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네. 일전에 지시하신 대로 답을 하긴 했습니다만….”
말을 흐리며 핸드폰을 내밀자, 리무진 뒷좌석에 몸을 싣던 기태정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팼다.
“했습니다만?”
“크흠, 그, 메시지 내용은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박 소위는 시선을 비낀 채 공손히 대기했다. 나른하게 잠긴 기태정의 음색에서는 길었던 정사에 대한 포만감이 잔뜩 묻어나왔다. 끝이 살짝 갈라진 상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여태 이세화와 벌였던 일을 훔쳐보는 것만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들어, 박 소위는 어쩐지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회신 이후로 김석철에게서 계속 연락이 왔는데 제가 대응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기태정은 축 늘어진 이세화를 옆자리에 앉혀놓고, 복제폰을 건네받았다. 하얀 시트에 둘러싸인 이세화는 꼭 눈사람처럼 보였다. 기태정은 시트 중간 부분을 뒤적여 이세화가 기우뚱거리지 않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천이 이리저리 쓸린 탓에 이세화의 턱 밑으로 품이 큰 상의가 슬쩍 밀려 나왔다. 옷깃에 새겨진 무궁화와 매, 그리고 별 하나. 공군 준장만 걸칠 수 있는 실내복이었다.
죽은 듯 기절한 이세화의 얼굴 위로 차창을 여과한 네모난 빛의 궤적이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지나치게 밝은 빛은 안 그래도 희뿌연 이세화의 낯을 더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속눈썹에도 솜털이 나는 걸까, 눈물이 아롱아롱 매달린 눈시울은 유독 빛살이 반사되는 부분이 있었다. 훤히 드러난 말간 낯이 보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세화에겐 조금 더 은밀한 곳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창문도 없이 세상과 단절된 벙커처럼 가둬놓고 꺼내주기 싫은 곳. 거기서 쏟아지던 은은하고 음습한 조명등… 그런 것들.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고 혼자 모조리 먹어 치우고 싶은, 질 낮은 욕심을 자극하는 얼굴이었다.
기태정은 문득 이세화가 저에게 우물쭈물 내기를 제안하던 때를 떠올렸다. 밥도 못 얻어먹을까 봐 슬금슬금 빵을 쪼개 주머니에 숨기던 모습도. 미동도 없는 이세화의 혼곤한 얼굴은 아득한 곳에 처박혀 사람 손길을 기다리는 어린 짐승 같았다. 게걸스러운 이리떼들이 헉헉대며 따라붙는 줄도 모르고, 어둠이 안온하다고 믿고 자꾸만 뒷걸음질 치려는 어리석은 작은 동물.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환한 세상인데, 그 한 걸음을 배우질 못해서 빛이 내리쪼이는 풍경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멍청하고 순진한 사냥감. 서글프고 처연한 낯을 지그시 완상하던 기태정은 이내 무료한 손길로 핸드폰을 두드렸다.
“그나저나 아주 다급한 얘긴가 봐. 현장 보고보다 김석철의 메시지를 먼저 들이댈 정도면.”
혀로 볼 안쪽을 불룩하게 굴리며 이세화를 한 번, 박 소위를 한 번 바라보는 눈길이 서느렇다. 물론 박 소위도 대피소 상황부터 전달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상사가 날이 밝을 때까지 연락이 두절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그랬을 거다.
“김석철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메시지에 전부 마크를 해뒀습니다.”
