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46)화 (46/144)

#046

욕이라도 집어삼키는 걸까. 지척에서 흩어지는 숨소리가 사나웠다. 세화는 눈을 질끈 감고서 따뜻한 손이 제 얼굴을 밀쳐내기를 기다렸다.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감은 시야는 피멍이라도 든 것처럼 새파랬다.

그러나 체감상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겨우 얻어낸 온기가, 여전히 세화의 얼굴 아래 놓여있었다.

“…….”

안도를 되찾자 뻣뻣하게 굳어있던 어깨가 축 가라앉았다. 늘 생각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이 없었다. 매몰차게 버림받지 않은 것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살만해지니까 또 다른 바람이 솔솔 피어올랐다. 이젠 남자가 저를 좀 쓰다듬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아까처럼 이마나 뺨을 살살 어루만져줬으면. 그거 되게 기분 좋았는데….

실컷 들떠서 상상을 부풀려가던 세화는 이내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 욕심을 접었다. 세화가 사는 곳은 까마득한 밑바닥이었다. 열심히 날갯짓을 해봤자 영원히 비상할 순 없으니 언젠간 땅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발을 디딜 지점은 남들보다 한참 아래였다. 추락하는 순간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언제나 아팠다. 그러니 이쯤에서 만족해야 한다. 어차피 이 이상의 다정함은 가져본 적이 없으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늘 그랬듯 체념은 빨랐다.

“물 줘?”

머리꼭지로 무심한 물음이 툭 떨어졌다. 세화는 눈을 감고서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챙겨준답시고 멀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세화의 바람과는 달리 멀리서, 아니 가까이서… 하여튼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자가 내어준 손을 빼진 않았다는 거다. 뚜껑이 열리는 소리, 꿀꺽꿀꺽 액체가 넘어가는 소리, 페트병 아래를 우그러트리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바쁘게 움직이는 반대편 손을 따라 세화가 깔아뭉개고 있는 손등 위에도 핏줄이 벌컥대며 일어섰다. 세화는 이렇게 바투 맞대고 있어야 겨우 느낄 수 있는 그 미세한 약동이, 어쩐지 관능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대신 목 뒤로 체온이 감겨왔다. 분명 뺨을 기대고 있을 때만 해도 적당히 따끈따끈하다고 생각했는데, 손가락으로 몸의 다른 곳을 짚어주니 아스스해졌다. 갑작스러운 어루만짐에 절로 어깨를 움츠리는데, 얼굴 위로 불쑥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을 감고 있어도 남자가 지척에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른 입술 위로 촉촉한 살이 느릿느릿 내려앉았다. 남자의 입술이었다. 놀라 슬쩍 벌어진 틈으로 물이 꿀렁꿀렁 넘어왔다. 뒷덜미를 움켜쥔 손가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서 일순 골이 띵 울릴 정도였다. 그러나 불쾌한 감각은 잠시였다.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고 나서야, 세화는 제가 무척 목이 마른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마른 갈증이 일었다. 꿈이라서 그런 걸까, 감각의 전이가 힘겨웠다.

남김없이 받아 마셨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뜨거운 혀가 입 안 구석구석을 훑고 갔다. 남자는 세운 혀끝으로 입천장을 가르고, 맞닿은 살을 묵직하게 문지르다 물러섰다. 입가에서 뺨을 타고 흐른 물기를 쪽쪽 입 맞추듯 빨아들이고,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기도 했다.

그 정도 물로는 해갈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벌써 입술이 다시 말라가고 있었다. 아쉬워진 세화는 간절히 남자에게 매달렸다. 더 주세요, 조금 더요. 말하지 않아도 졸라대는 게 느껴졌는지 마주 닿은 그의 입매가 작게 호선을 그렸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또.”

말투는 질책에 가까웠지만 세화는 그 안에 숨겨진 실바람 같은 웃음을 읽었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제가 먼저 하압, 하고 욕심껏 남자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조금 전 남자가 그랬듯 아프지 않게 입술로만 감싸자, 그가 흔쾌히 입을 벌려주었다. 안쪽의 여린 살이 맞물렸다. 세화는 서툴게 호흡하면서, 남자의 혀를 허겁지겁 빨았다.

