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47)화 (47/144)

#047

“여기서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기태정은 세화가 했던 말을 느릿느릿 따라 했다. 무슨 감정인지 읽히지 않는 목소리는 사람을 괜히 위축되게 했다.

“너 같은 새끼랑 마주 보고서 밥 처먹기 싫으니까….”

그가 성큼 다가올 때마다 칼날 같은 걸음에 자리가 움푹 패는 것 같았다.

“할 말만 하고 썩 꺼지라는 거야?”

작게 뇌까린 끝말은 분명 욕이었다. 원래도 입이 험한 남자였지만 저런 식으로 자기 성질을 못 이겨 할 땐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저래놓고 수틀린다고 자기 수하들 눈과 혀를 뽑아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니라고 변명해야 했다. 사실 그런 의미가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수긍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설프게나마 부정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빤히 저를 쳐다보는 기태정의 안광이 무시무시해서, 세화는 빠르게 답을 내놓질 못했다. 눈에 다 보이는 거짓말로 그의 화만 더 돋우게 되면 어떡하나 무서웠다. 괘씸하게 굴었다고 제 숨통을 물어 뜯어놓을 것만 같았다.

“입에 발린 소리도 안 하지?”

어이가 없다는 듯 기태정이 코웃음을 쳤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 건 아니고….”

세화는 달리 눈을 둘 곳이 없어 달싹이는 기태정의 입술을, 꿈틀거리는 아래턱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기태정은 무슨 폭격을 쏟아내야 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지 가늠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바늘 같은 아픈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입매를 비틀 듯 콱 다물어버리고선, 자꾸만 앞으로 쏟아지는 머리칼을 성의 없이 빗어넘기기만 했다.

세화 또한 머뭇머뭇 눈을 굴려 기태정의 눈길을 따라갔다. 그의 날 선 시선은 세화가 걸치고 있는 상의, 정확히는 깃에 박혀있는 표식을 향해 있었다. 별과 꽃과 새. 다른 누구도 아닌 기태정의 물건임을, 그의 소유임을 확인시켜주는 낙인이었다.

다시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에는 약간의 여유가 돌아와 있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기태정은 자신의 표식에 감싸인 세화를 보고서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예전에 골치 아픈 새끼가 하나 있었어. 심문은 하되, 절대 죽여선 안 됐는데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지. 아주 씨발, 좆같이 잘 알아서 문제였어.”

“…….”

“자기한테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라면서 대뜸 혀부터 자르더라고? 그 미친 새끼가.”

‘멍청하지 않아? 자백이야 글씨로도 받아낼 수 있는 건데.’ 하며 기태정이 언젠가를 회고했다. 평화로운 때를 떠올리기라도 하듯 순순한 얼굴이었으나, 그 단조로운 낯에서 세화는 불같은 분노로 들끓었을 남자의 어느 시절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수액 같은 것도 필요 없고 그냥 죽어버릴 거라고 지랄발광하는 새끼 살려놓겠다고 내가 무슨 지시를 내렸을 것 같아.”

“…….”

“목구멍이 아니더라도 받아먹을 수 있는 곳은 많거든.”

기태정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의 시선이 흘끔 향한 곳은 세화의 하복부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혹시 일전에 제 구멍을 가리켜 아랫입 운운했던 게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던 걸까….

“좋은 말 할 때 먹어. 그 꼴 당하기 싫으면.”

“…….”

“비싼 약으로 처발라서 상태 멀쩡한 거 다 아니까, 아직 속이 안 좋다느니 그딴 개소리하지 말고.”

세화는 전기 침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얕게 떨었다. 그저 밥 생각이 없다고 했을 뿐이었는데 되돌아온 건 잔혹한 고문의 암시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서러움이 심장을 자근자근 뭉개고 갔다. 기절 직전까지 벌어졌던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며칠 만에 정신을 차린 거라고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 당장은 밥 먹기 싫다는 거, 누구나 보일 수 있는 평범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지, 세화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참고로 그 새끼는 살가죽을 벗기기 시작하니까 바로 자백하더라고. 진짜 멍청하지?”

그럴 거면 혀는 왜 자른 건지 모르겠다며 기태정이 픽 웃었다. 아랫입술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던 세화는 결국 군소리 없이 커다란 아우터를 뒤집어썼다. 그의 손에 들려있을 땐 가벼워 보였는데, 막상 몸에 걸치니 제법 묵직했다. 어깨에 얹힌 휘황찬란한 별무늬 때문일까.

“고기 좋아해?”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남의 취향 같은 건 왜 물어보는 걸까. 세화는 발밑이 쑥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기태정의 손이 당장이라도 걸치고 있는 옷을 찢어발기고, 제 뼈와 살을 분리하려 달려들 것 같았다.

***

차가 멈춘 곳은 세화의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목이었다. 근방에 있는 식당이라고 해봐야 싸구려 백반집뿐이어서 의외였다. 기태정의 걸음이 향한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가게였다. 간판도 없어서 이런 곳에 고깃집이 있는 줄도 몰랐다.