육중한 장교용 리무진이 우중충한 1환의 거리를 내달렸다. 포트라는 효율적인 수단이 있음에도 기태정은 일정 거리까지는 차로 이동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지프 같은 게 아니라 누가 봐도 높으신 분이 타고 있다는 티가 팍팍 나는 고급 리무진을 준비하라고 주문했다. 공군을 뜻하는 남색 바탕에 별까지 아로새겨진 번호판까지 달았으니, 아는 사람이 보면 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박에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1환의 군사 시설이 털렸다는 이야기가 이미 군부 안을 쫙 돌았다. 물론 기태정의 따까리들이 일부러 슬쩍 말을 흘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피소 시설이 워낙 허름했던 터라 다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기면서도, 조금은 찜찜하게 여기고 있었다.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일을 친 거라는 범행 동기도 그럴싸했고, 놈들이 실제로 대피소 내부를 터는 장면이 담긴 CCTV 기록까지 나왔는데도, 정작 범인이 털어간 물건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등신 같은 새끼들 천지라지만 군대는 군대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놈들만 모인 곳이었다. 지금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감지했을 거다. 그런 와중에 딱히 임무 수행 중도 아닌 기태정이 1환 근처를 지나갔다는 말까지 돈다면….
성 밖에서 도난당한 수상쩍은 물건, 최근 해당 시설을 가장 자주 방문했다던 김석철 소위, 그리고 사건 당일 다소 뜬금없이 그 근처를 지나갔다는 기태정 준장. 여기까지만 듣고서도 ‘추수’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단번에 일의 흐름을 꿰어맞출 수 있으리라.
물론 대피소를 테러할 땐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 일을 벌인 주체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는 여지를 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물증은 철저히 없애되 심증은 남겨야 한다. 그것도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도록 어슴푸레한 형태로. 그래야 승냥이들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거다. 김 소위가 속한 계파를 날려버리든, 먹어 치우든… 어떻게든 해보려 안달이 난 아귀 떼가 말이다.
기태정이 전술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덕목은 효율성이었다. 남의 손을 빌려 적을 공격할 방법이 있는데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젠 김석철을, 정확히는 뒤에 버티고 선 그의 집안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인사들이 알아서 입에 칼을 물고 날뛰어대기 시작할 거다. 저는 적당히 기름만 부어주다 적시에 필요한 자료를 들이 밀어주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대피소를 테러하는 일은 실패할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늘 그랬듯 근거가 있는 오만함이었고 이유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못해 따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박 소위, 이거 뭐냐?”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스크롤을 내리던 기태정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아무래도 김석철은 이세화를… 음, 꼬리 자를 때를 대비한… 그런 용도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박 소위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기태정은 애써 좋은 말로 포장해 보고하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직전까지 이세화와 붙어먹은 상관에게, 김석철이 당신 상대와 어떻게든 해보려고 오랜 시간 껄떡댄 것 같다고 하기는 좀 그랬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서릿발 같은 시선이 떨어졌다.
“김석철이 여태 이 지랄 떨었던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고?”
폰 복제할 때 진작 확인 안 하고 뭐 했냐는 기태정의 개지랄에, 할 말이 없어진 박 소위는 고개만 푹 떨구었다. 어쨌든 처음부터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맞긴 했다.
“씹돼지 새끼가 진짜 쳐 돌았나….”
자기 딴에는 머리를 썼는지 김석철은 매번 새로운 번호로 이세화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제각각의 번호로 날아온 수많은 메시지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발신인이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한결같이 추잡스러웠다.
메시지를 읽어내리다 결국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한 기태정이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창문을 쾅 내리쳤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분노로 눈꺼풀 뒤가 타오를 듯 뜨거워졌다. 갖가지 잔상들이 빠르게 망막을 스쳐 갔다. 얼룩덜룩한 태닝 스프레이가 벗겨지고 처음으로 민낯을 드러내던 때. 벙커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축 늘어져 있던 이세화의 마른 몸뚱어리. 주사 찌르는 시범을 보이는 동안 샐샐 웃으면서 손님, 하고 부르며 반달 모양으로 접히던 눈….
“씨팔, 진짜….”
그래서 이세화는, 김석철과 무슨 사이지? 김석철에게도 대준 건가? 저한테 안겼을 때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다 혹시 닳은 티가 나냐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묻고 그랬을까? 그 새끼한테도 이름 같은 거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매달려서 빌었으려나…. 이세화의 애액에서 풍기던 달콤한 풋내가 어쩌면 김석철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김석철 이 씨발새끼가 사람 기분 개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어.”