약간의 물과 키스 덕에 조금은 정신이 돌아온 것도 같다가도, 여전히 몽롱했다. 아니, 입을 맞출수록 열로 들뜨는 기분이었다. 세화는 허우적거리며 팔을 뻗어 남자의 어깨 위에 슬쩍 손을 얹었다. 취기처럼 번진 열을 붙들고, 가물거리는 시야를 스쳐 가는 어떤 기억을 붙들려 애썼다. 세화는 돌덩이처럼 단단한 이 어깨의 주인을, 이마를 짚고 뺨을 쓸어준 꿈속의 남자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알고는 있었다. 이 감촉을, 영영 부술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몸을… 분명 알고 있었다.

“잘, 못… 했어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데없는 사과가 툭 튀어나왔다.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내뱉은 구걸에, 손을 올리고 있던 근육질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아서, 세화는 고개를 슬쩍 갸웃거렸다.

“다시는 안… 그럴, 게요….”

그 와중에도 굳은 혀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입 안은 버석버석 말랐는데 사죄하는 말은 샘처럼 고여서, 퍼내도 퍼내도 줄어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준장, 님… 제가….”

준장님…. 그게 누구였더라.

“다시는….”

“하.“

남자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조금 전 둥근 호선을 그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조소였다.

“자기라고…, 불러…, …소리도 잘, 낼… 테니까….”

더듬더듬 알 수 없는 말이나 내뱉는 못난 입술 위로, 물기를 머금은 차가운 살갗이 다시 내려앉았다. 주는 대로 꿀꺽꿀꺽 받아마시다가도, 세화는 몇 번이나 더 용서를 구했다. 마음처럼 혀가 구르질 않아 조급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을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왜냐면… 그랬다간, 또….

“씨발, 너 입 안 다물어?”

더듬거리며 한심하게 굴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남자가 화를 냈다. 턱 끝으로 더운 눈물이 뚝뚝 고였다. 속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은 남자의 깊은 탄식이 얼굴을 훑고 갔다. 겨우 붙들고 있던 의식의 귀퉁이가 조금씩 이지러졌다. 꿈속에서도 결국 누군가의 미움을 사고야 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

“아윽….”

무의식중에 몸 좀 뒤집으려고 했던 건데, 온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절로 정신이 들었다. 세화는 느릿느릿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속눈썹이 눈물에 죄 엉켜있어서, 고양이 세수하듯 몇 번이고 눈두덩이를 문지르고서야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다.

멍한 눈을 몇 번 깜빡여 초점을 맞추고 나니,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일단 걸치고 있는 가운부터가 이전에 입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훨씬 천이 도톰했고 사이즈도 컸다. 이런 걸 입고서 이불까지 꼭꼭 덮고 있으니 땀을 뻘뻘 흘렸지 싶다.

세화는 조심스럽게 시트를 걷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새 물침대에 익숙해져서 아래 깔린 매트리스의 감촉도 낯설었다. 머리맡에 나부끼는 커튼을 걷어내자, 밖은 온통 불그스름했다. 새벽? 아니면 노을이 지는 건가? 24시간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동네라 더더욱 시간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선수 상시 대기, 정성으로 모십니다… 언제 봐도 촌스러운 현수막이 바람에 흐느끼듯 나부끼고 있었다. 벙커에서 언제 어떻게 이동한 건진 모르겠지만… 자면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바깥의 풍경을 보아하니, 여기가 하우스 안인 건 확실했다. 게다가 숨길 수 없는 촌스러움이 묻어나오는 가구는 확실히 사장 놈의 취향이었다.

하우스 안이면서도 세화에게 다소 낯선 곳이라면…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군인들이 못 들어가게 막았던, 기태정의 침실.