“4환에 가장 큰 도축장이 있어서 돼지고기는 여기가 제일 신선해.”

성 안의 사람들이 가끔 바람 쐬러 놀러 오는 곳 몇 군데가 있는데 그중 하나라고 했다. 기름 찌꺼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바닥, 고기를 굽는 곳인데도 쾌적하기만 한 공기, 물때라곤 하나도 없는 식기, 필요한 것들은 알아서 올려주고 자취를 감추는 멀끔한 행색의 종업원들…. 기태정의 말을 듣고 난 이후인지 식당의 모든 것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뭐랄까 이건, 세트장처럼 예쁘게 꾸며진 허름함이었다. 세화는 어쩐지 묘한 기분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어떻게든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을 치던 4환의 구질구질한 모습이 누군가에겐 유희처럼 즐기는 불량식품 같은 것일 수도 있구나….

식당 안을 전부 다 빌린 건지, 내부는 제법 널찍했는데도 손님이 한 테이블도 없었다. 제가 일어날 때를 예측하고서 예약을 해두진 않았을 것 같고…. 아마 기태정이 패악을 부려 있던 손님들을 다 쫓아낸 거겠지 싶었다.

세화가 속으로 괜히 구시렁거리는 사이 먹음직스러운 밑반찬이 차려지고, 몸통이 하얀 숯불과 불판이 들어왔다. 선홍빛 고기가 치익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큰 공사 마칠 때나 얇은 냉동 고기를 주워 먹어봐서, 돼지고기가 이렇게 선도가 좋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건드리면 아삭아삭 소리가 날 것 같은 싱싱한 콩나물무침과 적당히 익은 김치가 가장자리에서 지글거리며 구워지기 시작했다.

기태정은 집게도 쥐지 않은 채 가위만으로 고기를 싹둑싹둑 잘도 잘라냈다. 그것도 한 손으로.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자를 대고 칼로 자른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일정한 크기였다. 썰고 베는 것이 저렇게 능숙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봤을까…. 세화는 고개를 파르르 떨며 무서운 상상을 떨쳐냈다.

처음엔 어색한 침묵을 또 어떻게 견뎌야 하나 막막했는데, 신기한 가게와 차려진 상을 구경하느라 시간은 잘만 흘렀다. 그래서 이런 곳은 얼마나 받을까. 돈 없는데…. 거기까지 생각의 가지가 뻗어 나갔을 무렵 다 익은 고기가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때맞춰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와 고봉밥처럼 위로 불뚝 솟은 계란찜도 차려졌다. 찌개 속 송송 썰린 청양고추와 하얀 두부가 먹음직스러웠다. 심지어 자투리 같은 게 아니라, 네모나게 깍둑 썬 두툼한 고기가 국물 속에 꽉 들어차 있었다. 밥 생각이 없다고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너 내숭 떨어?”

“…네?”

“잘 먹는 거 아니까 빼지 좀 말지?”

아니면, 하고 기태정이 뜸을 들였다. 이번엔 또 무슨 끔찍한 협박을 하려나 싶어서 세화는 냉큼 젓가락을 들었다. 불편한 마음에 삐걱삐걱 어색하게 손을 놀렸던 건 잠시였다. 깨끗이 씻은 상추 위에 포슬포슬한 쌀밥을 얹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올렸다. 고기 기름에 구워져 풍미가 더해진 김치와 콩나물무침은 덤이었다.

“생각 없다더니?”

쌈을 꼭꼭 씹어먹는 세화를 보고 기태정이 어이없어했다. 민망해진 세화는 고개를 숙이고서 속으로 숫자를 셌다. 저의 남루함은 새삼 숨길 것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허겁지겁 먹으면 같이 먹는 사람 밥맛도 떨어질 테니까.

이십까지 천천히 헤아리고 나서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쌈을 몇 개 더 싸 먹고, 양파를 절인 간장에도 콕 찍어 먹고, 계란찜까지 크게 한 숟가락 들고나서야… 혼자서만 신나게 먹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맞은 편에 앉은 남자는 묵묵히 고기만 잘라대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지 위에 뭘 걸치지도 않고 나온 그는, 불 앞에 있어서 덥기까지 한지 이젠 소매도 걷어붙이고 있었다.

“저기… 제가 구울까요?”

씹던 것을 냉큼 삼키고서 세화가 슬쩍 손을 뻗었다. 이번엔 정말로 제가 눈치 없이 굴었다. 기태정의 신분을 생각하면 어디서 고기나 구울 짬이 아닌데. 또 수틀린 남자가 무슨 지랄을 떨어댈지 모르니, 이왕 식당까지 온 거 얌전히 아랫사람 노릇이나 해주기로 했다. 게다가 그에게 들을 얘기도 있지 않았던가.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이게 누굴 꼰대 취급하고 있어.”