박 소위는 기태정이 쿵쿵 창문을 두드릴 때마다 방탄유리에 쩌적 금이 가는 것을 보면서 미리 경위서를 써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폰이야 다시 복제하면 되고 필요한 내용은 이미 전부 채록해두긴 했다. 그렇지만 이 리무진은 교체한 지 4개월도 되지 않았다. 상관의 지랄 같은 성미는 온 군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지만, 리무진의 교체 주기가 이렇게까지 빠른 건 확실히 지적을 받을 사안이긴 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시하셨던 내용대로 회신하자마자 김석철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준장님께 후속 대응을 여쭤볼 때가 아니라 받지는 않았는데, 한참 불이 나게 전화 넣더니 어느 순간부터 잠잠해졌고,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상황입니다.”
기태정이 픽 웃으며 금이 간 유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갈라진 틈으로 실낱같은 바람이 스산하게 타고 들어왔다. 날은 밝고 햇빛도 쨍쨍한데, 리무진 안만 한겨울 날씨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대피소가 털렸다는 얘기가 돈 이후부터겠지. 그 새끼가 입 닥치게 된 건.”
이세화에게 신경 쓸 상황이 아닐 거다. 빼돌린 물건을 협상 카드로 쓰겠다는 말까지 흘렸으니, 지금쯤 그 잘난 집안사람들이 김석철의 목을 졸라대고 있을 테니까. 거기에 투자자들도 있었다. 아직 인가가 나지 않은 프로젝트에 발 좀 담갔다고 군부의 미움을 사는 건 아닌지, 물건의 안위는 보장할 수 있는 건지, 수출도 전에 생산부터 막히는 건 아닌지….
당장 자기 숨통이 막히고 있는데 이세화한테 전화나 넣을 정신머리가 있을 리가. 자기 방에 처박혀서 훌쩍이며 이세화가 정보를 흘린 것 아닐까 의심 중이라는 데에, 기태정은 본인의 계급장을 걸 수도 있었다.
“아직은 집안의 눈치를 보는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만, 김석철이 부리는 사람들이 2환으로 급히 이동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사실인지 확인하는 중인데, 신빙성이 높다고 봅니다.”
“2환… 2환이라.”
그 빌어 처먹을 약이 제법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건 오늘, 아니 어제 기태정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런데도 김석철은 군부에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었다. 그 새끼 성격에 무슨 계획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진 않고 아직 손을 봐야 할 곳이 있어 내세우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대피소에 놓인 물건의 규모를 봤을 땐 생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면 다양한 임상 시험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김석철은 포트를 이용해 당당히 성 바깥으로 나돌아다녔다. 그나마도 소위가 되고 나서는 4환까지만 내려갔지만, 예전에는 1환이나 2환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목적이야 뻔했다. 약 빨고 도박이나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놈이 1환의 대피소를 방문할 때는 나름대로 신중을 기했다. 저였더라면 더더욱 대놓고 1환을 찾았을 거다. 진짜 마약 싸 들고서, 싸구려 환락에 취한 듯 굴었을 거다. 그렇지만 김석철은 멍청하게도 자신의 보물 창고를 찾을 땐 더없이 조심스러워서, 행보를 쉬이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몇 주 전에 시찰 나갔을 때 찍어뒀던 물류 창고 몇 개 있었지? 2환에만 창고 가지고 있는.”
“네. 그쪽 위주로 사람 배치해두겠습니다.”
“대피소에 생산 공정은 따로 없었으니, 약을 찍어내는 곳이 2환에 있을 거야. 임상 시험도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을 확률이 높고.”
“이번엔 털리지 않으려고 김석철도 무작정 달려들겠네요, 부나방처럼.”
“그렇겠지.”
그걸 노리고 이 귀찮은 일을 벌인 거였다.
2환에는 제트정찰기 격납고가 있었다. 기태정이 이끄는 전투 비행단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이것이 김석철의 두 번째 실책이었다. 저였다면 위험 부담이 좀 올라가더라도 대규모 격납고는 없는 3환에 터를 잡았을 텐데… 김석철은 2환에서 공군의, 기태정의 눈을 피해 수상쩍은 물건을 조몰락거린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던 게 분명했다. 이쯤 되니 김석철과 손을 잡은 사람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소심하고 변태 같은 새끼의 염병에 대체 몇 명이나 놀아나고 있는 건지.