안은 평범했다. 세화에게 내어준 방보다야 크기는 컸지만, 구성은 똑같았다. 침대,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욕실. 차이점이 있다면 한편에 큼지막한 옷장이 있다는 것과 정말로 쉬는 것이 목적인 공간이라는 게 느껴진다는 것 정도?

땀이 마르기 시작해 버스럭거리던 머리칼을 쓸어넘기던 세화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모르겠다. 찝찝하니, 일단 씻고 생각하고 싶었다.

기억이 뭉텅뭉텅 썰려있었다. 어쨌든 기태정이 심하게 대했던 거… 그건 확실히 생각이 났다. 정신을 잃기 전, 끝이 매우 안 좋았다는 것도. 중간중간 기절했다가 눈을 뜨면 여전히 그의 좆이 제 안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세화는 가물가물한 머릿속을 뒤적였다. 샤워부스 안이 습기로 희미해지자, 반대로 애써 밀어두었던 의식의 조각은 선명해졌다. 아아. 그래. 기태정은 왜 자길 좋아하느냐고 비웃었다. 그래서 부정했고… 오기로 대들었다가 호되게 당했다.

기태정은 세화의 이름을 멋대로 불렀다. 그 안에 담긴 세화의 소박한 바람을 내동댕이쳤다. 일부러 자기야, 하는 친밀한 애칭으로 부르며 감히 연민을 품었던 세화의 마음을 비웃었다. 이전까지는 수치심을 주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같더니, 이젠 세화가 느끼는 방향으로만 찔러넣으며 집요하게 반응을 유도했다. 저 좋으라고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게 편하니까, 싫다고 울면서도 결국은 매달려 질질 싸는 꼴을 비웃고 싶으니까, 그냥 재밌으니까… 그런 거였다. 마음과 엇나가는 몸뚱어리가 싫어서,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고 결국은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그게 전부였다.

세화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가만히 물을 맞고 서 있었다. 좋아하냐니. 잘못했다고, 다신 안 대들겠다고 빌긴 했어도 저 말은 아직도 동의할 수 없었다. 기태정이 대체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평소 이상형 같은 걸 정해두진 않았지만, 굳이 고르자면 다정한 사람이 좋았다. 그런 사람을 마음에 품고 싶었다. 어차피 제 주제에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보통은 끼리끼리 만나게 되니까. 함께 있어봤자 서로의 신세만 망치는 꼴이라는 걸 알면서도 곁에 있어 주고 싶은 이를 만나서, 그가 겪었을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더는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갚을 빚이 두 배로 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기태정은…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의 외양이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넋을 놓고 훔쳐보기도 했고 가끔은 기태정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렐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피조물에 대한 경외일 뿐이었다. 친밀한 감정이 아니라 단순한 놀라움에 불과했다. 세화도 이제는 안다. 그 미모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독이다, 그러니까…. 기태정에게 마음 같은 거, 준 적 없었다.

세화는 멈춰버린 손을 들어 몸에 남은 거품을 모조리 쓸어냈다. 뒤늦게야 여기서 씻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곤하고 찝찝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욕실로 비척비척 걸어오긴 했다만, 여기가 기태정의 침실이 맞다면…. 그는 자기 침대에서 재워준 걸로도 엄청나게 생색을 낼 위인이었다. 그런 와중에 팔자 좋게 여기에서 샤워까지 했으니. 이번엔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까.

세화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더는 기태정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장부는 이제 그의 손에 있다. 새로운 신분증은 약속만 받았지, 구경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김 소위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이상 저를 놓아줄 생각도 없을 거다. 당분간 무섭고 싫어도 계속 봐야 하는 사람인데… 이 이상 트집이 잡히고 싶진 않았다.

“이젠 좀 살만한가 본데.”

서둘러 벽에 샤워기를 걸어두고 수전을 잠그자마자,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세화는 깜짝 놀라 발을 삐끗했다. 하마터면 크게 넘어질 뻔했는데, 수전과 샤워부스 벽을 빠르게 붙들어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낮게 혀를 차며 기태정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운동이라도 하고 왔는지 편안한 차림인 그는 땀으로 범벅이었다. 딱 달라붙은 티는 떡 벌어진 가슴과 쪼개진 근육의 형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슈트를 벗고서 머리까지 내리고 있으니, 평소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면… 지난 밤 저를 괴롭혔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세화는 또 말문을 잃고 멍하니 기태정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왜. 씻겨주게?”

