥 없는 시선으로 조촐한 세간을 훑어보기만 했다. 그의 눈엔 보잘것없어 보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독방은 실장급 선수가 된 이후에나 받을 수 있었다.

    “담배도 피워?”

    어차피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사람이니 내 할 일이나 하자, 싶었다. 비닐 옷장을 열고 쓸만한 옷가지를 뒤적이고 있는데, 어느새 창가까지 다가간 그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담배야.”

    “…저 올해 성년의 날 맞는데요.”

    “…뭐?”

    스물한 살이니 충분히 어른이니까 담배 피워도 되지 않냐는 뜻으로 대꾸한 거였는데, 기태정은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얼굴을 하고선 턱만 쓸었다. ‘성년의 날….’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

    “…내가 내 생각보다도 씹쓰레기였네.”

    기태정은 난데없는 자조에 젖은 채 얄팍한 담뱃갑을 뒤적였다. 그러면서도 또 한 번 성년의 날, 하고 곱씹었다.

    세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떨이 위에 올려둔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이 또한 습관이라면 습관이었다. 담배를 물고 있는 손님이나 윗사람한테 당연히 해야 하는 일. 한쪽 손으로 들이치는 바람을 막은 채 라이터를 켜자, 잠시 위태로운 불씨를 바라보던 기태정이 느리게 상체를 숙였다. 타닥. 연초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반대편 건물 전광판의 불빛에 비친 기태정의 얼굴은 반쯤 먹색으로 번져있었다.

    품이 큰 상의 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훅 밀려 들어왔다. 빗어 넘기지 않은 기태정의 머리칼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담배 연기는 내뱉자마자 춤을 추듯 사라져버렸다. 꽃이 피기는커녕 한바탕 눈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숨통 좀 트여주라고 하더라.”

    한참을 아무렇게나 바깥만 바라보다가 툭 뱉은 그의 말은… 제법 의외였다. 3월, 촌스러운 제 별칭이 새겨진 라이터만 괜히 만지작거리던 세화는, 저한테 하는 소리가 맞는 건가 싶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앞으로도 계속 써먹을 생각이라면, 고장 나지 않게 숨 쉴 틈은 주라고.”

    기태정은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그 조언을 빌어 오늘의 청승은 넘어가 주겠다는 듯이.

    “…저요? 저한테요?”

    “그럼 씨발,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세화는 조금 얼떨떨해져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옆태를 훔쳐보았다. 그럼 부모님 얘기 들려주겠다고 하고, 난데없이 고깃집에 데려가서 삼겹살 다 구워주고, 자리 비워줄 테니까 혼자서 다 먹으라고 했던 게…. 나름대로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그랬다는 건가?

    빤히 보는 세화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기태정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건네줬다. 세화는 얼떨떨하게 싸구려 담배를 받아들고 입에 물었다. 부싯돌이 한 차례 더 번쩍였다. 이쪽을 돌아보는 기태정의 눈동자 속에 주홍빛 원이 그려졌다. 스러지는 불꽃의 테두리 안으로 담배를 문 세화의 모습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뱉자, 과식으로 불편했던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간 사무실 안에 갇혀있었던 터라 흡연 자체가 오랜만이기도 했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흡입에 집중하고 있는데, 문득 옆얼굴이 따끔거렸다. 기태정은 담배를 피우는 세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화 또한 굳게 다물린 기태정의 입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만약 지금 그가 입을 연다면 이전과는 색과 온도가 다른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준장님.”

    세화는 밑바닥에 숨어있던 용기를 싹싹 긁어모으며 간신히 그를 불렀다. 수없이 판돈을 쥐어봤던 본능이 속삭였다. 지금이라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저 담배도 피우고… 욕도 잘해요.”

    “…….”

    “…잘 울지도 않고요.”

    “이게 어디서 구라를 쳐.”

    “진짠데요. 표정 하나도 안 변한다고, 재수 없다고 다들 뒤에서 저 욕했어요.”

    실없는 소리가 퐁퐁 흘러나왔다.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는데, 속에 뭔가가 가득 들어차서 더는 말을 집어삼킬 여력이 없었다. 툭 치면 그대로 펑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세화는 당장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토해내기로 했다.

    기태정은 누군가에게 제 숨통 좀 트여주란 충고를 받았다는 얘기를, 굳이 자신의 앞에서 꺼냈다. 세화는 그걸, 오늘은 선을 좀 넘어도 자신을 봐주겠다는 뜻으로 읽기로 했다. 그러니까….