“참, 그럼 탈 주인들도 슬슬 2환 쪽에 대기 시켜놓을까요? 그 죄수들 말입니다.”
기태정과 이세화에게 얼굴 생김을 빌려줬던 진짜 범죄자들은 기태정의 관사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래야지. 강도 새끼들이 이번엔 2환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는 정보도 흘려. 그래야 김석철이 빡돌아서 더 나댈 테니까.”
어차피 즉결 처분이 가능한 일급 범죄자들이니, 김석철도 눈치 보지 않고 바로 놈들을 죽이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김석철은 경솔한 성격상 훔쳐 간 물건은 어디에 숨겨뒀는지, 어디서 ‘추수’에 관한 정보를 얻었는지… 그런 중요한 얘기들을 신나게 나불거리며 추궁할 게 뻔했다.
기태정은 그 현장을 급습할 생각이었다. 명분이야 충분했다. 2환의 격납고에 들렀다가, 역도의 잔당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왔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 와중에 죄수들이 흘린 수상쩍은 물건을 주운 척하면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김석철 소위의 발언을 들었노라 군부에 고발장을 제출한다… 그런 계획이었다.
“어쨌든 고발장 갈기는 것까지는 어려운 일 없을 것 같으니….”
기태정은 엄지와 검지로 도드라진 눈썹 뼈 위를 꾹꾹 누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김석철과 이세화가 무슨 사이였을까, 그딴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고발장 제출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석철과 그 새끼의 집안을 모조리 격추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누구도 저를 상대로 이런 골치 아픈 일을 벌이지 않을 거다.
“아, 그리고 나 중위 좀 불러와.”
“예. 이세화 때문에 그러십니까?”
박 소위가 죽은 듯 잠든 이세화를 흘끔거렸다.
“확실히 무리하긴 했지요.”
“그것도 그런데… 이세화 체질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
“임신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니. 중독 안 된다던 그 체질 말이야. 그게 좀 이상한 구석이….”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돌연 새하얀 것이 기태정의 어깨 위로 풀썩 떨어졌다. 시트에 폭 싸인 채 잠들었던 이세화였다. 승차감이 좋다는 장교용 리무진도 구불구불하고 험한 1환의 도로 위에선 어쩔 수 없는지, 차체의 흔들림에 맞춰 펭귄처럼 뒤뚱거리던 하얀 몸뚱어리는 기태정의 어깨를 스쳐 옆구리에 머리통을 통 들이박고는, 허벅지 위까지 천천히 추락했다.
기태정은 무게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세화의 머리를, 동그랗게 솟은 볼을 가만히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진짜 자는 거 맞아?”
훔쳐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얘기가 나오니까 반응을 보이는 게 어이없었다. 귀엽기도 하고. 하여튼 말이 그렇다는 거고, 진짜로 정신을 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세화는 본인 의지로 기태정의 무릎을 베고 누울 위인은 못됐다. 그렇게 애교를 떨 수 있는 성격이면, 그럴 담이 있는 위인이면 지금처럼 신세가 고달프진 않았을 거다. 진작 손님 하나 물고서 이 바닥 떴겠지.
기태정은 깨워서 놀려줄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이세화의 어깨를 짚었다. 자기가 누구 무릎 베고서 누워 있는지 알면 또 얼마나 놀랄까 싶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상상하며 살살 이세화를 흔들었다. 그런데….
“…뭐야.”
손길이 닿자마자 맥없이 픽 구르는 이세화의 옆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조금 긴 머리카락은 가닥가닥 뭉쳐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었고 그 아래 희끗희끗 드러난 살갗은 빗금이라도 그은 듯 온통 붉었다. 기태정은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에 손등을 대보았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옅게 찌푸릴 정도로, 온몸이 열로 절절 끓고 있었다.