그게 아니면 나오라며 기태정이 턱짓했다. 욕실 쓴 건 그냥 넘어가 주는 건가. 세화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샤워부스 안을 종종 빠져나왔다. 벽에 걸린 타월을 집어 간신히 앞만 가린 채 그의 곁을 비껴갔다. 꿰뚫을 것 같은 시선이 옆얼굴을, 그리고 뒤통수에 와닿았다.

마주치면 분명히 한 소리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벙커에서 했던 것 같은 소모적인 섹스가 연속된다거나. 그렇지만 기태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저를 보내줬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배경 삼아, 세화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변덕을 부리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놓아줄 때 가야 한다.

땀에 젖은 가운을 다시 걸치긴 싫어서, 거실을 가로질러 물침대가 놓인 조그만 방으로 향했다. 벽에 걸린 고리에는 가운 대신 옷이 걸려있었다. 벙커에서 입었던 실내복이었다. 세탁했는지 옷감을 뒤적일 때마다 섬유 유연제 향이 솔솔 풍겼다.

가운보다야 훨씬 좋은 옷가지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건… 벙커에서의 기억이 좋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상의에 새겨진 표식 때문이었다. 별, 꽃, 새. 제가 아무리 무식하다지만 이 문장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세화가 주섬주섬 옷을 입은 건, 물소리가 툭 끊기고 나서였다. 멍하니 있었던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건지 머리카락도 그새 반쯤 말라 있었다.

하의야 원래 제가 입었던 것과 동일한 물건 같은데… 문제는 상의였다. 옷의 진짜 주인이 걸쳤을 때보다 목둘레가 훅 가라앉아서, 우묵한 빗장뼈가 거의 다 드러날 정도였다. 심지어 어깨 봉제선은 세화의 팔뚝 중간쯤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아니, 중간보다도 조금 더 밑인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 멀리서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났다. 뭔가를 찾는 듯 잠시 두리번거리는 걸음은 이내 똑바로 이쪽을 향해왔다.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을 거라 확신이라도 하는 듯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세화는 고개를 떨군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표정을 하고서 기태정을 봐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도 침대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긴 싫어서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했고… 그와 동시에 침입자가 불쑥 안으로 쳐들어왔다.

어벙한 꼴을 훑고 가는 시선엔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눈길만으로도 몸에 불이 붙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얼굴이 달아오를 무렵, 숙이고 있는 정수리 위로 하, 하는 짧은 코웃음이 들렸다. 또 혼자서 심사가 꼬인 모양이었다.

입을 열면 마음에 안 드는 소리나 한다고 화내고. 사과하면 그것도 언짢아하고…. 그래서 세화는 일단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

그런데… 눈앞으로 불쑥 내민 이 손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의중을 알 수 없어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기태정이 쯧쯧 혀를 찼다.

“정신줄 놓고 있을 땐 잘도 나불거리더니….”

물러나는가 싶었던 기태정의 손이 불쑥 뺨을 움켜쥐었다. 세화는 붕어처럼 볼살이 눌린 채 간신히 숨만 몰아쉬었다. 잠시 제 우스운 꼴을 감상하는가 싶었던 기태정은 이번엔 손등을 얼굴에 마구 치대기 시작했다. 뺨을 때리려는 것 같진 않았다. 뭔가 바라는 반응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세화가 잠시 정신을 놓았던 사이 기태정은 이전보다 더한 난제가 되어 나타났다. 이전에도 그의 방향과 속도는 충분히 따라잡기 버거웠는데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

“더 아프면 그땐 어떻게 굴까 궁금해지잖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기태정은 듣기 싫다는 듯 세화에게 뭔가를 툭 내던졌다. 실내복와 똑같은 표식이 박힌 검은색 아우터였다. 혹시 이것도 기태정의 옷인 거라면… 지금 입고 있는 상의처럼 품이 클 게 분명했다. 저번에도 무슨 핫도그 포장지 같은 옷이나 주더니…. 이런 거적때기 같은 스타일이 취향인 걸까.