    “…준장님.”

    평소처럼 각이 잡힌 슈트가 아닌 편안한 옷을 입은 그가, 코딱지만 한 자신의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대꾸는 없었어도, 용건도 없이 부르지 말라고 면박은 주지 않았다.

    “앞으론 저더러 뭐라고 하시든 토 안 달고 준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할게요.”

    “…….”

    “편하게 부르세요. 구멍이든, 좆… 집이든…. 저 그거 다 맞으니까요….”

    “…….”

    “귀염 떠는 법은 모르겠지만 저번처럼, 벙커에서… 그랬던 것처럼 건방지게 굴진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기태정이 내던진 칼날 같은 말은 만년설처럼 녹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영영 남아있을 것 같았다. 함부로 대하는 걸 알면서도 결국은 좋다고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벙커에서의 시간이, 키스하기 싫다고 거절했다가 창놈 소리나 들으며 손목이 뒤로 꺾였던 그때가 아직도 세화의 머릿속에 악몽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다만, 조금 전 군소리 없이 고기를 구워주고, 몇 번이고 소리를 지르려던 걸 참았던 게 그가 나름대로 저에게 보냈던 사인이었던 거라면….

    그렇다면 세화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가 봐줄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인지. 또 자신이 어디까지 용기를 낼 수 있는지. 오늘 정신을 차리고 기태정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채근하고 싶었던 비겁한 속내가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해치지 않겠노라 판을 깔아주고 나서야 비로소 차오른 비굴한 신념이었다.

    “이름은… 그렇게 안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너무 속상해서요. 물론 제 기분 같은 거 준장님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사과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게 성립될 신분이 아니었으니까. 기태정이 너라고 부르든 자기라고 부르든 삼월이라고 부르든 이젠 상관없었다. 이세화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 괜찮았다. 다만 벙커에서 그랬던 것처럼 명백한 조롱의 수단으로 이용하지만 않았으면 했다. 그거면 됐다. 이 남자에게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았다. 여기까지만 지켜준다면. 이 선까지만 허락해준다면, 세화는 지금 이상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견딜 만할 것 같았다.

    “…오늘 밥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이랑 밥 먹기 싫다고 거부해서 죄송하다고 굽히는 대신, 주섬주섬 고맙다는 말을 골랐다. 누가 들으면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지키고 싶었던 세화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맛있었어요. 정말로요….”

    덧붙이는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렸다.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당장 손에 쥔 담배로 제 눈을 지져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태정은 다만,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새카만 눈으로 세화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추위로 피어오른 하얀 김이 뒤섞여 내뱉는 숨이 유독 길었다.

    “…입 벌려.”

    “…….”

    “입 벌리라고.”

    적어도 세화의 혓바닥에 담뱃재를 털 생각은 아닌 듯, 재떨이에 단초를 비벼 끄면서 그가 짧게 명령했다. 키스, 라도 하려는 건가…?

    “…….”

    세화는 눈을 내리깔고서 순종적으로 입술을 열어 보였다. 비현실적으로 긴 기태정의 속눈썹이 뺨을 간지럽혔다. 맞닿은 입술 틈으로 매캐한 싸구려 담배 연기가 흘러들어왔다. 이름 가지고 장난질만 안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던 조금 전 세화의 다짐을 시험해보는 것 같은 키스였다. 벙커에서 입맞춤을 거부했던 게 기태정에겐 제법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모양이었다.

    “팔 내밀어.”

    세화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담배를 거두어가며, 기태정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얌전히 내밀자 곧장 양 손목이 붙들리고, 손가락이 넝쿨처럼 얽혔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최대한 태연하게 굴고 싶은데… 자꾸만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원망할 대상도 목적도 잃은 두려움과 서러움이, 무작정 칭얼거리고 싶은 어린 마음이 한데 엉켜 끓어올랐다.

    “…으, 응….”

    코끝을 빨갛게 얼리는 찬 바람이 불고, 싸라기눈 같은 담뱃재가 하늘하늘 나리고, 골목 너머로 희미한 가로등이 켜지고, 남자의 마른 입술이 세화를 전부 집어삼켰다.

    얌전히 잘 참은 상이라도 주듯 다시 시작된 입맞춤은 그리 거칠지 않았다. 이번엔 손목을 비틀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데도 못 가게 하려는 듯 단단히 붙들고만 있었다.

    기태정에게선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그렇지만 세화는 그때처럼 잔인하게 굴진 않겠다는 대답을 벌써 들은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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