주는 대로 처먹기나 하라며 기태정이 불판 위로 마늘을 와르르 쏟아부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팔뚝의 근육이 울룩불룩 일어섰다. 세화는 고민에 빠졌다. 저 말을 순순히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여태 기태정이 했던 얘기 중 곧이곧대로 믿어도 됐던 게 있긴 했던가? 끝까지 안 하겠다고 해놓고선 결국 삽입했다. 별일 아니라고 해놓고선 범죄자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대피소를 털자고 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아니면 알맹이는 쏙 빠진 얘기뿐이거나.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다, 아주. 밥 생각 없다고 지랄했던 건 어디 사는 누구셨어요?”

난감해진 세화는 눈썹을 아래로 꺼트렸다. 단순히 놀리는 것인지, 비난하는 어조인지 알 수 없었다. 세화가 자기만 먹고 있는 상황을 불편해한다는 걸 깨달은 기태정은 그때부터 생색을 잔뜩 내며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정말 얹히라고 그러는 건지, 괜찮다고 만류해도 찌개도 떠주고 찬도 가까이 밀어주었다. 고의인 게 분명했다.

대체 뭐 어떡하라는 건지. 울상이 되어 고민하던 세화는 퍼뜩 드는 생각이 있어, 주섬주섬 상추를 집어 들었다. 밥도 푸짐하게 올리고, 고기도 세 점이나 넣고, 당장이라도 옆구리가 터질 것 같은 풀때기를 조심조심 달래가며 둥글게 쌈을 쌌다. 이렇게 계속 기태정 눈치나 보다가 체하느니 뭐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쌈이라도 싸주면, 적어도 팔자 좋게 받아먹기나 한 건 아니니까….

“저기….”

상추 끝을 동그랗게 오므리고서 기태정을 불렀다. 그는 눈썹만 까딱여 세화를 보았다.

“이거….”

우물우물 말을 흐리자, 기태정은 세화가 싼 쌈을 바라보기만 했다.

“뭐 어쩌라….”

핀잔을 주려던 기태정의 낯이 돌연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눈동자만 움직여 자신을 향해 들이민 쌈을 바라보았다. 한 박자 늦게 세화의 의도를 이해한 모양이었다.

잠시 굳어있던 기태정이 잇새로 바람을 훅 불었다.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가 얕게 흔들릴 정도로 제법 거친 움직임이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괜히 오버한 건가. 민망해진 세화는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끄집어내며 중얼중얼 변명했다. 저만 편하게 먹는 것 같아서, 원래 고기 굽고 반찬 나르고 하는 건 어딜 가도 제일 어린 자신의 몫인지라 이렇게 받아먹기만 하려니 마음이 좀 불편해서, 또 부모님 얘기도 해주신다고 했는데 아쉬운 건 저니까….

그렇지만 불판 위를 가로질러 쭉 뻗은 손이 뜨끈뜨끈해지도록, 기태정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세화의 손끝을 바라보기만 했다. 커다란 소매를 둘둘 걷어붙이느라 드러난 허여멀건 팔뚝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벌겋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더는 무안함을 이기지 못한 세화가 도로 상추 쌈을 물리려고 하자,

“…….”

그제야 기태정이 몸을 숙였다. 키스라도 하듯 고개의 각도까지 틀고서는, 커다란 쌈을 전부 집어삼켰다. 와삭, 채소 줄기가 씹히는 감촉이 손끝까지 진동했다. 숫제 손가락까지 씹어 삼킬 것 같은 기세에 흠칫 놀란 세화가 뒤로 빼려고 하자, 얌전히 있으라는 듯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기태정은 세화의 손가락을 한 마디 정도 삼키고선, 손톱 아래 볼록한 살에 맺혀있던 물기까지 모조리 핥아먹고 나서야 물러섰다.

“뭐해. 더 안 만들고.”

엄지로 입가를 대충 훔쳐내며 기태정이 거만하게 턱짓했다.

“더… 요?”

“그럼 뭐, 이번엔 내가 싸다 바쳐줘?”

세화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기태정이 만들어준 걸 받아먹으라고? 생각만 해도 얹힐 것 같았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기다란 소매를 다시 돌돌 걷어 올리고서, 상추의 물기를 탁탁 털었다. 볼 안에 빵빵하게 먹이를 주워 담는 햄스터처럼 초록색 풀 안에 고기를 가득가득 욱여넣으며 부지런히 손을 굴렸다.

먹고 산다는 건 대체 뭘까. 밥 생각 없다고 한마디 했다가 살 거죽을 벗겨버리겠다는 협박이나 들어놓고선, 막상 고기반찬을 보니 눈이 돌아가서 잘도 목구멍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그러다 못해, 이젠 내내 저를 아프게 했던 남자의 눈치나 보면서 상추 쌈이나 싸다가 바칠 준비 중이다. 직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기태정과 마주 앉아서 밥이나 먹고 있는 이 상황이, 뒤늦게야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래도 갖추고 있던 삶의 틀이 썩 멀쩡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기태정을 만난 이후로는 그마저도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젠 그를 원망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쉽게 수긍하고, 쉽게 무너지고, 또 쉽게 괜찮아져서 잘도 밥이나 밀어 넣고…. 그냥, 뭐든지 쉬운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뭔데, 또.”

“네?”

“왜 그렇게 웃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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