“입어. 나가게.”

“…이것만 입고서요?”

가운 차림보다야 나았지만 여전히 속옷은 허락받지 못한 채였다. 게다가 실내복은 파자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기에 아우터를 걸쳐봤자 제대로 된 몰골이 아닐 거였다. 그러고서 나가자니, 대체 어딜 가려고….

“혹시 부모 얘기에 관심 있나?”

“…예?”

“널 낳아준 사람 말이야. 궁금하지 않아?”

세화는 멀거니 눈만 깜빡였다. 앞으로 어떤 낯을 하고 기태정을 다시 마주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어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사이는 아니었어도, 당분간은 그런 기류가 흐르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조롱하듯 부르거나, 자길 좋아하지 말라는 헛소리만 하지 않으면 견딜 만할 것 같았다. 폭력의 강도와 빈도로만 따지자면 기태정보다야 사장 놈이 훨씬 더했다. 그 아래에서도 몇 년을 버텼는데, 더 서러울 것도 없지 싶었다.

그렇지만… 이 주제는 너무 난데없지 않은가.

“일단 나와. 밥부터 먹고서 얘기하게.”

너 나흘 만에 일어났어, 하며 기태정이 몸을 틀었다. 세화는 얼떨떨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부모? 낳아준 사람? 살면서 몇 번 발음해본 적도 없는 단어가 낯설게 입 안을 굴러다녔다. 그걸, 그런 얘길, 대체 지금 왜 하는 거지…?

“뭐해?”

“아, 저는….”

세화는 일단 속을 어지럽게 하는 말을 전부 밀어냈다. 뜬금없는 주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기태정과 마주 앉아서 밥 같은 걸 먹을 상태가 아니었다. 생각만으로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저에게만 낯선 주제를 뜯어보고, 고민할 자신이 없었다.

세화는 우물우물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가 정신이 든 게 나흘만이라고 했던가. 그럼 그 핑계를 대도 괜찮지 않을까?

“저는, 막 일어나서 그런지 아직 밥 생각이 없어서….”

소심한 거부에 성큼 밖으로 나가려던 기태정이 우뚝 멈춰 섰다.

“…다녀오세요.”

휙 돌아보는 그의 눈매에 서슬 퍼런 예기가 서려 있었다. 날카로운 눈길에 베일 것만 같아, 얼떨결에 순종적인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리고 곧장 자조했다. 속도 좋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와중에 생각난 말이 ‘다녀오세요’라니….

“안 먹겠다고?”

기태정이 이쪽을 향해 성큼 걸음이 내디뎠다. 벌어졌던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오히려 세화가 물러서기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상태였다. 누구의 몸에서 떨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물기가 한데 엉켰다.

“말씀드렸지만 저는 딱히 생각이….”

세화는 바닥에 뚝딱뚝딱 만들어진 조그만 물길을 덧그리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제가 듣기에도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굶는 게 싫어서 덜덜 떨면서도 부스럭부스럭 빵 쪼가리나 숨겨두던 게….”

기태정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정말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생각이 없다고?”

세화는 축 처진 소매 속으로 떨리는 손을 감췄다. 몸을 옹송그릴수록 커다란 상의가 축축 흘러내렸다.

“그냥 여기서 편하게 말씀하시면….”

안 먹으면… 밥값 안 들고 좋은 거 아닌가? 하우스 근처에 있는 식당은 비싸기만 하고 맛은 그냥 그랬다. 기태정도 그런 싸구려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을 거다. 저만 없으면 포트를 건너 어디로든 가서 먹고 올 수 있을 테니까, 그로선 제가 식사를 포기하는 게 오히려 편한 일일 터였다. 그런데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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